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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중에서 발췌한 글
- 소걀 린포체 지음, 오진탁 옮김, (주)민음사,
삶
제 1 장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서
삶과 죽음을 통한 여행
우리의 탐구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과
무상함이라는 진리가
현시되는 다양한 국면을
직접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
이런 식의 검토 작업을 통해
우리는 아직까지 시간을 갖고 있는
지금의 삶을 좀 더 풍부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고,
우리가 죽게 되더라도
자신의 삶을 낭비했다는
후회에 빠지거나
자기 자신을
힐책하지 않게 될 것이다.
티베트의 유명한 성자이자 시인인
밀라레파도 이렇게 말했다.
<내 종교는 후회 없이 살다가
후회 없이 죽는 것이다.> p.33
무상함에 담긴
헤아리기 어려운 메시지,
무상함과 죽음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깊이 심사숙고하면
곧바로 티베트의 오래되고
설득력 있는
가르침의 정수라고 부를 수 있고,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마음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열쇠다.
죽는 그 순간,
일상적인 마음과 미혹은 사라지고
그 갈라진 틈으로
끝없는 하늘과도 같은
우리 마음의 성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품안에서
전 우주가 전개되는
하늘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이러한 본성과
삶과 죽음 모두의 토대인 것이다. p.33
이 가르침에 의하면
마음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죽을 때 해체되며,
죽은 이후 무엇이 지속되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마음의 본성이라는
좀 더 깊은 실제의
새로운 차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마음의 본성에
정통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죽는 그 순간
마음의 본성이
자발적으로 힘차게
스스로를 드러낼 때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매우 자연스럽게,
바르도 가르침에 따르면
<어린애가 어머니 무릎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마음의 본성을 알아보게 되리라.
그리고 그러한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마침내 온갖 속박으로부터
풀려나게 된다. p.34
마음의 본성에 대해 말하게 되면
자연히 온전한 방식으로
명상을 가르치게 된다.
왜냐하면 명상은
마음의 그러한 본성을
반복해서 드러내
점차적으로 실현하고
견고하게 다지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통한
여행의 온전한 의미와 맥락을
충분히 제시하기 위해서는
인간 생명의 전개 과정, 재탄생,
그리고 카르마에 대한 설명이
주어져야 한다. p.34
제 2 장 덧없음
제 3 장 반성과 변화
무사의 영혼
삶 속에서
상실과 거짓에 직면해
덧없음을 배우게 될 때마다,
우리는 진리에
더욱 다가서게 된다.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우리가 내려설 곳은
오직 하나뿐이다.
땅, 즉 진리의 땅이다.
만일 당신이
영적 수행으로 비롯되는
식별력을 지니게 된다면,
그때의 추락은
결코 재앙이 아니라
내면의 안식처를 발견함이다.
만일 적절히 이해되고
마땅하게 활용할 수만 있다면,
어려움과 장애는
종종 예상치 못한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스승들의 전기를 읽을 때,
그들에게 아무런
어려움과 장애가 없었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힘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때때로 발견한다. p72
제 4 장 마음의 본성
하늘과 구름
불성은 알기 쉽게 말해서
그대의 흠 없는 현재 의식으로,
인식할 수 있으되
텅 비어 있고
벌거벗은 상태이지만 늘 깨어 있다.
뒤좀 린포체는 이렇게 썼다.
어떤 말로도 그것을 묘사할 수 없다.
어떤 예로 그것을 설명할 수도 없다.
윤회가 그것을 더욱 나쁘게 할 수도 없고
열반이 그것을 더욱 좋게 할 수도 없다.
그것은 결코 생겨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언제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결코 자유로워진 적이 없고
그것은 결코 미혹된 적도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한계도 없다.
그것은 어떤 범주에 속하지도 않는다. p.94
뇨술 켄포 린포체는 이렇게 말했다.
심오하고, 평온하고,
복잡함에서 벗어나
어떤 것과도 뒤섞임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명료함,
마음의 개념적 이해를 벗어남,
이것이 승리한 자 마음의 깊이다.
그 안에는
버려야 할 것도 없고,
보태야 할 것도 없다.
그것은 다만
티없는 깨끗함으로
자연스럽게
그 자신을 바라본다. p95
네 가지 잘못
바르도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마음의 본성을
지금 곧바로 실현하는 것을 가로막는
네 가지 잘못이 있다고 한다.
첫째, 마음의 본성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깨닫기 어렵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
마음은 그 본성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둘째, 마음의 본성은
너무나 심원해서
우리를 숨 막히게 한다.
그것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만일 우리가 알았다면,
이미 어느 정도
그것을 실현했을 것이다.
셋째, 마음의 본성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쉬워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마음의 본성이라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 의식에서 쉬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은
어느 순간이든
항상 현전하기 때문이다.
넷째, 마음의 본성은
엄청나게 놀라워
우리가 적응할 수 없다.
마음의 본성은
참으로 방대해서
우리의 편협한 사고 방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정말로 믿을 수 없다.
깨달음이
우리 마음의 실제 본성이라고
상상할 수조차 없다. p.95.96
제 5 장 마음을 고향으로 이끌기
자연스럽고 거룩한 평화
나는 명상할 때 때때로
어떤 방법도 이용하지 않는다.
내 마음을 푹 쉬게
할 뿐이다.
특히 영감이 솟아오를 때,
나는 내 마음을
고향으로 이끌어
가능한 한 빨리,
아주 조용히 앉아
마음의 고향에서 쉰다.
내가 <올바른> 상태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묻지도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때는 별로 애쓰지 않아도
오직 풍부한 이해,
깨어 있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마음의 본성속에 있을 때
일상적인 마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떠 받치거나 확신할 필요도 없다.
나는 단지 존재할 따름이다.
오직 근본적인 믿음이 있을 뿐이다.
특별히 해야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p117
몸의 자세
스승들은 말한다.
<만약 몸과 마음을
상서로운 상태로 이끈다면,
명상과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몸의 자세에 관한 이야기는
비밀로 가득 찬 현학(衒學)이 아니다.
올바른 자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명상을 위해서,
리그파를 깨닫기 위해서
좀더 영감 넘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마음과 몸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몸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면,
명상은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p119
족첸 가르침은
당신이 소견(所見)과
몸의 자세를 산처럼 하라고 말한다.
소견은 마음의 본성에 대한
당신의 이해와 통찰 전체를 합친 것으로,
당신을 명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의 소견은
몸의 자세와 통하고,
몸의 자세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당신이 앉아 있는 방식을 통해서
당신 존재의 핵심이
표출되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산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확고부동한 위엄을 지니고 앉아보자.
산을 강타하는 바람이 거세고
산 정상을 휘감은 먹구름이 두터울지라도,
산은 온전히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산처럼 앉아 있으면
마음은 떠올라
치솟을 것이다.
몸의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허리를 곧추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내면의 에너지>인
프라나prana가
몸속의 미세한 채널을 따라
쉽게 온몸으로
퍼져나갈 것이고,
마음은 참으로 휴식 상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떤 것도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등뼈 아랫부분은
자연스럽게 휘어 있도록 한다.
긴장은 풀어야 하지만
허리는 곧추세워야 한다.
머리는 목 위에서
편안하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몸자세의 힘과
은총을 지탱하는 것은
바로 어깨와 몸통 윗부분으로,
튼실하게 균형 잡으면서도
긴장은 풀어야 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되,
연꽃이 활짝 핀 것 같은
자세로 앉지는 말자.
그러한 자세는
한층 고급의 요가 수행에서 요청된다.
결가부좌 자세는
삶과 죽음, 선과 악,
숙련된 방편과 지혜,
남성 원리와 여성 원리,
윤회와 열반의 일치를 뜻한다.
즉 그것은 둘로
나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 다리의 긴장을 풀고
의자에 앉을 수도 있지만
등은 항상 곧추세워야 한다. p.120
티베트의 명상 전통에 따르면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명상에 들어갈 때
잠시 눈을 감는 편이
마음을 조용히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느끼면,
서서히 눈을 뜬다.
그러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한층 평화롭고
고요해진 것을 느낄 것이다.
이제 눈을 콧등을 따라
약 45도 각도로 내리 뜬다.
마음이 거칠어 질 때마다
눈을 더 내리뜨고,
마음이 나른해지고 졸릴 대마다
눈을 위로 치켜뜨는 것이
일반적인 수행의 요령이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명석한 통찰력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자기 앞의 공간을
똑바로 바라보면
자신의 시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족첸 수행법이 권하는
바라봄의 방법이다.
족첸 가르침에 따르면
명상과 시선은
거대한 바다처럼 열려야 한다.
즉 가장 충만하고 넓게 한없이
멀리 뻗어나가야 한다.
당신의 소견과 몸의 자세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명상은 자신의 시선에
영감을 불어넣어
결국 하나로 결합하게 만든다.
어떤 것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지는 말자,
대신 가볍게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
시야를 넓히자.
그러면 점점 광대해지고
한층 충만해질 것이다.
그에 따라
자신의 시야 자체가 더 넓어져,
더 평화롭고 자비로우며
평온하고 균형 잡히게 될 것이다.
티베트에서는 자비의 붓다를
<첸레지 Chenrézig>라고 부른다.
<첸 Chen>은 눈,
<레 ré>는 눈의 한구석,
<지 zig>는 보는 것을 뜻한다.
<자비로운 눈을 지닌 붓다가
모든 중생들이
원하는 것을 본다>는 의미이다.
명상을 통해서
솟구치는 자비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자신의 눈으로 전해지므로,
그 시선은 바다처럼
광대한 자비,
모든 것에 스며드는
자비 그 자체가 된다. p.121
명상할 때에
눈을 뜨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쉽게 잠들지 않는다.
명상이란
세상으로부터
달아나거나 도망쳐
황홀경에 빠진 것 같은
의식 상태를
경험하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명상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세상과
직접 연결시켜 준다.
따라서 명상할 때
눈은 뜨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닫아버리기보다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하며,
그것들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
청각, 시각, 촉각 등
오감 전부를
감각 대상에 집착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열어놓아야 한다.
뒤좀 린포체는 말했다.
<다양한 형태들이 지각되겠지만,
그것들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비어 있다.
그렇지만 그 비어 있음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들을 지각한다.
다양한 소리가 들리겠지만,
그것들은 텅 비어 있다.
그렇지만, 그 비어 있음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소리들을 지각한다.
또한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겠지만,
그것들은 텅 비어 있다.
그렇지만 그 비어 있음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생각들을 지각한다.>
당신이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듣든지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자.
들리는 것은 들리는 대로,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집착하지 말고
지각된 그대로 놓아두자.
광명과 관련된
족첸 가르침의
특별한 수행법에 따르면,
지혜의 에너지가 발하는 모든 빛은
심장 핵심부에 귀속되어 있으며
<지혜의 채널>을 통해 눈과 연결된다.
눈은 광명이 흘러나오는 <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혜의 채널을
닫아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또한 명상할 때, 긴장을 풀고
목의 깊은 곳에서
<아 ―>라고 말하는 것처럼
입을 가볍게 벌린다.
그리고 주로 입을 통해
호흡함으로써,
마음과 명상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사변적인 생각들을 만들어내는
<카르마「業」의 바람>이
훨씬 잔잔해진다고 한다. p.122
그리고 손은 편안하게
무릎에 올려놓는다.
이것이 <마음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이끄는 몸의 자세>이다.
이러한 몸의 자세에는
희망의 섬광,
쾌활한 유머가 함축되어 있다.
그것에는 우리 모두가
불성을 갖고 있다는 이해가
깊숙하게 깔려 있다.
따라서
당신이 이런 식으로
몸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즐겁게 붓다를 흉내 내는 것이고,
자신의 불성이 현현하게 될 것을 알고
그렇게 되도록 고취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붓다가 될 수 있는 존재>로
존중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상대적 조건들에 유념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자신의 불성을
기쁘게 신뢰하게 되었으므로,
우리의 부정적 양상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것들을 좀 더 상냥하고
유머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된다.
명상을 통해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한
붓다의 존귀함, 존엄함과
그리고 철저한 겸손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불성을
기쁘게 신뢰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자주 말하곤 한다.
이러한 이해와 확신으로부터
명상은 자연스럽게 진전될 것이다. p.123
명상의 세 가지 방법
붓다는 부정적 감정들을 다스리는
팔만 사천 가지 방법을 가르쳤다.
또 불교에는 명상 방법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수많은 명상법 가운데
현대 사회에 특히 효과적이고
누구나 쉽게 행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명상법을 나는 발견했다.
숨결을 <지켜보기>,
대상을 활용하기,
만트라「眞言」를 암송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p.123
숨결을 <지켜보기>
이 방법은 무척 오래된 것이고,
불교의 모든 학파에서 활용하는 것으로
가볍게 그리고 마음을 집중해서
숨결에 주의를 쏟는 것이다.
숨결은
우리의 삶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생명의 표출이다.
히브리어로 숨결을 <루아 ruah>라고 하는데,
피조물에 대한 생명을 불어넣은
신의 영혼을 뜻한다.
기독교에도
성령과 숨결 사이에는
깊은 연결 고리가 있다.
성령 없이는 어떠한 것도
생명을 지닐 수 없다.
붓다는 산스크리트 어로
<프라나>라 불리는 숨결을
<마음을 실어 나르는 수레>라고 말했다.
우리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프라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숨결을 능숙하게 조절하여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하면,
마음은 자동적으로 길들여
다스릴 수 있게 된다.
힘든 일에 직면했을 때
혼자서 몇 분 동안 숨을
깊고 조용히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졌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단순하게
호흡을 고르기만 해도
우리는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명상을 할 때,
늘 해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호흡한다.
의식을 가볍게
날숨에 초점을 맞춘다.
숨을 내쉴 때,
날숨과 함께 흘러가 보자.
숨을 내쉴 때마다
집착을 내려놓아 풀려나게 한다.
당신의 숨결이
모든 곳에 넘쳐흐르는
광대한 진리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고 상상해 보자.
숨을 내쉴 때마다,
다시 숨을 들이마시기 전에
모든 집착이 융해된
자연적인 빈틈이 있음을
당신은 발견할 것이다. p.124
이 빈틈,
이 열린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자.
그리고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며
특별히 집중하지 않도록 하자.
열려 있는 빈틈 속에서
계속 쉬도록 하자.
수행을 닦을 때
정신적인 설명, 분석
또는 내면적인 관심거리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속으로
<지금 나는 숨을 들이쉬고 있다,
지금 나는 숨을 내쉬고 있다>라는 식으로
설명을 붙이는 실수를 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순수한 현존이다.
호흡에
너무 마음을 쏟아도 안 된다.
4분의 1 정도만 마음을 쓰고
나머지 4분의 3은
조용히 긴장을 풀고
여유 있게 휴식을 취하자.
주의 깊게 숨쉬기를 할수록
당신은 점점 현존하게 되고,
흩어졌던 자신의 단편들이
당신의 자신 속으로 모여들어
마침내 하나가 되는 것을 알 것이다.
숨결을 <지켜보기>보다,
당신이 숨결과 하나가 되는 것처럼
자신을 서서히 숨쉬기와 일치시켜라.
천천히 숨결과 숨 쉬는 사람,
숨쉬기가 하나가 된다.
그러면 모든
이원적 대립과 분리가 사라진다.
숨쉬기에 집중하는
단순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서서히 걸러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마치
허물이라도 벗는 거처럼
무언가가 벗겨져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숨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쉽게 편안해지지 않는다.
그것이 거의 밀실 공포증 같다고
그들은 느낀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음 명상법이 도움이 될 것이다. p.125
대상을 활용하기
두 번째 명상법은
마음을 대상에 가볍게 의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명상법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꽃이나 수정같이
당신에게 특별히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대상을 이용할 수 있다.
붓다, 예수 그리스도같이
진리를 체현한 인물,
특히 자기 스승의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은 좀 더 효과적이다.
스승이란 당신과 진리를 이어주는
살아 있는 연결 고리이다.
스승과 당신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에,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감이 떠오르거나
당신 자신의 본성과
연결시켜 줄 수 있다. p.126
만트라를 암송하기
세 번째 명상법은
티베트 불교
(또한 수피교,
정통 그리스도교, 힌두교)에서
많이 쓰이는 것으로,
마음을 만트라 「眞言」 소리와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만트라는
<마음을 보호하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부정적인 성향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며,
당신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바로 만트라이다.
신경이 날카롭고,
마음이 종잡을 수 없고,
감정적으로 나약할 때
만트라를 읊조리거나 외우면,
당신의 에너지와 기운이 변화됨으로써
당신의 마음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만트라는 소리의 정수이며,
소리의 형태로 표출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만트라의 음절 하나하나는
영적인 힘을 내장하고 있으며,
영적인 진리를 함축하고 있고,
붓다의 말씀에
깃들인 축복으로 진동하고 있다.
또한 마음은
몸 안의 채널을 따라 움직이면서
몸을 순수하게 만드는
숨결의 미묘한 에너지,
프라나를 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만트라를 암송하게 되면
자신의 숨결과 에너지에
만트라의 에너지가 모여들어
당신의 마음과 몸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p.128
생각과 감정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떠오르든지
그것들이 바다의 파도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났다가
가라앉도록 내버려두자.
무슨 생각이 떠오르든지
아무 불평도 하지 말고
그것이 마음에
일어났다가 가라앉도록 내버려두자.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먹여 살리지도 말고,
그것에 빠져들지도 말자.
그것을 붙들지도 말고
응결시키지도 말자.
생각을 따라가지도 말고
끌어들이지도 말자.
마치 바다가 일어나자마자
쓰러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처럼,
하늘이 스쳐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생각을 지켜보자.
생각이란 바람과 같은 것임을
당신은 금방 깨달을 것이다.
생각이란 그저 왔다가 가는 것이다.
생각을 다스리는 비결은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이 마음을 통해서 흘러가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생각으로부터
당신 마음은 자유롭게 되리라.
일상의 마음에서 우리는
생각의 물줄기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결코 그렇지가 않다.
당신은 각각의 생각들 사이에
빈틈이 있음을 스스로 발견할 것이다.
과거의 생각이 이미 지나갔을 때,
그리고 미래의 생각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을 때,
당신은 마음의 본성인
리그파가 드러나는 빈틈을
언제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명상이란
생각을
서서히 밑으로 가라앉혀
그 빈틈을 점점 더
뚜렷하게 만드는 것이다. p.133
수행 체험
명상의 진정한 영광은
방법이 아니라
그 축복과 맑음과 평화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집착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살아 있는 현존 체험을 지속함에 있는 것이다.
점점 덜 집착하는 것은
당신이 좀 더 자유로워졌다는 징표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런 자유를
좀 더 체험하면 할수록,
자아와 자아를 계속 살아 있게 하는
희망과 공포가 사라지고 있다는 조짐이
한층 분명하면 할수록,
당신은 무한하게 풍요로운
<무아(無我)의 지혜>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지혜의 고향에서 살아갈 때,
당신은 더 이상
<나>와 <너>, <이것>과 <저것>,
<안쪽>과 <바깥쪽> 사이의 벽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마침내 자기의 진정한 고향,
차별 없는 상태에 이를 것이다. p,137
행동과 명상을 일치시키기
뒤좀 린포체는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은
꿈같고 환상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즐겁게 무언가를 계속 해나가라.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불필요한 엄숙함이라든가
자의식 없이 걸어가고 있다면,
당신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리의 광활한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앉을 때,
당신은 진리의 성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를 먹을 때,
부정적 성향과 망상은
공(空)의 뱃속에 들어가
광활한 공간 속에서 용해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으로
화장실에 갈 때,
온갖 몽롱함과 장애물은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p.140
이 일화에서
유명한 선어(禪語)가 나왔다.
<내가 밥을 먹을 때 나는 먹을 뿐이고,
잠을 잘 때 나는 잠만 잘 뿐이다.>
밥을 먹을 때 먹고,
잠을 잘 때 잔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것이며
그것을 막는 자아의 산만함이
전혀 없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명상과 일상생활의 일치이다.
이러한 상태에 실제로 이르고 싶으면,
수행 닦는 것을
약 먹거나 치료받는 것처럼
어쩌다 한 번씩 하지 말고
매일 끼니때마다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서
도시 생활의 중압감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한적한 장소에서
수행을 닦는 것은
명상과 일상생활을
통합하는 힘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p.141
영감
명상이란
깨달음으로 올라가는 길이며
우리가 지금 이 삶에서
가장 힘써야 할 것이라고
나는 말하곤 한다.
제자들에게 명상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단호한 훈련과
집중적인 헌신으로
수행에 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가능한 한
영감에 가득 차고 창조적이면서도
윤택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제자들에게 항상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명상이란 예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가들처럼
창조의 기쁨과 풍부한 상상력을 지켜야 한다. p.141
당신이 세상에 대해 신경 쓰고
경쟁에 열중하는 만큼
평온한 마음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 자신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방편을 갖춰야 한다.
기쁨으로 충만하게
명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많이 있다.
자신을 아주 감동시키고
당신의 마음과 가슴을 열어주는
음악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감동을 주었던
시나 가르침 가운데
한 구절을 모아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늘 곁에 두고 읽을 수도 있다.
나는 티베트의 탱화들을 사랑해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영감을 받아왔다.
당신도 성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복제화들을 찾아
자신의 방에 걸어둘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 녹음된 테이프나
염불이 녹음된 테이프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꽃 한 송이, 향 한 자루,
촛불 하나,
깨달은 스승의 사진이나
신 또는 붓다의
조각상을 찍은 사진으로 장식된
조촐한 당신만의 천국에서 명상할 수 있다.
또 평범한 방 한 칸을
신성한 공간으로 바꾸어
오래된 친구와 더불어
기쁨과 행복 넘치는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매일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마주치는 성소(聖所)로 바꿀 수 있다.
만약 도시에 자리 잡은 공간에서는
쉽게 명상에 들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궁리를 해서
자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언제나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당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려면,
새벽에 공원을 산책하거나
뜰에서 장미꽃 위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을 들여다보자.
땅에 누워 하늘을 보면서
마음이 크고 넓은 그 속으로
퍼져나가게 하자.
마음 밖에 있는 하늘이
마음속 하늘을 일깨우게 하자.
개울가에 서서 마음을
그 흐름에 참여시켜 보자.
끝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하나가 되자.
폭포 옆에 앉아
폭포의 웃음소리로
마음을 정화시켜 보자.
바닷가를 걸으면서
바닷바람이 얼굴 가득
신선하게 부딪치는 것을 느껴보자.
마음을 균형 잡기 위해서
달빛의 아름다움을 찬양해 보자.
호숫가나 뜰에 앉아
조용히 숨 쉬면서
마치 달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위엄 있게 천천히
가로질러 가는 것처럼,
침묵 속에 빠져들어 보자. p.142
어떤 것이든 명상으로 이끄는
초대장으로 이용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본
어떤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
시멘트 포장 도로 틈 사이로
자라는 작은 꽃 한 송이,
상점의 창 위로 드리워진
짙은 색 커튼 한 자락,
창턱에 놓인
화분에 떨어진 햇빛 한줄기……,
아름다움이라든가
우아함이 깃들인
온갖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에 기쁨을 느끼고,
순간순간 깨어 있으면
<침묵으로부터
늘 솟아나는 새 소식>이
당신에게 도달할 것이다.
이제 당신의 모든 숨결과
움직임을 고양시키고,
기운을 북돋우고,
밝게 비추고,
영감을 불어넣는
신비의 약을
늘 곁에 둔다면
당신은
서서히 축복의 주인이자
기쁨의 연금술사가 될 것이다.
위대한 영적인 수행자란 무엇인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의 현전을
항상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
심오한 영감의 원천을
지속적으로 발견해 활용하는 사람이다.
영국의 현대 작가
루이스 톰슨Lewis Thompson은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시인인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열정적으로 진리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순수한 행동인 동시에
완벽한 상징이기도 했던
그의 몸짓 하나하나는
초월적인 진리를 체현하고 있었다.>
그렇게 초월적인 진리를
온몸으로 체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p.143
제 6 장 진화, 카르마 그리고 환생
마음의 연속성
불교적 관점에서는
환생을 <증명하는> 주요 논거로
마음의 연속성에 대한
심원한 이해를 제시한다.
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의식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순간의 의식도
바로 직전에 선행하는
의식과 한순간이라도
단절된다면 성립될 수 없다.
달라이 라마는
이 복잡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p.156
불교에서 환생 개념을
받아들이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의식의 연속성에 기초해 있다.
물질계를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을
아주 미시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물질계의 모든 요소가
<우주 입자>라고 알려진 것 속에
응축되어 있는 최초의 지점까지
추적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 우주 입자들은
이전의 우주가 붕괴되어
산산이 흩어진 상태라고 한다.
따라서 우주가 진화하고
붕괴하는 순환이 계속 반복되고,
소멸된 모든 것은 다시 존재하게 된다.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마음> 또는 <의식>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일상의 경험을 통해
그 현존이 입증되고 있으므로,
분명하다.
또한 우리의 경험이
증거하고 있듯이,
우리가
<마음> 또는 <의식>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전혀 다른 상태나 환경에
직면하게 될 때
변화한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마음> 또는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성이
순간순간 바뀌며
변화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마음> 또는 <의식>의
조야한 단계가
몸의 생리학적인 상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사실상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음이
물질계와 상호 작용할 때,
마음이 의식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토대,
에너지, 또는 근원 같은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p.157
물질계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그 과거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 이 삶에서
전생의 마음 또는 의식을
추적할 수 있다면,
물질계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연속성의 기원을
무한 차원까지
추적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그것은 시작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게 만드는
환생이 있음은 분명하다.
불교는 모든 것은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원인과 조건에 따라 바뀐다는
인과론이 일체에 통용된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신적인 창조자가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공간은 없으며,
자기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공간도 없다.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마음이라든가 의식 또한
그 이전 순간의 결과로서
존재하게 될 뿐이다.
우리가 원인과 조건에 대해 말할 때
두 가지 주요한 유형이 있다.
어떤 것을 생성시키는 실체적 원인,
그러한 인과 관계에 작용하는 힘 등
요소 두 가지가 있다.
마음과 몸의 경우,
서로 상호 작용하지만 하
나가 다른 것의 실체가 될 수는 없다. ……
마음과 물질도
서로 의존하고 있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의
실체적인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불교가
환생을 받아들이는 근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생>이란
다시 태어난 <어떤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하나의 삶에서 또 다른 삶으로
여행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영혼이나 자아 같은
독립적이고 변하지 않는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의 삶과 다른 삶의
연속성을 제공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의식의
가장 미묘한 차원이다.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불교에 따르면,
궁극적인 창조 원리는
바로 의식이다.
의식에는 여러 차원들이 있다.
우리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미묘한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제나 거기에 존재한다.
그 미묘한 의식의 연속성은
우주 입자처럼
거의 영원한 것으로 보인다.
의식에서 물질 영역의
우주입자에 해당되는 것은
밝은 빛이다. ……
특별한 에너지를 지닌
밝은 빛은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p.158
제 7 장 네 가지 바르도와 다른 실제들
「바르도 상태에서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위대한 해탈을 얻는다.
Great Liberation through Hearing in the Bardo」,
「티베트 사자의 서」는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한
안내서 또는 여행 가이드이며,
어떤 사람이 죽어갈 때
또한 죽은 이후에
스승이나 영적인 친구가
그를 위해 읽어주는 책이다.
티베트에는
<명상하지 않고도
깨달음에 도달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해진다.
위대한 스승이나
신성한 대상을 보는 것,
성스러운 만트라와 함께
특별히 축복받은 만다라를 지니는 것,
스승들이 집중적으로 특별 수행을 닦음으로써
성화(聖化)시킨 감로수를 마시는 것,
죽는 순간에 의식의 전이(轉移),
즉 포와Pohwa를 기억하는 것,
「바르도 상태에서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위대한 해탈을 얻는다」같은
심오한 가르침을 듣는 것.
「티베트 사자의 서」는
그 가르침에 친숙한 사람들
또는 수행자들을 위한 책이다.
따라서 현대의 독자들이
그 가르침을 이해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며,
그 책의 모태가 되는 전통과
충분하게 접촉하지 않았다면,
결코 풀리지 않는 수많은 의혹에
사로잡히고 만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특별히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입으로만 전해지는,
수행의 핵심이 되는
문서화되지 않은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면
이 책은 충분히 이해될 수도 없고
활용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p.180
제 9 장 영적인 길
영적인 길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이든지
영적인 길을 만나게 되는
카르마를 지니고 있다.
나는 당신의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자신에게 풍요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길을
온 마음을 다해
따르라고 권하고 싶다.
위대한 영적 전통에서
전하는 책을 읽고,
스승들이 해탈이나
깨달음이라는 말로
뜻했던 바를 이해해 보고,
당신을 진정으로 끌어당기고
당신에게 적합한
절대적 실재에 이르는 길을 찾아보자.
최대한의 분별력으로
당신의 탐구를 계속하라.
영적인 길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지성과 냉정한 이해력과
섬세한 분별력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그 길이
최상의 진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 순간마다
자신의 건전한 상식을 이용하라.
당신이 지고 가야 할 행낭,
이를테면
자신의 결점, 환상,
실패, 편견을 의식하면서
밝은 마음으로
그 길에 접어들도록 하라.
자신의 참된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높이 솟구치는 깨달음과
진실하고 분별력 있는 겸양이
조화되도록 하라.
그리고 영적인 여행에서
자신이 지금 어디에 놓여 있으며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숙지하도록 하자. p.224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서양의 도처에서 목격한,
<지성을 쇼핑하기 위해
이곳저곳 다니는 행위>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스승에서 저 스승으로,
이 가르침에서 저 가르침으로
아무 연속성 없이,
어떤 한 가지 수행법에
헌신하지도 않은 채
이리저리 쇼핑만
하러 다니는 일이 자주 있다.
본질적인 것은
영적 여행의 종착점까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의 전통을 따름으로써
진리에 오르는
하나의 방법이나
한 가지 길을
완전히 숙달하는 것이며,
이러한 주장에
모든 전통의
위대한 스승들은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통찰에도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며 존중한다.
티베트에서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하나를 알면, 모든 것을 이루게 된다.>
언제나 선택의 자유를
열어놓아야 하며
어떤 것에도
자신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는
변덕스러운
오늘날의 이념은
현대 문화의 가장 위험한
자기기만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의 영적인 탐구를 가로막는
자아의 가장 효과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p.225
죽어감
제 12 장 소망을 실현시켜 주는 자비의 보석
자비의 논리
우리의 커다란 적인
자신에 대한 집착과
애착과의 싸움에서
자비의 실천보다
뛰어난 동맹군은 없다.
윤회라는
고해(苦海)에서
끝없는 유랑의 원인이 되는
거짓된 자아에 대한
오래된 집착을,
무아(無我)의 지혜와 더불어
효과적으로
완벽하게 파괴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게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대신
그들의 고통을 떠맡는 자비이다.
이런 까닭에
티베트 전통에서는
자비를
깨달음의 근원이자 정수,
깨달은 인물의
핵심적인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자비의 지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와 상반되는 행위가
우리에게 끼치는 손해와
자비가 가져오는 이익을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만
초점을 맞추는 자아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을
아주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애지중지 하는 것이
자기 삶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자아에 대한 애착을 낳고
이것이 반복되어
해침이나 고통 받는 것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생겨난다.
그러나 해침이나 고통은
전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에게
실체와 힘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당신의 반감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게 될 때,
당신은 해됨이나 고통이
객관적인 존재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반감임을 이해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반감으로 인해
우리에게 모든
부정적 성향과 장애가 모여들고,
우리의 삶이
신경질적인 근심, 기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과
존재하지도 않는
자아에 대한 애착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저 반감을 극복하게 되면,
어떤 장애라든가
부정적 성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있지 않은 누군가를,
또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 무엇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겠는가? p.314
그때 최상의 보호 장치가
바로 자비심이다.
또한 지난날의 위대한 스승들이
항상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비는 모든 치유의 근원이기도 하다.
우리가 암이라든가
에이즈 같은 질병에
걸렸다고 상정해 보자.
우리가 저런 질병을 떠맡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고 덧붙여
자비로 충만한 마음을 갖춘다면,
지금과 미래에
우리 고통을 지속하게 하는 원인,
지난날의 부정적인 카르마는
의심할 나위 없이 정화될 것이다.
티베트에서 나는
자신이 시한부 인생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자기의 소유물 전부를 나눠주고서
스스로 공동묘지를 향해 걸어갔던
비범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공동묘지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떠맡는
수행을 닦았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들이 죽기는커녕
완전히 치유돼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보살핌이
절실한 상황에 처한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비를 행동으로 실천할
직접적인 기회를 제공받게 됨을
계속해서 경험했다.
자비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세 가지 근본적인 이로움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것은
우리 마음을 열어주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죽어가는 사람이 크게 필요로 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한층 쉽게 그에게 보여준다.
좀 더 깊은 영적인 단계에서,
만일 우리가 자비를 체현해
충만한 자비심으로
행동하려고 애쓴다면,
다른 사람이
영적인 차원에 관심을 쏟거나
심지어 영적인 수행에 착수하도록
영감을 불어넣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음을
나는 계속해서 보아왔다.
가장 깊은 단계에서,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계속적으로 자비를 베풀고
그가 똑같이 행하도록 고취한다면,
그가 영적으로 심지어
육체적으로 치유될 수도 있다.
그러면 모든 영적인 스승이 알고 있던,
자비의 힘은 아무 한계가 없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 놀라움 속에서
깨달을 것이다. p.315
성스러운 비법
모든 전통의
신비스러운 스승과 성자는
통렌 수행이라는
이렇게 성스러운 비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통렌 수행과 더불어 살면서
그것을 체현해 아무 거침없이
참된 지혜와 자비의 열정으로
환희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간다.
테레사 수녀는
현대 사회에서
병자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주고받는 기쁨을
발산했던 인물이다.
그녀의 다음 말보다
통렌 수행의 영적인 정수를
한층 영감 넘치게 제시한 적은 없다.
우리 모두는
신이 있는 하늘을 갈망한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그분과 함께할 수 있는 힘을
우리는 지니고 있다.
그분과 함께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은 이것을 뜻한다.
그분이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그분이 도움을 주는 것처럼 돕고
그분이 나누어주는 것처럼 나누어주고
그분이 섬기는 것처럼 섬기고
그분이 구원하는 것처럼 구원하고
그분과 24시간 함께하기 위해
궁핍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분을 접하는 것. p.341
죽음과 환생
제 17 장 본래 갖추어진 광휘
죽는 순간
근원적 광명이 떠오를 때,
숙련된 수행자는
의식을 온전하게 유지해
근원적 광명과 합일함으로써
해탈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근원적 광명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바르도,
다르마타의
빛나는 바르도를 만나게 된다.
다르마타의 네 가지 국면 p.444-p.459
산스크리트 어 <다르마타>는
티베트 어로
<최니 ChӦ nyi>라 불리며
모든 것에 본래 갖추어진 성품,
일체의 정수(精髓)를 뜻한다.
다르마타는
있는 그대로의 절대적인 진리
실재의 본성, 또는
현상의 참된 성품을 의미한다.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것은
마음의 본성과
모든 것의 본성을
온전하게 이해하려고 할 때
관건이 되는 내용이다.
실제로 바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은
마음과 그 근원적 본성이
점차 명백하게 드러나는
전개 과정이다.
다르마타 바르도는
그 전개 과정 가운데
한 단계에 해당된다.
마음이 가장 순수한 상태,
근원적 광명으로부터
다음의 바르도,
즉 생성 바르도의 상태에서
형태를 나타내기 위해 전개되는 것은
바로 빛과 에너지의 이 차원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물질을 탐구하면
그것이 결국
빛과 에너지의 바다임이
드러나게 된다고
현대 물리학이 밝힌 것은
지극히 시사적이다.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이렇게 말한다.
<물질은 말하자면
응축된 또는 얼어붙은 빛이다…….
모든 물질은 빛의 속도보다
낮은 평균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양식속에 빛이 응결된 것이다.>
현대 물리학은 또한 빛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해한다.
<물질은 에너지이고 또한 정보――
내용, 형식, 구조를 지닌다.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광명―――빛의 풍광
다르마타 바르도의 상태에서 우리는
빛으로 된 몸을 지닌다.
이 바르도 상태의 첫 번째 단계는
<공간이 광명 속으로 해체되는 때>이다.
갑자기 당신은
소리, 빛, 그리고 색이 흐르면서
진동하는 세계를 의식하게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환경의
일상적인 모든 특징은
일체에 스며드는
빛의 풍광 속으로 용해된다.
이것은 찬란하게 밝은 빛을 발하고,
투명하고 여러 색채를 띠고,
아른아른하게 빛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어떤 종류의 차원이나 방향에도
제약받지 않는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는 그것을
<여름 땡볕이 평지에
내리쪼일 때 생기는
신기루 같다>고 했다.
그것의 색깔은
마음에 본래 갖춰진 기본 성질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다.
공간은 파란 빛,
물은 하얀 빛,
땅은 노란 빛,
불은 빨간 빛,
그리고 바람은 녹색 빛으로 감지된다.
어쩌면 그것이
일어났는지 조차 모를 수 있다.
오직 토갈 수행자만이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이처럼 찬란한 빛의 현현은
마음의 본성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결합―――신
만일 이것이
리그파의 자발적인 현현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다음으로 단순한 빛과 색깔들이
틱레tikle라 불리는
서로 다른 크기의 빛의 공이나 점으로
통합되어 합쳐지기 시작한다.
빛이 거대한
둥근 모형으로 집중되어
마치 공간 정체를
점유하기라도 하듯
그들 안에
<평화의 신과 분노의 신의 만다라>가
나타난다.
이것이
<광명이 분해되어
결합하는 것>으로 알려진
두 번째 단계인데,
광명은 붓다라든가
상이한 속성을 지닌
다양한 크기, 색, 형상을 띤
신의 형태로 현현하게 된다.
그들이 방출하는 밝은 빛은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현란하고,
소리는 천여 개의 천둥소리가
포효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하고,
그리고 빛의 광선과 광속은
모든 것을 꿰뚫는 레이저 같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는
이를 <42가지 평화의 신과
58가지 분노의 신>이라고 묘사했다.
그것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다섯 겹의 만다라 양식을 띠면서
<며칠>에 걸쳐 전개된다.
이것은 당신의 지각 전체를
강하게 채워오는 비전이므로,
만일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 못하면 놀라게 하고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더없는 두려움과
맹목적인 공포가
당신을 소진시켜
마침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당신 자신과 신으로부터
매우 미세한
한 줄기 광선이 흘러나와
당신의 마음과
그의 마음을 연결시킨다.
그들의 광선들 속에서
빛나는 공간들이
셀 수 없이 나타나고
점점 증가되어,
모든 신이 당신 속으로
녹아들어 가듯 <모여들게> 된다.
지혜
만일 당신이 그것들을
다시 인지해 안정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다면
<결합이 지혜 속으로
용해된다.>고 불리는
다음 단계가 전개된다.
미세한 한 줄기 광선이
당신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와
그로부터 거대한 비전이 펼쳐진다.
하지만
모든 세목(細目)은
독특하고 분명하게 남아 있다.
이것은
지혜의 다양한 측면이
현현한 것인데,
빛으로 펄럭이는 카펫과
눈부시게 둥근 틱레가
마치 전시회를
열기라도 하는 양
함께 나타난다.
첫째,
짙은 파란색 빛의 카펫에
청옥(靑玉)색으로
아른아른 빛나는 틱레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그 위에
하얀 빛의 카펫에
크리스탈같이
하얗게 빛나는
틱레가 나타난다.
그 위에
노란 빛 카펫에
금빛의 틱레가 나타나고,
그 위에
붉은 빛 카펫이
홍옥 빛 틱레를 뒷받침한다.
그것들은 크게 펼쳐진
공작새 털 덮개처럼
밝고 둥근 천체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빛의 빛나는 표출은
다섯 가지 지혜의 현현을 뜻한다.
첫째 일체를 포괄하는
공간의 지혜「法性体性智」,
둘째 거울같이 맑은 지혜「大圓鏡智」,
셋째 평등의 지혜「平等性智」,
넷째 분별의 지혜「妙觀察智」,
그리고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
그러나 모든 것을
성취하게 하는 지혜는
단지 깨달음의 순간에만
완벽해 지므로
그것은 아직 현현하지 않는다.
따라서 녹색 빛의
카펫과 틱레는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른 모든 색 안에 내재한다.
여기에 제시한 것은
깨달음에 대한
우리의 잠재적 기능성이고,
모든 것을 성취하게 하는 지혜는
단지 우리가 붓다가 될 때만
나타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여기서
마음의 본성에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휴식을 취함으로써
해탈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빛의 카펫과 틱레가
당신의 리그파와 함께
모두 공작새의 털로 만든
덮개 같은 빛의 현란함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자발적인 현전
이것은
다르마타 바르도의 마지막 국면
<지혜가 자발적인 현전으로
용해되는 단계>이다.
이제 실재 전체가 그 자체로
광대하게 현현하게 된다.
먼저 원초적 순수함의 상태가
구름 한 점 없이 트인 하늘처럼
떠오르게 된다.
이어서 평화의 신과
분노의 신이 나타나고
붓다의 순수한 영토가
뒤따르게 되고
그 아래에 윤회하는
여섯 세계「六道輪廻」가
뒤따르게 된다.
이 비전은
아무 한계가 없어서
우리의 일상적인 상상을 넘어선다.
이를테면 지혜와 해탈에서부터
혼란과 재탄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능성이 제시된다.
이 즈음에 당신은
자신에게 통찰력과 회상 능력이
부여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아무 장애도 없는
순전한 통찰력과 감각 능력으로
당신의 과거와 미래의 삶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게 되고,
여섯 세계의 모든 존재를 알게 된다.
한순간에 당신은 이미 들었던
어떤 가르침이라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고,
결코 들은 적이 없던 가르침이라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고,
결코 들은 적이 없던 가르침이라도
마음에서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밧줄이 끊기면
텐트가 단숨에 무너지는 것처럼,
비전 전체가 그 근본 정수로
돌아가 용해되어 버린다.
만일 이렇게 현현한 것이
<당신 자신의 리그파의 광휘>임을
확실하게 안다면,
당신은 해탈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토갈 수행 체험이 없다면
<태양처럼 빛나는>
신들의 비전을 바라볼 수 없으리라.
대신 이전의 삶의
익숙한 습관적 성향으로 인해
당신의 눈길은
여섯 가지
윤회의 세계로 떨어질 것이다.
당신이 인지하게 되는 것이
바로 여섯 가지 윤회의 세계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 따르면
이 단계가 진행되는 기간을
다르마타 바르도의 체험으로 정해진다.
그때 시간의 기준은
지금과 같지 않다.
다르마타의 영역은
시간과 공간 같은
모든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날들은
예컨대 <명상의 날>,
우리가 마음의 본성에서
산란하게 흩어짐 없이
쉴 수 있는 시간의 길이,
또는 마음의 단 한 가지 상태에 달려 있다.
명상 수행에 있어
안정감이 없다면
이런 날들은
지극히 짧아지고
평화의 신과
분노의 신의 현현은
순식간에 지나가서
그들이 언제 나타났는지
우리는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다르마타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그러므로 신은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매우 친숙한 그런 형상을 띨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의 경우
신은 예수라든가
성모마리아의 형상을
취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깨달은 붓다가 나타나는
목적의 전부는
우리를 도와주려는 데 있으므로
어떤 형상이든지
우리에게 적합하고
유익한 형태를 띨 것이다.
그러나 신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어쨌든 그 기본 성품엔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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