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다
흔히 교과서(敎科書) 정도의 세계사(世界史)를 살펴보면 서양사(西洋史)에서 476년 로마제국(Roman Empire)의 종말(終末, 엄밀히 말하면 西로마제국)과 더불어 고대사(古代史)가 마감(磨勘)됩니다.
그리고 나서 기껏 15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 부흥(文藝復興), 학예 부흥(學藝復興)은 유럽 문명사(文明史)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 시기(革新運動時期)]와 19세기말 이탈리아(Italiana) 통일(統一)에 관하여 잠깐 언급(言及)된 것을 제외(除外)하면 이탈리아 반도(半島)를 중심(中心)으로 한 역사는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가이세리크에 의한 반달족의 로마 약탈(455년
↑서로마의 멸망으로 고대사가 문을 닫습니다
비록 서부(西部)유럽의 사상적(思想的) 중심인 로마 교황청(敎皇廳)이 있기는 하였지만 세계사의 흐름에서 볼 때 로마제국멸망 이후 이탈리아반도는 역사의 헤게머니(覇權, hegemony) 중심(中心)이 아닌 변방(邊防)으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통일(統一)이 늦었던 관계(關係)로 이탈리아는 이미 슈퍼파워가 되어버린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과는 물론이거니와 비슷한 시기에 통일을 완성(完成)한 독일에 비해서도 국력(國力)이 한참 뒤졌습니다.
↑가리발디 장군과 ‘붉은 셔츠단’이 진격하는 모습
↑테아노의 다리에서 가리발디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만남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가리발디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을 벗어나 세계적(世界的)으로 식민지(植民地)를 확대(擴大)하여 나가는 제국주의 경쟁(帝國主義競爭)의 선두(先頭)에 있었고 그 모습은 가히 고대(古代)로마제국의 모습을 재현(再現)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1870년 뒤늦게 근대 국민국가(近代國民國家)로 통일(統一)을 완성(完城)한 이탈리아는 고대로마와 혈통적(血統的)으로는 상이(相異)하다고 볼 정도로 차이(差異)가 크지만,
이탈리아 반도(半島)에서 있었던 영광(榮光)의 역사(歷史)를 그들이 승계(承繼)하고 재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로마멸망 후 1,400여년 만에 등장한 통일 이탈리아, 그런데 이탈리아가 만들어지고 나서 이탈리아인들이 창조(創造)되었다는 말처럼 문화적(文化的), 인종적(人種的)으로 상이(相異)한 이질적 지역(異質的地域)들의 강제적 결합(强制的結合)이었고 지금도 분리독립(分離獨立)을 주장(主張)하는 지역이 있을만큼 감정(感情)의 골(骨)이 큽니다
때문에 그들이 아닌 주변 선발 제국주의 국가(帝國主義國家)들의 활약(活躍, ?)을 지켜보면서 이탈리아의 위정자(爲政者)들은 심한 질투(嫉妬)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고대(古代)로마제국이 처음부터 세계제국(世界帝國)이 아닌 너무나 작은 도시국가(都市國家)로부터 출발(出發)하였듯이 비록 근대 통일국가(近代統一國家)의 완성(完成)은 늦었지만 이탈리아가 로마를 승계(承繼)한 세계적인 패권국가(覇權國家)로 발전(發展)하지 말라는 법 또한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탈리아는 지중해(地中海) 너머의 북(北)아프리카로 눈길을 돌립니다.
↑선발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경쟁적(競爭的)으로 침탈(侵奪)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자마전투
↑로마의 영토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희대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의 전쟁이었다. 그의 기본 전략은 로마 본토가 전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국의 도움 없이 원정을 수행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시칠리아와 스페인이 로마의 손에 넘어가자 그의 전략은 토대에서부터 무너졌다.
오늘날 튀니지(Tunisia), 리비아(Libya)로 불리는 지중해 남부의 북아프리카는 인류 역사(人類歷史)와 함께 문명(文名)이 빛을 발한 지역 중 하나로 세계사 변혁(世界史變革)의 시기(始期)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轉換點)이 될만한 사건(事件)이 벌어지던 곳이었습니다.
도시국가였던 고대로마가 제국으로 발전 된 전환점은 유명한 포에니 전쟁(Punic Wars)이었는데,
그것은 이탈리아 반도(半島)를 벗어나려는 로마와 지중해 패권(地中海覇權)을 유지(維持)하고 있던 카르타고(Carthage)의 충돌(衝突)이었습니다.
↑가장 극적이었던 제2차 포에니전쟁
3차례에 걸친 이 전쟁의 승자(勝者)인 로마는 세계제국으로 발전(發展)하여 천년 영화(榮華)를 누렸고,
한니발(Hannibal, BC247~BC183)의 눈물이 전설(傳說)로 남은 카르타고는 역사(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카르타고가 망(亡)하기 전까지 영화를 누리고 그 역사를 간직하던 곳이 오늘날 리비아, 튀니지인데 이곳을 이탈리아가 점령(占領)한다면 고대 로마제국이 세계제국으로 발전하였던 영광의 역사를 재현(再現)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더욱이 이곳은 아직까지도 영국, 프랑스과 같은 버거운 상대가 아닌, 노쇠(老衰)하지만 또 하나의 제국인 오스만투르크(Turkish Empire)가 실효지배(實效支配)를 하고 있었는데,
오스만제국은 발칸반도와 아라비아의 여러 문제들로 인하여 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관리(管理)하기가 벅찼던 상황(狀況)이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이런 절호(絶好)의 기회(幾回)에 리비아를 정복(征服)하여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