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의 길
이정호
바람은 온 산을 다 지나가고도
어디에도 제 이름을 걸지 않는다
계절은 소리 없이 옷을 바꿔 입고
강은 몸을 낮추어 먼 데로 흐른다
그 크고 아득한 것들의 뒤를
나는 오래 뒤처지며 걸었다
따라갈수록 세상은 멀어지는데
곁에서 나란한 숨소리 하나만 가까웠다
혼자인 밤이면
길은 발밑에서 자주 끊어지고,
끊긴 자리에 네 숨이 와 닿을 때마다
어둠에도 디딜 바닥이 돋아났다
눈이 내려 온 세상의 소리를 덮은 밤,
꺼지지 않고 끝까지 남은 것은
맞잡은 손과 손 사이,
말보다 먼저 데워지던 한 뼘이었다
그 한 뼘 안에서
네 손목이 조용한 북을 울리면
먼 데를 헤매던 겨울이 그 소리에 무너지고
언 강도, 언 들도, 언 밤도
작은 북을 따라 풀려 내리기 시작한다
봄이면 이름 모를 꽃 곁을 함께 지나고
여름 소나기를 한 우산 아래 긋고
가을이면 서로의 그늘로 나란히 앉는 사이,
밟는 데마다 없던 길이 돋아났다
먼 산이 우리 쪽으로 조금 몸을 기울이고
강이 발치까지 제 소리를 밀어 보낼 때,
이토록 작은 두 사람을
세상은 왜 이렇게 넓은 품으로 받는지
이제 걸음이 느려진 저녁,
주고받던 말은 낮게 잦아들고
나란히 가는 두 숨소리만 남는다
추운 길 위에서 두 입김이 만나
한 점 흰 김으로 풀리고,
그 김이 바람의 등에 얹혀
아무도 모르는 데까지 흘러갈 때-
가만히 귀 기울이면
멀어지는 그 숨결 속에
아직 식지 않은 두 사람이,
걷고 있다
카페 게시글
시 (가~사)
숨의 길
이정호
추천 0
조회 60
26.08.01 09:43
댓글 12
다음검색
첫댓글 아직 식지않은 두사람 누구일까요
글쎄요, 숨겨둔 사람이 아닐까요.
계절이 바뀌어도
두 사람이 걷고 있어 외롭지 않을 듯 합니다.
네 같이 걷는 길을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따뜻한 두사람으로 꽉 채우는 나날 되겠네요.
그런 사람이 사람입니다.
사람이라서 정겹고, 사람이라서 동행 할 수 있는 것이겠죠.
감사합니다.
손과 손 사이로 숨이 흐르는 사람들이 아름답지유
우리 문학의봄 회원님들은 모두 저의 동반자 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나름데로 향 내음을 표현 하신 듯 합니다
계절 속을 걷는 사람을 표현하였습니다.
계절보다 아름다운 것은 단연 사람의 호흡이었습니다.
아직은
이 여름이 느려지진 않았지만 ~
피할 수 없으면
그래도 여름을 건강하게 즐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름이 비껴가야 가을을 노래할 터인데 아직
가을은 더디 오나 봅니다. 건강 잘 지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