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령의 명작산책
/이미령 지음
내 인생을 살찌운 행복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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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생명의 숨소리를 듣다
07. 알래스카가 들려주는 자연의 이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 호시노 미치오
중학생 남자아이 하나가 어느 날 물었습니다.
“산이나 바다 같은 그런 ‘자연’이랑
‘자연스럽게’라고 할 때의 ‘자연’은
말이 똑같잖아요.
그럼 이 두‘자연’은 같은 건가요?”
같은 말이라는 나의 대답에
녀석이 신기한 표정입니다.
그 얼굴을 바라보자니
우리가 자연을
얼마나 자연스럽지 않게 받아들이고
얼마나 자연스럽지 않게 대하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이치란 어떤 것일까요?
자연은 정의롭지도 않고,
고상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은 의지가 없습니다.
속된 말로 자연은 그저 제 생긴 대로
그냥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그런 자연을 가지고 인간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면서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느니,
자연으로 돌아가라느니 외쳐댑니다.
정말 자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잘 모른 채
제 방식대로 자연을 규정짓고
말로만 자연을 숭배하는 것도
도시인들의 무지와 교만이 아닐까 합니다.
1977년 겨울 일본 청년 호시노 미치오는
알래스카로 향합니다.
오래전 일본 동경의 한 헌책방에서
알래스카의 어느 마을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넋을 빼앗기고 말았는데
그게 계기가 된 것입니다.
청년은 그 사진 속 마을이라
짐작되는 곳의 마을 추장 앞으로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즈음 답장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을 떠나
1977년 겨울 미국 시애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 알래스카행을 준비합니다.
문명세계를 등지는
젊은 남자의 속마음이 어떨까요?
그는 출발날짜가 확정되었을 때
마침 아주 후진 변두리 재즈클럽에서
덱스터 고든이라는
테너색소폰 주자의 연주가 있음을 알게 되고,
공연을 보기 위해 출발을 연기합니다.
그리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재즈클럽의 화장실에서
덱스터 고든과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고난 뒤에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는 마침내 온통 겨울뿐인,
몹시 추울 때는 영하 60도를 훌쩍 넘는
그 새하얀 고장에서 짐을 풀게 됩니다.
사진작가인 그는 알래스카에 정착한 뒤
그곳의 풍광과 야생동물,
알래스카 사람들의 사진을 찍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과 글을 통해서
거친 눈보라와 야생동물들과
부대끼며 터득해가는
자연의 생리를 세상에 들려줍니다.
자연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에
의외성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자연은 정말 그렇게 교과서대로 움직일까?
의외로
우연성이 지배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자연은
약한 자까지도 포용해버리는
넉넉한 품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들려주는
새틀라이트 무스 이야기를 볼까요?
알래스카의 가을은
무스(moose, 사슴과 동물)의 번식기입니다.
수컷 한 마리가 암컷 무리를 거느리고 사는데,
암컷이 수컷을 받아들이는 때는
번식기 끝 무렵의 아주 짧은 시간이라고 합니다.
수컷은 교미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수컷들을 물리쳐야 하고
또 많은 암컷들과 짧은 시간에
힘겹게 번식의 사명을 치르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합니다.
이 시기에만
체중의 약20퍼센트를 잃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번식에 성공하고 살아남으니
과연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자손을 남긴다는
자연의 이치 앞에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새틀라이트 무스’라는 녀석이 있습니다.
평소 너무 약해서 싸움 상대도 되지 못하는
별 볼 일 없는 수컷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언제나
암컷들 주변을 빙빙 돌다가
수컷 두 마리가 영역을 놓고
뿔을 부딪치며 싸우는 사이에
슬쩍 암컷 무리로 들어와 교미를 해버린 뒤
영역을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적자생존이 자연의 이치라고 하지만
새틀라이트 무스가 보여주는
절묘한 생존의 법칙을 보자니
약육강식이니 적자생존이니 하며
자연을 규정짓던 말들이
말장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알래스카의 자연을 보고하는
호시노 미치오의 글과 사진은
<카리부의 여행을 찾아서>
라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카리부는 얼핏 보아 순록처럼 생겼습니다.
남쪽 삼림지대에서 월동한 뒤에
수십 마리,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1000킬로미터나 되는 여로를 거쳐
북극권으로 모여듭니다.
이곳에서 새끼를 낳은 뒤에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북극의 들판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남쪽으로 여행길에 오른다고 합니다.
한 해를 그렇게 순환하며 살아가는
동물의 이동행로를 찾아서
사진에 담고 싶었던 미치오는
그들이 기적처럼 불쑥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두 달 정도 고립지대에서 홀로 지냅니다.
그가 무리지어 이동하는 카리부를
이렇게 고대하게 된 것은
어느 해인가 한밤중에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동물 수천수만 마리의 발소리를 듣고
그들을 목격한 뒤입니다.
그 태고의 짜릿한 감동에 전율한 뒤로
해마다 카리부의 행렬을 만나기를
원하게 된 것이지요.
7월의 어느 날 오후,
수만 마리의 카리부가
서로를 부르는 화음에 세상이 울리더니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관을 목격하게 된
호시노미치오는 몸이 달아오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멋진 광경을 렌즈에 담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니
입안이 바싹 말라갑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조바심을 태우며 사방을 두리번거립니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촬영을 포기합니다.
카메라를 내던지고 맙니다.
언젠가는
거짓말 같은 전설이 될지도 모르는
이 광경을 내 기억 속에 남겨두고 싶었다.
시야는 온통 카리부의 바다였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혹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위하여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그 바다 속에서
수만 마리의 카리부가 울려내는 발굽소리에
그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알래스카를 사랑한 호시노 미치오는
1996년8월8일 쿠릴 호반에서 잠을 자던 중
불곰의 습격을 받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책 속에는
누가 곰의 습격을 받았다거나
곰과 마주쳤다는 이야기가 간혹 등장하는데
이것이 그의 운명이 될 줄 어찌 알았을까요.
도시와 자본과
기계문명을 떠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알래스카의 자연을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어 하던 그는
그 마지막조차도 야생의 자연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런 마침표를 찍습니다.
자연은 참 아름답습니다.
적어도 사진작가의 사진 속에서는….
하지만 실제로
내가 몸으로 만나고 부딪치는 자연은
그리 친절하거나 곰살맞지는 않습니다.
자연은 정직하고 또 유순합니다.
자연은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저 담담히 법칙을 따를 뿐입니다.
자연재해란 것은
인간에게 분노한 자연의 복수가 아닙니다.
늘 그래왔던 상궤이고,
인간의 행위 끝에 따라붙는 자연스런 결과요,
당연한 귀결입니다.
지금 알래스카는 알코올 중독이니,
개발이니 하는 문제를 앓고 있다고 하지요.
자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이
알래스카를
현대 도시문명의 질병 속으로
몰아넣은 건 아닌가 합니다.
어서 현명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해답대로
순순히 인간들이 따라가 주지 않는다면
호시노 미치오의 책 속에 담겨 있는
이 마술 같은 풍광은
머지않아 전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습하고 탁한 이 한국의 대기 속에서
어느 하루 호시노 미치오의 책을 만난 나는
알래스카의 시퍼런 생기에
가슴앓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다 나도
그처럼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오래된 재즈가스의 연주를 들은 뒤
얼음의 나라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더럭 겁이 나서 부랴부랴 책을 덮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