호화오간(好和惡姦)
함석헌
씨알 여러분, 절대의 평화 속에 이 자연의 봄, 또 역사의 봄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싸움은 고돼만 갑니다. 우리 속에 품은 알갱이를 위해, 그것이 태꼭지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고 탄탄하게 자라, 때가 오는 날 빛 속에 활짝 피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 몸이 텅 빈 껍질로 돼버리기까지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온유 겸손한 마음가짐과 끊임없이 애탐으로 올리는 기도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니”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니” 하신 것, 곧 그것입니다.
두보(杜甫)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앞에 서 있는 늙은 잣나무를 두고 읊은 시에
落落盤踞雖得地(낙낙반거수득지)
우뚝 솟아 서리서리 얽힌 뿌리 설 자리는 얻었건만
冥冥孤高多烈風(명명고고다렬풍)
아득아득 높이 서 외로이 버틴 몸에 모진 바람이 더 많다
라고 한 귀절이 있습니다만,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모습, 우리의 신세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버티고 서야 합니다. 역사의 나무는 우선 자연 속에 뿌리를 깊이 박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자연은 반드시 늘 친절한 것만은 아닙니다. 부드럽고 살진 흙도 있지만, 또 모래같이 쌀쌀하고, 바위같이 완고하고, 낭떠러지같이 거만하고, 구렁이같이 음험하고, 갉아먹는 버러지같이 앙칼지고, 썩어진 웅덩이같이 더럽고 독한 것이 수두룩합니다. 그러니 그 속에 뿌리를 박고 거기서 양분을 빨아올리자니 지극히 온유하고 겸손하지 않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 역사의 생명나무는 보통나무와 달라서 뿌리를 땅속에만 뻗는 것 아니라 하늘 위에도 뻗어야 합니다. 사람은 정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잎으로 공중에서 양분을 취하듯이 우리는 우주 무한한 허공에서 가지가지의 영기를 마셔야 합니다.
그와 같이 역사의 생명나무는 물질과 영 두 세계에 뿌리를 뻗으며 자라는 나무인데 그 중간에 걷잡을 수 없이 떠돌고 휘몰아치는 모질고 사나운 바람이 많습니다. 거기 견디어내지 않고는 정신의 세계에 뿌리를 박을 수 없습니다. 연약한 가지와 잎이 바람 속에서 견디려면 무한히 질기고 무한히 탄력성이 있지 않고는 될 수 없는 것같이 우리 마음이 저 공중에 권세 잡은 가지가지 악령의 유혹, 위협, 후려갈김, 짓밟아댐을 이기려면 무한히 참고 무한히 용서하는, 그리하여 무한히 되살아나는 평화의 정신이 아니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볼 때, 땅의 주인과 하늘의 상속자의 두 조건으로 갈라서, 우리의 할 일을 온유와 평화로 가르쳐주신 예수의 교훈은 결코 쉽게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평화를 지으려면 애를 태워서 하는 기도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산간 초막에서 아침으로 저녁으로 가늘게 올라가는 파란 연기가 있는 한 그 안에는 사랑과 기쁨이 끊이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긁어모은 낙엽 같은 우리의 아픔, 슬픔, 고됨을 믿음의 불로 태워 무한한 저 위로 올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원수도 사랑스럽고 악한 것들도 가여워 뵈게 됩니다. 그럼 이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빈 굴뚝같이 하늘 땅 사이에 곧추서게 되고 우리 영은 너도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러면 이 땅 위에 영원히 심고 거둠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뜻을, 살벌한 중국 전국시대에 나서, 무자비한 전쟁 영웅들의 등쌀에 개, 닭같이 참혹한 운명을 당하는 수없는 씨알들을 보고 그냥 견딜 수 없어서, 평화주의를 부르짖었던 장자의 시원한 말 속에서 한번 읽어보렵니다.
서무귀(徐無鬼)가 무후(武侯)를 찾아갔더니 무후가 말하기를, “선생님 산 속에 계시면서 도토리, 밤이나 잡수시고 파, 부추로 배를 불리시면서 내게는 아주 외면을 하고 계신지가 오랬는데, 이제 어떻게 된 일이십니까? 선생님도 이젠 늙으셔서 술, 고기 맛을 좀 보시고 싶어지셨습니까? 아니면 내가 나라에 복이 있어서 오시게 된 것입니까?”
서무귀가 대답하기를, “저야 나기를 본래 가난하고 천한데서 했으니 임금님의 술, 고기 언제 먹어본 일 없습니다. 온 것은 임금님을 좀 어루만져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씀이요, 나를 어루만져주다니 무엇을 어루만진단 말입니까?”
“임금님의 정신과 몸을 어루만진단 말입니다.”
무후가 말하기를, “왜, 어째서요?”
서무귀 말하기를. “하늘 땅이(만물을) 길러가는 것은 한결같습니다. 높다고 더해주는 것도, 낮다고 덜해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임금께서는 홀로 임금이 됐노라고 한 나라 백성을 괴롭히면서 귀, 눈, 코, 입을 길러가고 계시니 (스스로 즐겁게 여기시겠지만) 임금님 속정신은 그것을 좋게 여기지 않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정신이란 하나로 같이하기를 좋아하지 제 욕심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夫神者好和而惡姦). 제 욕심대로 한다는 것은 병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루만져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어서 걱정이십니까?”
무후 말하기를, “그러지 않아도 선생님 뵙잔 생각한지 오랩니다. 내 하고 싶은 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의를 행해 전쟁을 쉬는 일입니다. 그럼 되겠습니까?”
서무귀 말하기를, “천만에, 안됩니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백성을 못살게 만드는 시작입니다(愛民害民之始也). 의를 행해 전쟁 그만둔다는 것은 전쟁 만들어내는 근본입니다(爲義偃兵 造兵之體也).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요? 뭣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그것이 바로 고약한 장난질입니다(凡成美惡器也). 임금께서 아무리 인의(仁義)를 하고 싶어하셔도 거짓이 돼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임금께서 정말 하실 생각이시라면, 가슴속에 정성을 닦으셔서 하늘 땅의 속뜻에 맞추도록 하실 것이지, 그것을 어지럽혀서는 아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백성이 이미 죽을 길에서 벗어났는데, 임금께서 새삼 전쟁을 그치느니 어쩌니 하실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修胸中之誠, 以應天地之情而勿攖, 夫民死已脫矣,君將惡乎用夫偃兵哉)
정치가, 군략가야 무슨 실없는 토론을 하거나간, 씨알이 있어서 안 될 것은 호화오간(好和惡兹)입니다. 수흉중지성(修胸中之誠)입니다.
씨알의소리 1977년 3월 62호
저작집30; 9-113
전집20; 8-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