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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9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루카 7,36-50
많이 용서받아서 많이 사랑한다면, 많이 사랑받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사이는 한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뿌리고 머리로 닦는 등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덜 탕감받은 사람보다 탕감해준 사람을 더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법칙대로라면 죄를 많이 지어서 더 많은 죄를 탕감받아야만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면에서 특별한 죄를 짓지 않은 바리사이인 시몬은 억울합니다.
사실 모태 신앙인이어서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기가 그리 어려운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랑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많이 사랑받으려면 많이 용서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이 용서받지 못하면 많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사회복지법인 들꽃마을 창설자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는데 헌신했던 최영배 신부(천주교 대구대교구 들꽃마을 후원회 전담)가 2024년 5월 20일 병환으로 선종하셨습니다.
최 신부는 생전 ‘부랑인의 대부’, ‘장애인의 벗’으로 불렸고 40년 가까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리스도의 사명을 몸소 실천했던 ‘천사 같은 사제’였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들과 장애인들과 범죄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마음이 커야 합니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을 참아낼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신부님께 어떤 자매님이 찾아왔습니다. 천사처럼 사는 분이라 성당에서도 천사란 별명을
지닌 분이신데, 요즘에 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10년 전 자기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그것을 떼어먹고 미국으로 도망쳤던 사람을 10년 만에 길가에서 보고는 온몸이 마비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자신은 천사라 다 용서하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런 나쁜 마음이
생겨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신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사람 모든 마음에 악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에 가라앉아 있는 오물과 같아서
그 물병이 쓰러지기만 하면 병 안의 모든 물을 더럽힙니다.
자매님이 천사로 불렸던 것은 지금까지 그 오물이 가라앉아 있기만 했을 뿐입니다.”
또 어느 날 한 남자분이 외도하다가 들켜서 간통죄로 6개월을 복역하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용서해주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밭에서 둘이 함께 일하고 있는데 천사처럼 아름답게 꾸민 자매가 잠깐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고 내려오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는 얼굴이 마귀처럼 변하여 욕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자기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서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않았는데 이런 창피한 고통을 준다고
빨리 이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교사였는데 어떻게 교사 입에서 그런 말과 표정이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남편은 기가 죽어서 계속 무릎을 꿇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눈에는 그 자매가 마귀처럼 보였고 형제가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받아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받지 못했다면 용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부님이 신학생 때 직접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당신도 신학교에 늦게 들어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도 도와주는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기도 중 가슴 속에서 수많은 구더기가 돌아다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들이 당신 안에 잠재되어있던 죄들이었음을 알고는 5년 동안 밤마다 방에서 울었습니다.
5년이 지난 뒤에야 그것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몸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서품받고 첫 미사 때 바로 교도소로 달려가셨습니다.
남자 4백 명, 여자 2백 명이 넘는 복역자들에게 자신도 똑같은 죄인인데 자신은 들키지만 않았을 뿐, 그래서 천사처럼 제의를 입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들켜서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차이밖에는 없는데, 이렇게 고생하고 계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시며 사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미사는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고 모든 분이 신부님과 함께 울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교만, 성욕, 욕심이라는 세 가지 죄를 누구나 다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는 그것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고 누구는 터뜨릴 뿐이지, 같은 죄를 지닌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기 위해 용서받읍시다.
나의 죄를 볼 수 있는 눈을 주님께 청합시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저도 제가 바리사이였지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한 마디로 무너졌습니다.
그분의 사랑에 한순간이라도 감사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죄입니다.
자녀를 부모만큼 용서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부모처럼 사랑받기 위해 모든 이를 자녀처럼 용서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9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7,36-5
이 깊은 상처가 때로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상처나 흠결, 과오나 흑역사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때로 그 흠결이나 과오가 너무 깊고 커서 걱정합니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내가 과연 주님 나라에 합당하기나 할까?
그런데 요즘 와서 드는 생각,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난 우리 삶 안에서 너무나 깊이 아로새겨져 문신처럼 사라지지 않은 상처가 때로 약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처는 나의 결핍과 약점을 상기시키기에 나를 거만하지 않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 나를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랜 세월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온 한 가련한 여인, 상처로 인해 늘 아파하고 갈등하고 한평생 주눅 들어 살아온 한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 너무도 당당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실이 나빴던 여인으로 지칭되는 그 여인은 오랜 방황과 악순환의 세월을 접어보겠다고 그토록 노력했지만 항상 그때뿐이었습니다.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은 어느새 과거의 비참함에로 떨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왔습니다.
여인의 머릿속에 늘 잠재되어 있던 큰 걱정거리는 이것이었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내가 변화될 수 있으려나?
죽을 때 까지 계속 이렇게 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토록 불가능해 보이던 여인의 회개는 결국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오랜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그녀의 쓰라린 상처를 당신 자비로 아물게 하십니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인해 지난 세월의 모든 상처를 완전히 치유 받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마웠던 여인은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건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예수님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이 어떤 것인지 찾아봅니다.
향유가 든 옥합이었습니다.
당시 꽤 값나가던 물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여인에게 있어 전 재산과 다름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향유를 가져온 여인은 회개의 표시로 예수님 발치에 서서 울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회개가 얼마나 절실했으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다 적셨습니다.
그 눈물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냅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마음은 지상 최고의 봉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봉사는 더이상 극진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었으며 용감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이렇게 행동 양식이 달라집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위주로, 이타적으로 변화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됩니다.
오늘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된 여인을 바라보면서 저 역시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 역시 누구나 여인 못지않은 ‘변화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참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토록 비참한 국면을 결정적으로 반전시킬 전환기가 찾아오리라고 확신하면서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매일 망가지고 깨져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다시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기뻐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강론>
(2024. 9. 19. 목)(루카 7,36-50)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48-50)”
1) 47절의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여자는 큰 사랑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감사’를 뜻하기도 하고, ‘회개’를
뜻하기도 하는데, ‘회개’ 쪽이 더 비중이 큽니다.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로 번역하면,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회개한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큰 사랑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로 번역하면, “크게 회개했기 때문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용서가 먼저인가? 회개가 먼저인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교리대로 말하면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이고,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진심으로 회개하기 전에는 이미 주어져 있는 용서의 은총을 실감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회개할 때 비로소 그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용서받고 싶으면 회개해라.”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됩니다.
2) 어떻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용서’로 드러나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한 회개’로 드러납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나도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다.” 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응답하는 방법도 회개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도 회개입니다.
<회개 없이는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나는 죄가 없으니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회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 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죄가 없다면 용서를 청할 일이 없을 것이고,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면 거짓 기도가 됩니다.
주님의 기도에 용서를 청하는 기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일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기 때문에,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십자가 은총에서 자기 자신을 제외시키는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속 사업을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 되어버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3) 47절의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과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만 보면, 주님의 용서에 차별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용서의 은총’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집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차별과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용서로 드러나는 주님의 사랑에도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한다.(믿는다.)”로,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은,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믿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똑같은 은총이 주어져도, 사람에 따라서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지은 죄가 크거나 작거나, 또는 많거나 적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용서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깊이 감사드리고 더욱더 회개하는 생활을 할 것이고,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감사드리고, 그만큼 회개도 적게 할 것이고, 안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드리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주님께 서운하다고 항의하거나 불평할 것입니다.
<그런 차이는 왜 생길까? 신심의 차이일까?
수양의 차이일까? 성품의 차이일까? 알 수 없습니다.>
4) 온 세상에 똑같이 밝은 햇빛이 비쳐도 해를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해를 등지고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는 인정하지 않고, 햇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어둡기만 하다고, 그림자밖에 안 보인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햇빛을 받고 싶다면 해를 향해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처럼 ‘주님을 향해서’(또는 ‘주님의 사랑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 돌아선 다음에는 자만하지 않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