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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水落山)
요약 :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경기도 의정부시 및 남양주시 별내면(別內面)의 경계에 있는 산.
위치 : 서울 노원구 상계동, 경기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別內面)의 경계에 위치
높이 : 638m
문화재 : 쌍암사, 석림사, 내원암, 석조미륵입상, 흥국사
서울의 북쪽 노원구 상계동과 경기도 남양주시 그리고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룬다. 서쪽에는 도봉산을 마주보며 남쪽에는 불암산(佛岩山, 높이 508m)이 위치한다. 수락산(水落山)이라는 이름은 거대한 화강암 암벽에서 물이 굴러떨어지는 모습에서 따온 것이다. 암벽이 많이 노출되어 있으나 산세는 그리 험하지 않다. 주말이면 도심에서 몰려온 산악인들로 항상 붐비는 산이며 북한산(北漢山), 도봉산(道峰山), 관악산(冠岳山)과 함께 서울 근교의 4대 명산으로 불린다. 높이는 638m이다.
수락산 정상에서 남쪽에 있는 불암산(佛岩山)으로 능선이 이어지며 동쪽에 금류계곡(金流溪谷)이 있다. 서쪽 비탈면에 쌍암사(雙岩寺)·석림사(石林寺), 남쪽 비탈면에 계림암(鷄林庵)·흥국사(興國寺), 동쪽 비탈면에 내원암(內院庵)이 있고, 내원암의 법당 뒤에는 고려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m의 석조미륵입상이 있다.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되자,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이곳 석림사계곡에서 은거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시습을 존경하던 박세당(朴世堂)은 석림사계곡에 김시습을 기리는 청절사(淸節寺)를 세웠는데 청절사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노강서원(鷺江書院)이 세워졌다. 노강서원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박태보를 기리는 서원이며 박태보는 박세당의 둘째아들이다. 남쪽 불암산과 사이에는 선조의 부친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가 있다. 사찰로는 흥국사(興國寺), 학림사(鶴林寺), 내원암(內院庵), 도안사가 있다.
수락산의 식물상은 신갈나무가 많고 소나무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가 자란다. 1977년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89년 수락산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본격 개발되기 시작했다. 계곡유원지가 지정되고 체육시설과 삼림욕장이 조성되었다.
등산코스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가장 경치가 좋고 수락산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다. 사기막 버스정류소에서 매표소를 지나 약 1.3km를 올라가면 은류폭포를 만나고 우측으로 거대한 암벽의 소리바위가 나온다. 은류폭포에서 다시 300m를 올라가면 금류폭포를 만나고 약 100m를 더 가면 내원암이 나온다. 다시 서쪽으로 오르며 약 650m를 더 가면 수락산 정상부에 이른다. 사기막에서 오르는 또다른 길은 향로봉을 지나 영락대, 칠성대, 기차바위를 지나는 등산로가 있는데 가파른 암벽능선을 타고 가는 험로이기 때문에 초보자는 위험한 길이다. 그 외 상계동 은빛아파트에서 물개바위를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고 의정부시 장암동에서 시작해서 노강서원과 석림사를 거쳐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채희묵의 산행기]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게 한 수락산 산행
서울경제 기사 입력일 : 2003.12.24.
!!!!!! 매월당이 수락산에 들어오기까지!!!!!
오늘 (2001년11월10일;토요일) 수락산 산행으로 나는 뇌리에서 멀어졌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1435-93)과 한결 가까울 수 있었다.
10여년전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무량사(無量寺)에 들렀을 때 산신각에 그의 영정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정은 중이 아닌 모습이었다. 차양이 좀 짧은 밀짚모자형의 검은 모자를 썼고 두루마기를 입은 상반신 초상화였다. 코수염에 턱수염까지 나 일반인 모습이었다. 염주로 만든 모자끈이 양볼아래로 드리워져있다. 한번 깊이 있게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갔었다.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알듯이, 매월당은 단종왕위를 찬탈한 숙부 수양대군과 그를 도운 세력들에 대해 살아서 저주한 생육신의 대표선수다. 성삼문이 죽음으로 항거한 사육신의 대표선수이듯이...
매월당은 한양 반궁동 (명륜동)에서 한 하급 무인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한 지 8개월만에 글을 깨쳤으며, 3세때에는 한시(漢詩)를 지었다. 5세때에는 중용, 대학을 통달하였으며, 세종대왕 앞에서 글을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당대에는 ``5세신동``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세종대왕으로부터 장래 좋은자리를 약속받기도 했던터다.
1455년 (단종 3년) 음력 윤 유월 열흘. 경회루 연못에 이슬 맺힌 넓직넓직한 잎위로 화사한 연꽃이 피어있었다. 단종은 경회루에 올라 세상사의 비정함을 슬퍼하고 있었다. 세종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우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등을 차례로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 겸 내외 병마 부통사 자리를 거머쥐고 조카의 옥좌를 노리고 있었던터에 이날 경회루 단종앞에 나타난다. 옥쇄를 내놓으라고 으르기 시작했다. 단종은 예방승지 성삼문으로 하여금 국쇄를 가져오라하여 경회루 다락 아래서 수양에게 넘겨주고 임금자리를 내준다. 그 이튿날로 수양은 근정전에서 7대 왕 세조로 등극하고, 단종은 창덕궁에 상왕으로 물러 앉으며,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다. 물론 고려때 숙종도 조카로부터 왕좌를 빼앗은 왕이었다.
자고로, 권력이란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지금도 민주당에서 일어나는 당권 주자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는 이때, 민주화 투쟁에 일생을 보내면서 대통령 임기 일년을 앞두고 당총재직을 내놓은 김대중 대통령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20세가 채못되어 결혼한 매월당은 삼각산 (북한산) 중흥사 (현재는 터만 남아 있음)에 들어가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다. 공부하기에는 예나 지금이나 조용한 산사가 그만인 모양이다. 공부를 하다 시동으로부터 단종 폐위 소식을 들은 매월당은 심히 분개한다. 가져온 모든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짜르고 방랑의 길을 떠난다. 마누라는 약골이라서 어린애 하나도 못 낳고 죽는다.
바리를 등에 메고 묘향산, 금강산, 오대산 등 온산을 다 누빈다. 워낙 시문에 뒤어난 천재이다 보니 가는 곳마다 주옥같은 시와 여행기를 남긴다. 1458년에 낸 관서지방 여행기 ((탕유관서록 宕遊關西錄)),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금강산·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지은 글을 모아 1460년에 낸 ((탕유관동록 宕遊關東錄)), 삼남지방을 유랑하여 1463년에 낸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이 그의 20대 방랑생활에서 나온 작품이다.
우리나라 한문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금오신화(金鰲神話)))는 그가 경주 금오산 (지금은 남산이라고 부름) 중턱 용장사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둥근 석탑이 특이하다)에서 매월당이라는 초당을 짓고 머무르며 쓴 소설이다. 조금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천재인 그의 머리에서 나옴직하다.
거기에서 8년 남짓 머물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수락산 동봉 (東峰) (동봉도 김시습의 또다른 호) 에 폭천정사(暴泉精舍)란 이름의 초당을 짓고 10여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충 옥류폭, 은류폭을 지나 금류폭 위에 있는 내원암 근처가 아닌가 싶다.
!!!!!!!수락산의 늦가을!!!!!!
원래는 지난 토요일 수락산을 오를 계획이었는데, 전날밤 11시경 이 상무가 갑자기 일이 생겨 못가겠다는 전화다. 혼자라도 가 보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역시 혼자는 의지가 약해 안됨을 알았다. 그래서 한주 늦은 오늘에 가게 됐다.
그런데 전날 나한테 문제가 생겼다. 축 가라앉은 기분에 소주를 했더니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눈을 떠보니 8시. 동국대역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다행히 전화가 와서 이 상무가 대치역까지 오게 되는 불상사가 생겼다. 준비없이 허겁지겁 등산화를 신고 지하철에 내려가 조금 있으니 이 상무가 내린다. 그래서 예정보다 한시간 이상 늦은 셈이다. 고속 터미널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 수락산역에 도착해 산입구에 들어 서니 10시. 날씨는 좀 쌀쌀하나 맑은 가을 하늘이다.
수락산 산행 안내판이 설명과 함께 크게 서 있다. 산이 바위로 되어 있어 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떨어진다 해서 수류(水流)산이 아닌 수락(水落)산이란다. 그래서 규모는 작지만 폭포도 많다.
!!!!!!!!명성황후와 용굴암!!!!!!!!!
김시습이 머물었다는 얘기와 명성왕후(1851-95)의 흔적이 이 산에 있다고 써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한 민겸호(1838-82)를 죽이고 경복궁으로 난입한 일부 성난 군인들을 피해 여주친정으로 피신 가는 도중 이곳 용굴암에 숨어 하루 저녁을 보내면서 무사하길 비는 치성을 드린 일이 있었다. 난이 진압되고 명성황후가 다시 세력을 잡게 되자 용굴암 주지에게 하사금을 내려 현존하는 대웅전을 지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친정 생가는 지금 여주읍 능현리에 있다. 연전에 갔을 때, 살고 있는 사람이 그냥 지켜주고 있다고 얘기를 해준 기억이 있다. 집 동쪽으로 명성황후 탄생 구리비각이 있고, 그 옆에는 받침석 거북이와 지붕석을 갖춘 명성황후 6대조 민유중 (1630-87)의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가 있는데 거북이가 묘소쪽 (서쪽)을 향해 목을 빼어 틀고 있다. 200년후 6대손 명성황후가 궁궐에서 시달릴 걸 염려해 경북궁쪽을 쳐다보고 걱정하는 뜻에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내판에 이르기 전에 덕성여대 생활관이 입구에 자리잡고있다. 옛날 ``우우당``자리를 덕성여대가 사들인 것이다. 우우당은 영조때 영의정을 두 번 지낸 영풍부원군 홍봉한이 세운 당시의 벽운동(碧雲洞) 별장 안채의 일부이다. 현재 덕성여대 생활관 자리에는 우우당 이외에도 주춧돌로 미루어 보아 여러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못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철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을 볼 수가 없었다.
홍봉한은 뒤주에 갖혀 죽었다는 비운의 사도 세자의 장인이다. 맏딸인 혜경궁 홍씨(1735-1816)가 1743년 9살에 세자빈으로 책봉될때까지 어린시절을 이곳 수락산 자락에서 자리면서 감성을 키웠고 후에 (한중록)과 (1795) 같은 문장을 남겼을 것이다. 같은 나이였던 사도세자가 28세에 죽고난 후에도 55년을 더 살았으니 비통함에 얼마나 속을 태우며 살았는 가는 한중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효심이 지극한 아들 정조가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주려고 화성군 화산자락에 용주사 (龍珠寺)를 지어 능을 돌보게 했다. 융릉(隆陵)이라는 이름 하에 혜경궁홍씨와 살아서 못다한 정을 나누고 있다. 그 옆으로 1800년에 죽은 정조의 능도 건릉(健陵)이라는 이름하에 있는데 한 많았던 어머니 아버지를 죽어서도 곁에서 모시고 있다. 지금은 한적한 공원이 되어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
가을도 이제는 끝자락이다.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못생긴 단풍이 미풍에 흔들거리며 마지막 가는 잎새을 보아달란다. 지난 수능고사 추위에 잎이 많이 졌나보다. 단풍보다 낙엽에 눈을 돌려야 할 때인 것 같다. 곳곳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이다. 돌과 낙엽을 빼면 발밑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등산객의 발길에 으깨져 푹신푹신 이불솜 같다. 마지막으로 등산객에 봉사하겠다는 뜻인지 싶다. 국립공원이 아니라서인지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가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시간 10여분을 걸으니 약수터가 나온다. 넓은 바위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앉아서 가는 가을을 즐긴다. 다 마신 물병을 다시 채웠다. 이제는 오르막길의 경사가 심해진다. 흔한 이름인 깔딱고개길이란다. 10여분 오르니 능선이 나오면서 시야가 넓어진다. 11시 반이다. 왼쪽 능선을 타고 가면 곰바위가 나오고, 북쪽으로 넘어가면 석림사와 장암역이 나온다.
!!!!!!! 상계동 아파트단지로 변한 마들평야!!!!!!!!
80년대 부족한 주택을 짓는라 평야지대였던 마들들녘이 상계동의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렸다. 이 상무는 이 들녘이 김포평야와 함께 서울의 가장 넓은 평야지대였다고 설명한다. 갈대가 많아 노원역(蘆原驛)이 있었던 이곳은 그 옛날 북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역에는 당연히 말이 많았을 게다. 그래선 말(馬)들이 많은 들녘이란 뜻에서 ``마들``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농사를 짓는 평야지대라 노래가락도 당연히 있다. 서울의 유일한 농요(農謠)로 마들농요가 구전되어 온 것을 채록해 지난 1996년 복원했다. 아홉개 가락으로 구성되었다. 아침부터 모심고 김매고 저녘 하루일을 마치기까지의 과정을 노래가락에 담았다.
첫 가락인 ((아침노래))로
``둘러주소 둘러주소 이논돔배를 둘러주소
이논돔배를 둘러주면 준치자반 주신다네…``
((열소리(모심기)))의 모심는 소리, 호미로 애벌 맬 때의 두루차소리, 두벌 맬 때의 ((미나리)) 및 다 매갈무렵인 저녁나절에 신나게 부른 꺽음조의 ((저녘노래))가 주조를 이루며, 노래 중간에 ``무엇이 그리워 상사났나. 30먹은 노처녀가 시집 못가 상사났네…” 의 ((네엘 넬 넬 상사디야))의 해학적인 가사와 ((방아타령))이 흥을 돋군다. 혜경궁 홍씨도 이 농요를 듣고 자랐을 것이다.
!!!!!!!!!!!!정상을 향해서!!!!!!!!!!!!
오른쪽 능선을 타면 정상(637.7m)으로 간다. 이 길은 숨이 넘어간다는 깔딱고개의 연장선이다. 여기서부터는 바위를 주로 타야한다. 두줄 밧줄을 설치해 놓아 잡고 가기 때문에 떨어질 염려는 없다. 온 산이 주황색과 갈색이 주류다. 홍색과 노란색은 벌써 다 사라졌다. 위로 올수록 낙엽진 나무들이 많다. 서쪽으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우뚝 서 있다. 네 형제가 정신없이 손잡고 달려가다 갑자기 큰형 북한산이 U-턴을 하는 바람에 수락산이 손을 놓쳐 불암산과 함께 떨어져 야속한 듯 두형을 옆으로 바라보고 있다.
수락산에는 모가 나지 않은 기암괴석이 많다. 이름도 많이 붙여 놓았다. 물개바위, 철모바위, 코끼리바위, 치마바위, 독수리 바위, 홈통(기차)바위, 탱크바위, 계란바위, 곰바위, 하강바위…. 가히 수락산 정상 능선부분은 자연 바위조각의 전시장이다. 남근바위는 이름을 아예 붙여놓지를 않했다.
나는 가는 도중 이름 지어진 바위를 확인해보려 애를 썼다. 독수리바위가 오똑 서있는 곳에 이르렀다. 도무지 독수리 근처도 못가는 듯싶다고 하니까, 한 노년에 접어든 분이 내 소매를 잡아 알아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운다. 날기 전 날개쭉지를 좀 들썩한 모습이다. ``두 마리만 되어도 한 마리를 가져가도 될텐데``라고 농을 해봤다. 사진으로 담을 수 밖에 없다.
이 상무가 북한산이나 도봉산보다 오르는 게 한결 재미있다고 말한다. 나도 동감이었다. 계속해서 바위 위나 사이를 밧줄을 잡고 오른다. 밧줄 없는 바위를 타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등산객들이 흙산보다 돌산을 많이 찾는가 보다. 지난 일요일 한 등산객이 이 산 바위를 타다 추락해 심하게 다쳤다는 뉴스를 언뜻 TV 에서 들었다. 역시 위험하다는 얘기다.
북쪽으로 정상 200m를 남겨놓은 지점에 넓직한 곳에 사방의 이정표가 있고 라면, 막걸리, 커피를 팔고 있다. 이 상무는 정상은 생략하겠단다. 그래도 나는 정상을 올라야만 한다.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맛 또한 어느 것하고 비길 데가 없기 때문이다. 한 직장 동료들이 정상 표지석 큰 바위를 등에 대고 북쪽을 향해 경관을 즐기면서 도시락을 들고있다. 주위에 여러 팀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고인돌처럼 밑에 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스모그가 조금 있다.
!!!!!!!단종과 단종비 및 사릉!!!!!!!!
남동쪽으로 금곡 못미쳐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의 능인 사릉(思陵)이 보일 것만 같다. 단종보다 한살이 많은 정순왕후는 82세까지 산다. 비운에 간 왕을 둔 왕비는 그 남편 몫까지 살아야하는 의무라도 있단 말인가. 비통함에 제명대로 못 살 것 같은 생각인데 말이다. 사도세자비도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던가!
24세에 폐위된 후 3년만인 27세(1457) 12월 24일에 영월에서 사약을 받았으니 64년을 더 살았다는 얘기다. 지금도 일반에 공개가 안된 사릉에서 머나먼 영월땅에 외롭게 묻혀있는 남편을 생각하며 불쌍히 여기고 있을것이다. 언젠가는 한쪽을 이장해 죽어서라도 같이 있도록 해주는 것이 후세의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만리(千萬里) 머나먼 곳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혼자 앉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우러 밤길 예놋다``
폐위된 단종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될 때 의금부도사였던 왕방연이 호송한 후, 한양으로 다시 발길을 돌릴 때 그의 심정을 읊은 시조다. 어디 왕방연만 그렇겠는가. 말 못하는 산천초목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의 심경을 그의 시를 통해 들어 보자.
한번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오니 (一自寃鳥出帝宮)
짝 잃은 외로운 몸 깊은 산중에 있구나(孤身雙影碧山中)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들지 못하고 (假眠夜夜眠無假)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이 남아서 (窮恨年年恨不窮)
산에 울음소리 끊어지고 달이 흰 빛을 잃어 가면 (聲斷曉岑殘月白)
피눈물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가 먹어 이 사연 모르련만 (天聲尙未聞哀所)
어찌하여 수심 많은 사람의 귀에만 홀로 밝게 들리는가 (胡乃愁人耳獨聽)
아마도 나이 어린 아들이 불쌍해 신하들에게 신신당부한 아버지 문종이나 어진 할아버지 세종이 너무도 생각났을 것이다.
!!!!!!! 매월당과 다시한번 대화를!!!!!!!!!!!!
매월당은 이 곳 정상에 와서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서쪽 내원암쪽을 유심히 내려다 보았다. 그의 흔적이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다.
설잠 (雪岑:높고 아른한 눈덮인 산)을 법명으로 한 매월당은 설악산 오세암에 기거할 때 친분이 두터운 양양부사(襄陽府使) 유자한(柳自漢)이 먹을 것 등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47세에 맞은 둘째 부인도 죽고 난 후다. 채이긴 하지만, 소동라라는 기생을 소개해주기도 하였다. 그가 딱따구리라는 제하에 쓴 시 한수를 감상해보자.
딱따구리야 딱따구리야 넌 뭐가 그리 궁하여 (啄木啄木爾何窮)
뜰에서나 어디에서나 그렇게 뚝딱거려 대느냐 (啄我庭樹聲丁東)
두들겨도 시원찮아 시끄러이 짖어가며 (啄之不足鳴怡怡)
인간이 싫어서 숲에 숨어 산다지만 (畏人避向深林中)
숲이 깊을수록 메아리는 더하더라 (林深山靜啄愈響)
붙어사는 벌레는 얼마나 잡았느냐 (懼機(木差)牙枝上忠)
벌레가 굵직해서 너는 좋겠고 (두多蟲老飽汝腹)
숲을 살리는 공로도 적지 않지만 (爾於啄두多全功)
세상에 백성을 등쳐먹는 놈은 (世上두物害民者)
아무리 들끓어도 내버려두니 (千百基數無人攻)
그 날카로운 부리로 나무는 살리지만 (縱汝利嘴除木災)
인간을 빠는 벌레는 어쩔수 없구나 (人間도災(言巨)能空)
*``두``는 좀벌레 ``두,`` 嘴 (부리 취)는 口(입구)가 빠짐. ( )에 있는 한자는 하나임.
아부하고 고혈을 빠는 인간 쓰레기를 해치우는 천적이 없음을 딱따구리를 가지고 시를 지어 본 것이다. 단종과 수양대군을 생각하면 조정에 있는 관료들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수락산에 왔으니 여기에 살면서 지은 시 한 수를 맛보는 것도 괜찮을 성싶다. 친했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추강 (秋江) 남효온 (南孝溫:1444-1492)이 수락산에 찾아 왔을 때 지은 ((추강에 화답함 (和秋江)) 제하의 네 수중 두수다.
건성으로 한세월 보내노라니 (堪笑消磨子)
중들이 나더러 스승이라 하네 (呼余곤者師)
소싯적엔 선비 노릇도 할 만하더니 (少年儒甚子)
늘그막엔 묵자가 더 마음에 들어 (晩節墨偏宜)
가을엔 달빛에 술타령이고 (秋月三杯酒)
봄에는 봄바람에 시타령인데 (春風一首詩)
쓸 만한 사람 부를 수 없으니 (可人招不得)
누가 있어야 흥도 나지 (誰與步施施)
l ``곤``은 머리털 늘어질 표(長+터럭삼+ 절름발이왕 받침)
부들이 자라는 못에 봄이 오니 (春意滿蒲地)
떠도는 미물에 배우는구나 (연연活卽師)
처마끝이 짧은게 다행이라 (茅첨短更喜)
다사로운 볕도 서로 좋은데 (風日원相宜)
시냇가에 나가 매화도 찾고 (溪畔探梅興)
술 한잔 앞에 놓고 풍월도 하네 (樽前問月詩)
그대와 마주 앉아 얘기 나누면 (逢君聯席語)
나는 어느새 내멋대로라 (吾欲效東施)
* ``연``은 儒의 인(人)변 대신 벌레충으로 꿈틀거릴 ``연``
* ``원``은 湲의 삼수변대신 날일변
아홉살 차이지만 서로 죽이 잘 맞아 장안에 갈 때나 추강이 놀러 오면 술 마시고 시를 지으며 잘 지냈다고 한다. 서정성이 물씬 풍긴다. 1481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안씨도 몸이 허약해 곧 죽고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하산!!!!!!!!!!!!!
정상에서 다시 이정표가 있는 곳에 돌아 왔다. 12시 반. 막걸리 한잔씩 걸치고, 컵라면을 하나 시켜 김밥을 곁들였다. 정상 길목이다 보니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 올라 올때는 계곡으로 왔는데 내려갈때는 능선을 따라 당고개로 길을 잡았다. 오후 1시.
역시 바위위로 엉금 엉금, 아래로 몸을 숙이며, 바위사이로 가까스로, 끝만 고정되어 있는 로프를 잡기도 하고, 쇠말뚝에 매어놓은 밧줄을 따라 산등성을 따라 내려간다. 못 알아챘던 철모바위가 머물었던 쪽 큰 바위에 다소 곳이 얹혀 있다. 이 상무 머리 위에 너무 눌리지 않게 살며시 올려 놓고 한 컷 찍었다.
내려오다 코끼리바위는 안보인다고 하니 한 등산객이 바위끝으로 잡아끈다. 맞은편에 집채보다 더 큰 바위위에 코끼리 새끼 한 마리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바위 겨드랑이 틈새에 가까스로 매달려있는 바위는 금방이라는 올라오는 등산객을 덮칠 것 같이 아슬아슬하다. 계란바위도 만나고, 남근바위도 보았다.
넓은 바위에 또 한사람이 전을 벌렸다. 치마바위가 어디있냐고 물어보니 있는자리가 치마바위란다. 세폭 치마라며, 가운데 폭은 넓고, 양쪽 폭은 좁단다. 치마폭에서 매일 노니 복도 많다며 몇 년째냐고 물으니 5년 됐단다. 혹시나 해서 매월당이 머물던 곳이 어디인지 아느냐고 물으니, 역시나 금시 초문이라는 표정이다. 하강바위, 탱크바위는 놓치고 말았다. 아는 사람이 알려주지 않으면 스스로 알기란 쉽지가 않다.
계속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데 최단거리 200m 옆에 있는 용굴암가는 이정표가 서있다. 들르자고 하기가 민망해 그냥 스쳐지나갔다. 명성황후의 자취가 있는 암자인데 말이다. 다음에 기회를 갖기로 했다.
!!!!!!!!!!!!학림사!!!!!!!!!!!!!
한참을 내려오니 절 하나가 아늑하게 자리잡고있다. 2시 50분. 학림사 (鶴林寺)다. 이 상무는 너무나 좋은 자리라며, 묘자리로도 명당이란다. 우리 눈으로 봐도 좋은데 풍수가들이 보면 뿅 갈 정도다. 학이 알을 품고있는 형국 (학지포란: 鶴之抱卵)이라서 鶴林이란 이름이 부쳐졌단다. 남쪽은 불암산이 정면으로 보이고 나머지 세 방향은 산등성이로 둘러져 있다. 동쪽으로는 골짜기로 물이 흐른다. 이 곳 주위 나무들은 빛깔도 선명한 단풍으로 줄곳 이산을 걸으면서 못보던 경치다. 자리가 좋으니 단풍도 곱게 물 들었나보다.
671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전한다. 불행히도 1597년 정유재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1624년에 무공스님이 중수한 이래 몇 차례에 걸쳐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학림사는 나한도량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기도를 봉행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영험 있는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오백나한전, 삼신각, 요사채, 청학루가 있다. 왼쪽 대각선으로 산밑에 꽤 큰 미륵 석불이 2층의 석탑을 이고 서 있다. 대웅전 안의 석가모니불은 신라 때, 절 입구 따로 홀로 있는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사찰주위에는 오래된 고목과 소나무가 많이 있다. 청학루 앞 비탈에는 정원을 조성할 요랑인지 삽을 든 스님과 인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골짜기 길옆 용굴암 가는 표지판 가까이에 흰 페인트로 싯귀를 써놓은 두개의 돌이 서있다. 하나에는,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한 티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다른 하나에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 멋에 살건마는, 이 몸은 언젠가는 한줌재가 아니랴. 묻노라 주인공아, 어느 것이 참 나련고?``
그 좋은 위치에 감탄을 연발 하고서 절 경내를 나서는데 당고개 주택가에 내려올 때까지 길을 씨멘트로 깔아 놓아, 누구를 위한 페이브먼트인지 모르겠다. 원래 그대로의 정다운 숲속길이 산책하기에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남쪽 건너편 불암산 (508m) 암봉 밑으로 온통 주황색 불꽃이 피어 형님 수락산과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당고개역 옆 조그만 생맥주집에 들어 간 시각은 3시 20분.
말년에 병이 들자 매월당은 부여 무량사에 들어가 한 많은 59년 생을 마친다.
그러나 그는 관료가 안되었기에 그의 시, 문, 세평등 많은 주옥같은 글을 남긴 것 같다. 매월당은 임종시 화장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여 3년간을 관속에 두었었는데 3년후에 열어보니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같이 변하지않았다고 전한다. 스님들은 매월당이 죽어서 부처가 된 것 같다면서 화장을 하였더니 사리가 나와 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사리는 현재 부여 박물관에 보관중이고, 부도는 무량사에 그대로 있다. 매월당과 많은 대화의 기회를 제공한 수락산과 작가 이문구님에 감사드린다.
(2001년11월 11일:일요일)
서울 수락산 / 암벽 등반 재미 겨울 산행 명소
매일경제 기사 입력 : 2003.02.02.
수락산은 서울의 북동쪽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기암괴석들이 많 은데다 깊은 계곡의 수려함까지 갖추고 있는 명산이다. 거리상으로도 가까워 수도권 사람들의 대표적인 겨울 산행 명소로 손꼽힌다. 정상 부의 능선을 거닐며 건너편의 도봉산과 북한산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서울의 북동쪽 끝에 우뚝 솟아 있는 수락산은 덕릉고개를 경계로 불 암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수락산의 주봉인 향로봉(해발 638m)에서 남쪽의 540봉(도솔봉)까지 이어지는 약 600m 구간에는 돌결대 바위와 삿갓바위를 비롯한 많은 암릉들이 군데군데 솟아 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계곡길을 따라 땀 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올라온 등산객들은 이 구간을 지나면서야 비로 소 수락산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다. 곳곳에 있는 아찔아찔한 암벽 코스가 적당하게 긴장감을 더해서 더욱 좋다.
몇몇 위험구간에는 자일이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 큰 걱정 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위험구간을 통과할 때는 서두르지 말고 반드시 질서를 지켜야 하며, 미리 장갑을 준비하는 것 또한 잊지 말 아야 한다.
■도봉ㆍ북한산 전경 장관■
수락산의 주봉을 목적지로 정한 다음 산을 오른 후, 당고개 또는 도 봉동 쪽으로 하산할 요량이라면 수락산 유원지에서 옥류폭포를 거쳐 주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선택하는 것이 무난하다. 무엇보다도 산행 을 마친 후에 서울로 돌아오는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수락산의 북동쪽 관문인 청학리에서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유 원지까지는 약 20분이 소요된다. 이곳 유원지 일대는 '마당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원지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다시 1 0분 가량 산을 오르면 큰 폭포 하나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겨울에는 빙폭으로 변하는 이 폭포의 이름은 옥류폭포. 바로 이곳에서부터 수 락계곡의 본격적인 등산로가 펼쳐진다.
옥류폭포에서 호젓한 등산로를 따라 은류폭포와 212계단을 거쳐 내원 암까지 오르는데는 약 40분이 소요된다. 약수터가 있는 내원암은 조 선 정조 때 300일 기도를 올린 끝에 순조를 낳았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내원암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20분쯤 더 올라가면 608봉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왼쪽으로 다시 15분쯤 더 올라가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주봉 꼭대기에 도착하게 된다. 주봉에서는 수락 산의 완만한 능선과, 마들 평야 건너편의 도봉산과 북한산의 시원스 런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코스 선택 지혜■
당고개에서 도솔봉을 거쳐 주봉으로 오르는 코스는 수락산으로 접근 하는 가장 편리한 코스다. 과천선 (4호선) 당고개 역에서 불과 10분 만 걸어가면 곧바로 등산로와 연결된다. 주택가가 끝나는 등산로 입 구에서 송암사까지는 30분, 흔히 540봉이라 불리는 도솔봉까지는 약 40분이 소요된다.
하산할 때는 내원암을 거쳐 청학리까지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해도 되 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까지 염두에 둔다면 608봉과 석림사를 거 쳐 도봉동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무난하다.
■수락산 주요 등산코스■
ㆍ청학리-수락산유원지-옥류폭포-내원암-주봉 (약 1시간 50분 소요)
ㆍ당고개-송암사-도솔봉-돌결대바위-주봉 (약 1시간 50분 소요)
ㆍ도봉동-덕성여대 생활관-시립양로원-주봉 (약 2시간 10분 소요)
ㆍ하촌-노강서원-석림사-620봉-주봉 (약 1시간 40분 소요)
ㆍ의정부-동막골-509봉-영락대-주봉 (약 2시간 10분 소요)
수락산 산행지도
[수락산&불암산] 산행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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