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155편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55편: 악공들의 꾐에 빠진 세자 양녕 보름달이 휘영청 별 밟은 밤. 창덕궁 깊은 곳 세자궁에서 가야금 소리가 흘러나왔다. 야심한 밤에 세자궁에서 흘리나와서는 안 될 소리였다. 세자궁 숙위를 3교대로 강화했는데도 잡인이 드나든다는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아예 갑사를 배치했 다. 갑사는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정예군이다. 임금의 특명을 받은 갑사 군졸들이 세자궁을 철통같이 경비하고 있는 아심한 밤. 악공 이오방과 이법화가 종묘와 창덕공을 가르는 담장에 대나무다리를 걸쳤다. 어둡고 컴컴한 후미진 곳이었다. 좌우를 살피던 이 오방과 이법화가 잽싸게 뛰어내렸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궁궐 담장을 넘으면 대역죄로 처단될 수 있었다. 죽음이었다. 악공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담장을 넘은 것이다. 세자 양녕과 노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악공 신분에 세자의 눈도장을 받아두어 후일을 기약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들을 매수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회들이 담장을 넘어오는 것을 본 사람은 없으렷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졸들의 경비가 얼마나 삼엄한지, 하마터면 들 킬 뻔하였으나 본 사람은 없습니다." "다행이다. 너희들을 많이 기다렸느니라." 이들이 발각되면 의금부에 투옥된다. 세자 역시 엄한 질책을 받는다. 하지만 세자 양녕은 이들이 담장을 넘어오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기다렸고 부러워했다. 악공들은 담장이라도 넘어올 수 있지만 자신은 세자의 체통 때문에 넘어갈 수도 없잖은가? 세자 양녕은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저희들이 누구입니까요. 가야금 열두 줄 위에서 줄타기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요. 염려 놓으시고 피리 소리나 들으십시오." 이오방의 입술과 손가락이 움직이자 피리에서 청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자 양녕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피리 소리에 빠져들었다. 심연(深淵) 을 파고드는 구슬픈 운율이었다. 세자 양녕은 이 순간이 좋았다. '공부 하라' '법도를 지켜라' '성군이 되어라'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세자 양녕은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피리를 생각했다. 불과 두 뼘 남짓한 대통에 여섯개의 구멍이 뚫려있고, 그 구멍에 이오방의 손가락이 지나 가면 번화무쌍한 음색과 음률이 흘렀다. 실로 경이로운 음조였다. '나도 저 피리처럼 다양한 소리를 내고 싶다. 허나 난 부왕이 원하는 소리만 내야 한다. 글 읽는 소리. 아! 답답하다. 지켜보는 부왕의 눈길도 무섭고 담장을 에워쓰고 있는 군사들도 숨이 막힐 것 같다. 갇혀 있는 담장을 벗어나 훨훨 날아가고 싶다.' 세자 양녕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오동나무에 연결된 열두줄이 울기 시작했다. 이법화의 가야금 소리였다. 이법화 역시 조선 제일의 가야금 연주자였다. 가야금 소리에 푹 빠져 있는 세자 양녕에게 이오방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하. 곽선의 첩 어리가 자색이 빼어 나고 재예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리도 미인이라 하더냐? "양귀비도 울고 갈 천하절색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지체활 시간이 무에 있다 더냐? 냉큼 데려오도록 하라." "저하께서는 성질도 급하셔. 매사에는 수순이 있고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무슨 방도가 있느냐?" "어리란 여자가 어찌나 콧대가 센지 어지간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않는답니다. 우선 아랫것들을 보내어 선물을 전달하도록 하시지요." 가야금을 타던 이법화가 너스레를 떨었다. 호기심이 동한 세자 양녕은 어리에게 환관 김기를 보내어 수낭 (繡囊)을 선물했다. 어리는 수낭을 사양했다. 세자가 보낸 선물을 사양하다니 콧대가 세긴 쎈 여자였다. 소임을 다하지 못한 환관은 어리의 발치에 선물을 놓아두고 되돌아왔다. 환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세자 양녕은 더욱 몸이 달았다. 이법화를 통하여 사람을 놓았다. 천기 출신 어리에게 계지라는 친구가 있었다. 같은 기생출신이었다. 자태가 남다른 어리와 계지는 영감을 꿰차고 첩으로 들어앉았다. 곽선과 권보였다. 권보는 곽선 생질녀의 남편이었다. 곽선은 중추라는 관직에 있었고 권보는 소윤이라는 현직에 있는 관리였다. 어리와 계지가 오랜 만에 만났다. "네 얼굴이 좋아진 것은 보니 영감이 잘해주나 보다." "잘해주긴? 지 볼일만 보고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고니 내가 속 터져 죽지." 그 말 듣고 보니 얼굴이 많이 상했다." "상한 정도가 아니야. 내가 거울만 보면 속상해 죽겠다니까." "얘, 얘, 세자가 널 보고 싶어 한다더라." "나는 얼굴도 예쁘지 않고 지금은 남편이 있어 당치 않은데 그것이 무슨 말이냐?" 어리는 내숭을 떨었다. 지난번 선물 을 보내왔을 때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괜히 한번 거절을 했다. 아무리 세자라지만 사내는 사내지 않은가. 지 아비가 있는 아낙이 남정네가 부른다고 냉큼 나서는 것도 자존심이 하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만나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며칠 후, 판관 이승이 양아버지 곽선이 살고 있는 파주 적성현을 찾았다. 문안 인사였지만 목적은 따로 있었다. 곽선의 첩 어리도 함께 있었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오려는데 어리가 곽선에게 아양을 떨었다. "판관 아들 한양 나가는 길에 저도 한양에 좀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한양에는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친척도 좀 찾아뵙고 친구도 만나보고 싶어서요." "때마침 잘 되었구나. 다녀오도록 하여라." 곽선은 밤마다 앙탈을 부리는 어리를 한양에 내보내는 것이 홀가분했다. 하지만 곽선만 모를 뿐, 어리를 가마에 태우고 적성을 출발한 이승은 쾌재를 부르면서도 착잡한 심정이었 다. 아버지의 여자를 꾀어다 바치고 출세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승진과 뇌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56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