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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
살후 3:6-18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 3:6-18 / [게으름에 대한 경고]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우리가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 부지런히 일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며 세월을 보내는 그리스도인과는 멀리하십시오. 7)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우리가 보여준 행동으로 이미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빈둥거리며 노는 생활을 여러분에게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8)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먹을 것을 값을 치르지 않고 거저 얻은 일이 없습니다. 남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우리는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9) 우리가 여러분의 대접을 받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몸소 본을 보임으로써 여러분도 스스로 일을 해서 자기 생활을 꾸려 나가게끔 가르치고자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10)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이미 우리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11) 그런데도 여러분 가운데 게으름을 피우고 일하기 싫어하며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 들려 오고 있습니다. 12) 그런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충고하고 명령합니다. 공연히 들떠있지 말고 일에 열중하여 자기 생활비를 벌어서 쓰십시오. 13) 또한 바르게 사는 나머지 분들에게도 당부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선한 일을 하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14) 만일 우리가 이 편지에서 당부한 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살펴서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5)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 해서 적대시하지 말고 형제처럼 타이르십시오. 16) [작별인사] 평화의 주께서 항상 여러분에게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주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17) 나는 여기 친필로 써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친필은 내 모든 편지를 가려내는 표입니다. 이것은 내 손으로 직접 쓴 글씨입니다.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잘못된 이해로 안정된 삶을 무너뜨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올바른 이해가 있는 실생활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자기 양식을 먹으라(6-12)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이른다고 무위도식하며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규모 있는 생활을 하면서 재림을 소망하라 말합니다. 재림이 임박했다며 게으르게 행하지 말고 질서 있게 행하고 수고하여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대접을 받을 권위 있는 일꾼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랬음에도 바울이 듣고 있는 소식은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게으르고 일하지 않고 일을 만드는 자들입니다(딤전 5:13). 바울은 엄히 명하고 권합니다.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했고 성도들에게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했습니다. 악한 자들의 방해와 공격을 받고 손해를 입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주만 바라 보아야 합니다(히 12:2).
형제와 같이 권면하라(13-15) 바울의 말을 성도들에게 전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귀지 말고 그로 부끄럽게 하라 했습니다. 교회는 영적 권위, 바르지 못한 교인들을 향한 책망과 징계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원수같이 여기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다른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외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대할 때 형제에게 권면하듯 하라 명령하십니다.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주님께 구합니다.
마지막 축도(16-18)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에는 세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평강과 교제와 은혜입니다. 바울은 평강을 구합니다. 평강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마다 친필로 문안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와 교회 사이에 특별한 교제의 끈으로 이어지길 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너무나 중요하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구합니다. 바울은 만물이 은혜 아래 만들어지고 은혜를 입으므로 유지됨을 압니다. 그의 마지막 문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마무리입니다.
적용: 주님의 재림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믿으면 하루하루를 정성스럽게 살게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 멈추지 마십시오. 즐거움이 되게 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을 아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사명으로 느껴져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사명이 될 때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라고 야고보는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그리스도인으로써 마땅히 행해야 하는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규모 있는 교회
데살로니가후서 3:6-18 / 조 인 목사
1. 한 순례자가 여행을 하다가 어떤 늙은 수도사를 만났습니다. 이 순례자는 수도사에게 "선생님, 만약 선생님의 인생이 오늘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늙은 수도사는 자기의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 먼저 아침 기도를 올려야 되겠지. 그리고는 차를 한 잔 마시고, 뜰에 나가 잡초를 뽑아야 할 테고, 그 다음에는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 존을 만나려 갈 거야. 그러고 나서는 낮잠을 좀 잘까?" 그러자 순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거야 선생님께서 하루하루 지내시는 일상적인 생활이 아닙니까?" 수도사는 순례자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이지. 마지막 날이라고 여느 날과 다를 수 있나?”
2. 그렇습니다. 이 수도사의 삶은 세상의 마지막이 온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 성실하였습니다. ‘성실’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Sincerit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원래 라틴어인 ‘Sinecera’(시네세라)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시네세라’는 ‘없다’는 뜻인 ‘Sine’(시네)와 ‘밀초’라는 뜻의 ‘Cera’(세라) 이 두 단어의 합성어인데 ‘밀초가 없다’는 뜻입니다.
3. 요즈음은 포장술이나 운송술이 발달해서 아무리 먼 곳에서 상품이 운반되어 와도 별로 상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운반 도중에 상품의 세미한 부분이 파손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운송업자는 파손된 부분을 밀초로 감쪽같이 때워서 전문가가 아니면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밀초로 때운 부분이 녹으면서 파손된 부분이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밀초로 때운 부분이 없는 상품은 계약서에 ‘시네세라’, 즉 ‘밀초가 없음’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네세라’는 ‘이 상품은 밀초로 때운 부분이 없는 정품’임을 보여주는 일종의 품질보증서였습니다.
4. 이 ‘시네세라’에서 영어단어 ‘Sincerity’, 즉 성실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성실이란 무엇입니까? 성실이란, 밀초로 때워서 파손된 부분을 감쪽같이 숨기는 것과 같은 속임수가 없는 것이 성실입니다. 정직함이 성실이고, 순수함이 성실입니다. 그리고 책임감이 성실이고, 부지런함이 성실입니다. 비록 하루밖에 남지 않은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평소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은 묵묵히 해나가는 것이 바로 성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처럼 모든 일에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성실입니까? 우리는 지난 주일에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서 데살로니가교회가 세워진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바울 사도의 2차 전도 여행지의 첫번 째 방문지였던 빌립보에서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웠지만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두번 째로 방문한 도시가 바로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곳에서도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는데 역시 유대인들의 핍박에 의해서 쫓겨나고야 말았습니다.
6. 그런데 바울 사도는 겨우 3주 동안만 데살로니가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바울 사도가 쫓겨난 이후에도 성도들은 교회를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로마제국의 일부였던 데살로니가에는 황제숭배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왕으로 믿고 섬기던 성도들이 유대인들이나 이방이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굳건히 잘 지켰습니다. 물론,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7.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AD51년 경에 고린도에서 편지를 하나 썼는데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그리고 약 10개월이 지난 AD51년 후반에 다시 편지를 썼는데 바로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 전서 역시 후서에서도 바울 사도는 핍박받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격려하는 글을 썼습니다.
8. 그런데 전서와 후서는 내용상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전서는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후서는 다소 책망하고 훈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잘못된 재림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데살로니가전후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바울 사도가 생각할 때에 핍박받는 성도들이 그 핍박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신앙 밖에 없었습니다.
9. 사실, 바울 사도 역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믿는다고 핍박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핍박도 고난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다 심판을 받을 것이며, 자신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급을 받고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재림신앙 때문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핍박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10. 오늘 우리들에게도 재림신앙은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십니까? 빨리 재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지금은 말고 한 10년 정도 후에 재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발 오지 마시고 내가 죽은 다음에 재림하셨으면 좋겠습니까? 이러나 저러나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한 사실이며, 언젠가는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재림신앙이야말로 오늘 우리도 예수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당할 때 그 핍박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기는 믿었지만 잘못 믿어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오늘날의 잘못된 재림신앙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재림신앙이란 곧 종말론(eschatology)에 관한 신앙인데, 오늘날 잘못된 기독교 종말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2. 첫째는, 예수님의 재림을 너무 믿어서 문제인 시한부 종말론(predicted eschatology)입니다. 이 종말론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주장하면서 심지어 재림의 날짜와 시간까지 예언을 합니다. 한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에 이런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월호 참사 1주년이 되었습니다마는, 세월호 사건과 관련이 있는 구원파 역시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단입니다.
13.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의 특징은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내일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면 오늘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가정이나 직장, 교회, 사회를 포기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서 일상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14. 두 번째의 잘못된 기독교 종말론은 소위 연기된 종말론(delayed eschatology)입니다. 이것은 시한부 종말론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너무 안믿는 종말론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재림 자체를 안믿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임박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언젠가 재림이야 하시겠지만 적어도 오늘, 혹은 10년 내에는 재림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께서 재림을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15.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아직 못해본 것도 많고, 못먹어 본 것도 많습니다. 가보지 못한 곳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해보려면 지금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안됩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오시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연기된 종말론이 좀 더 극단적으로 나가면 예수님의 재림 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재림하실 예수님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은 알아서 잘 굴러간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없으니까 심판도 없고, 천국이나 지옥도 없습니다.
16. 아무튼, 이처럼 잘못된 종말론은 크게 시한부 종말론과 연기된 종말론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잘못된 재림신앙, 즉 잘못된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둘 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연기된 종말론자들도 있었지만 주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날짜와 장소를 정해놓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고, 다만 오늘 당장 예수님이 재림하실 줄로 믿었습니다.
17.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 사도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여, 핍박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참으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인데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러한 재림신앙으로 핍박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친 재림신앙이었습니다.
18.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신다고 믿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믿은 나머지 일상의 모든 일들을 다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정도 포기하고, 직장도 포기하고, 학교도 포기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곧 재림하시면 다 천국갈 것이니까요… 특히 당시의 많은 성도들이 생계를 위한 일을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9.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씀은 백번 옳은 말씀입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누구든지 노동한 만큼 댓가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지금 단지 자본주의나 경제학적 개념에서 노동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신앙에 비추어서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일 당장 재림하시더라도 스피노자의 말처럼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라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그 늙은 수도사처럼 오늘 하루 늘 하던 대로 차 한잔을 마시고, 뜰에 나가 풀을 뽑고, 친구를 만나고, 낮잠을 자라는 것입니다.
20. 사실, 우리들도 모두 시한부 종말론자들인 것은 맞습니다. 언제가는 다 죽을 것이고, 또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하루 평소처럼 일을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일, 직장에서의 일, 교회에서의 일, 사회에서의 일,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함 없이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sincerity, 즉 성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실하지 못합니다.
21.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성실하지 못한 것을 ‘규모가 없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6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절과 9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규모 없이 행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2. 여러분, 여기 ‘규모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어성경에는 ‘idle’, 즉 ‘게으르다’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더 정확한 의미는 ‘빈둥거리며 무질서하게 놀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규모가 없다’라는 원래 헬라어 단어는 군사용어인데 ‘대열을 이탈하다’라는 뜻입니다. 군인들이 줄을 지어서 행군을 하는데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는 것이 규모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무질서하고 불규칙한 상태가 규모가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무질서하고 불규칙한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가정을 이탈했고, 직장과 학교, 사회를 이탈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무질서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잘못된 종말신앙, 잘못된 재림신앙 때문이었습니다.
23. 이처럼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그러나 사실, 신앙과 행동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행동하고, 행동하는 대로 믿습니다. 규모 없이 행하는 것은 규모 없이 믿기 때문이며, 규모 없이 믿기 때문에 규모 없는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규모 있게 사십니까? 규모 없게 사십니까?
24. 규모 있게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수입은 적은데 씀씀이가 많은 사람을 우리는 규모 없게 산다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버는 것과 사용함에 있어서 규모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성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교회가 규모 있는 교회입니까? 특별히 오늘 우리는 새 교회를 출발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가 규모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가 규모 있는 교회입니까? 말 그대로 건물의 규모가 큰 교회가 규모 있는 교회입니까? 교인의 수가 많은 교회가 규모 있는 교회입니까? 헌금의 액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헌금을 알뜰하게 사용하는 교회가 규모 있는 교회입니까? 다 필요한 일이고 맞는 말입니다.
25.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규모는 무엇입니까? 규모 있는 교회는 정말로 일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첫째, 말씀을 사모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6절 다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왜 규모 없이 행동하는 자들이 되었습니까? 사도들에게서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6. 여기에서 ‘유전’이란 ‘어떤 사람에게 넘겨진 것’을 말하는데, 본절에서의 뜻은 ‘교훈, 가르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가 이전에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동안 머물면서 선포했는 복음,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서 전했던 복음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유전이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재림신앙에 대한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직장까지도 포기하는 이상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잘못 가르쳤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떠난 이후에 제대로 된 성경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7. 물론,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 말하는 일이란 말 그대로 생계를 위한 노동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정말로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밀초로 대충 때우듯이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로서 우리들은 말씀을 사모하는 일이 말 그대로 일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이 땅에 교회를 세운 사명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일은 더욱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28. 왜냐하면, 교회란 본질적으로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의 터 위에 세워진 이 땅 위의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 교회를 하나 세우면서 사도들의 가르침,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부가 없다면 이 교회는 도대체 어느 기초 위에 세운 교회란 말입니까? 말씀의 터가 부실한 교회는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금방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29.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예배도 해야 하고, 선교도 해야 합니다. 교육도 해야 하고, 구제나 봉사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의 목표와 목적, 동기, 방법 등은 다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학교가 아니며, 교회는 회사도 아닙니다. 교회는 자선단체도 아니며, 교회는 친목단체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지런히 성경을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30. 특히 교회는 교리교육이 중요합니다. 교리는 마치 지도와도 같습니다. 잘못된 교리가 지도 없이 운전하는 운전자가 길을 잃는 것처럼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무질서하게 만듭니다. 잘못된 교리가 이단과 사이비를 양산하며, 잘못된 교리가 성도들을 믿음이 나약한 성도들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바른 하나님의 말씀, 바른 교리를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바로 규모 있는 교회입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예배도, 선교도, 교육이나 구제, 봉사도 규모 있게 잘 감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교리를 선포하고 배우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규모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1. 두번 째, 규모 있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예배나 선교, 교육, 구제, 봉사의 일을 규모 있께 감당하기 위해서는 말씀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아도 기도하지 않으면 다 허사입니다. 1절,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이 말씀은 기도를 하되 특히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32. 여러분, 우리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 규모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 장소도 필요하고, 조직도 필요합니다. 사람도 필요하고, 물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 카마리오제일장로교회를 이 지역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이라는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질서 있고 규칙적인 규모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33. 정말로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저부터도 기도하는 목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하는 목사요, 기도하는 집사요, 기도하는 권사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 교회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러므로, 기도하는 일을 하기 싫거든 밥도 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기도에 올인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4. 마지막 세번 째,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11절 다시,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규모 없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입니다. 일을 만든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문제를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원래 이 말은 ‘참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일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가 바로 일을 만드는 자입니다.
34. 그런데 이들은 남의 일에 어떻게 참견을 했을까요? 이들은 시한부 종말론자로서 일하지 않았는데, 자신들만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으니까 일하지 말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6절에서는 이처럼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 즉 규모 없는 자들로부터 떠나라고 했고, 14절에서는 이런 자들을 사귀지도 말고 부끄럽게 하라고 했습니다.
35. 우리 역시 오늘날 말씀을 사모하는 일, 그리고 기도하는 일을 하지 않는 자들, 즉 규모 없는 자들에게서 사실은 떠나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귀지도 말고 부끄럽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우리는 모두 다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며, 믿음의 수준도 다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실수가 무엇입니까? 비판하는 것이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 한 형제요, 자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6. 16절,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 무한히 우리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회가 바로 규모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13절,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37.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떤 교회가 규모 있는 교회입니까? 내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해도 오늘 우리 자신들이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규모 있는 교회입니다. 물론, 내일 예수님이 재림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재림하신다는 생각으로 일해야 합니다. 즉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사모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새로운 출발을 하는 우리 카마리오제일장로교회가 말씀과 기도, 사랑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규모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규모 있는 생활
데살로니가후서 3:6-18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데살로니가서의 마지막 강해가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를 마감하면서 성도들에게 규모 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규모 있는 생활이란 열심히 일을 하여 자기가 번 돈으로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면한 배경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중에는 주님께서 곧 재림하신다고 믿고 하던 일을 그만 둔 이유로 먹을 것이 없어 다른 교인들의 가정을 빙빙 돌면서 폐를 끼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믿고 재산을 다 처분하여 교회에 바치고 일도 안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재림의 날만 기다렸던 한국의 어떤 재림 주의자들과 흡사한 일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부 교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열망하는 것은 좋지만 열망이 지나쳐서 일상 생활의 일들을 다 팽개쳐서 먹을 것이 없어 다른 교인 가정으로부터 얻어먹는 정도는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에 도적 같이 오실 주님을 영접할 모든 성도들은 그가 언제 오시든지 간에 오시는 날 까지 일상 생활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우리들은 노동의 축복, 노동의 가치, 노동의 신성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규모 없는 자에게서 떠나라(6, 11, 13-15) [2]규모 있게 행하라(7-10, 12) [3]끝 인사(16-18)입니다.
[1]먼저 6절, 11절, 13-15절의 규모 없는 자에게서 떠나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도무지 일을 안하고 이 집 저 집 돌면서 남의 가정에 폐를 끼치고 또 일을 만드는 자들이 있음을 들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두고 규모 없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남들은 다 열심히 일을 해서 자기 먹을 것을 해결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잘 믿는 것 같이 일도 안하고 재림하실 주님만 기다린다고 하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이 집 저 집 성도들의 가정을 돌면서 얻어먹는 교인이 있다면 그 교회 성도들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겠습니까?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남에게 덕을 끼치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신앙을 핑계 대고 남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니 이런 사람을 교회에서는 잘 정리해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으로부터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떠나라는 말은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좀 냉정하게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친절하게 하면 자기의 잘못을 모를 것이기 때문에 좀 냉정하게 대하므로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규모 있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하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대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권면하고 이 편지를 읽어주어도 변화 없이 이집 저집 돌면서 폐를 끼치고 말을 만드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과 사귀지 말고 따돌려 부끄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돌린다는 한계는 원수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형제이기 때문에 그가 깨닫게 하는 목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구해주고 고쳐주기 위해 일시로 냉정한 태도롤 보이면서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냉냉한 대접을 받는 그는 그 이유를 깨닫고 고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2]두 번째는 7절부터 10절, 12절의 규모 있게 행하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규모 없는 자들을 향해 규모 있게 행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종용히 일을 한다는 말은 개으르고 말만 만드는 것에 대조되는 뜻으로 입을 다물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을 뜻하며 남에게 덕을 끼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열심히 일을 하므로 자기들이 먹을 양식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게 되고 또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는 능력도 갖게 되므로 종용히 일을 하는 것이 성도로서 규모 있게 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아무런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을 하면서 자기들의 생활비를 해결했던 것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보인 모범을 본받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생활비를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받을 권리가 없어서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또 일하는 것을 본을 보여 데살로니가 교회가 본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보인 본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전도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할 당시 그들에게 권하기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여 열심히 일할 것을 이미 가르쳤음에도 데살로니가 교회 일부 교인들이 규모 없이 행함을 보고 규모 있는 자들이 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3]세 번째로 16절부터 18절의 끝인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를 끝맺으면서 평강의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때때로 풍랑이 일고 비바람이 쳐 믿음이 흔들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언제나, 어떤 일에도 평강을 주실 것을 기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땀흘려서 벌어먹는 노동의 축복에 대해 바로 알라는 교훈입니다. 젊은 나이에 돈이 많아서 일찍 은퇴하고 날마다 집에서 놀고 있는 자를 두고 복도 많은 사람이라고들 부러워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건강을 가진 자라면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자보다 일을 하는 자가 더 복된 자라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는 자란 노동의 대가로 받는 돈의 가치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늙어서 은퇴하고도 몇 푼 받지 못한다해도 일을 하고 있는 노인들을 동정심으로 바라보지 말고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다면 일하는 사람에게 여러모로 상당한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요즘 일자리를 잃었지만 가족과 이웃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직장에 다니는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그들에게 묻는다면 노동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말해주리라 봅니다.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건강을 가진 자라면 그 일거리가 무엇이든 감사히 받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했습니다.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 고 강 순 명 전도자는 전도 일을 하기 위해 칼을 갈아주는 일을 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가 어떤 직업 또 무슨 일을 하느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남이야 어떤 관심을 가지던 일을 하는 나 스스로는 현재 나에게 일거리가 있음을 감사하고 만족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또 아니면 복권이라도 당첨되어 일을 그만 두는 것이 복이 아니라 늙어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가치는 땀을 흘려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미국에서 65세까지 일을 하게 한 것은 불행이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돈의 크기로 가치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받는 보수는 직업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납니다. 심지어는 같은 직업에서 일하는 자들도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압니다. 같은 팀의 야구 선수 중에는 천만불짜리도 있고 백만불 짜리도 있고 십만불 짜리도 있다면 좀 이상하겠지만 이것은 현실입니다. 만일 십만불 짜리가 천만불짜리의 선수와 자기 처지를 비교한다면 맥이 빠지고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마음이 나지 않겠지요? 그렇다고 자기 인생의 가치가 천만불짜의 인생의 가치보다 100분의 일의 가치밖에 없다는 뜻은 전연 아닌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남이 받는 수입에 자기의 수입을 비교하므로 스스로 맥이 빠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얼마를 받던 그 받은 돈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를 가지고 규모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게 벌었기 때문에 쓰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쓰지는 못하지만 성도로서 남에게 규모 없다는 말을 듣지 않고 덕을 끼치며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비교할 남이 없다면 자기가 불행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가 전연 아님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돈이 많이 있거나 돈이 많이 없거나 성도의 일은 남에게 덕을 끼치고 기쁨을 주는 규모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동은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떤 일거리이든지 주신 일거리를 감사히 받아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하며 남이 받는 돈과 비교하지 말고 노동의 대가로 받고 있는 그 보수에 감사하면서 성도로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하시다가 주님 오실 때에 평등의 나라 천국에서 영원히 기쁨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으로 이겨라
데살로니가후서 3:6-18 / 하늘기쁨
오늘 본문은 바울의 마지막 권고와 인사말입니다.
1. 게으른 자(복음의 방해자)
바울이 마지막 권고로 삼은 주제는 '게으른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데살로니가후서 3:6, NKRV) '게으른 자에게서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곧 그들을 공동체에서 추방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강력한 처방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들이 일하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그들이 왜 일하지 않고 있는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잘못된 종말론 때문인데요. 주님이 곧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교회 부자들의 자비의 마음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 형제이기에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하지 않고 도움을 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경우라도 그들의 겉 모습은 일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게으른 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에 대해 바울이 강하게 명령하는 것은 그들이 바울이 가르친 것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집을 부리며 일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그들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일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데살로니가후서 3:7, NKRV) '무질서하게'가 '게으른 자'와 같은 헬라어입니다. 바울은 게으르게 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것이 복음에 유익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오해하여 복음을 생계수단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게으른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게으른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이 복음에 큰 지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빌미로 무절제하고 게으르게 살아서 결국은 복음에 먹칠을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악한 행동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복음을 말하지만 실상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큰 악입니다. 복음에 방해물이 된다는 것은 때로는 복음에 반대하는 사람만큼이나 나쁩니다. 그래서 복음을 말하는 우리들은 항상 조심하여 복음의 방해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늘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바울과 일행이 권리까지 포기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2.성실한 자(복음의 일꾼)
바울은 선을 행하다 지친 사람에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3, NKRV) '선한 일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게으른 자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돕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그들이 종말론 떄문이든 아니면 자애로운 마음으로든 그들을 도왔는데 결국 그들이 오히려 의존적인 사람이 되고 계속 일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도운 것이 아무 열매 없이 끝난 것입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 그들을 도왔던 사람들은 매우 낙심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게으른자가 잘못인줄 알아 이제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을 해야 하지만 그들이 이전에 선한 마음으로 도움을 준 것은 유효합니다. 잘못된 것이 확실히 드러났을 때 돕는 것은 잘못이지만 이전에 도운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선한 일입니다.
열 가지 선한 행동 중에 한 가지 선한 행동에 열매가 없거나 문제가 되었을 때 다른 선한 일까지 멈추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지금까지 선한 일을 해 온 마음에 힘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마음입니다. 선한 일은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선한 일은 성실하게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멈추면 악에 지는 것입니다. 악이 선한 일을 흐리게 할 때 더욱더 선한 일로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보물이요 비밀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선한 길을 힘을 내어 가야 합니다. 성실하게 가야 합니다. 세상에 조금 무슨 사정이 있다고, 나에게 힘든 일이 있다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들을 돕는 것을 멈춘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앙의 길까지 멈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놓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선 행하는 것을 멈추면 안 됩니다.
게으른 자를 쫓아낼 때도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5, NKRV) 그들을 쫓아낼 때 '원수를 대하는 자세가 아니라 형제를 대하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행동과 태도는 단호하지만 그것이 원수를 향한 마음이 아니라 형제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선을 생각해야 합니다. 악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인사말을 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NKRV)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늘 '평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에서 항상 하나님의 통치를 생각하며 평강해야 합니다. '모든 일마다'는 직역하면 '모든 면(방식)에서'입니다. 혹 게으른 자와 단절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그들은 평강을 생각하며 유지하며 행해야 합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기에 가능합니다. 사회 핍박이 있고 교회 내에 불협화음이 있지만 여전히 평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 바울이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을 위하는 것이 아니면 복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살다가 때로는 안 좋은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선을 알아주지 않은 사람들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위하여 계속 선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을 놓친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선한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의무로 느껴질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 가운데 끝까지 성실하게 선을 행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규모 있는 생활
데살로니가후서 3:6-18 / 민병석 목사
서론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따라야 할 규모 있는 행동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특히 6절에서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규모란 말은 본보기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로 자신의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이라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보낸 서신으로 일러준 교훈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1. 바울이 보인 규모 있는 생활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교회 앞에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한 일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수고하지 아니하고 양식을 취하는 자에 대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중에 일하지 않고 먹는 게으른 자들에 대해 이처럼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바울은 '누구에게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했다'는 사실을 경종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생활을 한 것은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 처지에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폐를 끼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그런 누를 끼칠 만한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복음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의당 모든 생활비와 활동비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초기에 그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덕을 세운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본 받을 만한 미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일하지 않고 먹는 자는 일종의 기생충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일하지 않은 이유는 주 재림의 긴박성 때문에 일하는 것도 배우는 것도 필요 없다는 경망스럽고 잘못된 종말관에서 온 것입니다. 또한 신비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구하면 주신다고 하신 일, 염려하지 말고 구하라고 하신 말씀 등을 잘못 오해 한데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교회에 누를 끼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인 나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류의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엄히 책망하였습니다.
2. 게으른 자의 경우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게으른 자를 말하는데 이 게으른 자에 대한 교훈이 잠언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잠20:4절에서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기를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잠19:15절에서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십계명에도 엿새 동안에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하되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생활 지침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교회를 봉사하는 일에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나님은 게으른 자에게 명하시기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하셨습니다. 잠12:27절에서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시128:2절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어떤 모양으로 받느냐?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도에 행하는 자로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고 하셨습니다. 손의 수고가 없으면 하나님의 축복도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해야 할 일
바울은 14절에서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처신에 대하여 그 사람을 지목하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교제를 삼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제란 일반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서의 교제로 이런 사람들과는 일정한 신앙적인 경계선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끄럽게 하라는 말은 그런 생각에 동조하지 말고 책선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곧잘 어울려 한 무리가 되는 경우조차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이나 생활이나 헌신이나 규모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평강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의 생활에서 그런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성실한 그리스도인
살후 3:6-18
바울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좋은 전통은 좋은 본보기에서 시작됩니다. 바울은 복음의 전통에 이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에 대한 전통을 언급합니다.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고 남에게 폐가 되는 의존적 생활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제자의 삶은 이론을 구축해 전수하는 것만으로는 전통으로 계속 이어지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전통이 되려면 전달자의 삶이 피전달자가 따를 수 있는 '표본'으로 확실하게 제시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보다는 부모가 실제로 보여 주는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그가 전하는 가르침과 자신의 삶이 일치했습니다. 좋은 전통은 말에서 나오지 않고 삶의 본으로 형성되어 대를 이어 갑니다.
내가 생활하는 모습은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의 본이 되나요?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삶을 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우리 안에 없는 것을 보여주려다보면 없는 것을 있는 척하는 위선을 행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삶이 익숙해지면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자기기만과 자기합리화에 스스로도 속아 넘어갑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나의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나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진정한 선함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 힘의 근원, 복의 근원,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무엇인가 열매로 나오는 방법은 철저하게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진정한 선함이란 이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품과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본이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본입니다.
일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고 영적인 것을 강조하는 종교인들이 쉽게 빠지는 오류는 현실 세계에 대한 무책임입니다. 일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종말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수고로 나온 결과만 취하고, 공허한 말로 정작 다른 사람들이 책임지게 될 일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복음 사역에 전념하면서도 가능한 한 주변 사람들이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직접 장막을 만드는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했습니다(8절; 고전 9:12).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확실하게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왕 되신 하나님의 완성된 다르심을 현재로 끌어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하나님 앞에서 매사에 성실하게 일하며 진실하게 이웃을 사랑합니다.
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성실한 생활인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일하며 그 사명을 다할 때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며 "좋다. 선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려는 이원론적 신앙관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은 거룩하게 지내고 나머지 일하는 날들은 세상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은 거룩하고 일터에서 일하는 시간은 속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날이 주일이든지 주중이든지, 그곳이 예배당이든지 일터나 가정이든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영적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통해 증거되게 됩니다.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동시에 성실한 생활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인노릇 할때는 내뜻대로 게으르고 무질서하고 규모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신이후 주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신실함이 되고, 주님의 성실하심이 우리의 성실함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아 성실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주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삶에 성실하게 하소서.
사도 전통대로
살후 3:6-18
“우리를 본받아야”
데살로가후서 3장 6-18절은 사도들이 친히 실천한 모범과 권면과 기원과 문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6절의 “게으르게 행하고”는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여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짜임새 없는 생활을 말한다. 바울은 11절에서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11절)는 소문을 언급하였다. 6절의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와 7절의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how you ought to follow our example)가 연관된 구절이다.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은 사도들이 말과 행실로써 성도들에게 보인 본과 연관된다. 따라서 사도전통이란 사도들이 예수님께 배워서 실천하고 전파한 복음과 실천을 뜻한다. 본문에 나타난 사도들의 실천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였다(7절).
둘째,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았다(8절).
셋째,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였다(8절).
넷째,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였다(8절).
다섯째,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였다(9절).
여섯째, 친히 본을 보여 본받게 하려하였다(9절).
일곱째,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치고 권하는 일에 힘썼다(10,12절).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바울이 가르치고 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절).
둘째,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12절).
셋째,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13절).
넷째, 사도들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람과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라(14절).
다섯째,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16절).
16-18절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바울이 보낸 기원과 문안이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다”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1장 11-12절에서 “내가 전한 복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교회의 어떤 가르침과 실천이 정통(옳음)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확정지어질 당시 수집된 책들의 정경여부를 결정지은 잣대는 사도들의 전통(가르침과 실천)이었다.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엡 2:20)고 했다. 여기서 “너희”는 교회를 지칭한 것이고, “모퉁잇돌”이란 건물 네 모퉁이에 놓는 주춧돌과 같은 것으로써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이뤄진 사실들이 교회의 근간이란 뜻이다. 그리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란 예수님께 배운 자들이 전하고 실천한 내용들이 교회의 기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순종하라고 권하였고(롬 6:17), 고린도인들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칭찬(고전 11:2)하였으며,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according to the tradition which you received from us)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고 충고하였으며, 갈라디아인들에게는 심지어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고 하였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통에 있다.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고소할 때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우리가 들었다”고 분노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 즉 모세오경에 실린 613개의 계명들과 전통들을 주어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언약을 지키는 것이었고, 땅을 지키는 수단이었으며, 거룩함이었고 의로움이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전통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든 수없이 많은 울타리 법들로써 계명들에 겹겹이 방어막을 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헛되이 지키게 할뿐 아니라, 외식하도록 만들어왔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전통교회들에 남아있다.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자들이 중보자이신 예수님께 직접 기도하지 못하고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하게 한 것과 신자석보다 상당히 높고 먼 곳에 주의 만찬상인 제단을 배치하여 사제의 권위를 높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성막건축에 관한 출애굽기의 말씀에서 거듭 강조된 구절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이다. 출애굽기 39장에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는 이 구절이 무려 10번이나 쓰였다. 32-33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고, 그들이 성막을 모세에게로 가져 왔다”고 했고, 42-43절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고 하였다.
성막제작의 핵심사상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just as the LORD had commanded) 행하고 이루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장점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 6:5) 문자적으로 지키려하는데 있다. 토라의 613개의 계명들뿐 아니라, 계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랍비들이 만든 수많은 울타리 법들까지 성심을 다해서 지키려한다. 그러나 단점은 하나님의 계명들의 근본취지와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내적인 것, 영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 문자적인 것, 형식적인 것에 치우쳤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신약성경 저자들이다. 그들이 새롭게 이해한 것은 지상 가나안땅이 하늘 가나안땅의 그림자라는 것, 지상 가나안땅은 옛 언약이요, 하늘 가나안땅은 새 언약이라는 것, 지상 성막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라는 것, 지상 성막은 일시적이요, 하늘 성전은 영원하다는 것, 또 구약성경성막은 신약성경교회의 예표요, 모형이며, 그림자란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이 실패한 길을 걷고 있다. 공리주의적 성공주의에 빠져서 신약성경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이해했던 방식대로 이해하지 않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했던 방식대로 해석하지 않고, 유대교의 랍비들이 유대교에 했던 것처럼 기독교에 하고 있다. 그 결과 많은 교회들이 구약성경교회로 또는 유대교적기독교에 치우쳐 있다. 공리주의적 성공주의와 유대교적 권위주의에 빠져서 신약성경교회의 사도전통을 멋대로 왜곡시키고 있다. 기독교가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민(특권)의식과 교조주의에 매어 자만과 자기우상숭배로 인해서 응보를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러므로 사도 전통인 신약성경의 가르침대로 믿고 실천하여 기독교의 본래성과 능력을 회복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힘써야할 것이다.
육체적 노동은 신앙과 삶을 건강하게 합니다
살후 3:6-1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느질을 생각하면, 두 개의 상반된 그림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만종>으로 유명한 장 프랑스와 밀레의 그림, 제목 그대로 <램프 불 옆에서 바느질 해 주는 여인>입니다. 젊은 여인은 머릿수건을 쓰고 두터운 옷을 입은 채 누군가의 옷을 바느질 하고 있습니다. 옆으로는 아이가 곤히 누워 자고 있지요. 그 사이 긴 막대에 걸린 램프 불빛이 환합니다. 그 램프 불빛 때문인지 혹은 방안의 온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여인의 옷차림이 말해주듯, 실내지만 추운 방안형편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잠든 아이의 볼도 여인의 볼도 빨갛습니다. 그 빨간 볼과 여인의 머릿수건이며 램프가 걸린 긴 막대가 밀레가 한결같이 그림에 등장시켰던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밀레의 대부분의 그림들이 그렇듯, 위쪽의 환한 램프 불빛이 그렇게 따뜻하고 밝고 다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바느질 그림으로, 미국화가 윌리엄 윌리스 귈 클라스트 주니어의 그림이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바느질 분위기는 밀레의 것과는 정 반대이지요. 여인은 화려한 꽃무늬의 파란 색 옷을 걸친 채, 분홍색의 파티 드레스를 바느질 하는 중입니다. 여인이 입고 있는 화려한 겉옷과 약간 흘러내린 겉 옷 사이로 들어난 어깨며, 앞 쪽으로 길게 펼쳐진 분홍색 드레스가, 여인이 곧 그 파티 드레스의 주인공임을 짐작케 해 줍니다. 그러니 그 바느질에선 상류층의 화려한 파티와 무도회가 느껴지지요. 그렇게 대조적인 두 바느질 그림을 들여다보노라면, 이런 걸 바라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두 가지 상황이나 마음을 다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으면. 어떤 날은 저 밀레의 그림 속의 여인처럼 검소하고 소박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저 파티 복을 바느질 하는 여인처럼 들뜨고 설레기도 하고. 일상이 너무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말고, 양쪽을 다 살기도 하고 다 이해하기도 하기를 바래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1년 12월 8일 방송>b.
2. “게으름에 대한 경고(6-15절)”과 “작별 인사(16-18절)”을 읽었습니다. 크리스천이 게으를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로 생각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군주를 위해서 충성해야 하고, 동시에 하늘의 군주를 위해서 충성해야 하는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게으름이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노동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없으니까 남의 일에 참견하는 문제입니다. 셋째는 타인에게 기생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현상은 일반 사회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 달을 제가 시무하던 교회 기도실을 찾아와서 몸을 녹여가던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대전 어딘가에 산다고 했습니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숙인 생활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아무 근심걱정이 없는데, 그날그날 자기 자신의 숙식만 해결하면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말로 설득해서 노자를 준비해서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때 노숙인 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인생의 멍에에 대해서 무책임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이런 무책임함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빌붙어 편히 사는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후자의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들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밤낮으로 수고하며 노동하였던 것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했다고 술회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는 말을 종종 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노동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첫째는 일하지 않고 노는 것이 나은 삶이다 는 생각, 둘째는 삶의 의미를 일하지 않는 것에 목표를 두는 생각 등입니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습니다만, 그래도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은 육체적 노동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대신 헬스클럽에 등록해서 땀을 많이 흘리려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운동을 따로 하지 않더라도 적절한 노동만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아닐 수 없는데 말입니다. 하루해를 넘기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오늘 밥값을 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노동을 통한 건강한 삶을 셈해보는 일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