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핑크'와 '보라보라'가 지천인 섬, 일단 한번 와보세요
전남 신안 붉은 정열의 옥도 작약과 박지도의 몽환적 라벤더
양진형
▲옥도 작약 정원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기후 변화로 봄이 떠나는 속도는 갈수록 빠른 듯하다.
하지만 아쉬운 봄의 뒤안길에서 여전히 뜨거운 정열을 꽃피워내고 있는 섬 꽃들이 있다.
전남 신안의 옥도 작약과 '퍼플섬'으로 이름난 박지도의 보랏빛 라벤더가 그 주인공이다.
▲퍼플섬(박지도) 라벤더정원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오월의 끝자락, 이름마저 고운 신안군 하의면 옥도(玉島)와 퍼플섬 박지도를 향한다.
새벽바람을 가르며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신안의 관문인 천사대교를 넘어선다.
붉은 작약의 섬에서 보랏빛 라벤더의 섬으로 이어지는 이 여정은,
단 하루 만에 점점이 박힌 남도의 다도해와 역사, 그리고 계절적 감성을 모두 품을 수 있는 완벽한 무박 여행길이다.
▲퍼플섬을 방문한 여행객들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문명의 발달로 4개의 해상 연륙교(압해대교, 천사대교, 중앙대교, 신안제1교)와 해상 인도교들이 유기적으로 놓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줍은 아름다움' 옥도의 붉은 작약
이번 여정의 베이스캠프는 안좌면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퍼플섬 주차장이다.
이곳에 차를 대고 나면 신안의 작은 섬과 섬을 잇는 더 깊숙하고 은밀한 섬 여행이 시작된다.
전체적인 동선은 주차장에서 출발해 반월도~옥도를 먼저 거친 뒤, 다시 반월도로 돌아와 박지도~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반월선착장~옥도 유람선을 타기 위한 행렬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먼저 안좌면과 반월도를 연결하는 약 700m의 해상 보행교인 '문브릿지(부잔교)'를 사뿐히 걸어 건넌다.
보라색 의복을 입거나 소지품을 간직하면 이 다리는 무료패스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걷는 길, 아직 갯벌을 드러내지 않은 푸른 바다는 폐부 깊숙이 청량함을 선물한다.
▲해상에서 바라본 신안군 하의면 옥도 전경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반월도 선착장까지는 16인승 전동카트(왕복 4천 원)에 몸을 싣는다.
싱그러운 초록 터널을 5분여 달려 반월선착장에 도착한 후, 최대 250명이 탈 수 있는 유람선으로 갈아탄다.
그렇게 해상으로 약 20여 분을 더 달리면 마침내 옥도 선착장에 닿는다.
▲옥도 작약 축제장 전경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이 섬에 도착하면 시간의 주인은 이제 자신이다.
빨갛고 노랗고, 때로는 하얀 작약꽃 28만 본(22.6ha)이 식재된 축제장만 둘러본다면 1~2시간이면 족하다.
하지만 작약 축제장 능선 너머로 해안을 따라 이야기처럼 아득히 이어지는 소로길을 걸으며
세 개의 마을까지 모두 둘러본다면 4시간 정도는 여유 있게 잡아야 한다.
▲탐스럽게 핀 옥도 작약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먼저 발길이 닿는 곳은 작약 축제장이다.
지난 15일부터 시작된 제2회 작약축제는 25일로 끝이 났지만 섬은 아직 작약꽃으로 가득하다.
섬 이장 장인성씨는 "아직 꽃이 지지 않아 당분간은 발길을 이끌기에 충분한 탐스러움을 자랑하고 있다"고 전했다.
▲옥도 남서쪽 작약 정원에서 바라본 신안 도초도와 비금도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축제는 작은 섬 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가설 음식점은 손님들로 들떠 있고, 한편에서는 작약꽃 화분이 2만 5천 원에 판매되고 있다.
또한 곱게 포장한 작약 비누도 매대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말린 작약 뿌리는 귀한 한약재로도 판매된다고 하니, 작약은 섬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작약꽃비누 등 기념품 판매 센터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낙지 섬' 옥도의 숨은 이야기
옥도는 단순히 아름다운 꽃 섬에 머물지 않는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이곳은 요충지를 선점하려는 일본 해군이 주둔했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일본군이 설치했던 무선관측소와 측후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대한민국 기상청의 시발점이 되었다.
▲옥도 갯벌에서 맨손으로 낙지를 잡고 있는 한 주민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화려한 축제장을 뒤로하고 무연한 갯벌이 펼쳐진 해안 길로 접어든다.
신안에서도 내로라하는 낙지 생산지답게 옥도 갯벌은 곱고 차지다.
서남해안 갯벌들이 환경오염으로 제 기능을 못 하는 곳이 많다지만, 이곳은 여전히 청정 그 자체다.
▲바닷물이 빠진 옥도 갯벌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회색의 빛깔 고운 개펄은 '난 아직 건강하다'라는 듯 조용히 숨을 쉬며 수많은 생명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칠게와 농게, 짱뚱어들이 제집을 들락거리기에 바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보채는 파도에 노곤하던 거룻배도, 이제는 물이 빠진 갯벌 위에 널브러져 달콤한 한숨을 자고 있다.
▲전성기 때 하루 100 마리 낙지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송정찬 어르신. 지금은 낙지잡이는 접고 농삿일에 열중하고 있다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이러한 해안도로를 따라 두 개의 마을을 지나니, 어느덧 120년 전의 역사 현장과 마주한다.
마침 그 앞 논에서 모내기를 위해 트랙터로 논갈이를 하던 옥도 맨손 낙지잡이 장인 송정찬 어르신(80)을 만났다.
어르신은 "한창일 때는 하루에 100여 마리까지 낙지를 잡았다"며 옛날을 회상하셨다.
지금은 기력이 부쳐 낙지잡이를 접으셨단다.
그도 그럴 것이, 낙지잡이는 개펄 속 낙지 구멍을 정확히 감지하고 맨손이나 삽을 활용해 재빠르게 낚아채야 하는
고도의 순발력과 체력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다는 우물터와 공동 목욕탕이 있었다는 곳(산기슭 우측 )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송 어르신으로부터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다는 우물터와 공동 목욕탕의 위치를 전해 들었지만,
아쉽게도 그 흔적은 과거 농지 개량 작업 중에 사라져 버려 찾을 수 없었다.
'옥도 팔구포방비대' 터로도 불리는 이 유적은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 해군 함선의 집결지이자 식수 보급로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옥도 짓제산 정상에 있는 팔구포 조형물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팔구포'라는 이름은 옥도를 중심으로 주변에 여덟 개의 물길이 열려 있어 붙여졌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은 거제도, 어청도, 월미도, 가덕도와 함께 이곳 옥도에 군사 용지를 마련해 동아시아 패권을 노렸다.
유적의 흔적은 비록 사라졌지만,
그곳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우측 언덕에는 기상청이 2017년에 세운 표지석이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근대 기상업무의 발상지(옥도)'라는 제목의 표지석에는
"1904년 3월 25일부터 1906년 4월 목포시 대의동으로 이전하기까지 약 2년간 기상업무를 수행해왔다"고 적혀 있어
역사적 현장임을 증언한다.
▲'근대 기상 업무의 발상지'를 기리는 표지석. 2017년 기상청이 세운 것이다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이렇듯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작은 섬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은 계기는
지난 2021년 전라남도의 '가고싶은섬' 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다.
5년간 50억 원의 재원이 투입되면서 섬 가득 작약꽃이 피어났고, 다정한 둘레길이 조성됐다.
주민들은 정성껏 섬을 가꾸어 방문객을 불러들이는 아름다운 '작약 섬'으로 멋지게 변모시켰다.
보랏빛 향기 속으로, 박지도 라벤더 숲길
옥도에서 섬의 역사와 붉은 작약꽃에 70%쯤 취했다면,
이제 남은 30%의 여운은 배를 타고 다시 돌아와 퍼플섬의 또 다른 축인 '박지도'에서 채울 차례다.
옥도가 붉은 열정의 섬이었다면, 반월도에서 다시 보라색 교각을 통해 닿는 박지도는 몽환적인 보랏빛의 세계다.
▲퍼플섬(박지도) 라벤더정원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이곳의 프렌치 라벤더 축제 역시 오늘 막을 내리지만, 앞으로 보름 동안은 보랏빛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장관을 만끽할 수 있다.
박지도 입구에서 라벤더 축제장까지는 편도 1.2km 거리.
이곳 역시 전동카트를 활용할 수 있지만, 진정한 남도의 멋을 느끼려면 해안가를 따라 잘 조성된 숲 속 길을 걷는 것을 추천한다.
▲라벤더정원에서 추억 쌓기에 한창인 여행객들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마침 5월 초파일 연휴를 맞아 수많은 인파가 가족, 연인, 친구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았다.
오후의 따사로운 봄 햇살을 살며시 가려주는 숲길로 들어서자, 그윽한 찔레꽃 내음이 여기저기서 바람을 타고 풍겨온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라벤더 축제장에는 수많은 젊은이가 저마다의 인생 샷을 남기기 위해 셀카 삼매경에 빠져 있다.
▲현재 개화율 70%를 기록하고 있는 라벤더꽃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무박으로 즐기는 최고의 봄날 나들이
축제장에서 감성을 가득 충전한 뒤, 다시 걸어서 박지도 입구로 돌아온다.
시간은 아직 오후 5시, 여전히 수많은 인파가 다리를 걸어 축제장으로 향하고 있다.
문득 돌아본 퍼플섬 입구(안좌도 두리)는 필자가 4년 전에 찾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모해 있었다.
▲박지도에서 반월도 가는 퍼플교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당시에는 관리사무소 외에 주변 언덕배기가 허허벌판이었으나, 이제는 풀빌라가 들어서고 그 옆으로 대형 카페와 식당이 제법 근사하다.
2021년 12월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가 선정한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의 명성이 안겨준 이후의 변화일 것이다.
▲4년 전에 비해 크게 변모한 퍼플섬 주변 ⓒ 양진형관련사진보기
대형 주차장에는 관광객을 가득 싣고 온 버스가 10대 이상 서 있고, 주차장을 가득 채운 승용차들은 도로 한쪽으로도 길게 줄지어 있다.
퍼플섬이 쏘아 올린 보랏빛 기적이 이제 신안 깊숙한 곳의 작은 섬들로까지 번져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단 하루, 무박으로 다녀온 신안의 두 섬은 봄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자,
오래도록 기억될 멋진 남도 여행이었다.
지는 봄이 아쉽다면, 이번 주말 당장 신안의 섬으로 떠나보자. 그곳엔 아직 봄이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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