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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합당해 가는 삶(데살로니가후서 1:5)
2025년 3월 9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데살로니가후서 1: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를 믿은 후부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입니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신앙의 진짜 모습은 잃어버린 채 본질 없이 살아갑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모습의 삶이 아닌 신앙의 다른 요소들만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이 한마디로 정리했는데, 여러분의 마음에 충분히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신앙의 본질은 사라지고, 신앙생활의 루틴과 겉모습만 남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문제이며, 저는 이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자신을 거울에 비추보게 되었는데, 이런 점들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결과를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여기 있을까?’ 질문은 이렇게 되는데, ‘나는 왜 여기 있을까? 우리 신앙은 옳은 것일까? 나는 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일까? 잘하고 있다면, 왜 잘하고 있는 걸까? 어떤 면에서 잘하고 있는 걸까? 내 신앙과 신앙생활이 실질적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누군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알려주세요.’ 바로 이런 문제죠.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걸까?’
보통은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멀찌감치서 보니까, 저기서 감독님이 설교하고, 또 “다음 주에 봅시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아, 잘 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물론 저도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을 인도하고 있지만, 제 마음에는 이 핵심 질문이 한순간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부르신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도 부르잖아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1].’ 여러분은 하나님이 부르신 삶에 합당하게 살고 있습니까? 더 노골적으로 묻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삶을 살고 있냐는 겁니다.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아서 하나님께서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맞아.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거야. 잘하고 있다.’ 하고 인정해 주시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겁니다.
‘나는 문제없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 손 들어보세요. 약간 손 들기 어려운 질문이 됐습니다. 곤혹스러운 질문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솔직히 저는 완전히 자신 없습니다. 제 신앙생활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신이 없습니다.’라고 생각하는 분은 마음속으로 손을 들어보세요.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할까요? 신앙생활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거대한 주제를 오늘 다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한두 가지 중요한 점을 이야기할 게요.
나의 신앙 루틴, 신앙의 모습. 매번, 매주 반복되는 신앙생활의 모습들. 교회의 예배,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기도회에 참여하고. 밥 먹을 때도 그냥 아무렇게나 먹지 않고 항상 기도하고 먹고, 잘 때도 ‘아, 졸려!’ 하고 그냥 잠들지 않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자고.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요?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에는 여기에서 완전히 탈락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내 신앙생활은 잘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천국에 갈 것인가, 가지 못할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구원에 합당하지 않으면, 비록 구원은 받았지만 천국에 갈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Are you saved?"라고 물으면 "Yes, I am."이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천국에 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만약 내가 배반했다면,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이죠.
성경에는 이러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빌립보서 1장에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이 있으며, 사도행전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원이 제공되었지만, 합당하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2].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구원의 복음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가르치신다고 합니다[3]. 그 목적은 바로 우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삼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너희가 은혜를 받은 것에 근거하여 합당하게 생활하도록 하기 위함[4]’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5].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은혜를 맺지 않고 엉겅퀴나 가시 같은 것만 내면, 그는 합당하지 않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었다! 구원받았다! 끝! 천국 간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퍼졌던 ‘예수 천당’, ‘믿음 천당’하는 식으로 표현을 간소화해서 어떤 수식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본질을 간과한 채 신앙을 너무 쉽게 설명하는 그런 것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어떤 문제가 있냐면, 이 제도 안에 있기만 하면 모두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틀림없이 천국에 간다’고 믿는 것이죠. 지도자들도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성도들은 ‘아, 나는 아무 문제없이 천국 가는 길을 가고 있나 보다’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많은 내용을 다룰 수 없으니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죄로 물든 내가 나 자신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가망 없음을 깨닫고 주 앞에 나아가 사죄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용서받았다고 해서 "와! 깨끗해졌다!" 하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회생불가한 상태입니다. "나는 정말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망 없는 우리의 상황은 각자가 더 잘 알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중적인 존재입니까?
물론 모든 사람이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제를 하고 자기 양심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양심이고 뭐고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어차피 사람은 양심이 있어도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고 망하게 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을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수 있으니까. 주의 십자가는 회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Not guilty!" 하고 우리를 그저 ‘쫙!’ 하고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에 대한 찔림을 느끼고, 회개하며 사는 사람들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죄의 무게를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교회를 더욱 사랑합니다. 자신의 삶도 바쁘고 평탄하지 않으며, 어려움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사랑합니다.
세상 사람 같으면 교회고 뭐고 다 등지고 ‘나나 살고 봐야겠다, 내 가정이나 지켜야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를 위해 자신의 넉넉지 않은 삶을 나눕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어렵지만 헌금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할까요? 회개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데 대해서 건강한 채소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말이죠. 그러나 반대로, "나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쉽게 생각하고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사람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은혜는 받았지만, 그 이후의 삶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집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어린 영혼들도 있습니다. 여기 중등부도 있고 고등부도 있는데, 제 마음은 우리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씹고 먹어야 할 양식을 주지만, 저 영혼들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인생의 길을 갈 때 ‘어? 그때 그 말씀이 생각난다!’라고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본질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지금 이 말씀이 씨앗이 되어서 그때 그 영혼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 영혼들이 신앙의 길이 잘 수호되기를, 잘 보호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에 대한 기준이 잘못 들어가고, 이해가 잘못되면 단순히 인생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삶(lifetime)을 잃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지옥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죠. 분명 교회를 괴롭혀서 얻을 이득도 없는데,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래 교회에 빨대를 꽂아서 계속 빨아먹으려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니 괴롭히는 것이죠. 오랜 시간 동안 교회를 상대로 그런 계획을 세우고, 교회의 옆구리에 빨대를 꽂고 끊임없이 빨아먹으려고 그러는데, 지금도 그런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죽어라 괴롭히는 이들이 있고, 거기에 동조하여 함께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신앙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천국에 간다.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말은 부흥회에서 어떤 말씀을 하고서 큰 골자로서 하나의 결론을 맺을 때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는, 이때부터는 자기 믿음을 수호하는 고난의 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심하게 고생해야 합니다. 남들이 나를 괴롭히고, 불신앙이 나를 유혹하며, 나는 오해를 받고, 신앙생활이 힘들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 속한 삶도 살아야 하니, 수많은 고난이 따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삶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괴롭힘을 받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지금 큰 고난을 겪고 있지 않습니다. 아직 종교적인 탄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신앙생활이 매우 힘듭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서 깨끗한 삶, 이런 행동 안 하고, 저런 행동 안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서 내 양심이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나라를 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부분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을 기쁘게 할까?’라고 고민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방식대로 주님을 기쁘게 하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계속 교회에 다니고 있고,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런데 왜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확신할까요?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고, 헌금을 내고, 교회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으니 ‘봐요, 나 괜찮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괜찮은 걸까요? ‘I’m okay’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함께 있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우리는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받지 못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것은 심판자가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올라오라” 부르시면 올라갈 것이고, 부르시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자세하게 천국에 합당한 자세의 범위를 알려주신다면, 사람들은 아마 시험 공부하듯 할 것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벼락치기를 해서 잘할 것입니다. "봐요, 봐요! 난 천국 갈 수 있죠? 여기 천국증~!" 이렇게 하고서 천국 간다 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심으로 주께 회개하고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천국에 합당한 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천주교가 기독교를 품고 오랫동안 인도해 왔는데 겉모습만 있을 뿐 속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에도 이러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인 모습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배하는 모습을 보니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예배당에서는 예배하는 시간에 그냥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참여했잖아! 나 여기 있잖아! 나 참석했어!" 하지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의 예배는 그저 그 시간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양분을 공급받는 시간, 주님과 함께 서로 화답하며 기뻐하고 찬양하고 주게 영광 돌리는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믿는 환경 속에 있다고 해도 그런 환경 속에 있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6]. 여기서 ‘영’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것, 비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말하면, 부분적으로 도덕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신령한 것이라고 합니다. 진실하고, 거룩하고, 참된 것.
그리고 ‘진리’란 거짓의 반대가 진리입니다. 어떤 영적인 이론을 잘 갖춘다고 해서, 그 이론을 기반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성경을 많이 공부했고, 영적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날 받으소서!"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오냐오냐~”하고 기뻐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자, 참된 예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보면서 거짓된 자들에 대해 많이 보았습니다. 양심을 속이는 것이 거짓된 것입니다. 신앙이 크다고 해서, 신앙적인 행위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괴롭히고, 미워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의 루틴만 유지할 뿐 정작 교회를 아프게 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가끔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봅니다. 진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어떤 목적을 위해서, 어떤 이념에 근거해서 말합니다. 거짓의 의도가 있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도 자연스럽게 합니다. 이것은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을 보면 ‘양심’에 대해 나옵니다[7].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때로는 믿는 사람보다 더 나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심이 그들 가운데 말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그들의 회개에 더 가깝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들은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서는 오히려 믿는다 하면서 양심 없는 자들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양심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누구를 때리려고 “에잇!” 하고 손을 들었다가도 ‘아이,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지 말자.’ 결국 그는 손을 거두고 말합니다. "미안해요. 잘 가요. 내가 그렇게 하려던 거 미안해요." 이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상대적으로 예수를 믿지만 "에잇!" 하고 사람을 때리고 "아프지? 신난다~!" 하는 사람보다는 착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해 보자면, "난 예수 믿어." 하면서 손찌검을 하는 사람보다 예수를 믿지 않지만, 때리지 않는 사람이 낫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큰 부분을 대신해 줍니다. 그래서 양심으로 깨끗게 되는 것이죠. 히브리서에서도 여러 번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8]. 이제는 양심이 하나님께로 다가가서 양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다르게 이해합니다. "신앙이란 건 비밀을 알아야 해! 이건 영성의 문제야!" 그러면서 신앙을 영적이라 하면서 허공에 떠 다닌다든지, 어떤 지식만 갖추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이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진리의 핵심이 지식에 있으니까 그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영’이 중요하니까 비물질적인 것만 잘 알고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인은 증발돼 버립니다. 의인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의라는 것은 용서받은 데 대한 진심 어린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자신을 속이지 않고, 부족함과 죄에 빠진 심령을 돌이키며, 이를 억누르고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는 것입니다. 평생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 참회기도를 합니다. 참회기도가 어느 때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좋게 생각했습니다. ‘참회기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정말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할 때 보면, “뭘 해 주시고, 뭘 해 주시고…” 이런 간구가 많습니다. 물론 목사님들이 기도를 인도하려다 보면 쉽지 않습니다. 여기 강단에 올라와서 기도 인도하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일반 성도들이 올라오면 부들부들 떨 정도입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다리는 마치 탱고를 추는 것처럼 떨립니다.
그래서 목사님들께서는 성도들의 기도가 뜨겁게 이어지도록 기도를 인도해야 되기 때문에 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참회기도의 핵심은 결국 ‘나 같은 자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봐도 주님께서 나를 용납하시는 것이 가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용납하여 주옵소서.”
우리 성락교인 모두가 참회 기도할 때 그렇게 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주 앞에 나타날 때 주께서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한 우리를 받아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고, 저는 그런 자들을 주께서 반드시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나는 지식이 많다, 영적 지식이 풍부하다”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태의 모든 것이 거짓으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다른 것은 다 해도 된다, 이미 구원은 확보됐으니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 하는 식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영혼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치 않고, 부르신 삶에도 합당치 않고, 천국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평생을 주님 앞에 회개하는 우리 성락인 여러분 되시길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의 진실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을 섬길까요? 주께 죄송하고 또 감사한 마음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고백이 평생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내 행실이 잘났느냐, 못났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지식이 많으니 합당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영, 진리, 지식’이라고 비약하여 억지로 연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 어떤 자의 예배를 받으실까요? “나는 영이 충만하고, 지식이 많으며, 이런 이론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 너는 자격이 있으니 예배하러 와라”라고 하실까요? 아니죠. 오히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참된 것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참되시고, 진실하심을 나는 사랑합니다. 내 안의 더러움과 거짓이 나를 지배하고 끌고가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싫습니다. 저는 주님의 진실함이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믿으시는 분들은 ‘아멘’ 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어떤 사람이 “아, 내가 구원받았는데, 교회가 나한테 나쁜 짓을 하네?” 하면서 교회를 계속 고발하고, 또 고발하고, 또 고발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는데 왜 손을 안 쓰시오? 당신, 이상한데? 상급 법원에다가 고발해야 되겠는데?”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영이 망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지 않았고, 비도덕적이며, 양심을 완전히 버린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이 정도만 함께 나누어도, 나는 오늘 저녁에 죽는다 해도 이 말씀에 의해 내 피값을 청구받아야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께 우리 하나님의 심정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기준으로 삼아,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더러운 사단의 거짓 증거를 거절하고 밀쳐낼 수 있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구원해 주신 주님께 합당하고, 부르신 주님께 합당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면 그 나라를 위해 이 땅에서 온 힘을 다해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목사는 싫지만, 내 하나님만 믿겠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래.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마. 내 욕심대로 살고, 내 특권을 다 누리며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가증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을 주어도 나쁜 열매를 맺을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위해 죽기로 작정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한 식구로서, 한 몸으로서, 이 땅의 소망을 버리고 더 많은 기회가 있다 해도 영생을 위해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주님께서 보시는 거울과 같습니다. 내가 아무리 주님을 속이려 해도 주님께서 속으시겠습니까? 내가 교회에서 의롭다 한들, 주님이 속으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법정은 잘 속았습니다. 거짓을 쉽게 믿기도 하고, 때로는 진실을 배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억울한 일도 많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본질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 앞에 깨끗한 양심으로 다가가 거룩한 주님의 몸을 이루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신앙생활이 변질되지 않고, 실패하지 않도록 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 합당한 자로 여겨지고, 주님께 받아들여지며, 주님께서 기쁨으로 우리를 견인해 가시는 거룩한 영혼들, 회개한 영혼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내 영혼을 맡아 주옵소서. 나는 주님 없이는 아무 가망도 없습니다. 내 영혼을 맡아 주시옵소서. 내 영혼을 도와주시옵소서. 내 영혼에 참된 회개의 뜨거움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성령의 뜨거운 열기로 나를 새롭게 하시고, 진정한 회개로 나아갈 수 있는 내 인생 최고의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의 회개가 온전케 하여 주시옵소서.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을 도와주시고, 감동해 주시고, 또 새로운 용기를 주시고, 또 영감을 주셔서 이제부턴 더욱더 정말 주의 나라에 이르기에 합당해 가는, 늘 변화돼 가는 우리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은혜 받은 심령, 은혜를 헛되이 낭비하고 소멸하지 않고, 주신 은혜를 온전히 옳게 반응하여 마음의 변화, 자세의 변화, 영원한 나라를 위한 진정한 그 섬김의 자세로 바꿔지는 우리 모든 성도가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약점이 있고 한계가 있을지라도 주님께 매일 더 진실하게 나아가는, 정말 사랑함으로 진실한 변화로 마음으로 사랑하고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 다 되게 하시고, 영과 진리로 주님을 모시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2]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3]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 2:11~12)
[4]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살후 1:5)
[5]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
[6]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7]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8]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출처] 20250309 천국에 합당해 가는 삶(데살로니가후서 1:5)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감독|작성자 태초에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