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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신 왕양명 王陽明(王守仁)의 기이한 생애
왕양명이라는 인물은 양명학을 창시한 사상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제갈공명처럼 위대한 군사 전략가였고 감수성 예민한 시인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그의 군사적 활약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마치 삼국지를 읽는 것 같았다. 조선조에는 송시열 이후 양명학은 사문난적으로 취급되어 발붙이기 어려웠지만 그의 실천철학은 중국에 왕학의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붉은 악마에서 보듯 우리는 획일과 일사불란을 사랑하고 자랑스런 단일민족으로 다양성이나 이질적인 것을 혐오한다.
여기서는 왕양명이 주창한 양명학에 대해 좀 자세히 다루었다. 중국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주자가 우주의 원리인 “리”를 말하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격물치지’를 말했다면 왕양명은 우리 마음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심”과 본성인 ‘양지’를 말하고 방법으로 ‘치양지’와 ‘지행합일’을 주장했다. 이것이 양명학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대강이고 이를 안다면 왕양명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조금 자세히 다루었다. 관심없는 분은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이 책에는 왕양명이 군사 전략가로 이용한 여러 전략과 지략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흥미롭지만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니라서 지면 관계상 간략히 취급했다.
왕양명은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자 위대한 사상가, 교육가이자 시인이다. 중국 고대 문화의 정수를 한 몸에 구비한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를 '고금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인물' 혹은 '삼불후'라고 평가하는데 삼불후란 '썩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세 가지'란 뜻인데, '입덕', '입업', '입언‘, 이 세 측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을 기려 대대손손 칭송하는 말이다. 입덕이란 숭고한 도덕적 품행, 입업은 위대한 공적, 입언은 독창적 사상의 학설을 수립하였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무수한 영웅호걸이 등장했다. 하지만 도덕적 품성이 뛰어난 자가 반드시 큰 공적을 세운 건 아니었고 또 위대한 공적을 이룬 자가 독창적 사상까지 수립한 예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독창적 사상을 수립했다고 해서 반드시 도덕적 품성이 구비된 건 아니었다. 세 가지를 겸비하기란 그만큼 어렵다.
왕양명은 명 헌종 때 절강성 여요의 왕씨 집에서 태어났다. 이 가문의 조상들은 서진(265~316) 시기에 산동성 낭야에서 이주해왔는데 꽤 명망 있는 선비 집안이었다. 그가 태어난 날은 성화 8년 9월 30일, 양력으로는 1472년 10월 31일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범상치 않은 인물의 탄생에는 으레 예사롭지 않는 이야기 뒤따른다. 범상치 않은 태몽과 어릴 적 범상치 않은 일화 등이 나열되어 있지만 넘어가자.
왕수인(양명)
1481년 왕양명이 열 살 되던 해, 부친 왕화는 장원 급제하여 한림원 수찬에 제수되었다. 열두 살 때, 북경에서 함께 기거하던 부친 왕화는 따로 스승을 초빙하여 그에게 정식으로 유가 경전을 익히게 했다. 왕양명은 분명 ‘유별나고 독특한’ 소년이었다. 독자적으로 사유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지는 않는 유별난 기질 때문에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었다. 12살에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에 뜻을 두었다.
열다섯 살 되던 해 어느 가을, 그는 나이 어린 두 하인을 데리고 불현듯 집을 뛰쳐나가더니 한 달 남짓 후에 초췌해진 몰골로 집에 나타났다. 까맣게 그을린 채 깡마른 몸으로 나타난 그는 협객이라도 된 양 허리춤에는 칼까지 차고 있었다. 그는 북쪽 변경의 관문인 거용관·자형관·도마관 세 지역을 둘러보고 왔다. 성인이 되려면 무엇보다 국가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자질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변방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거용 3관의 현지답사를 감행했다. 이 세 곳은 북방소수민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북쪽 변경의 주요 관문이었다. 그는 관내 백성을 통해 소수민족의 성향과 역사 등을 파악했고 역사 속 인물들은 그들을 어떻게 방어했는지, 그들이 중원으로 침입해왔을 때 효과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대책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했다.
거용관과 자형관
이에 더하여 거용관 일대의 지형, 산세 도로 사정은 물론 아군의 방어 체계에 대해서도 면밀히 조사했다. 말로 하는 조사가 아니라 실지 답사를 진행했고 소수민족들과도 직접 접촉했다. 소수민족 청년들과 함께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 힘을 겨루어보았고, 그들과 함께 기마술과 궁술을 훈련하기도 했다. 호방한 기백, 민첩한 몸놀림, 결연한 의지, 혹독한 훈련… 그의 무예는 급속히 성장했고, 소수민족 청년들조차 그의 모습에 경탄해마지않았다. 이렇게 한 달여를 보낸 후 왕양명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가 열여섯이 된 이듬해, 연이은 흉작과 기아로 인해 호광·하남·섬서성의 경계 지역에서 유랑민의 폭동이 일어났다. 유통·석룡 등을 수괴로 한 그들은 황색 깃발을 내세우며 국호를 한, 연호를 덕성으로 정했는데, 순식간에 수도 일대를 경악시켰다. 이때 왕양명은 '지금이 바로 내가 나설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일필휘지로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서를 작성했다. 자신이 가진 군사적 지략, 반군 제압에 대한 방책, 거용관 실지 답사에서 얻은 지식 등을 총동원한 상주서였다. 심지어 황제에게 자신이 직접 군대를 통하여 유통·석룡 등 반군의 수괴들을 토벌케 해달라는 요구까지 포함시켰다. 이 상주서를 그는 부친 왕화에게 건넸다. 황제에게 전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로부터 호된 질책만 받았을 뿐이었다.
송나라 주희
그렇다고 해서 성인의 꿈을 버릴 그가 아니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송나라 주희의 학설이 꽤 유행하고 있었다. 그도 본격적으로 주희의 저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주희의 사상 가운데 당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격물치지이다. 격물치지란 '일상생활에서 사물의 궁극적인 이치를 명백히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사물에 대한 지식을 부단히 습득할 때 우리는 결국 '모르는 게 없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천하 만물은 표면적으로 보면 각기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근본적이고 유일무이한 '이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를 '천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희는 이런 '이치'를 '근본이 하나인 이치'라는 뜻으로 ‘일본지리’라고 말한다. 이는 가장 크고, 근본적이면서 또 보편적인 이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각각의 사물은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저마다의 독특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즉 자기만의 '이치'를 가지고 있다. 주희는 이것을 '분수지리'라고 말한다. '서로 상이하여 차별되는 이치'라는 뜻이다. 우리가 멈추지 않고 '사물을 마주하면 특정 사물에 담긴 이 독특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그저 멈추지 않고 오늘은 한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내일은 또 다른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언젠가는 세상 모든 사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치'를 깨달아 통달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고도 오류 없이 근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일본지리'를 깨우칠 수 있다. 바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왕양명 역시 이 주희의 이론을 아무런 의심 없이 굳게 믿었다. 그는 사물을 철저하게 마주한다면 그 이치를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결국 성인이 될 수 있다니, 그럼 이제부터 사물을 한번 철저히 마주해보자!'라고 결심했다. 그는 뜰 안에 대숲에서 대나무를 일주일 동안 관찰하다 얻은 것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그가 성인이 되기 위해 주희의 가르침대로 실행했다가 좌절을 겪은 사건이다. 그는 주희의 학설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주희의 격물치지설은 성인의 경지로 통하는 첩경이 아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의 이런 회의는 후일 심학을 제시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듬해인 1488년, 왕양명은 나이 열일곱 되던 해에 강서성 정사 참의 제양의 딸과 혼인하였다. 고대 예법상 남자가 아내를 맞으려면 직접 여자 집으로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데려오게 되어 있었다. 장인 제양도 왕양명의 집안처럼 원래 여요가 고향이었는데, 이때 그는 강서 포정사 참의로 있었기 때문에 남창에 살고 있었다. 왕양명의 집안은 여요에서 당시 절강성 소흥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이해 7월, 왕양명은 제씨 집안의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소흥에서 남창으로 왔다. 남창에 도착하자 장인 제양은 왕양명이 기백이 넘치고 재주도 뛰어난 인물이라는 걸 알고 매우 흡족해하면서 곧바로 혼례를 올리자고 했다. 그러나 혼례 당일,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왕양명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불안과 초조 속에 제양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온갖 잡생각에 초조해진 제양은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그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해가 제법 높이 뜰 때쯤 되자 왕양명이 혼자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제씨 집안 식구들이 온통 혼례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 일없이 한가하게 지내던 왕양명은 남창 주변을 한번 둘러볼 생각에 혼자서 그 집을 빠져나왔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어슬렁거리던 그는 성 밖 장강 유명한 남포정을 구경하고 광윤문 부근에 다다랐다. 철주궁을 막 지날 무렵 그 안에서 어떤 나이 많은 도사가 미소를 머금은 채 정좌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는 도사 곁으로 다가가 말을 붙여보았다. 도사의 이야기는 거침없었고 왕양명은 도교의 양생술에 흠뻑 빠져들었다. 흥이 나서 말을 멈출 줄 모르는 도사, 넋을 놓고 그 얘기를 듣는 왕양명, 두 사람은 그새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남창 광윤문 부근
결혼 당일 도사와의 대화 때문에 혼례를 놓친 사건은 왕양명으로서는 최초로 도교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그의 인생 역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혼 후 왕양명은 남창 처가에서 1년 반을 지낸 다음, 이듬해 12월에야 아내 제씨 부인과 함께 고향 땅 여요로 돌아왔다. 이때 그의 나이 열여덟. 6~7년 동안 줄곧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고,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별별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몸만 쇠약해지고 말았다.
스물한 살 되던 1492년, 왕양명은 절강성 향시를 거뜬히 통과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다. 곁에서 부모님을 봉양하고 또 이듬해에 치를 회사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부터 남달리 재능이 뛰어난 데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기까지 했으니 진사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이듬해 회시에서 낙방했다. 그가 공부에 몰두한 건 사실이지만 공부한 내용이 당시에 두루 통용되던 소위 ‘모범 문장’은 아니었다. 그는 경전, 문집, 역사서 등 중국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자료들을 두루 읽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개인의 정신 수양에는 매우 중요했겠지만, 과거를 보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지만은 않았다.
스물다섯의 그는 두 번째 과거에 실패한 후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았고, 독한 마음을 먹고 다음 시험을 철저하게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오히려 병법이었다. 그는 비법을 기록해놓은 병사들을 수집하는 데 주력하면서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책에다 자신의 견해나 느낌을 기록하는 등 미친 듯이 그 일에만 매달렸다. 손님이라도 오면 신이 나서 상대방에게 병법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스물여덟 살에 그는 진사가 되었지만 정식으로 관직이 주어지지는 않았고 우선 공부에 임시로 배치되었다. '과정'이라고 해서 업무를 익히는 일종의 수습 관리 같은 역할이었다. 그는 다시 주희의 저술을 연구하는 데 주력했고 격물치지설의 연구에도 재도전했다. 열여섯 살 때 '대나무 관찰 사건으로 병을 얻은 것은 주희가 주장하는 방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방식이란 '순서에 입각해서 단계적으로 익혀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경을 너무 많이 쓴 탓인지 과거보다 더 심한 병을 얻고 말았다. 이에 그는 또다시 주희의 방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주희의 학설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런 대나무를 1주일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병이 재발하자 그는 다시 도교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진사가 된 다음 그는 공부에서의 수습 기간을 거쳐 형부 주사로 발령을 받아 강소성 회안 등지를 다니며 형사 사건을 담당했다. 근무에 충실하면서도 가끔씩 틈을 내어 안휘성에 위치한 구화산을 찾았다. 구화산은 빼어난 명승지이면서 동시에 불교와 도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 시기, 구화산에서 도사들과 교유하면서 아마 왕양명은 도교의 깨달음에 대해 뭔가 터득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구화산
하지만 형사 사건을 맡아 바쁜 업무에 긴장감마저 더해지면서 그의 건강은 현저히 악화되었다. 각혈이 심해지자 이듬해인 1502년, 서른한 살의 나이에 병가를 얻어 요양을 위해 소흥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회계산에 있는 '양명 동굴'을 찾아 굴속에서 도가의 양생술을 수련했다. 양생술 수련은 물론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수련이 점차 깊어지면서 상당한 경지에까지 이르렀고,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예지력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신체 단련을 위한 도교의 양생술 외에 양명은 불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무척 많았다. 특히 선종 사상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다. 왕양명은 시종 목표가 뚜렷했고 의지가 강인했다. 실천력에 있어서도 그는 한 치 소홀함이 없었다. 자신이 뱉은 말은 기어이 실천하고야 마는 근성이 있었다. 열두 살 때 성인의 꿈을 품고, 성인이라면 최소한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혼자서 변방을 찾았고 무술을 익혔다. 모든 사물에는 다 저마다의 이치가 담겨 있다는 주희의 학설을 배운 다음에는 '대나무 관찰'을 통해 사물의 궁극적인 이치를 탐색하려고 했다.
남창 시절, 도사로부터 양생술을 들은 다음에는 곧바로 양생법 수련에 몰두하기도 했다. 자신의 서예 실력이 남보다 뒤진다는 생각이 들자 날마다 서예 공부에 몰입하여 마침내 당대의 저명 서예가로 발돋움하기도 했다. 당시 저명 시인들에 비해 자신의 작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고향 여요로 돌아가 친구들과 시 모임을 만들어 시작에 매진했다. 결국 그는 시단의 주요 인물과 어깨를 겨루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했다. 병법을 연구할 때는 단순히 이론에만 치우치지 않고 실제 훈련까지 실시했다.
32년간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왕양명은 마침내 ‘성인의 도’로 통하는 중요한 길을 찾아냈다. 특별할 건 없었다. 유가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인의지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성인의 경지란 곧 도덕의 경지, 성인의 생활이란 곧 도덕적 생활 그뿐이었다. 도덕의 최고 경지란 ‘천하 만물이 일체를 이루는 것’이고, 숭고한 도덕적 생활이란 ‘사람들에게 두루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서른두 살이던 1503년 이후 왕양명은 자신의 공부를 오로지 유학 하나로만 집중시켰다. 이제 더 이상 불교나 도교 쪽을 넘보지 않았다. 그는 유학을 성인에 이르는 학문, 즉 '성학'이라고 불렀다. 성학의 기치 아래 그는 유가 사상의 신봉자이자 실천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서른네 살 때부터 그는 정식으로 제자를 받아들여 성학을 강의했고 성인의 도를 가르쳤다. 그의 문하에는 확고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담약수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광동성 중성 출신으로 그 역시 성학을 즐겨 강의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지기이자 동지가 되었다.
왕수인과 함께 강학했지만 왕수인과 길은 달라 담약수는 隨處體認天理를 종지로 삼아 각각의 학파를 세웠다.
1505년은 서른넷의 왕양명뿐 아니라 명조 전체를 통틀어서도 아주 특별한 해였다. 이해 5월 효종 주우탱이 나이 서른여섯에 붕어하고 아들 주후조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열다섯 살의 주후조는 여느 황제들과는 달랐다. 어린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던 그는 온종일 궁녀와 환관들 사이에서 응석받이로 성장해왔다. 놀기 좋아하고 뭐든지 제멋대로 하는 괴팍한 성격을 가진 그야말로 전형적인 '망나니 군주'였다.
주후조가 이런 기질과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은 신분이나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곁을 따르는 한 인물의 역할도 컸다. 환관 유근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역사에서는 그를 ‘교활하고 잔인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태자의 비위를 잘 맞춰주면서 두터운 신임을 얻었는데, 사실 주후조가 '망나니 황제'라는 악명을 얻은 데는 유근이 절대적 역할을 해냈다. 1505년 황제의 붕어는 유근에게 하늘이 내린 희소식이었다. 유근은 이제 자신이 한껏 도약할 수 있는 봄날이 바야흐로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걸 예감했다.
명 10대 황제 무종 주후조
유희와 쾌락에만 탐닉하는 황제, 그에 화답하여 교묘하게 황제의 비위를 맞추면서 갖은 지혜를 짜내는 데 골몰하는 유근, 이 둘이 서로 어울리다 보니 조정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유근은 자기 휘하에 태감 일곱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당시 그들을 '팔호'라고 불렀다. 호랑이 여덟 마리, 이들 환관의 행태가 얼마나 포악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별명이다. 유근을 중심으로 한 팔호는 황제 주후조를 따르며 매일같이 향락에 탐닉했다. 투계, 경마, 매 사냥, 음주가무, 축구, 격투에다 심지어 장터에 있는 유흥가까지도 드나들었다. 주후조의 음란한 생활과 패악질은 그가 황제로 등극한 다음에는 더더욱 심해졌고, 유근 등 팔호도 더 한층 기세등등하며 날뛰었다.
대신들은 종묘사직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침울한 나날을 보내면서 그들은 종묘사직을 지켜낼 대책을 강구하는 데 골몰했다. 기필코 유근 일당을 제거해야 했다. 이때부터 조정 내부에서는 엄청난 정치 투쟁이 전개될 조짐이 서서히 움트고 있었다. 이듬해인 1506년, 마침내 공개적인 정치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바로 이런 위기 상황에서 왕양명의 신상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북경 ·남경 등지에서는 의분에 찬 관리들이 잇따라 상소를 올렸다. 팔호의 전횡을 비난하는 상소였다. 그러나 권력의 대세를 거머쥔 팔호가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도처에 수하들을 내보내 대규모 보복 행위를 자행했다. 기세가 오른 유근 역시 황제의 권세를 등에 업고 관료들을 더욱 철저하게 감시했고, 바른말 잘하는 관리를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조정은 그야말로 암흑천지였고, 북경에서든 남경에서든 관료사회의 분위기는 그지없이 흉흉하기만 했다.
그러나 정의의 목소리가 아주 단절된 건 아니었다. 남경 호과급사중 대선, 감찰어사 박언휘 등은 여전히 상소를 올려 국법을 농단한 간신배 유근 일당을 엄벌해야 조정 정치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유근은 황제의 뜻임을 빙자하여 대선·박언휘 마저 금의위의 감옥에 가두었다. 이런 와중에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대선·박언휘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왕양명이었다. 당시 그의 직책은 병부 주사, 정6품관으로 병부에서는 거의 최하위직에 해당했다. 사실 직급으로나 직책으로 보아 그가 나서서 상소할 일은 아니었다. 유근과 맞섰던 사람들은 이미 하나같이 투옥되거나 피살되는 등 온갖 보복을 다 당했다. 문무백관이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 순간 병부 주사라는 일개 말단 관리 왕양명이 이런 식으로 당차게 나왔으니, 유근이 그냥둘 리 만무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는 황명을 빙자하여 왕양명을 체포했고 곤장 40대의 징벌을 명령했다.
왕양명이 처음으로 바지를 내리고 곤장을 맞았다
유근의 명령이 떨어지자 금의위 교위들은 왕양명에게 곤장 세례를 퍼부었다. 순식간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서 피범벅이 되었다. 곤장 40대를 맞고 인사불성이 된 그는 숨조차 가물가물했다. 교위들은 왕양명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끌고 가서 금의위 감옥에 던져버렸다. 감옥에 갇힌 왕양명은 스스로 성인의 꿈을 다짐해가며 주 문왕이 그랬던 것처럼 『주역』 공부에 들어갔다. 그의 감방에는 죄수가 두세 명 더 있었다. 왕양명은 그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고 성인의 도를 설파했다. 그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잃지 말라는 격려 차원에서였다.
감옥에 갇힌 지 대여섯 달 정도가 지났을까. 1507년 어느 여름, 조정에서는 마침내 왕양명에게 석방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용장의 역승으로 좌천되었다. 투옥되기 전 왕양명은 정품 병부 주사였지만, 역승은 품계가 없는 자리여서 사실상 삭탈관직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은 '역참'이라고도 했고 역승은 역참의 책임자였다. 용장은 지금의 구이저우성 슈원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성도 구이양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요즘의 구이저우성
출옥 이후 용장 임지로 떠나기 전 그는 준비물을 챙기기 위해 먼저 고향에 들를 생각으로 남쪽을 향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를 미행하고 있었다. 유근이 보낸 자객들이었다. 전당 강변에 다다른 왕양명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이제 더 이상 저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절명시 두수를 지어놓고 의관과 신발을 벗어둔 채 파도가 넘실대는 야밤의 전당강으로 뛰어 들었다. 금의위 자객들이 강변에 다다랐을 때 이미 왕양명은 보이지 않았고 그의 옷과 신발 등이 강물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강변에 남겨진 「절명시」를 발견하고는 그가 이미 강으로 뛰어 들어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했다. 이 소식은 곧바로 절강성 정사와 안찰사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직접 관원 몇 명을 데리고 와서 강변에서 왕양명을 위해 제사까지 지내주었다. 또 이 불행한 소식은 왕양명의 가족에게도 전달되었다. 가족은 대성통곡하면서 장례를 준비했다.
그러나 왕양명은 죽은 게 아니었다. 파도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던 그가 눈을 떠보니 놀랍게도 배 안이었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그를 발견한 것은 상선이었다. 배가 복건에 이르자 왕양명은 기력을 되찾았고 뭍으로 올라왔다. 이런 풍파와 곡절을 겪으면서 그는 거의 혼비백산할 정도로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그래도 목숨은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그는 집으로 돌아가 얼마간 휴식을 취한 다음 용장으로 출발했다. 절강 소흥에서 귀주 용장까지는 당시 교통 사정으로는 너무나 멀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떠나기 전, 가족과 그의 제자들이 배웅을 나와주었다. 그중에는 서애라는 제자도 끼어 있었는데 왕양명이 가르친 최초의 제자이자 애제자였다. 서애는 자가 왈인으로, 왕양명의 학문을 숭앙해서 ‘성인의 학문’을 배우겠다고 다짐했고, 왕양명 역시 그의 학문적 자세를 높이 샀다. 후일 서애는 왕양명의 매제가 되었다. 왕양명은 '나에게 서애는 안연과 같은 존재'라고 할 정도였다. 애석하게도 서애는 안연처럼 단명해서 나이 서른한 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초창기 왕양명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서애가 스승 왕양명의 어록과 편지를 모아 엮은 책, 전습록
1507년 12월, 왕양명은 소흥을 출발하여 이듬해 봄에 귀주 용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발 1300m 정도의 고산 지대로 강수량이 많은 데다 다습해서 기후가 온화한 대신 독충과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곳은 묘족·포의족 등 소수민족의 집단 거주지라 한족과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한족 출신인 왕양명은 더더욱 힘겨운 생활을 겪어야 했다.
주변 지형을 파악하러 다니던 중에 용장 북동쪽에 위치한 용강산에서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동굴 안은 다소 음습했지만 그래도 비바람을 피하기엔 좋았다. 그래서 아예 이 동굴을 거주지로 삼기로 하고 짐을 죄다 꾸려왔다. 현지인들은 그곳을 '동쪽 동굴'이라고 불렀는데, 왕양명은 그 이름을 '양명 동굴'로 바꾸었다. 거주지는 이 동굴로 해결되었으나 이번에는 또 양식 문제가 불거졌다. 먹을거리가 떨어지자 사태는 전보다 더 심각했다. 때는 마침 봄 파종기였다. 묘족민이 어떻게 파종하나 봤더니 다들 화전을 일구고 있었다. 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불을 지른 다음 파종하는 방식이었다. 원시적이긴 해도 그 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주민들로부터 파종법을 익힌 후 왕양명은 직접 황무지를 개간하고 경작에 들어갔다.
구이저우성 양명동굴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은 대충대충 엮어놓은 오막살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흙벽돌 제조법을 가르쳐주고 나무로 집 짓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 결과 주거 환경의 개선과 함께 한족 문화를 보급하는 효과도 있었다. 현지 주민들은 이러한 왕양명에게 매우 호의적이었고 고마워했다. 주민들은 왕양명이 거주하는 동굴 속이 너무 음습하다고 생각해서 벌목한 나무로 왕양명에게 여러 칸짜리 집을 지어주었다. 왕양명은 그곳을 용강 서원 명명했다. 그 얼마 후 빈양당·하루헌·군자정·완이와 등 서원의 부속 건물들이 속속 생겨났다.
구이저우성의 용강서원
왕양명의 용장 생활, 특히 초창기의 생활 환경은 그 자신이 상상한 이상으로 열악했다. 그는 음습한 동굴 속에서 기거했고 온갖 독충이며 전염병과도 싸워야 했다. 물자가 부족해서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환경 속에서 거의 매일 생존의 위협에 시달린 그로서는 길거리에 나뒹구는 시신을 묻어주며 생존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상황이었다. 용장에 부임한 이래로 왕양명이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어떻게 살아남느냐’였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을 오가면서 그는 비로소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당시 그의 행동 방식은 독특했다. 돌로 자신의 관을 만들어 그 속에 누워보았다. 이른바 '사망 체험'이었다. '만약 성인이 현재 나와 같은 처지라면 어떻게 할까?' 그는 깊은 사유에 몰입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밤낮없이 사유에 잠기면서 점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달 밝은 밤, 문득 그는 마음 저 깊은 데서 솟구쳐 오르는 한 줄기 광명을 본 듯했다. 자기 자신이 무한한 우주 공간과 자연 세계와 혼연일체가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말로 다 못 할 희열과 함께 힘이 솟구쳤다. 그 자신도 모르게 우렁찬 탄성을 질렀다. 그의 온몸에는 땀이 흥건했지만, 얼굴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희열감이 가득했다. 흔히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그가 ‘용장에서 도를 깨쳤다’고 말한다. 소위 ‘용장오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계기로 왕양명은 그동안 자기 마음을 짓눌러왔던 '죽음'이라는 장애물을 걷어냈다. 그제야 그는 죽음의 문턱, 죽음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생명의 실체를 깨달았다. 죽음으로부터의 초탈이었다. 이제 죽음의 위협은 그에게 더 이상 중요한 화두가 되지 못했다.
용장오도
죽음은 결코 생명의 대립물이 아니다. 죽음 자체가 곧 생명과 연관된 하나의 사건, 생명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대한 사건일 뿐이다. 바로 여기서 그는 큰 이치를 하나 깨달았다. '모든 사물의 이치는 원래부터 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단정히 한다면 사물의 이치를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도 족하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본성 속에 원래부터 성인의 도를 구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과거 그는 성인의 도를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어떤 물건을 찾듯이 항상 외부에서 성인의 도를 추구하려고 했다. 이제 그는 그것이 전적으로 착오였다는 걸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용장오도'는 '사물 속에 하늘의 이치, 즉 천리가 담겨 있다'는 주희의 관점에 대한 부정이다. 왕양명은 '모든 사물의 천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고 인식했으므로 양자의 관점은 서로 판이했다. '용장오도'는 주희의 학설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고 이와 더불어 '용장오도'는 이제 왕양명이 '마음'을 골자로 하여 자신의 철학 체계를 수립해가는 기점이 되었다. 이른바 심학이다. 이후 그의 모든 사상과 관점은 이를 기초로 확립되어갔다. '용장오도' 이후 왕양명의 용장 생활도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그는 고달픈 생활을 보내면서도 생명의 환희를 깨달았고, 온몸을 내던져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1509년 어느 날, 용장으로 한 손님이 왕양명을 찾아왔다. 귀주제학부사 석서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소문을 통해 왕양명의 '용장오도' 사건이나 강학 활동에 대해 잘 알고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석서에게 자신이 용장에서 깨우친 이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왕양명은 그 이치를 '지행합일'이라고 명명했다. 석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정말 뜻밖이다. 진정한 성인의 도를 오늘에야 발견했노라”고 감탄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왕양명에게 귀양 서원으로 와서 그곳 선비들에게 그의 새로운 사상을 강의해달라고 요청했다. 왕양명은 석서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명사』에는 왕양명의 귀양 서원 강학이 1509년에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귀주 지역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독창성을 가진 왕양명의 사상이 최초로 대외적으로 알려진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만했다. 당시 강학의 핵심은 ‘용장오도’ 이후 왕양명의 사상을 대표하는 지행합일설이었다. 그의 귀양 서원 강학은 거의 1년 동안 지속되었고, 1510년 봄, 마침내 3년간의 유배 생활도 마감되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실제로 용장에 거주한 기간은 만 2년이었다. 그는 여릉의 지현으로 승진했다.
여릉은 지금의 장시성 지안이다. 조그마한 현이긴 해도 그곳은 구양수·문천상과 같은 송대 명인들을 배출한 고장이라 이름이 제법 알려져 있었지만 여러 심각한 사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양명이 여름 현령을 지낸 불과 7개월 만에 그는 일련의 긴급 사태를 적시에 잘 처리했다. 예컨대 백성 집단 시위와 소송 사건, 가뭄과 전염병의 재난, 화재 및 도적 떼 사건 등이었다. 이 7개월의 현령 재임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과 애민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가 민생을 가장 우선시하여 백성의 생활 질서를 재편하고 바로잡는데 주력한 사실은 바로 그의 탁월한 정치적 안목에서 나온 것이었다.
구양수와 문천상
1510년 가을 환관 유근이 주살되자 그해 11월, 왕양명은 조정의 부름을 받았고, 이로써 7개월간의 여릉 생활은 마감되었다. 여릉 현령은 왕양명으로서는 생애 최초의 관직다운 관직이었다. 7개월 동안 그는 지방 행정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고,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 대처하는 위기 관리능력도 어느 정도 배양할 수 있었다. 이번 직무 수행은 자신의 지행합일 사상을 정치 현장에서 실제로 응용하고 실천한 사례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의 지행합일 사상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먼저 그 방법부터 숙지해야 한다. 즉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래서 '앎'이 먼저고 실천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한다. ‘지선행후’다. 과거 주희 역시 이 '지선행후'의 관점을 견지했다. ‘반드시 먼저 알고 난 다음 실천해야 한다’는 견해다. 다시 말하면 주희의 격물치지란 사물의 관찰을 통해 지식을 획득한 다음에야 천리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왕양명은 용장에서의 깨우침을 체험한 다음, 주희의 이런 관점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했다. 특히 도덕의 실천에 있어서는 더 심각하게 문제가 된다고 보았다. 만약 ‘지’가 ‘행’보다 앞서야 한다고 강조하면 사람은 '지'의 중요성에 집착한 나머지 '행'의 중요성을 소홀히 하기 마련이다. 원래 '지' 그 자체는 끝이 없어서 '지'에 한평생을 다 보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행'은 영원히 불가능해진다. '지'와 '행'을 분리할 경우 '지'는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래서 그는 '지'만 지나치게 중시하고 '행'을 홀시하는 폐단을 고치려면 지행합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일을 단순히 '알기'보다는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백범 김구의 글씨
그의 지행합일설은 '지선행후'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 잡으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지'와 '행'은 하나로 통일되었을 때 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는 '지식이 참되고 알차면 꼭 실천하기 마련이며, 명료하고 경밀한 실천은 곧 진정한 지식이 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지식은 반드시 실천이 수반되고, 충실한 실천은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 요컨대, '지'와 '행'은 원래 하나로 통일된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하나의 '완벽한 과정'으로 구현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지'는 '행의 시작이며 '행'은 '지'의 완성이니, 이로써 시작과 끝이 서로 일관된다고 말한다.
왕양명이 주장한 지행합일설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사상이었기에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강학을 듣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따금 회의적인 시각을 갖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철저한 신봉자가 되었다. 귀양 서원에서 비롯된 강학을 통해 그의 독창적인 사상이 급속도로 번져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행합일설은 왕양명의 초기 사상을 대표하는 학설로, '용장오도' 이후 그의 사상을 결집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사상은 그가 어려서부터 길러온 ‘말한 대로 바로 실천하는 성격’을 좀더 발전적으로 응집시킨 결과물이다.
1510년 11월, 왕양명은 여릉을 떠나 북경에 도착했고 형부의 주사로 제수되었다. 그가 용장으로 떠나기 전의 직책으로 복직된 것이다. 이때부터 5~6년 동안 그의 직책은 자주 바뀌었는데, 마지막 직책은 남경 홍로시 경으로 정4품이었다. 이 직책은 비교적 한직이었기에 그는 이 기간 집중적으로 강학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잦은 직책 변경으로 도처를 나돌았는데, 그러다 보니 그 강학의 족적 또한 북경·남경·제주·소흥 등 광범위했다. 강학을 거치면서 지행합일설은 한 단계 더 발전된 사상으로 변모했고, 사람들로부터도 중요한 이론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이런 사상은 당시 학술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제자도 나날이 늘어났고 영향력도 점차 확대되었다. 강학에 치중한 이래 왕양명은 제자들과 자주 교류하면서 활발한 토론을 벌였고, 그런 활동 속에서 즐거움을 만끽했다.
하지만 1516년 9월, 조정에서 그에게 새 임무를 부여했다. ‘도찰원 좌첨도어사 순무남감정장등처’라는 직책이었다. 도찰원은 명대의 중앙 감찰 기구이고, 남감정장은 지역을 가리키는데, 강서성의 남안과 감주, 복건성의 정주와 장주 등지다. 순무는 지방의 군사와 정치 업무를 총괄하는 관리로, 당시 순무남감정장의 관아가 감주에 있었으므로 왕양명은 감주로 이사해야 했다. 직책의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그의 관할지는 강서·복건·광동·호광(지금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등 4개 성의 경계 지역을 망라하는 광활한 영토였다. 그의 새 임무는 이 지역에 출몰하는 도적떼를 진압하는 일이었다.
동정호의 위아래에 있는 후베이성과 후난성
이 시기에 강서·복건·광동·호광 등지의 경계지에서 할거한 도적 떼의 세력은 크게 세 파로 나뉜다. 하나는 복건성 장주부 경내의 도적 떼로 첨사부, 온화소 수괴였고, 또 하나는 강서성 남안부·감주부 경내의 도적 떼로 사지산·남천봉이 수괴였다. 나머지 하나는 광동성 혜주부 경내의 도적 떼로 지중용이 수괴였다. 이 3대 도적 떼는 각기 수천 명 이상의 방대한 세력을 형성했고 그 기세 또한 대단했다. 조정에서 왕양명을 내려 보낸 시기는 바로 수차례에 걸친 관군의 토벌이 실패를 맛본 뒤였다. 그에게는 도적 떼 토벌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왕양명은 첨사부·온화소가 이끄는 장주 남부 지역의 도적 떼는 ‘장남 전투’에서, 사지산 남천봉이 이끄는 도적 떼들은 ‘횡수·통강 전투’로, 지중용의 도적 떼는 ‘이두 전투’를 통해서 모두 토벌하였다. 1517년 2월에서 1518년 3월까지, 불과 1년 남짓 되는 기간에 왕양명은 강서·복건·호광·광동 등 4개 성의 경계 지역에서 여러 해 동안 온존했던 도적 떼의 폐해를 해결함으로써 백성의 안정된 삶을 회복시켰다. 도적 섬멸을 위한 군사 작전은 현지 백성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왕양명에 대한 강서 백성의 공경심도 더 한층 높아졌다.
왕양명이 주도한 '장남 전투' '횡수·통강 전투' '이두 전투’ 등 이 3대 전투를 통해 우리는 그의 전략 전술을 다음과 같이 총괄해볼 수 있다.
첫째, 지피지기 전략. 그는 사전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전투를 치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언제나 그는 엄청난 공을 들여 준비 작업에 철저를 기했다. 병과 장비, 병사의 사기, 작전 수행능력 등 쌍방의 전력을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했고, 제때 문제점을 찾아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강구했다. 이렇게 사전에 충분한 준비 태세를 갖춤으로써 최종 승리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둘째, 고립화 전략. 그는 적을 고립화시키는 전략을 매우 중시했고 그 방식 또한 다양했다. 즉 적들 상호간의 왕래와 정보 교환을 차단하여 그들의 정보 수집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또 실제 전투에서는 적들 상호 간의 군사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주요 공격 목표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관군의 공격권에 들도록 했다. 이 고립화 전략 때문에 관군은 전력상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또 전력 노출을 예방하는 효과까지 얻었다.
셋째, 전투 의지 와해 전략. 과정에서 왕양명은 적의 전투 의지를 마비시키기 위해 곧잘 첩자를 활용하거나 거짓 정보를 흘리곤 했다. 특히 '장남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그리고 '이두 전투'에서 이 첩자와 거짓 정보 활용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넷째, 전력 집중화 전략.
고립화 전략의 목적은 관군의 우세한 전력을 집중하여 적을 공격하는데 있다. 위에서 말한 3대 전투에서 왕양명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집중화 전략을 구사했으니, 이미 고립화된 적을 전방위적으로 포위 공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적은 항상 관군의 공격권 내에 있었고, 이는 최후의 승리를 담보하는 보증 수표였다.
다섯째, 대세 파악 및 발 빠른 전술 운용을 통한 주도권 장악. 왕양명은 전투 수행에서 무엇보다 대세 파악을 중시했다. 그에 더하여 그는 임기응변식의 발 빠른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전투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이런 전술은 고난도의 ‘횡수·통강 전투’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전투에서의 불리한 국면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것, 이 역시 전투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 사례다.
여섯째, 주모자의 엄벌과 살상의 최소화. 왕양명은 전략을 수립할 때 도적의 수괴는 엄벌하되, 상대방이 저항을 포기할 땐 살상을 금할 것을 누차 강조했다. 또 그는 포로가 된 도적 떼에게 전투가 종료된 다음에는 극진히 보살펴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바로 왕양명이 보여준 넓은 도량, 또 그가 전투의 목표와 의미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곱째, 군기 확립. 엄격한 군기, 공정한 상벌 제도는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핵심 요소다. 그는 병사들이 마을을 통과하거나 주둔할 때마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라도 백성의 재물에는 손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의 애민 정신이자, 신뢰받는 군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배려였다.
여덟째, 전후 복구를 통한 사회 안정 도모. 왕양명에게 있어서 전쟁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전쟁의 목적은 결국 백성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전투가 종료될 때마다 어떻게 하면 그 지역의 항구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했다. 예컨대 그가 복건성에서 평화현을, 강서성에서는 숭의현을, 그리고 광동성에서 화평현을 신설한 것도 알고 보면 이들 지역을 좀더 철저하게 관리하고 교화함으로써 민생을 보살피고 예의범절을 두루 전파하겠다는 바람에서였다. 그가 자신의 치적이나 이익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원대한 정치적 식견을 가졌음은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왕양명의 이러한 군사적 안목과 사상은 그 뿌리가 있다. 바로 과거부터 치밀하게 연구해온 중국의 역대 병법에 대한 지식과 실전 경험에 그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이후의 여러 전투에도 이어졌고 이러한 군사적 안목과 사상은 또 후일 중국의 군사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의 많은 군사 전문가에게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어쨌든 전투는 완전히 종료됐다. 이제 그가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비교적 많았다. 1518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감주에서 보내면서 정무, 강학 활동, 요양 생활 등에 고루 활용할 수 있었다. 강서 지역에 거주했던 일군의 청년들, 가령 추수익·구양덕·황홍강 등 성인의 학문에 뜻을 둔 이들이 이 시기에 그의 문하로 들어왔다. 후일 그들은 ‘강우왕문학파’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1519년 6월 5일, 왕양명에게 조정의 명령이 하나 하달되었다. 복건성 군대 내부에 무슨 변고가 발생한 듯하니 서둘러 조사하라는 내용이었다. 6월 9일, 그는 감주를 출발하여 감강을 따라 남하했다. 남창을 거쳐 복건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6월 15일, 남창 외곽에 위치한 풍성 황토뇌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의 지현인 고필이란 사람이 영접을 나왔다. 인사가 끝나자 지현은 왕양명에게 경천동지할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영왕 주신호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더 이상 남창으로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급작스런 소식이 왕양명으로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영왕 주신호는 명 태조 주원장의 5대손이다. 명 건립 직후 주원장은 아들들을 친왕으로 봉했는데, 당시 열일곱째 아들 주권이 영왕으로 책봉되었다. 주신호는 바로 제1대 영왕 주권의 직계 후손으로, 1497년에 영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제4대 영왕이었다. 영왕의 봉지는 원래 남창이었다. 주신호는 무종 주후조와 같은 황족으로서 항렬로는 주신호가 조부뻘이었다. 다만 나이는 주후조보다 겨우 열두 살이 많았다.
명 태조 주원장
이 두 사람은 주원장의 후손이긴 했지만 모두 행실이 바르지 못했다. 주후조는 황제 자리에 있었지만 아예 정사를 돌볼 생각은 않고 매일같이 유람, 음주가무, 사냥, 유희나 투전에 탐닉했다. 조정이 있는 북경에 머무는 날도 거의 없었다. 반대로 주신호는 몸은 비록 남창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북경에 있었다. '황제 주후조가 북경에 머물기 싫다면 그 자리는 내가 맡아야지!'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주후조가 황제로 등극하던 그날부터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차지할까를 고심했다.
주신호는 거병 명령을 발동했다. '정덕'이라는 연호를 폐지하고 핵심 참모 이사실과 유양정을 각각 좌승상, 우승상에 임명했다. 그는 황제 주후조를 토벌한다는 격문을 내걸고 10만 대군을 결집하여 구강, 남강으로 진격했다. 이 두 지역은 금방 반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왕양명은 연고를 떠나 있어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병사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주신호의 대군을 섬멸했다. 후세 사람들은 흔히 왕양명이 주신호의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요인으로 그의 정보전을 꼽는다. 그것은 조작한 정보를 활용하여 주신호의 반군을 남창에 묶어둔 채, 그 틈에 관군의 집결 시간을 번 전략이다. 병법에서 말하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전략', 바로 이 전략에서 그의 군사적 지혜가 잘 드러난다.
26일의 파양호 전투에서 왕양명은 마침내 주신호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주신호의 이번 반란은 조야를 뒤흔들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왕양명의 치밀한 전략 덕분에 신속하게 평정되었다. 주신호의 거병일은 6월 14일, 그가 생포된 날은 7월 26일이므로 도합 41일간의 반란이었다. 여기서 주목해볼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왕양명이 반란을 평정하는 전 과정에서 동원한 군대는 강서 지역에서 임기응변식으로 모집한 2~3만 정도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군사 작전의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란군이 종횡무진했던 40여 일 동안 조정에서는 어떤 군대도 파견하지 않았고, 왕양명이 지원을 요청했던 인근 지역의 군대 역시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복건성에서 지원에 적극 호응했지만 그들이 원군을 파견했을 때는 이미 평정이 끝난 뒤였다.
중국의 두번째로 큰 담수호인 파양호지도
주신호가 거병했을 당시, 왕양명의 신분은 단지 반란 지역을 통과하는 관리에 불과했다. 따라서 조정으로부터 그 어떤 군사적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조정의 명령 없이 자발적으로 이룬 공로'였다. 과거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도 그랬듯이 조정에 승전보를 올림과 동시에 왕양명은 즉각 전후 복구 사업에 착수했다. 현지 주민에 대한 지원, 임시 조직된 군대의 해산 등 그는 최선을 다해 남창 성내의 주민들이 조속히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그러나 혼탁한 조정에서는 왕양명에 대한 모함과 비방이 그칠 날이 없었다.
1521년 3월, 황제 주후조가 사망했다. 향년 31세로 황당무계한 삶을 마무리하면서 임종 직전 그는 사촌 동생 주후총에게 황위를 넘겼다. 그가 가정 황제다. 가정제가 즉위한 어느 정도 조정은 점차 안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왕양명은 주신호의 모반에 동조했다는 모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집을 떠나 온 1516년 9월부터 이미 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그사이 조모 잠씨는 병으로 세상을 떴고 부친 왕화 또한 노쇠해졌다. 변경의 도적 떼를 섬멸한 직후 그는 네 차례나 상소하여 가족 방문을 위한 귀향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다시 그는 다섯 번째 상소문을 올렸다. 이번에는 가정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명 11대 황제 가정제 주후총
당시 조정에는 걸핏하면 왕양명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1523년, 이번에는 또 왕양명의 강학 활동을 비방하는 자가 등장했다. 왕양명이 위학, 즉 거짓된 학문으로 민심을 선동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강학은 평생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사업이었다.
왕양명은 '용장오도'를 통해서 처음으로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그 핵심은 바로 ‘성인의 도는 내 본성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의 본성과 마음속에 이미 성인의 도가 존재하므로, 그것을 파악하려면 자기 내심을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심의 성찰을 통해 본연의 공명정대한 본심을 인식하자는 말이다. 내심을 성찰하지 않을 경우, 성인의 도가 마치 외부 사물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외부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엉뚱한 길로 빠질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용장오도' 이후 그는 자신의 관점을 지행합일설로 총괄했다. 그는 진정한 지식은 현실 생활에서 실제 행동으로 구현되어야 하며, 또 일상의 모든 실천과 행동은 지식의 활용이자 동시에 근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과거 그는 엄청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복잡한 정치 상황과 힘든 생활을 겪었지만 사리사욕은 철저히 배제했다. 내심에서 우러나온 정의와 정도에 충실했고 또 그것을 철저하게 자신의 생활에 반영했다. 이런 가운데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의 본심은 사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사악인지,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잘 알고 있다. 이런 본심이 곧 양지다." 그의 양지설은 그가 고난, 죽음과 삶의 문턱을 넘나드는 가운데 생명과 맞바꾸며 깨달은 이치다. 그것은 성인지학의 근본이자 핵심이다.
“양지는 개개인의 마음속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천부적으로 타고난다. 양지는 독서 등 후천적인 학습이 필요 없다. 그것은 원래 존재하므로 본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이유, 또 생활 속에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후천적 독서 때문이 아니라 바로 천부적 본심인 양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이치는 나의 마음 밖에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양지설에 따르면 양지야말로 우리가 인간이 되는 근본이자 본질이다. 양지는 우리가 탄생하면서 선천적으로 생겨났다. 선천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천덕' 또는 '천량'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천'은 본래부터 타고났다는 뜻이다. 그것은 영구적이어서 소멸되지 않는다. 아무리 사악한 자라도 양지는 존재한다. 그것은 '잠들지 않고 언제나 깨어 있다. 언제나 깨어 있기에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에 대한 내부 감독자'이며, 깨어 있는 우리 내심의 ‘관찰자’로서 모든 언행을 빠짐없이 관찰한다. 그러므로 일상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양지가 정확하게 판단해낸다.
“양지는 선과 악, 행동의 시시비비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분별한다. 문제는 우리가 이따금 양지의 인도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흔히 범하는 오류다. 양지를 거스를 때 여러 도덕적 타락이 나타난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할 때 그의 양지는 분명 도둑질이 나쁘다는 걸 잘 안다. 그렇지 않다면 도둑이 왜 남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은밀하게 행동하겠는가. 도둑이 남의 물건을 훔치려는 건 양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지를 따랐다면 물건을 훔칠 리 없다.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 이것은 '지'와 '행'의 불일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무리 양지가 마음속에 영원토록 내재한다고 해도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우리의 눈과 귀, 코와 입, 신체 등 외재적 감각 기관은 무시로 외부 사물과 접촉한다. 그리고 접촉하는 과정에서 감각 기관은 종종 분별없이 제멋대로 작동하기도 하며, 심할 경우 편견과 허위를 오히려 진리인 양 여기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양지가 이끄는 데서 멀어지거나 양지가 은폐되어버리기도 한다. 양지가 은폐되면 아주 위험해진다. 이는 생명이 그 기반과 본질을 상실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온갖 욕망과 만족을 추종하다 보면 사람은 도덕적 가치를 상실하고 본질적으로 타락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본심, 본성으로 회귀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본심 본성으로의 회귀는 곧 양지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양지가 생활을 주재하고 인도해야만 우리 심신은 균형을 이루고 인간 존재로서의 완전성을 확보하며, 원만한 인격을 구비하게 된다. 양지로의 회귀, 즉 자기 본심, 본성으로의 회귀는 바로 생명 본질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왕양명의 관점에서 보는 '치양지'다. '양지의 실현' 또는 '양지의 완성'이라는 의미다.
양지는 모든 사람에게 다 구비되어 있지만 분주한 일상 속에서 종종 은폐되기도 한다. 그 은폐는 인간의 감각 기관이 욕망의 추구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일단 양지가 은폐되면 일상생활에서 그것은 자기 고유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따라서 ‘치양지’의 첫 번째 의미는 “양지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질임을 자각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의미 있는 생활을 영위하려면 반드시 자기 내면의 심령을 충분히 드러내어 양지가 새롭게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왕양명은 양지를 거울에 비유한다. 본래 거울은 깨끗해야만 만물이 그대로 비칠 수 있다. 거울 속에서는 크든 작든, 예쁘든 뭐든 모든 사물이 다 원래 모습 그대로 비친다. 그러나 거울을 오래 사용하지 않으면 거기에는 얼룩이 생긴다. 얼룩이 잔뜩 낀 거울은 거울이긴 해도 거울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양지도 장기간 방치하면,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은폐되면 마치 거울에 얼룩이 낀 것과도 같아진다. 우리가 '자각적으로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수양을 하면서 본성을 기르는 것은 바로 정성을 다해 거울에 낀 얼룩을 닦아내는 것과 같다.
우리가 만약 자기 양지의 존재를 자각했다면, 그 내재된 양지를 다양한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을 왕양명은 이렇게 설명한다. "치양지란 자신의 양지를 매사에 반영하는 것이다. 모든 일상사에서 양지가 실현되면 자신의 생존본질, 가치, 의의 또한 원만하게 실현된다. 다시 거울의 비유를 들어보자. 우리가 사리사욕을 배제한 채 오로지 양지가 인도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양지가 깨끗한 거울처럼 비춰주기 때문에 시비, 선악, 미추를 자연스레 판단할 수 있다. 양지의 인도와 가르침을 따른다면 사물의 원래 면모가 정확하게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양지의 지시에 따를 때 매사가 완벽하게 처리되므로 더 이상 마음속에서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게 된다. 사물은 거울 앞에서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물이 거울을 벗어나면 거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일상 업무를 처리할 수 있고, 사물의 구속으로부터도 초연해질 수 있다. 결국 무한히 넓고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도덕이 고상한 이유는 진정한 도덕적 행위에는 사리사욕이 개입되지 않으며 그 어떤 이해타산도 초월해서다.
요컨대 왕양명이 제시한 '양지'는 개개인이 자각적으로 자기 내면으로부터 양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동시에 이 내면의 양지를 일상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는 반드시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측면에서 보든 지행합일은 가장 근본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지행합일은 '치양지'의 가장 근본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왕양명은 초지일관 이 '지'와 '행'의 통일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양지설이 제기된 후 지행합일에서의 '지'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었다. '지'는 흔히 말하는 '지식'의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양지를 의미한다. ‘치양지’하려면 개개인의 본심을 일상생활 속에서 충분히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왕양명은 곧잘 ‘심외무물’ 혹은 ‘무심외지물’을 이야기한다. '마음 밖에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흔히 사물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들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어떤 '사물'을 대할 때,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해야만 그것이 의식이나 사상 속으로 들어온다. 우리 의식에 들어오지 않는 '사물'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거나 처리할 수 없다. 이런 사물의 ‘존재’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마음 밖에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왕양명의 말은, 우리 의식에 들어오지 않은 '사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사물은 내 세계의 일부이기에 하나같이 다 내 관심 안에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는 개개인이 ‘치양지’할 것을 요구한다. 또 자기 자신의 인식세계를 최대한 확충하여 자신의 영혼을 무한히 확충할 것을 요구한다. 원래 인간의 영혼이나 양지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무한하다. 따라서 만약 천하를 마음에 둔다면 천하의 일체 만물이 다 우리와 관련을 맺는다. 천하 만물이 다 내 마음속에 있을 때, 궁극적으로 우리는 천하 만물이 일체가 되는 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우리 영혼 세계가 무한히 확충되어야만 개인적 사리사욕이 배제되고 생명의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의식세계로 진입한 다음에야 그 존재 상태가 명료해져서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고 존재의 의미 또한 제대로 받아들여진다. 그 전에는 그저 고요의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게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명료하게 인지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왕양명의 입장에서는 독서든 학문이든 입신양명이든 그 근본 목적은 바로 본심, 즉 양지를 밝히는 데 있었다. 양지는 학문의 근본이었고 입신양명의 기반이었다. 양지가 밝혀져야만 학문의 근간이 세워지고 또 생활의 핵심 가치가 확립될 수 있다. 그의 강학 규모는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광범위했고, 강학 활동과 함께 학설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가히 ‘천하를 풍미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그를 기점으로 중국 사상사의 골격이 바뀌었으니, 중국 역사상 독창성이 가장 뛰어난 철학자. 사상가의 일원으로 꼽히는데 하등 이견이 없다. 그의 양지설은 주희 이후 전래되어온 중국의 사상적 굴레를 완전히 탈피하여 사상계에 또 하나의 참신한 바람을 몰고 왔다.
강학 활동의 즐거움에 몰두했기에 왕양명은 소인배들의 모함이나 조정의 불공평한 예우에 대해서도 초연해질 수 있었다. 관직을 벗어나 집에서 머문 5~6년이 그에게는 오히려 가장 행복한 시기로 여겨졌던 것도 바로 강학 때문이었다. 이 5년 동안 왕양명의 생활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다. 1525년 정월, 부인 제씨가 세상을 뜨면서 상처의 아픔을 경험했다. 그의 나이 쉰넷이었다. 게다가 건강 상태도 몹시 불안정했다. 젊은 시절 앓았던 기침은 호전될 기미는커녕 오랜 병영 생활로 더 악화되어 강학 활동 중에도 요양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만 했다. 이 무렵 가정 4년 연말을 전후로 하여 그는 장씨를 새 아내로 맞았고 이듬해 11월에 아들을 하나 얻었다. 원래 전처 제씨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기에 왕양명은 사촌 동생의 아들 왕정헌을 양자로 들였는데, 만년에 친아들이 출생하자 큰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조정은 왕양명을 마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강학 활동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1527년 5월, 조정은 다시 그를 불러냈다. 이로 인해 그는 강학 활동과 자유로운 사색 등을 부득이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나이 어린 아들과도 작별해야 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몸을 이끈 채 다시 그는 갑옷을 걸치고 종군에 나섰다.
이때 조정에서 그에게 내린 관직은 ‘도찰 겸 총좌도어사 제양광군무’이고, 광서성 사은·전주 지역의 정무를 처리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조정은 이 두 지역을 상황이 위급한 '군사반란 지구'로 간주하여 왕양명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사은(지금의 광시 허츠 환장 지역으로, 마오난 족 자치현이 소재한 곳)과 전주(지금의 광시, 바이써, 텐양), 이 두 지역은 모두 광서성의 토사[자치가 허용된 소수민족 거주지에 설치된 관아]에 해당했다. 그런데 전주 토목 노소와 사은 토목 왕수가 서로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광서 장족 자치구
1527년 9월 8일, 왕양명은 조정의 명에 따라 소흥을 떠나 광서로 향했다. 출정에 나서는 심경은 참으로 복잡했다. 그렇게 정성을 쏟았던 강학을 중단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컸고, 날로 악화되는 건강 상태도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천 리 아득히 먼 이번 광서행도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터였다.
장도에 오르기 전날 밤, 제자들이 전송하러 몰려들자 그는 자기 집 정원에 연회를 마련했다. 더없이 상쾌한 가을 공기, 휘영청 밝은 달, 한껏 흥이 오른 그는 제자들과 어울려 악기를 연주하고 시를 읊조렸다. 제자들이 하나둘씩 돌아가고 이제 남은 사람은 애제자 전덕홍과 왕기 두 사람뿐. 이때 그는 자신의 사상을 주제로 그 두 제자와 좀더 깊이 있는 토론을 벌였다. 두 제자가 제기한 의문에 대해 왕양명이 답변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거듭 천명하는 형식이었다. 이때 나온 것이 바로 4구로 개괄해놓은 철학 사상, 그 유명한 ‘사구교’이다. 당시의 이 문답 사건은 양명학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데, 이를 흔히 ‘천천증도’라고 부른다. '천천교 위에서 도를 논하다'라는 의미다. 천천교는 왕양명의 집 안에 있던 작은 다리로, 그가 두 제자와 대화를 나눈 곳이다.
사구교
이튿날 그가 소흥을 떠나 광서로 갈 때, 전덕홍과 황기는 스승을 전송하기 위해 부양의 엄자릉 조대까지 따라 나섰다. 못내 작별을 아쉬워했던 스승과 제자, 여기에서도 또 한차례 사제 간의 문답이 이루어졌다. 화두는 '마음'이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엄탄문답'이라고 부른다. 엄자릉 조대 부근의 한 여울가에서 이루어진 문답이라는 의미다. 왕양명으로서는 '엄탄문답'이 자기 학술 사상의 핵심 주제를 마지막으로 설파한 자리였다.
절강성 동려현의 엄자릉조대
엄자릉은 동한시대의 사람으로 광무제 유수의 절친한 친구. 유수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를 도왔다.
출발한 지 한 달 만인 10월, 마침내 그는 남창에 도착했다. 남창 백성은 환호와 함께 융숭하게 그를 맞았다. 향을 피워 들고 길 양옆에 도열한 백성은 서로 번갈아 그가 탄 가마를 받들며 관아로 향했다. 왕양명은 남창에 머물면서 공자묘를 참배했고, 그곳 명륜당에서 『대학』을 강학했다. 강학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막중한 임무가 내려진 터라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하고 바로 남창 백성과 작별해야 했다. 그는 다시 감강을 거슬러 올라 길안에 도착했다. 길안에서는 제자 300여 명이 나와 그를 맞이했고, 이곳에서 그는 생애 마지막으로 대규모의 공개 강학을 주도했다.
11월 20일, 왕양명은 당시 양광 총독부가 있던 광서성 오주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사은·전주의 소위 '반란'과 관련된 제반 업무처리에 착수했다. 사실 그는 강서 경내로 진입하는 순간 이미 노소·왕수의 '반란' 사건에 대해 철저하게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왕양명은 신속하게 군사적 대비를 갖추는 한편, 노소·왕수가 거병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조사해보았다. 면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마침내 그는 그들이 벌인 소위 ‘반란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었다. 사은 전주 사건의 전후 맥락을 분석한 결과, 그는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보다는 설득과 위무가 상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대응책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현지 소수민족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적 전통을 감안할 때, 토사제를 폐지하고 한족 관리를 등용하는 ‘유관제도’가 이 지역에서 꼭 효율적이지만은 않다. 이 지역은 예외적으로 ‘토사제’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 이 지역까지 일률적으로 한족 출신 관리를 등용한다면 현지 소수민족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 따라서 과거처럼 토사를 부활하여 민족 자치를 실시하되, 한족 지부를 두어 그들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하면 된다고 건의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왕양명의 이런 건의가 전달되자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병부는 왕양명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조정은 "왕양명의 대책에 동의하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을 하달했다.
원래 노소와 왕수는 조정에 반기를 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조정의 정책 실패, 현지 관리의 오판과 과잉 반응 때문에 일이 더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것이다. 그는 조정이 천편일률적으로 토사를 폐지하고 한족 관리를 임명한 것이 소수민족의 민족 정서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민족 자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백성과 대립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그들의 입장을 배려했고, 또 국가 이익을 고려했다.
토사를 시행하고 투항을 회유하자 노소와 왕수는 스스로를 포박한 다음 왕양명에게 나타났다. 두 사람이 제발로 투항해온 건 가상했지만 이들 때문에 지난 2년여간 이 지역이 공포에 떨었던 걸 생각하면 어쨌든 처벌은 불가피했다. 왕양명은 두 사람에게 곤장형을 내렸고, 그들 또한 전혀 원망하는 내색 없이 이 처분을 달게 받아들였다. 노소와 왕수가 투항하자 왕양명은 그들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병사들은 귀향시켜 농사를 짓게 하라고 명했다.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소위 사은 전주의 반란. 4개 성의 병사를 총동원하여 수차례 토벌에 나섰지만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던 이 사건을 왕양명은 단 한 명의 병사도 동원하지 채 신속하게 마무리함으로써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
스스로를 포박한 다음 왕양명에게 나타난 노소와 왕수
하지만 당시 광서 지역에는 또 다른 위협이 하나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단등협과 팔채 등지에 할거하고 있던 지방 무장 세력이었다. 왕양명은 그들 때문에 줄곧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조정의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는 심각한 불안 요소로 부각되고 있었다. 양광총독 겸 영광 순무의 직위를 맡은 왕양명에게 지역 안정, 생활 및 정치질서 유지는 당연한 책무였다. 그는 단능협과 내에 할거하는 무장 세력을 소탕함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조정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이 소탕전은 그의 생애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단등협은 검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길이가 40여 km로, 협곡 대부분은 지금의 광시성 구이핑에 위치한다. 광서 지역에서는 길이가 가장 길고 험난한 협곡이다. 명대에는 단협 주변에 주로 소수민족인 야오족과 좡족이 거주했는데, 그들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는 한족과는 판이했다. 팔채는 산속에 있는 도적 떼의 근거지인 산채를 가리키는데, 8개 산채가 지금의 광시 좡족 자치구 내 상린과 신청 경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광시 좡족
단등협과 팔채는 모두 지형이 아주 험준한 광서성 오지에 위치했다. 즐비하게 늘어선 험산과 급류, 까마득히 높은 절벽 등으로 인해 교통도 불편했고 외부와의 교류도 거의 차단되다시피 했다. 외부인이 그곳으로 진입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단협을 지나 서쪽으로 나가면 바로 팔채로 통할 정도로 두 곳은 서로 이웃해 있었다. 단등협·팔채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은 명 초엽부터 이미 무장 세력을 조직하여 자주 관아를 습격하거나 양민의 재물을 약탈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정과 양민 모두에게 심각한 골칫거리였고, 조정에서는 일찍이 명 초엽부터 이 지역의 무장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노력해왔지만 워낙 험준한 지역이고 저항이 거세 손을 놓고 있었다.
왕양명은 기습작전과 허허실실과 같은 작전으로 두 지역을 신속히 평정했다. 그렇지만 단등협·팔채의 전투를 치르고 나자 왕양명의 건강 상태는 이전보다 훨씬 더 악화되었다. 원래 그는 젊은 시절부터 줄곧 병약했고, 관리로 등용된 후에는 온갖 고난과 위험에 시달렸다. 그의 삶은 대부분 열악한 자연환경, 고달픈 생활과의 투쟁으로 점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516년부터 시작하여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군영생활, 반군이나 도적 떼를 평정하기 위해 악전고투해온 나날들, 허약한 몸을 이끌고 오로지 승리를 위해 노심초사 외길을 걸어왔다. 영왕 주신호의 반란을 평정한 이후 그는 정치적 갈등에 휩쏠렸고 각종 유언비어, 무고와 치욕을 감내해야 했다. 보통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월이 되자 건강은 그의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더 악화되었다. 기침이 심하게 도졌을 뿐만 아니라 무더위와 풍토병에도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연이은 종군생활과 빈약한 의약품 때문에 온몸에 좋기까지 부풀어 오르는 상황이었다.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이루거나 음식을 삼키기조차 힘든 경우도 잦아서 마음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허다했다.
드디어 그는 고향 집을 향했고 11월 21일, 대유령을 넘어 강서 경내로 진입했고, 장수를 거쳐11월 25일이 되어서야 마침내 남안에 도착했다. 하지만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거의 위중한 상태까지 이르렀다. 1529년 1월 9일. 마침내 왕양명은 더없이 험난했고 영광스러웠던 삶을 마감했다. 향년 57세, 남안 청룡포에 정박해 있던 배 위에서였다. 11월 11일, 왕양명의 영구는 소흥 난정에서 5리가량 떨어진 청산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자신이 골라둔 장소였다. 분묘는 청산을 뒤로 한 채 녹음이 둘러선 곳에 위치했다. 앞에는 홍계라는 작은 시내가 흘렀고 더 앞쪽은 광활한 들판이 펼쳐진 탁 트인 곳이었다. 장례는 가족 외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1000여 명의 제자들로 엄숙하면서도 장대하게 치러졌다.
절강성 왕양명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