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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
"입에서 씹혀 액체가 된 음식물은 위장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런 다음에 액체 상태에서 영양분이 추출되면 그 물질은 비장으로 간다. 비장에서는 탁한 물질과 맑은 물질이 걸러지고, 맑은 물질에는 진액(津液)이 있어서 이것은 폐로 운반된다. 폐는 물길(水道)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면서 맑은 물질을 경맥과 낙맥, 즉 경락을 통해서 몸 전체로 보내고 나중에는 오장(五臟)에도 보내고, 탁한 물질 혹은 노폐물은 방광으로 모여든다." (경맥별론 經脈別論, 경맥의 질병과 맥상 脈象 중)
'황제내경'은 동양 최고의 의학서이자 철학서로, 오늘날에도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바이블이며, 그 명성에 걸맞게 내용도 훌륭하다. 다만 매우 난해해 한의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도 쉽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황제내경'은 동양의학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유기적이고 전체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바라본다는 내용, 즉 병인론, 생리학, 진단방법, 치료방법, 예방의학 및 동양 고래의 우주론이 81편에 걸쳐 담겨 있다. 사람의 몸과 병을 개별적으로 분석하려 드는 서양의학과는 달리 인체를 전체적으로, 대자연과 연결시켜 바라보는 동양의학의 관점을 잘 소개하고 있다.
'알기 쉽게 풀어쓴 황제내경'은 미국에서 오랜 기간 동양전통의술을 펼쳐 온 중국인 한의사가 동양철학과 한의학을 모르는 서양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황제내경'을 영어로 풀어 쓰고(원제 THE YELLOW EMPEROR'S CLASSIC OF MEDICINE), 이를 한국의 영문학자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당초 서양인을 위해 저술된 책이지만, 한문을 잘 모르고 서양식 사고에 익숙한 현대 한국인들이 '황제내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쩌면 한문투 용어로 번역된 책보다 이 책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읽기 쉽다. 그리고 재미까지 있다. 본시 '황제내경'은 동양 최고의 의학서이면서 동시에 철학, 기상학, 천문학, 역학, 윤리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당시 최고 수준의 지식이 기술된 저작이다. 게다가 2000 년 전의 한문으로 저술돼 현대의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면이 있다. 저자는 매우 어려운 원전의 내용을 최대한 쉽게,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노력을 들였다. 음양오행이나 천간지지 같은 철학 개념은 물론 기, 혈, 경락, 경맥 등 한의학 용어까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현대식 언어로 해설했다. 자칫하면 딱딱하고 지루하기 십상인 내용이 쉽고 재미있게 전개된다.
고전을 단순히 번역한 책이 아니다. 재구성한 책이다. 원전은 황제(黃帝)와 기백, 귀유구, 뇌공 등을 비롯한 신하들의 대화 형식으로 기술돼 있다. 저자는 이를 대화체 형식 그대로 풀어 나가기도 하고, 대화체가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자신이 전면에 직접 나서서 해설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10여만 자에 이르는 '소문'의 내용을 누락된 부분 없이, 그러나 자구에 너무 집착하다 재미없는 글을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고 풀어 썼다. 막히는 부분 없이 읽을 수 있다. 한의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의 입문서로도 탁월하고, 일반인의 교양서적으로도 손색이 없다.
'황제내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한 가르침을 많이 담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하는 사고방식, 질병을 국부적으로 보지 않고 몸 전체적으로 보는 관점, 심신을 건강하게 보존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현대인들은 산업화된 사회를 살아가며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도 정작 몸과 마음의 건강이나 건전한 환경에는 별 관심이 없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바르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며, 바로 그렇기에 21세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3.『황제내경』과 『소문』, 『영추』의 역사적 관계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책을 사람들은 왜 『황제내경』이라 부르는가? 『소문』과 『영추』는 어떻게 하여 『황제내경』이라고 불리게 되었는가?
『황제내경』이라는 책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록은 한漢나라 반고班固(AD 32~92)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이다.{{) 錢超塵, 第一章 『黃帝內經』 書名含義解 , 『黃帝內經硏究大成』 上卷, 王洪圖 總主編(北京:北京出版社, 1997), 3쪽.
}} 「예문지」 중 '방기략方技略'에 "黃帝內經 十八卷 外經 三十七卷"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도 "扁鵲內經 九卷 外經 十二卷, 白氏內經 三十八卷 外經 三十六卷" 등 적지 않은 의학서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많은 책들이 '내경'과 '외경'이라는 이름으로 저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책들, 특히 춘추전국과 진한(秦漢) 시대에는 의학서적 외에도 많은 책들이 '內' '外'로 구분되어 저술되었다. 『한시(韓詩)』도 '내전(內傳)'과 '외전(外傳)'으로 이루어졌고, 『장자(莊子)』도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구분한 이유에 대해 심오한 뜻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으나, 현재 중의학계에서는 상대적인 말로 서로 구분한 것일 뿐이지 지나치게 심오한 뜻을 찾으려고 하면 오히려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을 억지로 꿰어맞추듯 결론이 기괴해진다고 생각한다. 자세한 것은 錢超塵, 앞의 글, 앞의 책, 4쪽을 참고할 것.
}} 또한 한대漢代에는 『내경』이 『황제내경』만 전문적으로 가리키는 말로는 사용되지 않았던 듯하다. 『한서』 「예문지」에는 『황제내경』에 관해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이 없다. 또한 『소문』이나 『영추』라는 책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그 후 동한東漢 시대 장중경張仲景{{) 성이 장(張), 이름이 기(機)이고 자(字)가 중경이다.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 要略)』이라는 책으로 나뉘어 전해지고 있다. 전자는 육경변증(六經辨證)을, 후자는 팔강변증(八綱辨證)과 한(汗), 토(吐), 화(和), 온(溫), 청(淸), 보(補), 사(瀉) 등 각종 치료법을 서술하고 있다. 중의학 역사에서 변증논치 원칙의 발전 기초를 다진 걸출한 인물로 "의성(醫聖)", "의방지조(醫方之祖)" 등으로 숭앙받는다.
}}의 『상한론傷寒論』 서문에 "建安紀年以來 …… 撰用 素問 九卷 八十一難 陰陽大論 胎 藥錄 幷平脈辨證 爲傷寒雜病論 合十六卷"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魯兆麟, 第二節 張機對黃帝內經理論的臨床發揮, 『黃帝內經硏究大成』 上卷, 王洪圖 總主編(北京:北京出版社, 1997), 443쪽.
}} 이 서문이 역사상 처음으로 '소문素問'과 '구권九卷'이라는 책이름이 나온 기록이다. 여기에 건안建安이라는 연호年號가 명시되어 있는데 중국 역사에서 이 연호를 사용했던 기간은 196년에서 220년까지이다. 여기에서 장중경은 『황제내경』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소문』과 『구권』이 어떤 관계인지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상한론』이 『소문』과 『구권』을 기초로 하여 지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장중경 『상한론』에 언급된 『소문』과 『구권』이 현재의 『소문』과 『영추』, 즉 현재의 『황제내경』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또 이 서문에 나오는 『음양대론陰陽大論』에 관해 임억林億 등이 '신교정新校正'이라는 이름으로 주注를 달기를, "왕빙王 이 이 『음양대론』을 『소문』 중에 보충 삽입한 것이 지금의 『소문』 '운기칠편運氣七篇'이다"{{) 郭靄春 主編, 『黃帝內經素問校注』 上冊(北京:人民衛生出版社, 1992), 王 序 15쪽.
}}라고 하였다.
현재 중국 의학계에서는 『상한론』이 『황제내경』을 기초로 해서 쓰여졌다는 데 이론異論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내경』에 대한 이해 없이 『상한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상한론』과 『황제내경』을 별도의 의학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한론』이란 책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의학사상을 토양으로 하여 나온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의학사상의 집결체라 할 수 있는 『황제내경』을 떠나서는 『상한론』 또한 논할 수 없다.
그 후 서진西晉의 황보밀皇甫謐(215~282){{) 위진(魏晋) 연간에 생존하였던 명의. 자는 사안(士安), 어린 시절 이름은 정(靜), 자호(自號)는 현안선생(玄晏先生)이다. 『소문』, 『영추』, 『명당공혈침구치요(明堂孔穴鍼灸治要)』 등을 기초로 편집하여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침구 전문서적으로서 현재 침구학의 수많은 기초들이 이 책에서 정형화되었으며, 또한 지금의 『소문』과 『영추』의 내용 거의 전체가 들어가 있으므로 『황제내경』을 연구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책이다.
}}이 『갑을경甲乙經』 서문에서 이에 관해 말하기를, "按 七略 藝文志 黃帝內經 十八卷 今有 鍼經 九卷 素問 九卷 二九十八卷 卽 內經也. 亦有所亡失"{{) 皇甫謐, 『甲乙經』, 曹炳章 原輯, 『中國醫學大成』 三卷(北京:中醫藥出版社, 1997), 593쪽.
}}이라고 했다. 즉, 『황제내경』은 『칠략七略』과 「예문지」에 언급되어 있으며 『침경鍼經』 9권과 『소문』 9권으로 되어 있고 줄여서 『내경』이라고도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힌 최초의 기록이 『갑을경』 서문이다. 반고의 시대와 황보밀의 시대는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서』 「예문지」에서 말하는 『황제내경』이 『소문』과 『침경』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황보밀의 『갑을경』에는 현재 전해지는 『소문』과 『영추』의 거의 전문全文에 해당되는 내용이 실려 있다.{{) 郭靄春 主編, 앞의 책, 1237쪽.
}} 결국 이로써 당시의 『황제내경』이 지금의 『소문』과 『영추』로 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영추』는 장중경이 『상한론』을 집필할 시기에는 별다른 이름 없이 그저 『소문』과 함께 『구권』이라고만 불리다가 황보밀 시대에 와서는 『침경』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亦有所亡失", 즉 황보밀 당시에 이미 『내경』 중 망실된 부분이 있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중국 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제양齊梁 연간 사람 전원기全元起가 지은 『소문훈해素問訓解』에서 말하는, 『소문』 중에 없어진 제7권이라고 보고 있다.{{) 錢超塵, 앞의 글, 앞의 책, 3쪽.
}} 또한 앞에서 최초로 『황제내경』이라는 기록이 나오는 곳을 『한서』 「예문지」라고 하였는데 황보밀의 서문에는 『칠략』이라는 책이 나온다. 그러나 『칠략』은 이미 오래 전에 망실되어 현존하지 않는 책이므로 이 책에 『황제내경』이라는 기록이 있었는지 확실히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황보밀 당시에는 『칠략』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한서』 「예문지」가 『칠략』을 토대로 쓰여진 책이고 또한 황보밀이 인용한 것으로 미루어 『칠략』에도 『황제내경』이라는 기록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영추』가 처음 등장한 것은 당나라 중기에 왕빙이 『소문』을 주석하면서 『영추』라는 책이름을 인용했을 때이다.{{) 錢超塵, 앞의 글, 앞의 책, 9쪽.
}} 『소문』 「삼부구후론三部九候論」에서 "血病身有痛者治其經絡"이란 구절을 주석하면서 "靈樞經曰 經脈爲裏 支而橫者爲絡 絡之別者爲孫絡"이라고 『영추』의 구절을 인용했다.{{) 郭靄春 主編, 앞의 책, 上冊, 303쪽.
}} 또한 『소문』 「조경론調經論」 "神有餘 則瀉其小絡之血"이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鍼經曰 經脈爲裏 支而橫者爲絡 絡之別者爲孫絡"{{) 郭靄春 主編, 앞의 책, 下冊, 748쪽.
}}이라고 똑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왕빙이 두 군데에서 인용한 구절이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왕빙은 앞에서는 『영추경』에서 인용했다고 하고 뒤에서는 『침경』에서 인용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신교정'에서는 "『소문』 「조경론」에서 『침경』이라 인용하여 주석한 것과 『소문』 「삼부구후론」에서 『영추』라 인용한 것을 비교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서는 『침경』으로 앞에서는 『영추경』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왕씨의 의도는 『영추』가 바로 『침경』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소문』을 주석하면서 『침경』이라고 인용한 곳이 『영추』라고 인용한 곳보다 많다. 단지 현재 『영추』 9권을 완전하게 다 갖춘 판본이 없어 더 이상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郭靄春 主編, 앞의 책, 下冊, 748쪽.
}}고 주석했다. 어쨌든 『침경』이 곧 『영추』라는 것은 명백히 밝혀졌다. 또한 북송北宋 때 임억이 교정을 볼 당시 이미 『영추』 아홉 권 한 질帙 중 많은 내용이 없어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소문』의 왕빙 서문 중 "黃帝內經 十八卷 素問 卽其經之九卷也 兼 靈樞 九卷, 其數焉"이라는 구절에 대해 '신교정'에서 주석하기를 "『소문』 외의 『구권』을 한의 장중경과 서진 시대 왕숙화王叔和의 『맥경脈經』에서는 단지 『구권』이라 하였고, 황보밀은 『침경』이라 하였다. 양현조楊玄操{{) 양현조는 당나라 때 사람으로 『소문석음(素問釋音)』, 『소문의료결(素問醫療訣)』, 『침경음(鍼經音)』 등의 저작이 있다(王洪圖 總主編, 『黃帝內經硏究大成』, 2611쪽).
}}는 말하기를 '『황제내경』은 두 질로 되어 있는데 한 질이 아홉 권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구령九靈』이라고 되어 있다. 왕빙은 명名하기를 『영추』라 하였다."{{) 郭靄春 主編, 앞의 책, 上冊, 王 序, 13쪽.
}}
지금의 『소문』과 『영추』에 해당하는 모든 내용을 주제별로 재편집한 양상선楊上善의 『태소太素』는 지금의 『소문』 내용을 주해하면서 지금의 『영추』 내용을 인용하는데, 그 출처를 『구권』이라고 밝히고 있다.{{) 楊上善, 『黃帝內經太素』(北京:科學技術文獻出版社, 2000), 32쪽.
}} 그런데 문장이 지금의 『영추』 문장과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구권』이 곧 지금의 『영추』임을 알 수 있다. 양상선은 당나라 초기의 사람이므로 당나라 중기 왕빙 이전까지는 주로 『구권』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어오다가 왕빙에 의하여 『영추』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교정'에서 정리한 것처럼, 처음에는 주로 『구권』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다가, 『갑을경』에 의하여 『침경』이라는 이름으로 혼용하여 사용되고, 다시 『수서』 「경적지」에 의하여 『구령』으로 일컬어지다가, 최후로 왕빙에 의하여 『영추』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