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와 미국인을 상징하는 엉클 샘은 정육 포장 출하업자이자 뉴욕의 정치인이었던 실존 인물이었다. 우연과 농담의 일치로 그는 엉클 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다. 엉클 샘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1830년 5월 22일자 일간지의 광고란이다. 엉클 샘의 본명은 새뮤얼 윌슨이다. 그는 매사체세츠주 알링턴에서 1766년 9월 13일에 태어났다. 당시 알링턴시는 메노토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가 8살 때 마을 민병대의 고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1775년 4월 어느 날 아침 샘(새뮤얼 윌슨의 약칭)은 당번 근무를 하고 있었다. 어린 샘은 영국 군인이 눈에 띄자 북을 힘껏 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영국군의 침입을 알렸다. 샘이 14살이 되자 군에 입대해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미국이 독립을 쟁취한 후 그는 뉴욕주 트로이라는 도시로 이주해 정육 포장회사를 차렸다. 그는 성격이 명랑하고 사업에서도 정직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그를 ‘엉클 샘’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엉클 샘이 전 미국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미국이 영국과 다시 교전하게 되면서부터였다. 1812년, 전쟁 동안 미국 정부군이 트로이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샘의 정직성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던 정부군은 돼지고기와 소고기의 군납을 요청했다. 샘은 군납용 고기를 창고에 저장한 다른 고기와 구별하기 위해 거기에 미국의 약칭인 ‘U.S’라는 스탬프를 찍어놓았다. 당시 이 약칭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812년 10월 1일 정부 검사관이 정기 검열을 하기 위해서 샘의 공장을 방문했다. 검사관들은 고기에 적힌 ‘U.S’가 무슨 뜻이냐고 인부들에게 물었다. 그 의미를 몰랐던 인부는 농담 삼아 그것은 사장인 엉클 샘의 머리글자가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이 잘못된 대답이 군인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곧 군인들은 모든 군사 식량을 엉클 샘이 공급하는 물품으로 언급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정부의 모든 공급 물자를 엉클 샘이 공급하는 것으로 부르게 되었다. 엉클 샘의 삽화는 1920년 뉴잉글랜드의 한 일간지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아저씨 타입의 샘은 깨끗이 면도를 하고 멋진 검정 실크햇에 검정 연미복 차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엉클 샘의 모습이 차츰 골격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 시절에 엉클 샘은 빨간 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흘러내리는 듯한 턱수염을 가진 엉클 샘의 모습은 에이브러험 링컨의 대통령 재임 시절에 생겨난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엉클 샘이 미국인의 이미지로 자리 잡기 시작하자, 삽화가들은 더욱 애국적인 복장을 한 샘을 그리기 시작했다. 샘의 빨간 바지에는 하얀 줄무늬가 그려지고 실크햇에도 별과 줄무늬가 아로새겨졌다. 그의 옷이 성조기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당시 엉클 샘의 옷은 휘황찬란했다. 하지만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그의 키는 약간 작은 편이었으며 몸은 지나치게 비대한 편이었다. 남북전쟁과 재편입 기간(남북전쟁 후 남구 각 주가 합중국에 재통합되던 시기 :1865~1877) 동안 활동했던 독일 태생의 만화가인 토머스 내스트는 엉클 샘을 키가 크고 볼이 움푹 파였으며 호리호리한 모습으로 그렸다. 우연하게도 내스트가 그린 엉클 샘은 실제 인물인 새뮤얼 윌슨의 모습과 가장 닮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내스트의 모델은 윌슨이 아니라 링컨이었다. 가장 유명한 엉클 샘 그림은(가장 많이 복제되고 또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인식하는) 20세기 예술가인 제임스 몽고메리 플래그의 작품이다. 그의 그림에서 엉클 샘은 근엄한 표정에 팔을 쭉 뻗어 손가락으로 독자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포스터에 그려진 엉클 샘의 모습으로,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 “나는 여러분이 미국 군대에 입대하기를 바랍니다” 전쟁 기간 동안 온몸에 성조기 무늬 옷을 걸친 엉클 샘의 포스터는 400만 장 이상 팔렸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50만 장 이상 팔렸다. 그러나 플래그의 엉클 샘은 실제로는 링컨의 모습을 모델로 한 그림이 아니라, 플래그의 자화상을 그린 것이었다. 엉클 샘의 포스터가 인기 절정에 있을 때도 사람들은 엉클 샘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실존 인물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61년 초에 이르러서였다. 토머스 거슨이라는 역사학자가 뉴욕 역사학회의 문서보관실에서 1830년 5월 12일자 뉴욕의 일간지를 발견했다. 그 신문에는 당시 뉴욕시의 우체국장이었던 베일리라는 사람이 엉클 샘의 유래를 설명하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1812년에 군인이었던 베일리는 정부의 검열관과 함께 엉클 샘의 정육 포장회사를 직접 방문했던 인물이었다. ‘U.S’라는 머리글자가 엉클 샘을 의미한다고 인부가 대답했던 사실을 베일리는 이 기사에서 밝히고 있었다. 샘 윌슨은 어느 정도 정치적인 활동도 하다가 1854년에 8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31년에 세워진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비명이 적혀 있었다. “새뮤얼 윌슨의 애칭인 ‘엉클 샘’을 기억하면서” 샘 윌슨과 엉클 샘의 관계에 대한 공적인 조사가 케네디 대통령의 재임 동안에 진행되었고, 그 결과 미국 의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공식 발표했다. ‘의회는 뉴욕주 트로이의 엉클 샘 윌슨이 미국의 국가적인 상징인 엉클 샘의 시조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샘 윌슨이 사용했던 표현 하나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던 적이 있다. 1812년 전쟁 전야에 윌슨은 일장의 연설을 하면서 미국이 위대한 국가로 부상하기 위해 미국인들이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목표를 제시했다. ‘우리가 국가로부터 무엇인가를 언제나 얻으려고 하기 이전에 우리 모두 국가에 무엇인가를 조금 더 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윌슨의 문장은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더 웅변적으로 다듬어져서 표현되었다. ‘미국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마십시오. 대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오’
새뮤얼 윌슨
엉클 샘의 그림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 그림의 모델은 제임스 몽고메리 플래그 자신이었다.
첫댓글 수고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