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돌아가던 센위에게 여유가 생긴 것은
톈진에 온지 두 달쯤 지나서였다.
내무부와의 갈등을 하소연하는 센위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산물이야.
섣불리 건드렸다간 오히려 동티 나.”
사석의 우리는 반말을 쓴다.
처음에 높임 말을 썼다 한바탕 혼찌검이 난 나는
어마 뜨거라 예전 말투로 돌아갔다.
“하지만 무려 8만 달러라구.”
여전히 분한 기색이었다.
“게다가 태후마마 하사금이고.
그런 돈까지 꿀꺽할 정도면 뭔 짓인들 못 하겠어?"
화석공주의 품위를 벗어던진 따꺼가 씩씩 댔다.
이제 보니 제법 곱상한 여자 티도 난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껄렁껄렁한 모습이 더 반가웠던 나는
전처럼 편하게 말했다.
“먹이사슬은 곧 세상의 위계질서야.
그걸 바꾸는 건 세상을 바꾸는 거고.
당연히 만만찮지.
양무운동이 부진한 것도 다 그래서일 거야.
역성혁명으로 판이라도 확 바뀌지 않는 한 어려워.
하지만 우리 마마께서 그 사슬을 끊고 싶다면야...
뭐 어쩌겠어. 해내야지.”
남루한 현실을 얼버무리며 농담조로 말했지만
따꺼는 진지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나는 농담기를 지우고 말했다.
“자원 봉사자와 기부금으로 돌아가는 구빈원은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모든 일은 관부와 얽히기 마련이야.
그러니 먹이사슬의 토양은 결국 이권이지.
그딴 걸 줄이거나 없애면....”
“저들이 나댈 기회도 사라진다...?”
“내관의 소임은 만세야 수발과 의식주 관리야.
그 모두가 남자 황제를 전제로 생긴 건데... 이젠 태후시대잖아.
한직도 많을 걸. 이를테면 규방을 다루는 경사방 같은 곳.”
“하지만... 일단 차지한 밥그릇을 어떻게... ?”
“걱정 마. 나도 베이징으로 같이 갈게.
이참에 떨거지들을 확 줄여 밥값을 해야지.”
병사들과 구르던 거친 기세를 드러내자
센위의 눈이 대뜸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태후 하사금까지 손대는 내관부의 횡포를 안
짜이펑 학장은 분개했다.
센위가 태후의 은밀한 지시를 전하자 바로 지원을 약속했다.
나는 하사관 과정과 상급생도로 1영을 편성했다.
따꺼 시절의 화석공주를 아는 생도들은
친위대 선발을 반겼다.
내관부 정비계획은 베이징 바깥에서 조용히 진행되어갔다.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궁에서
평생을 보낸 태후다운 신중한 방식이었다.
평양에서 톈진까지 시공을 건너뛴 환경에
적응하기 바빴던 내게는 아직 전생의 습관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톈진에 정착하면서 서서히 바뀌어갔다.
무비학당의 푸릇푸릇한 청춘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닮아갔다.
그건 바람직한 일이었다.
현지적응을 위해 경석 대신에 진津이라는 중국이름도 만들었다.
하늘 나루,
톈진에서 따온 글자였다.
젊어진 눈에 비친 세상은 풍요롭기 짝이 없었다.
당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도 보였다.
한 시대를 앞서 살아본 내게
이 땅은 가능성이 넘실대는 보물섬이었다.
덕국 공사관의 무관 알프레드 폰 발터는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청나라를 오지근무로 여겨 귀국 날자만 손꼽아 기다리는 동료들과 달리
동양문화에 심취한 그는 중국어를 배웠다.
짜이펑 학장을 비롯한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중국을 이해하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중국통이 되어갔고
톈진의 외교관들은 현지인과 얽힌 문제가 생기면 그의 자문을 구하곤 했다.
나는 이따금씩 무비학당을 찾는 그의 통역을 맡으면서
친분이 생겼다. 알프레드 역시 내게 관심을 드러냈다.
동방의 작은 나라 역관인 내가 유럽정세에 밝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건 굳이 정체성을 감출 필요가 없는 상대였기에 터놓고 상대한 결과였다.
그는 또한 화석공주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공주가 오면서 무비학당을 찾는 빈도는 부쩍 늘었고
공주의 자금성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차츰 친분이 두터워진 어느 날
나는 내관부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알프레드가 말했다.
“불우한 처지이지만 돈은 많은 태감과
유럽의 유대인은 닮은 꼴이야.”
구구한 설명은 일체 생략한 화법.
내가 유럽역사에 해박함을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환관들 중에는 재력가도 많다 들었어.
재산을 땅과 창고 속에 간직하겠지.
투자하면 재산도 늘고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을 텐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직은 상업이 천시되는 시대였기에
꽤 진보적인 발언이었다.
“이 나라는 아직 기업이라는 걸 몰라.
아는 건 그저 돈놀이 정도지.
전장錢莊과 은호銀號들의 상당수는 환관들이 주인이네.
그건 외교관들도 마찬가지야.
영토할양, 철도부설권 같은 굵직굵직한 이권에만 주목할 뿐
기업에는 관심이 적어.
매판을 통해 겨우 소개되는 단계지.“
다음 순간 나는 유대인이라는 말에 담긴 힌트를 깨달았다.
태후는 내관부를 압박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유대인 마녀사냥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나는 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촉발된 시오니즘 운동이
결국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그들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조차도 극복했다.
뿌리 깊은 집단을 강경책만으로 상대하기는 어렵다.
근본대책이 없는 한 개혁은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이다.
그렇다면...?
힘으로만 누를 게 아니라 숨 쉴 구멍 즉 퇴로를 열어주어야 한다.
자금성의 내관은 3천여 명에 달한다.
궁 밖 식솔과 은퇴자들까지 따지면 아마 열 배도 넘으리라.
그들을 외통수로 몰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는
그 누구도 짐작키 어렵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나름의 특권을 누려온 생태계를 흔들면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것만은 분명했다.
구빈원이라는 온건책이 의화권 무리들을 포용했듯이
이들의 부패를 처벌하는 한편 납득할 만한 대책을 제시해
희망도 주어야 했다.
이들은 의화권 무리들에 선동된 군중과는 달랐다.
전국의 전장과 은호들을 좌지우지 하는 자들이다.
이 시대는 상업을 천시한다.
저들에게 기업을 열게 하면...?
신분에 걸 맞는 천한 일거리를 주는 셈이니
사회적 거부반응도 적을 것이다.
훗날, 둥베이 발전의 모태가 되는
기업집단의 씨앗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센위도 무작정 해고라는 강경책보다는 내 의견에 찬성했다.
비판적인 나와 알프레드에 맞서 그들을 변호하기도 했다.
“그들이라고 좋은 면이 없는 건 아냐.
그들은 임무에 충실해. 훔치지 않고 나름의 자비심도 있어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려해.
출입 상인에게 가격을 두고 시비하지도 않아.
상인들은 값을 물으면
『따예 大爺(노인에 대한 경어)께서 알아서 주십시오.』하지.
그러면 거스름돈도 안 받아.
부유한 그들은 씀씀이에 구애받지 않거든.“
알프레드와 나는 환관과 황궁 문화에 대한 토론을 수시로 벌였다.
그 과정에서 환관이야말로
유서 깊은 황궁 문화의 지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지켜온 문화의 가치와 아름다움 또한 깨달았다.
이윽고 우리의 토론 주제는 그것들을 유지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수천 년 이어온 문화 지킴이들의 전문성을 오늘에 되살리는 방법,
일단 관점을 바꾸고 바라본 황궁은
비즈니스 아이템의 보고였다.
집기, 비품이나 보물을 다루는 어용감御用監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원형이고 대학 설립의 자원이었다.
의복담당 상의감이나
환관들의 모자, 신발을 다루는 건모국巾帽局,
옷 만드는 침공국,
비단 염색 담당 내직염국 등은
숱한 명품 브랜드를 품은 패션산업의 기반이었다.
종루와 음악을 관장하는 종고사는
예술자원이고
인수감, 문연각文渊阁은 도서관과
출판업의 자원이었다.
궁녀들과 황실 여인들이 사용하는 화장품과 미용술은
민간 여성들이 꿈에도 그리는 귀한 상품이 될 것이었다.
문제는 이 엄청난 자원들의 상품화였다.
제 아무리 좋은 물건도
상품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알프레드에게는 시인의 자질이 있었다.
홈스펀 자켓을 걸치고
느긋이 벽난로 앞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며
유서 깊은 문화, 시대의 잔영 속에서 부대끼는 군상의 모습을
기이하리만큼 정교하게 묘사하곤 했다.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그리움.
내려앉지 못하고 흩날리는 것들의 모습을
풍경화처럼 그려내는 그의 표현은
아름다웠다.
황실문화를 찬양하는 모습은
인문학 강론을 펼치는 학자의 풍모 그대로였다.
그는 황실문화의 민간전승에
덕국의 장인제도 도입을 구상하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황궁문화의 전파와 환관들의 생계수단 사이에서 오갔다.
하루는 도서관 사업을 논했었다.
황실의 희귀자료들은 서고에서 썩어가고 있다.
이를 공개하면 출판문화가 활성화되고
동양문화의 정수를 열강에 과시할 수 있다.
나는 탄광개발과 난방 사업을 제시했다.
문제는 개발 후보지가 대부분 둥베이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평생을 자금성과 베이징에서 지낸 이들이
그 머나먼 곳으로 가려 하겠는가?
살아온 환경이나 그들의 나이로 미루어
살아온 터전을 벗어나지 않으려 할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방직공장을 제시했다.
산업혁명에 뒤진 덕국은 영국을 맹추격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후발주자이지만 방직기술은 영국보다 앞선 나라가 덕국이다.
공장 건설에는 자본이 필요하다.
환관들이 자본가로 참여하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경공업의 선두주자로
시장성이 유망한 산업이 방직공장이라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황궁문화 아이템의 사업화는 방직공장 성공 후에 검토하기로 했다.
어느덧 우리는 신규사업 추진팀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톈진 당국 설득에 나섰다.
관내에 공장이 생기면 일자리가 생기고 세금도 늘어난다.
공단설립의 이점을 깨달은 관리들은
공장 부지를 지원하겠노라 했다.
이를 근거로 덕국 공사관에 방직기술 도입을 제안하고
화석공주와 자이펑 학장이 보증하자 일은 빠르게 진전되었다.
공장부지와 장비, 기술도입이 윤곽을 갖추자
톈진 방직공업 주식회사 설립 제안서를 준비했다.
자금성의 환관들에게 설명할 출자 제안서였다.
옷감이 귀한 중국에서 면직물은 언제나 품귀상태다.
수입은 제약이 많고 가내 수공업 수준인 국산품은
워낙 생산량이 적었다.
제대로만 만들면 파는 건 땅 짚고 헤엄치기인 시장이었다.
알프레드와 나는 덕국 공사관을 통해 기술도입계약을 진행하는 한편
주주가 될 태감들의 일자리도 마련했다.
출궁대상 태감들 중 조직관리나 회계지식이 있는 인재를 선발했다.
출궁 사유가 꼭 늙어서만은 아니었다.
황궁 적응이 어렵거나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다.
선발한 3명 중 두 명은 20대였는데 윗전의 비위를 거슬러 쫓겨난 경우였다.
농촌 출신인 왕이는 어릴 때 개에게 고환을 물려 고자가 되었다.
곱상하게 생긴 아삼은 집이 가난해 어릴 때 팔려갔는데 바
로 거세당해 입궁했다.
성품이 곧아 미움 살 인품은 아닌데 쫓겨났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연영은 더 이상 묻지 말라고만 했다.
아마도 문제는 이들이 아니라 쫓아낸 윗전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한 명은 40대의 장년이라는데
겉보기로는 60줄 노인이었다.
이연영은 그가 조직관리의 달인이니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는 말라고 했다.
나는 전생의 회사경험을 살려 조직 관리부터 설명했다.
기술문서는 영어와 독일어일 수밖에 없어
아라비아 숫자와 알파벳도 가르쳤다.
해석은 못해도 단어 정도는 읽어야하니 불가피했다.
공장운영은 독일 기술자들이 하겠지만
이들의 생활지원은 우리 몫.
직공을 뽑고 관리하는 일 역시 우리 몫.
우선 백 명 정도로 할 예정이지만
공장이 커져도 될 수 있도록 꼼꼼한 준비가 필요했다.
공장은 이미 건설 중이지만
장비도착까지는 1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원료확보와 판매대리점 선발, 협력업체 정비 등 준비할 일은 많았다.
나는 창업 준비에 5.5단을 동원했다.
인기상품인 면직물 공장은 도둑들의 표적이 될 것이었다.
경비업무를 무비학당 생도들에 맡긴다면
현장훈련이 될 것이니 서로가 좋은 일이었다.
방직공장이 내는 경비 대금은 5.5단 비용으로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