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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애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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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프로, 리허설, 방송, 화보 촬영, 인터뷰...
하루가 길어도 이렇게 길을 순 없었다.
매니저 동생이 한 손은 핸들을 붙잡고 한 손은 조수석을 붙잡으며 능숙하게 차를 주차시켰다.
옷이 들은 가방 몇 개를 챙겨 차에서 빠져 나오는데, 잠바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두 손이 꽉 찬 상황이라 이거 받을 수도 없고.
다행히도 전화는 아니였는지 세 번쯤 진동하다가 멈췄다.
"형 어제 번호 바꾼 거 아니었어요?"
"어, 왜?"
"아니 그냥요."
상원이가 궁금한 듯이 묻고는 후드를 뒤집어 썼다.
밤이라서 그런지 밖에 나온지 고작 몇 초지만 벌써부터 귀가 시렸다.
나는 벤 문을 끌어 당겨서 닫고는 아파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 둘이 사는 이 칙칙한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여는 순간부터 답답했다.
나는 가방을 소파 위에 내팽겨쳐 놓고 소파 밑에 앉아 두 팔을 쫙 뻗고 기댔다.
텔레비전이나 볼까 하다가 리모콘 찾기가 귀찮아서 관뒀다.
그러다 생각났다. 문자 왔었지.
"형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요. 아침부터 시트콤 촬영 있거든요."
"알겠어. 너 지금 잘거야?"
"씻고요."
잠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상원이의 말에 문득 내일 아침에 촬영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젠장, 내가 연기는 무슨.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담배갑을 집어서 한 개비를 꺼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터벅터벅 베란다로 걸어갔다.
밤 하늘은 지독하게도 까맸다.
징, 징....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요즘 건망증이 있나 자꾸 이렇게 사소한 걸 까먹는다.
아직 불 붙히지 않은 담배를 입에 대충 물고 한 손으로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었다.
발신인 따위는 뻔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축가 어때요? 제가 너무 김칫국 마시나요? 히히.]
무슨 말이냐. 갑자기 웬 축가 타령.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까 왔던 문자와 연결된 듯 싶었다.
[저 결혼해요, 오빠.]
그 순간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밑으로 한없이 추락했다.
뭐? 결혼?
***
"형! 늦었어요! 감독님이 화내시면 어떡해요."
"탈께, 타."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앞에서는 뭐가 그리 급한지 벤 뒤에서 왔다 갔다 거리는 상원이도 그렇고
내 머리 만져주기 바쁜 서영이도 그렇고 정신이 없었다.
"오빠, 오늘은 차 안에서 제발 자지 마요. 머리 망가진단 말이에요."
투정하듯 말하는 서영이를 보며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에 기대어 가는게 얼마나 편한지 모르는구나.
이렇게 잔소리를 들을 때면 꼭 애가 된 느낌이다. 벌써 스물 아홉이나 먹은 놈이.
"그런데 원래 시트콤도 아침 일곱시부터 촬영하냐?"
내 말에 상원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시동을 켰다.
"글쎄요."
"배고파서 죽을 것 같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
컨디션 죽여준다.
"촬영 끝나고 아침 겸 점심 먹죠 뭐."
서영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꿋꿋히 메이크업을 할 수 있는 서영이가 자랑스럽게만 보인다.
그런데 얘는 내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서도 아무런 미동이 없다.
보통 여자애들은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도 잘만 소리지르더만.
"서영아.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
"오빠 뭐 잘못 먹었어요?"
눈을 꿈뻑이며 날 미친 사람 취급하는 서영이를 보니 괜스레 쪽팔렸다.
나는 저런 말도 한 번 해 보면 안되냐.
"먹은 게 없는데 무슨...."
"누가 매력 없대요?"
저렇게 묻는 걸 보면 꼭 막내 여동생 하나 둔 것 같다.
"그냥."
정말 배고프긴 한가 보다. 속이 다 쓰리네.
20분동안 차 안에서 졸다 깨다 졸다 깨다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이거 이렇게 나가서 퀭해 보인다고 잔소리 들으면 체면 완전 구기는데.
밤 바람도 차고, 새벽 바람도 차고.
새벽이라고 하기엔 조금 늦은 시간인가.
선물받은 털잠바를 스웨터 위에 겹쳐 입고 나갔다.
"오빠!"
"오빠! 저 좀 봐 주세요!"
"여기요 여기!"
이 이른 시간부터 플랜카드를 들고 서 있는 교복입은 여학생들이 보였다.
아, 지금 진짜 다운인데.
스웨터 위로 드러난 와이셔츠 깃을 다시 제대로 정돈하고 뒷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이런건 차 유리창 보면서 해야 되는데.
"너넨 학교도 안가?"
"이 근처에요! 게다가 등교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목소리도 어찌나 큰지 길가 주위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보다 열 살은 어린 이 친구들은 정말 무대뽀다.
나같은 인간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쫓아다니고 소리지르고.
그 녀석도 한 때는 저랬는데.
사진 좀 더 찍어줄 걸 그랬다. 다정하게 어깨동무도 하고.
지금은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멀리서 손짓하는 스탭 하나가 보였다.
오늘 촬영 잘 할 수나 있으려나.
잔뜩 움츠린 채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
쉬는 시간이 되자 촬영장을 가득 에워싸고 있던 여학생들이 내게 달려왔다.
상원이가 말리려는 걸 그냥 내가 오라고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박혔다. 이젠 익숙하다.
그 아이들이 들고 있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예상한 대로 떡볶이, 김밥, 순대 등등 별 게 다 들어있었다.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데 나는 쿨하게 고맙다며 짧은 미소를 지어줬다.
집에 있었다면 그냥 보이는 대로 입에 쑤셔 넣었을 텐데 말이다.
"배고팠는데 정말 고마워."
"뭘요."
웃는 한 여자애의 모습에 나는 잠시 목이 메였다.
아주 오래 전, 이맘 때 그 녀석도 이렇게 눈이 휘어지도록 웃으며 내게 음료수 하나를 사다 주었다.
그 때는 녀석이 어찌나 어려 보이던지 키우던 강아지 쓰다듬듯 머리를 한 번 쓱 쓰다듬어 주었는데,
부드럽게 느껴졌던 생머리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손짓에 다시 수줍게 웃던 녀석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교복 입은 꼬맹이랑 겹쳐 보였다.
나 정말 뭔 생각을 하는 거냐.
"너 어디 학교야?"
"저요?"
놀란 듯 되물어오는 그 아이였다.
"그래, 너 말이야."
"요 앞의 여고 다녀요."
"고등학생이야?"
"네."
그 때 주머니에서 드르륵 핸드폰이 진동했다.
"미안, 전화 좀 받을께."
그 아이는 아쉬운 듯 멀어지는 내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너도 그런 느낌이었을까.
항상 멀리 떨어져서 나를 지켜보던 너였으니까.
"여보세요."
오늘따라 내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전화 주인공의 목소리는 미치도록 밝다.
행복하긴 행복하구나.
[오빠. 전데 왜 문자 답장 안해줘요?]
"나도 바빠."
[혹시 놀랐어요?]
"그래. 너가 결혼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러게 말이에요. 맨날 하는 게 오빠 얘기 뿐이었는데.]
녀석이 쿡쿡 웃었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웃음소리다.
[오빠 지금 시트콤 잘 되어가요?]
"너 그런 식으로 나오면 또 무서워지는 거 알지."
[팬카페에 다 나와있는 걸 어떡해요.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있어야지요.]
어느새 녀석의 목소리에 내 입가가 당겨오는 걸 느낀다.
[좀 스토커 같나?]
"그걸 이제 알았냐."
[헤헤....]
머쓱하게 웃고 있을 녀석의 모습이 상상이 간다.
"그래서, 누구랑 결혼하는데."
어차피 알게 될 거 그냥 지금 묻는게 낫다 싶었다.
그런데 괜히 물었나 보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녀석의 작은 숨소리에 핸드폰을 잡은 내 손이 떨려왔다.
[좋은 사람이에요. 대학 동기요.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아는 척도 못할 거면서.]
"언제.... 하냐?"
[한 달 뒤쯤에요. 청첩장 돌리려구요. 그래서 말인데 오빠 주소 좀 가르쳐 주면 안돼요?]
"그건 팬카페에 안 나와있고?"
내 목소리가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굉장히.
[진짜~]
"이따가 문자로 보내줄께. 그런데 너 와서 옛날처럼 문 열어 달라고 아우성치는 거 아니지?"
[너무해~]
다섯 명의 그룹 멤버들이 숙소에 옹기종기 살던 시절,
꼭 숙소 앞까지 찾아와서 새벽까지 버팅기는 팬들.
밤 늦게 숙소에 들어갈 때 그 때 고작 얼굴 한 번 보겠다고 그러니 보면 한숨만 나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비오는 날에는 쫄딱 젖은 생쥐마냥 우산 없이 덜덜 떨며 버티니까.
그런 막무가내들 중에 한 명이 지금 이렇게 커서 결혼까지 하는게.. 말이 돼냐?
난 그냥 눈 옆에 주름이 조금 진 거와,
삐죽빼죽 솟아있는 노란색 머리가 아닌 차분한 검정색 머리,
라디오에는 '우리' 그룹 노래가 아닌 '내' 노래를 들으며 가는 거,
고작 그렇게 변했지만...
넌 이제야 변해 가려고 하는구나.
[오빠 지금 바쁘죠?]
"어? 아니."
[그럼 피곤한가 봐요.]
"글쎄, 그것도 아닌데."
[밥은 먹었어요?]
"아직."
[그럼....]
"인마, 너가 내 애인이냐? 그렇게 캐묻게."
쓰다. 뭐가 쓴진 모르겠지만, 정말 쓰다.
청승맞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뭐냐.
[히히. 오빠도 잘 알잖아요.]
"야, 끊어야겠다."
[아 미안해요. 제가 너무 붙들어 놓고 있었죠? 나중에 다시 전화할께요.]
"그래..... 잘 있어라."
뚝 끊긴 전화기에는 길고 긴 신호음만 늘어지듯 들려왔다.
축하한다는 그 한 마디를 해줬어야 하는건데...
어찌나 입 속에서 맴돌던지 밖으로 나오질 않더라.
***
"형, 제정신이에요?"
"뭐가."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참나..
매니저 아니랄까봐 나 걱정해주는건 어찌 그렇게 똑같냐.
내 앞에 있는 술병들을 보며 상원이가 입을 쩍 벌렸다.
"내일 방송 때 목소리 잠길 거 아니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있겠어."
"뭐에요. 여자 문제에요, 뭐에요?"
"그런 거 아니야."
상원이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이럴 때면 조금 무섭다니까, 킥킥.
등치는 산만한게 째려보면 정신이 확 달아나는 것 같지.
"지금 앨범 판매 일순위지, 곧 생일이라서 팬들이 생일 파티 해 준대지. 곳곳에선 연기자 되라고 난리지. 형 뭐가 문젠데요?"
"나도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보니 몇 분 전에 땄던 소주 한 병이 금새 반이 없어져 버렸다.
내일 방송 때 목소리 나가면 안 되는데.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또 내 손은 술잔으로 가 있다.
"형."
내 손목을 쥐어 잡는다.
"자식, 느끼하게 왜 그래?"
"그만 먹어요."
"나 이거 한 병만 다 마시려고."
"제발요. 갑자기 왜 이래요."
건너편 테이블에 있는 남자 두 명이 이 쪽을 쳐다봤다.
"큰소리 내지 마."
"형...."
"알겠으니까 계산하고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 서려는데 몸이 비틀거리며 말을 안 듣는다.
쪽팔리게.....
상원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곧바로 자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몇 장을 빼 들고 계산을 했다.
"너 이럴 때만 기특한 거 알아?"
"전 지금 집으로 가기만 한다면 바랄 게 없어요, 형."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하는게 눈에 훤히 보인다.
호프집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에 문득 서영이 생각이 났다.
"얼굴 떴다고 내일 서영이가 화내겠다."
"당연하죠."
"그냥 내일 스케쥴 취소하면 안 돼냐?"
"정말 왜 그래요 형.... 이러면 나만 힘들어요."
나는 피식 웃으며 상원이의 목에 팔을 둘렀다.
금새 또 낑낑댄다. 엄살은.
"켁켁...안됀다니까요? 정말 안돼요."
"장난이야. 쫄기는..."
"장난도 따로 있지. 형이 이럴 때마다 전 정말 총맞는 기분이라구요."
인마...... 형은 지금 이 가슴 한 구석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다.
몇십 배는 더 아프다.
***
[연락좀 해줘요~네?]
전화번호 괜히 알려줬나보다.
회사에서 자꾸 이렇게 문자질 해도 안 짤리나 모르겠다.
아, 지금 집이겠지.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핸드폰 액정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나는 베개 밑에 쳐 박고서는 손을 뻗어 벽의 스위치를 껐다.
순식간에 방 안이 어두워졌다.
오늘도 잠이 안 오겠구나.
거실에 나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지지직 거리는데 이거 바꿀 때도 됐다.
안 그래도 상원이가 사라고 난리였는데.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마침 내가 나오길래 얼른 고정시켰다.
찍은 지가 언젠데 이게 지금 나오는구나.
모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나와서 시시덕거리고 있다.
꼴 좋다, 야.
"....평소에 어떤 스타일의 여자분을 좋아하세요?"
거기서 이런 질문도 했었던가.
"그냥 잘 웃고, 매력있고...."
무심결에 꺼버렸다.
너는 이런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검은 텔레비전 화면에 내 모습이 비쳤다.
잔뜩 멋 부리고 나온 내가 아니라.... 술에 떡이 되어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내가.
***
"요새 그 애는 안 온다니?"
오랜만에 온 엄마가 반찬을 냉장고에 넣다 말고 물었다.
"오긴 뭘요."
"아니 왜, 너 좋다고 음식 싸들고 오던 그 애 말이야."
"그건 옛날 얘기죠. 이제 걔도 다 컸어요, 엄마."
"으이구 그래 알겠어."
하필이면 왜 그 얘기가 지금 나오는 건데....
"뭐시기... 팬클럽 회장? 그런 거 아니었니?"
"맞는데요, 이제 그만 하죠."
"상원이랑 싸웠니?"
"아니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 말투에 조금 날이 섰다.
냉장고 문을 닫던 엄마가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결혼한대요."
"누가?"
"엄마가 방금 전까지 말한 그 애 말이에요."
"뭐? 정말로?"
많이 놀라신 눈치였다.
"올해 나이가 몇인데?"
"스물...셋인가 넷일걸요. 이제 막 졸업했으니까."
"그런 것도 정확히 모르니, 넌? 쯧쯧."
나를 보며 한심한듯 혀를 끌끌 차시는데....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꽝 얻어맞은 것 같았다.
너는 내 생일, 군대에서 제대한 날, 크리스마스, 심지어 상원이의 생일까지도 다 알고 챙겨 줬는데......
"난 너 좋아한다는 애들이 불쌍하다 정말. 응."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크게 포장되어 있는 선물 하나를 건네주던 너가 기억이 났다.
면회갈 수 없겠냐고 날 보채던 너가 떠올랐다.
춥지 않냐면서 두툼한 잠바 하나를 입으라고 주던 너가....
"저 그 결혼식 가봐야 겠죠?"
"안 가면 나쁜 놈 되는 거고 뭐.... 얘, 반찬은 이게 다니까 국 저기 있는 거 같이 데펴 먹어."
"그 녀석이 저보러 축가도 부르래요."
"근데 상원이는 어디 갔니? 용돈 좀 주려고 했는데."
내 인생 처음으로 후회라는 것을 해본다.
너가 내게 후회란 것을 가르쳐 줬다.
그래서 지금 너가 미치도록 밉다.
"너는 또 어디가니?"
갑자기 신발을 챙겨 신고 있는 날 보며 엄마가 의아해했다.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오려구요."
"늦었는데?"
"금방 갔다 올게요. 제가 늦으면 그냥 먼저 가세요."
역시나 밤 공기는 차다.
등 뒤의 문이 제대로 닫힌 걸 확인하고 단축번호 10번을 엄지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여보세요?]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띵- 소리와 함께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준비는 잘 돼 가는거지?"
[어? 정말 오빠에요?]
뭐가 그리 반가울까.
목소리부터 저렇게 좋은게 티가 나는 건 이 녀석 하나다.
"그래."
[청첩장 받았어요?]
"어."
[전 또 연락이 없길래 오빠 요즘 늦게까지 일하는 줄 알았죠.]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거든?"
[언제는 또 바쁘다면서.]
"넌 지금 뭐해?"
[그냥 집에서 놀고 있어요. 야식이나 먹을까 하고..]
"나와, 맛있는 거 사줄께."
[네???????]
"고막 찢어진다."
[취소하기 없기에요. 어딘데요?]
자주 들렀던 방송국 건너편 포장마차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핸드폰 슬라이드를 내렸다.
맨 정신으로 보기엔 자신이 없다.
***
어떻게 만나자고 한 사람보다 더 빨리 나올 수 있을까?
자리를 잡으려고 천막을 들추는데 이미 앉아서 날 향해 씨익 웃는 녀석이 보였다.
너 정말 나한테 왜 이러냐.. 내가 너 때문에... 에휴.
"하이."
"유치하긴. 그게 뭐냐?"
내 말에 녀석의 손은 슬로우모션같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온다.
"오빠도 이제 늙었나 보네요. 칫..."
"내가 늙었으면 세상 사람들의 반이 죽었게."
녀석이 자연스럽게 소주 두 병하고 떡볶이와 순대를 시켰다.
처음 보는 아줌마한테 이모 소리 해 가면서.
"전 오빠가 노란 머리하고 나왔을 때가 제일 좋았는데. 아 맞다. 머리에 살짝살짝 브릿지 들어간게 더 좋았나?"
벌써 칠년 전 얘기다.
기억력도 참 좋다.
"결국엔 지금은 싫다는 거네?"
"지금도 좋죠. 다만 그 때는 무지 귀여웠거든요."
"그 때 초등학생이었던 주제에..."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쌉싸름한게 취한다.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쳐다봤다.
"중학생이었거든요?"
"그게 그거지. 그 나이에 누가 누굴보러 귀엽대."
"초등학생이랑 중학생이랑 차이 많은데요?"
"야식 먹으려던 참이었다며. 떡볶이 하나 집어 먹어."
"또 말 돌린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쬐그만 게 팬클럽 회장이라며 틱틱거리던게 어제였는데.
"그런데 갑자기 웬 결혼이야?"
"딱 이 사람이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지금도 그 사람 생각하고 있나 보다.
날 보며 말하고 있는데 녀석의 시선은 허공에 가 있다.
좋냐, 그렇게.
"어떤 사람인데?"
"한 마디로 설명이 되겠어요?"
떡볶이 하나를 이쑤시개로 찍어 입 안에 넣는 녀석이다.
"따뜻하고, 자상하고, 잘 챙겨주고, 유머러스하고."
"난 너가 애인 있는 것도 몰랐다."
"바쁘신 분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쿡쿡."
당연하다는 듯 웃는 모습에 허탈해져 왔다.
내가 많이 무신경했었지..
"오빠도 좋은 사람 만나야죠."
"......"
아, 어색하다. 이런 말 듣는 거.
"그런데 옛날에 스캔들 난 여자 연예인들 이야기는 사실이에요?"
"글쎄."
"저 그것 때문에 예전에 얼마나 충격 받았었는데요. 인터넷에서는 팬들이 일일히 증거 자료 구해서 끼워맞추고, 하여튼."
"별것도 아닌 것에 시간을 다 쏟아 부었구나."
"오빠가 제 첫사랑이라서 그랬나봐요. 저도 지금 생각해보면 웃겨요."
그 한 단어에 온 몸의 신경이 쏠렸다.
첫사랑?
빈 술잔을 계속해서 손 끝으로 빙빙 돌렸다.
"누가 말했는진 모르지만 진짜 천재에요.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
녀석은 남 얘기 하듯 거리낌 없이 말했다.
여전히 자기 감정 앞에는 한없이 솔직하고 당당했다.
그 말에 뭐라고 해야 할까, 난.
"오빠가 첫사랑인 애들 수두룩할걸요, 아마? 오빠 사진 뜨면 그 밑으로 댓글에 다 그렇게 달려요. 아~ 저 사람 내 첫사랑이었는데. 라고."
"재밌네."
"그러니까 다들 저처럼 매일 오빠 보러 공방도 뛰고 팬미팅도 쫓아다녔죠. 사랑의 힘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사랑이라고 하니까 진짜 웃긴거 알아?"
"덕분에 남자친구 하나 없었다면 믿으실래요?"
"알겠어."
녀석은 술잔을 들이키다 말고 날 봤다.
"이런 얘기 하는거 보니까, 저 많이 컸죠."
"어. 많이 컸네."
찰랑이는 단발머리 대신 긴 생머리도 그렇고...
굽 낮은 학생화 대신 하이힐도 그렇고...
"전 진짜 그 땐 오빠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
그 낮은 중얼거림에 왠지 모르게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다.
그냥, 그냥.... 오늘은 이제 막 결혼하려는 철없는 신부의 하소연이라고 봐 둘께..
"소주가 쓰네요."
"원래 쓴거야, 인마."
"그렇죠."
"근데 너 오늘 왜 이렇게 말이 많냐?"
"원래 그래요. 예전엔 일부러 말을 조금 아낀 것 뿐이지."
"그래?"
"당연하죠. 누구 앞인데."
녀석이 웃었다.
잠시 흐르던 짧은 침묵을 깨고 녀석의 가방 안에서부터 벨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지금 밖이야. 왜? 아.."
내 눈치를 본다.
그 사람이구나.
"가야 돼?"
"어우... 어떡하지."
통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녀석이다.
"가 봐. 이제 며칠 안 있으면 결혼하는데 애인이 보고 싶다잖아."
"아, 어떡해. 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정말 가봐도 돼."
"오빠, 결혼식 때 꼭 올꺼죠?"
"응."
"꼭이에요."
약속하라는 듯 새끼손가락을 흔들었다.
"알겠어."
내 말을 끝으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사라져 갔다.
오늘 결국엔 취하지 못했다.
너의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눈 앞에 어른거리는 걸 보면.
***
1년 후.
"10초 있으면 무대에 오르시는 거, 아시죠?"
"그럼요."
다시 한 번 거울 앞에 가서 옷 매무새를 고쳤다.
넥타이가 조금 흐트러진 것 같아서 말이다.
밖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 긴장하지 말자.
"자~ 다음 게스트를 불러볼까요? 이번 앨범이....."
잔잔한 반주가 깔리기 시작하자 난 계단을 올랐다.
깜깜한 밤 같이 조명이 어두웠다.
넌.... 지금 보고 있겠지?
손에 쥔 마이크에 땀이 찬다.
짧으면서도 긴 3분 30초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려 맨 앞줄에 앉아있는 너가 보였다.
행복하게 웃으며 옆에 있는 듬직한 남자의 어깨에 기대있는 너가.
그래, 그거면 됐어.
"이 곡을 특별한 분을 위해 지으셨다면서요? 작사, 작곡 전부 본인이 직접 하셨다고 들었어요."
"네, 맞아요."
"누구..라고 여쭈어 봐도 될까요?"
"사실 이 곳에 와 있는데..."
내 말에 관객들이 술렁였다.
넌 이미 알아챘구나. 내가 여기 널 부른 이유를. 날 빤히 바라보는 걸 보니...
"예전에 그룹 활동 하던 시절, 팬클럽 회장 하시던 분이에요."
"그래요? 와!! 정말 특별한 사이에요."
"네. 많이 챙겨주시고.... 그러셨죠."
보고 있지?
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하단 말을 이렇게 대신하고 싶었다..
결혼 축하한다는 것도..
그 동안 함부로 연락 끊어서 미안하단 것도....
전부 다...
"그러면 잠깐 일어나 주실래요?"
관객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들렸다.
이거, 너 남편이 질투하면 어쩌지? 푸하하...
이따가 나가서 다 말해줄게.
사회자가 일어선 너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곧이어 너의 목소리가 기분좋게 울려 퍼졌다.
조금 떨린다고 생각하는 건 내 착각이겠지?
"오빠."
"......."
"고마워요."
"......."
"진심으로 고마워요."
울컥 하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 때 본 너의 따스한 눈동자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누구한테 사진 찍어서 담아 두라고 할 걸 그랬어..
"그리고 팬으로서 정말 사랑해요."
.
.
.
The end
첫댓글 팬들은. 계속 그 연예인을 사랑하고 그럴거같은데, 결국에는 자기 사랑찾아서 떠나버리죠;; 공감가네요 (헤헤)
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저 결혼하면 우리 동방신기는....생각하니까 목이 메이네요. 진짜 내가 커버리면 그 사람들도 나에게서 멀어지지는 않을까하는 불안감 따위! 사라지지 않는다능..ㅠ_ㅠ
저두카아에요 ㅠㅠㅠㅠㅠㅠ
저듀!!!!!!저두카아예여
재밌네요. 정말 있을듯 한?..아니 저런 경우는 정말 많겠죠? 나도 언젠가는 그럴테고..뭐 그래봤자 그 가수가 알리가 있나요!ㅠ0ㅠ암튼..재밌게 보고 갑니다~^^
매우공감 ㅋㅋ가끔 저도 한가수를 좋아하다보면 이게 그저 동경인건지 사랑인건지 햇갈릴때도 있다는..;; 언젠가 떠나가 저릴지도 모르는 그런관계지만 그래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것과 주는것은 행복한 일이겠죠ㅎㅎ
저도 한 가수를 좋아하는 팬으로써 가슴이 찡해지는 ㅠ 연예인과 팬이라는 관계를 딱 말로 할 수가 없는 사이랄까. 친구도 될 수 없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연인사이도 될 수 없는. 그저 연예계라는 실 하나만으로 이어져있는 아슬한 관계?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끝난 후에는 팬과의 관계는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겠죠. 기억 속에서 점점 추억이 되고 잊혀지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지지만은 ㅠ 그래도 저렇게 사랑을 주고 받거니 하는 것도 그때는 참 행복하죠^^
어욱 T_T...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나 난 우리 더블이 아니면 평생 독신으로 살테여 T_T.......
와........정말잘쓰셧어요!! 저도 여기 팬클럽회장분처럼 제가 동경하고 우상으로 바라보는 빅뱅오빠들과 이야기하고 웃을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휴....왠지 뭔가 씁쓸해지는 글이네요....저도 언젠간 제가 동경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결혼을하고 가정을 꾸릴텐데....그때쯤이면 지금도 추억이 되어버릴텐데 말이에요..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