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도 감탄한 조선시대 갓… 그 매력의 재발견
《갓을 쓴 양반을 빼고 조선시대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근대화를 거치면서 불필요한 전통문화를 상징했던 갓이 최근 여러 매체를 통해 새롭게 소개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을 제외하면 정작 세계 어디에서도 비슷한 모자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멀게는 200년 전 나폴레옹이 격찬했고, 구한말 한국을 방문한 서양 여행가들은 입을 모아 ‘한국은 모자의 나라’라는 기록을 남겼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킹덤’이라는 영화에 화려한 갓이 등장하여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엉뚱하게도 중국에서 갓의 기원은 중국이라며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도대체 갓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언제부터 우리와 함께했을까. 유물이 전하는 그 역사를 함께 살펴보자.》
한국의 갓, 고구려에서 시작
갓이라는 모자는 챙이 달려서 햇빛을 피하는 것이 주목적으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중국 신장의 실크로드에서는 2500년 전부터 짧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고깔을 썼다. 추운 초원에서 빠르게 말을 달려야 하는 지리적 특성을 감안한 결과이다. 현재 우리가 쓰는 갓과 같은 형태의 모자는 고구려의 감신총 벽화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둔황의 막고굴에 그려진 고구려인의 모습에서도 갓이 보인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자료로 볼 때 갓을 처음 쓴 사람은 고구려인일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에서 기마문화가 발달한 흉노를 비롯한 유목국가나 중국 어디에서도 비슷한 넓은 챙의 갓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갓은 일본으로 전해졌다. 일본 무사를 빚은 토기 인형(하니와)에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사진 출처 영국박물관
또 실물 갓의 흔적은 신라의 고분인 천마총과 금령총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갓은 자작나무로 만든 챙 부분이다. 그 위에는 고구려의 벽화를 연상시키는 각종 신화 속의 새와 기마인이 그려져 있어서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방증한다. 다만 머리에 쓰는 부분은 빠져 있다. 신라 고분 출토품으로 볼 때 삼국시대의 갓은 평소에는 관모를 쓰다가 갓이 필요하면 바깥의 양태(차양) 부분만 따로 쓰는 일종의 조립식이었을 것 같다. 고구려의 갓은 일본으로도 건너갔으니,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고훈시대의 인물형 토기(하니와)에도 갓과 같은 모자를 쓴 무사들이 보인다.
몽골 영향받은 패랭이
패랭이 같은 모자를 쓴 몽골의 석인상. 몽골 영향으로 고려는 물론 유라시아 전역에서 비슷한 모자가 널리 쓰였다. 강인욱 교수 제공
삼국시대의 갓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큰 변화를 겪으니, 당시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준 몽골의 영향이 결합되어서 챙이 짧은 패랭이가 등장한다. 패랭이의 흔적은 멀리 제주도의 돌하르방에도 남아 있다. 몽골제국의 곳곳에 남아 있는 석인상도 패랭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외형상 돌하르방과 가장 유사하다. 실제 몽골 간섭기에 제주도에 몽골인이 오래 거주했으니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제주도뿐 아니라 몽골식의 패랭이 모자는 전국 곳곳에 퍼졌다. 밀양 고법리에서 발견된 고려 말기에 문신으로 활동한 박익(1332∼1398)의 무덤에 남겨진 벽화에는 몽골 모자와 닮은 패랭이 같은 갓을 쓴 사람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비록 실물 자료는 없지만 공민왕 대에 검은색의 갓은 양반이 쓰고 흰 갓은 평민이 쓰는 법을 정했다고 하니,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양반의 갓인 흑립(黑笠)은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갓이 널리 유행한 것은 조선시대이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적 통치질서를 확립하며 엄격한 신분 질서를 강조했고, 각종 관직의 품계에 따라 갓과 장식을 규정했다. 갓은 단순한 모자를 넘어서 새로이 등장한 사대부 계급의 상징이 되면서 더욱 다양해지고 화려하게 발달하며 조선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고려시대로부터 전하던 패랭이는 평민의 것으로 남았다.
이렇게 갓이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수천 년간 이어진 한국의 상투이다. 2500년 전 고조선의 인물상과 2000년 전 부여의 인물상은 모두 빠짐없이 상투를 틀었다. 조선의 양반들도 멋있는 갓을 쓰기 위해서 머리를 다듬어 작은 달걀만 한 상투의 꼭지를 얹었다. 반면에 같은 시기 중국은 만주족의 변발이 널리 유행했으니 갓 같은 모자는 아예 발달할 수 없었다. 이렇듯 갓은 대외적으로는 한국을 대표하였고, 조선 사회 내에서는 성공한 양반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가 되어 양반의 수가 증가하고 신흥 부자들이 많아지며 갓 장식이 발달해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게 되었다.
갓의 위엄에 반한 나폴레옹
1816년 조선을 방문한 배질 홀이 쓴 책에 들어간 삽화. 나폴레옹은 그림 속 갓 쓴 노인의 위엄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배질 홀 ‘조선 서해안과 유구 항해기’
화려한 한국의 갓에 주목한 최초의 유럽인은 놀랍게도 유명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었다. 200년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결국 실각하여 세인트헬레나섬에 감금된 채 실의에 빠져 여생을 보냈다. 당시 영국 해군 장교였던 배질 홀(1788∼1844)은 1816년에 한국의 서부 해안과 일본 오키나와를 탐사하고 돌아가는 길에 나폴레옹이 유배돼 있던 세인트헬레나섬에 들렀다. 세상을 모두 잃고 좌절한 나폴레옹은 적국인 영국의 하급 장교와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홀의 아버지가 나폴레옹과 군사학교 동창이라 마지못해 만났고 대화도 무미건조했다.
하지만 홀이 가져온 조선의 그림을 보는 순간 나폴레옹은 눈을 반짝이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나폴레옹은 “노인네가 큰 모자, 긴 흰수염에 손에는 기다란 파이프를 쥐고 있네. 하! 정말 잘 그렸어!”라며 감탄했다. 평소에도 위엄 있는 이미지로 보이길 바랐고 큰 키가 아니어서 언제나 옷에 신경 쓰며 위엄을 드러냈던 나폴레옹이었다. 그러니 머나먼 조선에서 화려한 갓으로 위엄을 부린다는 것이 무척 와닿았던 것이다.
나폴레옹 이후 구한말 한국을 여행한 서양 여행가들은 ‘한국은 모자의 나라’라고 감탄하며 작은 키를 커버하고 화려한 패션을 자랑하는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 격찬했다. 그런데 외부의 평가는 국권을 침탈당하는 1900년대 이후에 급변하였다. 망해가는 조선에서 갓 쓴 양반을 보고 쓸데없이 큰 모자는 낙하산으로 쓰냐는 비아냥거림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도 조선 침탈을 본격화하며 유교에 사로잡혀 망국의 길로 간다는 침략 논리를 강화했고, 그 본보기로 화려한 갓을 대표로 들었다. 국운이 쇠하는 시점에서 갓은 망해가는 나라의 상징이 된 것이다. 나라를 잃어버리자 조선을 대표하던 갓은 근대화를 늦춘 구세대를 대표하여 망국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한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갓 쓰고 자전거 타기’ 같은 속담처럼 나폴레옹마저 감탄한,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명품인 갓은 구한말을 거치며 쓸모없는 것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매체에서 재현된 갓은 천편일률적으로 검은색의 흑립이고 옷도 흰색 도포여서 그리 멋있어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드라마와 대중문화에서 갓이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컬러의 의복과 어울려 재현되자 세계는 마치 200년 전의 나폴레옹처럼 다시 한국의 갓에 환호하기 시작했다.
한류 타고 ‘K복식’ 상징으로
세계 곳곳에 챙이 달린 모자는 많이 있지만 갓만큼 다채롭게 그 복식문화를 꽃피운 것은 없으니, 갓은 가히 한국의 미를 대표함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갓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자 중국 일각에서 갓이 중국제라는 주장도 나왔지만 갓은 고조선과 부여에서 유행했던 상투에 유목민들의 전투 모자가 결합된 대표적인 한국적 의복이다. 한국의 복식에는 갓뿐 아니라 북방 유목 전사들의 옷에서 기원한 철릭도 있다. 철릭도 고려시대에 몽골의 영향으로 도입된 이후 조선시대에 양반 신분을 대표하는 화려한 외출복이 되었으니 갓과 비슷하다. 이렇듯 중국과 다른 한국 고유의 복식문화 배경에는 북방의 여러 문화를 수입하고 자신의 사회에 맞게 발전시켰던 문화적 저력이 있다. 하지만 구한말 속절없이 외세의 침략을 당하면서 가장 자랑스러운 물건에서 가장 창피한 물건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의 여러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환영받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은 위태롭다. 바로 갓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이중적인 의미가 아닐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