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69
8월3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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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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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zZwm0ucy3s
[서울대교구 전창훈 시몬(신사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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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
요즘 우울증 비슷한 무기력감에 빠졌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좀 시작해보면 어떠실까요?”라고 말하면, “옛날에 다 해 봤어요. 지금 제 환경에서는 불가능해요. 안 돼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삶이 우울해요. 무기력해요. 나이만 먹고 있어요!”라고 또 말합니다. 어쩌라는 말입니까?
삶의 에너지는 ‘행복을 좇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가젤을 잡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표범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표범에 잡히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도망치는 가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행복은 생존입니다. 그 행복에 다다르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삶의 활력입니다. 행복을 향한 목표 없는 삶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안 돼!”라는 원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삶의 의욕을 되찾고 지금의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는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은 것은 그 법칙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톰 빌리유’는 연설가요 퀘스트란 다이어트 식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대표입니다. 그는 병적으로 뚱뚱한 집안에서 자라 엄청난 뚱보였습니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는 패스트푸드를 들고 계셨고 누나는 살에 묻혀 몸조차 가누지 못한 채 침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물론 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먹는 유일한 야채는 패스트푸드 안에 있는 양상추가 전부였습니다. 매일매일 나빠지는 건강상태를 보며 죽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매일 운동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권고하는 대로 무리가 되지 않을 만큼의 ‘최소한의 운동량’만을 지속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몇 달을 꾸준히 운동했으나 체중이 더 늘었습니다. 운동하니 그 만족감에 식욕이 더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자신의 한계를 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도전으로 몸과 마음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톰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에 만연한 비만이라는 질병과 싸우기 위해 ‘퀘스트’라는 식품회사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연속적인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난이었고 ‘너무 큰 목표를 꿈꾼 것은 아닌가?’라는 회의감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문득 엄마와 누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퀘스트 시제품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래, 아직 더 버틸 수 있어!’라고 다짐했습니다. 지속적으로 버티고 노력하다 보니 누나는 회사가 시작한 시점에서 54kg을 감량했고, 회사도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으려 하지 않으면 아무런 발전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삶의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참조: ‘자신의 임계점을 찾는 법’, 유튜브 채널 ‘체인지 그라운드’]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선 ‘더 나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것은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고 싶어야 행복을 바라는 것입니다.
배고프지 않으면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성취에 목마르고 배고파야 합니다.
그다음은 내가 바라는 행복을 긍정해주는 이를 찾아야 합니다. 자신 안에는 무조건 “넌 안 돼!”라고 말하는 자아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무조건 순응하게 태어납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이를 찾아야 합니다. ‘믿음’을 주는 이가 필요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긍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믿고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처음엔 잘 안 됩니다.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도 살을 조금 뺐는데, 살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저의 생각을 바꾸었을 때부터입니다. 저는 살을 빼는데 ‘음식 20%, 운동 80%’만큼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과는 반대로 ‘음식 80%, 운동 20%’임을 알았을 때부터 살이 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먼저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다면 감히 물 위로 뛰어내릴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넌 할 수 있어!”와 “어떻게?”가 함께 와야 합니다. 이것을 ‘은총과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정의 은총과 방법의 진리를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는 것은 ‘꾸준함’입니다. 베드로는 물 위에서 비틀거립니다. 우리 믿음은 한순간에 크지 않습니다. ‘성장’합니다. 톰 빌리유가 어머니와 누나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믿음을 지속시킬 수 있었듯 우리도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실패에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분명 목표에 다다를 날이 있습니다.
의욕을 가지고 살아야 진정한 삶입니다. 의욕을 가지려면 행복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평생 목표, 10년 목표, 1년 목표, 하루 목표를 정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께 “한번 해 보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기도합시다.
그분은 항상 “해 봐!”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요?”라고 물으십시오.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젠 비틀거리며 믿음을 성장시키고 확인해가는 일만 남습니다. 이 메커니즘에 자신을 결속시킬 수 있어야 참으로 활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처럼 기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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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마산교구 유청 안셀모 신부님]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베드로가 주님께 부탁한 의도가 무엇일까 묵상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문득 개인적으로 이렇게 풀이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혼자라도 배에서 내려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요.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다른 형제들의 어려움은 제쳐 두고, 혼자만이라도 빠져나가려는 생각을 하였다고 상상해 본 것입니다.
때로는 공동체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이와 함께하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습니다. 다 그만두고 사람들을 피하여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거센 바람과도 같은 어려움이 들이닥칠 때,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었든 나라도 살려 달라며 주님께 부르짖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처럼 혼자서 헤매기도 합니다.
바람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오르자 그쳤습니다(14,32 참조). 배에서 내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 배에 머물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더라도 머물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혼자 살고 싶다고 빠져나가더라도 주님께서는 아마도 우리의 손을 잡아 끌고 다시 배에 오르실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공동체에 늘 편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공동체이기에 풍랑에 맞서 함께 노를 저으며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제자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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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22-36: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오늘 복음은 파도와 바람에 시달리는 제자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믿음을 시험받는 베드로의 모습을 전해 준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23절) 예수님은 언제나 중요한 순간마다 아버지와의 친교 안에 머무르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은 당신께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Enarrationes in Psalmos 요약) 우리의 삶도 바람과 파도에 휘말린 듯 불안과 고통 속에 있을 때, 기도는 하느님과 끊임없는 연결을 통해 우리를 붙들어 준다. 교부들은 배를 자주 교회의 표상으로 해석했다.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파도에 흔들리는 배는 이 세상에서 교회가 겪는 시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무르는 이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Commentarium in Matthaeum 요약) 오늘날 교회 역시 세상의 도전과 박해, 내부의 약함 때문에 흔들리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결국 무너지지 않는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 위를 걸어 나갔지만, 바람을 보고 두려워 빠지고 만다. 예수님은 그를 붙들며 말씀하신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여기서 믿음과 의심의 역동성을 짚는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큰 믿음으로 배에서 내렸으나, 곧바로 눈을 주님께 고정하지 않고 바람을 바라봄으로써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믿음은 눈을 주님께 고정할 때 강해진다.”(Homilia in Matthaeum 50 요약) 우리 역시 세상 풍파를 바라보면 두려움에 빠지지만, 눈을 주님께 고정할 때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고, 제자들은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3절)라고 고백한다. 이는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분명히 고백한 최초의 순간 중 하나이다. 교회는 폭풍우 치는 세상에서 항해하는 배와 같으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성령께서 그 배를 이끌어 가신다. 이 고백은 오늘날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계속 새롭게 울려 퍼져야 한다.
우리는 때로는 베드로처럼 넘어지고, 의심하며, 주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코 완벽하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쓰러져도 다시 주님께 외치며 손을 내미는 믿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성인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주님께 손을 내미는 사람이다.” 우리 삶의 바람과 파도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베드로처럼 주님께 외치는 것이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30절) 그분은 언제나 즉시 손을 내미신다. 우리도 인생의 바다에서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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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마태오 14,22-36 (물 위를 걸으시다)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태 14,25)
불신
거슬러
믿음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절망
거슬러
희망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무정
거슬러
사랑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홀로
거슬러
함께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죽임
거슬러
살림이신
당신처럼
나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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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 중에 주교님께서는 ‘말씀의 전례’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신자들이 전례의 구경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라셨고, 그 정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공의회 이전에는 주일 미사의 독서가 1년 주기로 반복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미사 안에서 접하는 성경의 범위가 비교적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례 개혁 이후 주일 미사의 말씀은 3년 주기로 편성되었습니다. 가해에는 마태오 복음, 나해에는 마르코 복음, 다해에는 루카 복음을 중심으로 읽고, 요한 복음은 특별한 시기와 축일에 배치되었습니다. 평일 미사도 홀수 해와 짝수 해를 기준으로 제1독서가 배정되어, 신자들이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더 넓고 균형 있게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의 전례 개혁은 단순히 성경 독서의 양을 늘린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전례력의 흐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엮어 놓았습니다. 대림 시기에는 기다림과 희망의 말씀이, 성탄 시기에는 육화의 신비가, 사순 시기에는 회개와 십자가의 길이, 부활 시기에는 생명과 성령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매주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서로 흩어진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큰 구원 이야기 안에서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한 주 한 주 말씀을 들으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우게 됩니다. 말씀의 전례 개혁은 교회가 성경을 다시 신자들의 삶 한가운데로 가져온 은총의 사건이며, 미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선포되도록 한 소중한 열매입니다.
주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큰 ‘퍼즐’을 맞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퍼즐 조각 하나하나만 볼 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각들이 하나씩 맞추어지면 마침내 아름다운 그림이 드러납니다. 말씀의 전례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의 독서만 보면 어렵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례력 안에서 말씀을 꾸준히 듣고 묵상하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큰 그림이 보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사랑이 보이고,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어 오신 길이 보입니다. 말씀은 흩어진 조각이 아니라 우리 삶을 완성해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현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강대국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로마와 같은 강대국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빌로니아라는 강대국에 의지하고, 그들의 문화와 힘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이스라엘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과 세상의 권력은 잠시 우리를 지켜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예레미야는 눈앞의 현실보다 더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강대국의 힘보다 하느님의 말씀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로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파도가 높이 일고, 물이 깊어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자 두려움이 밀려왔고,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바람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파도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물이 깊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두려움을 더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보다 눈앞의 바람을 더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에 빠진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주 바람을 봅니까? 얼마나 자주 파도를 봅니까? 건강의 문제, 경제적인 걱정, 인간관계의 어려움, 공동체 안의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흔듭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바람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파도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바람과 파도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물에 빠질 때조차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손을 내미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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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옛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려라.” 하고 말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깨어 있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간다. 좋은 일도 어려운 일도 감당하면서 산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려운 일 자체에 매달려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고 만다. 그리고 곤경에 빠져 자기 눈이 멀면 문제의 핵심을 놓치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려울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곁으로 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두려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베드로의 청을 들어주셔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다. 일상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도 정신을 차려 예수님을 바라보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믿음을 가지고 의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눈이 멀면, 자기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원자를 만나지 못한다.
시련을 만나서 어려움만 생각하면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거센 바람이 부는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그 한복판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 그리하면 문제는 곧 은총이다. 위기는 기회다. 시련과 고통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을 단련시키는 은총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고통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된다.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된다. 부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행복하시길 바란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지만,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보장받는다. 구원의 여정에 용기와 두려움, 믿음과 의심이 혼재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는 확실하다. 주님은 믿고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믿음으로 손을 댄 병든 이들이 구원받았다. 확고하게 믿는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한다. 누가 뭐라 해도 ‘믿음은 주님의 선물이다.’
“주님, 언제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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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주변에서 다이어트하는 분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5kg을 뺐다, 10kg을 뺐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몇 달 뒤에 다시 만나면, 예전 체중 그대로가 되었다고 또는 아니 더 살이 쪘다고 한숨을 지으시는 분을 보게 됩니다. 힘들게 굶어가며 살을 뺐는데 왜 그럴까요?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할 것이 아니야.”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나이에 다이어트야? 그냥 잘 먹고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야."
목표와 목적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단순히 목표만을 삼게 되면, 이 목표에 도달한 후에 허탈감과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하면 목표를 달성한 후에도 목적에 맞게 살게 됩니다. 만약 다이어트하시는 분이 건강함과 늘씬한 몸매로 자신감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세례받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정확한 목적이 없으면 세례 후 곧바로 냉담하게 됩니다. 또 세속적인 안정만을 목적으로 삼고 세례받으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주님과 맞지 않는 것이기에 목적이 제대로 맞지 않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주님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함께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기쁨의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영적 위로와 평화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습니다.
고대 근동 및 유다 전통에서 ‘바다’나 ‘깊은 물’은 죽음, 혼돈, 마귀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과 죽음의 세력을 발 아래 두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놀라서 “유령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는 제자들을 향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라는 말은 탈출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나는 있는 나다”라고 계시하신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이 곧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말하자, “오너라” 하십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다가 빠지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하지만, 그의 시선이 거센 바람으로 향하는 순간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에 의지하면서 거센 바람 대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시선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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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물 위를 걸으시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4-27)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호수 한가운데에서 맞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는 모습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즉 불안감과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으로만 고난과 역경을 물리치려고 애를 쓰는 인간들의 헛된 노력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쪽으로 가셨다.”라는 말은,
제자들을 도와주려고 가셨다는 뜻입니다. ‘새벽’은 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부족하기만 했던 제자들의 믿음이 조금씩 발전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가신 것은 타고 갈 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과시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일이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의도로 물 위를 걸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이 호수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또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무엇인가를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러댄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물론 믿음이 부족해서 유령 따위를 무서워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유령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들은 왜 유령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둠 속에서 자기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그 ‘무엇’이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에 유령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령이라고 생각한 일 자체는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왜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을 무서워했을까? 첫째, 그들은 ‘그 무엇’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무서워했을 것입니다. 정체를 확실하게 알면 무섭지 않거나 덜 무서웠을 텐데, ‘몰라서’ 무서워한 것입니다. 둘째,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 무엇’에 비해서 보잘것없고 허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능력은,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무서우니까 무서워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을 꾸짖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는 말씀이고, 그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도, 또 유령을 무서워한 것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라는 말씀은,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병자에게 하신 말씀으로 자주 사용된 말씀으로서(마태 9,2.22),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나다.”라는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는 말씀에서 온 것으로 해석됩니다. (“나는 있는 나다.”는 “나는 존재 자체다.”라는 뜻이고 ‘야훼’를 풀이한 말입니다.)
그래서 “나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다.”로 해석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주로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날 때 사용되는 말씀입니다.(루카 1,13.30) 이 세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과 권능을 암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두려움에서는 해방되었겠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욱 놀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마태오복음 8장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물 위를 걸으실 수 있는가?”) 이 의문의 답은 33절에 있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33)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며 자연도 지배하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믿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은(마태 14,28),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특별한 능력에 대한 욕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마태 14,31), 베드로 사도가 믿음이 부족해서 물에 빠진 것을 꾸짖으신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 자체를 꾸짖으신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 상황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어갈 이유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와 예수님 부활 후의 이야기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36-37) 제자들은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보긴 했는데, 부활하셨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유령이 되어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를 뜻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
“그들은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해서 몹시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즉 부활하셨다는 것 제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면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24,39-40)
(아무리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라도 유령으로 나타나면 무서운 것일까? 어떻든 이 이야기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유령을 무서워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아직 부족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랬던 제자들이었는데, 성령 강림 후에는 유령 같은 것은 무서워하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선교사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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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용민 안드레아 신부님]
<주님께 의탁하나이다.>
어릴 적 두발자전거를 타던 형이 부러워서 저도 타게 해달라고 한참을 졸랐습니다. 한참을 졸라서 겨우 형과 함께 집 앞 소방도로에 자전거를 끌고 나갔습니다. 안장에 걸터앉으니 페달에 겨우 발이 닫았습니다.“꼭 붙잡아! 꼭 붙잡고 있어야 돼! 놓으면 안 돼!” 뒤에서 자전거를 붙들고 있는 형에게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자전거는 기우뚱 넘어질라 그러고 겁에 질린 저는 꽉 붙들어달라고 소리를 치고, 그러면 형은 꽉 붙잡고 있으니까 안심하고 패달을 밟으라고 대답했습니다. 형이 단단히 자전거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씩 페달을 밟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자전거는 조금씩 앞으로 나갔고 약간의 속도감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형이 아직도 자전거를 꽉 붙들고 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형!” “왜?” “아직 꽉 붙들고 있는 거지?” “그럼. 걱정 마. 꽉 붙들고 있으니까 앞만 보고 페달을 밟아!”
자전거에 속도가 붙자 겁이 덜컥 난 저는 그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핸들이 휙 돌아가더니 자전거가 중심을 잃고 저와 형은 땅바닥에 나둥그러지고 말았습니다.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났습니다.
저는 울면서 형을 볼멘소리로 “꽉 좀 붙들라니까?” 자전거를 붙들다 손가락을 다친 형이 “꽉 붙들고 있었는데 그걸 못 믿고 뒤를 돌아다보니까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거잖아. 그래서 너도 다치고 나도 다치고 이게 뭐야.” 하면서 저를 나무랐습니다.
정말 형은 제가 넘어질까 봐 자전거를 붙들어 세우려다 손을 다친 것이었습니다. 형이 붙들어준다고 생각했을 땐 아무 걱정 없이 자전거를 탈 수 있었는데 걱정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전거는 중심을 잃고 저는 넘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오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베드로 사도는 물위를 걸었습니다. 갑자기 풍랑이 불어오자 그만 겁에 질린 베드로사도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물에서 건져주시며 믿음이 약함을 질책하십니다. 베드로 사도가 걱정과 의심을 품는 순간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잊어버리고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호수는 사도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과히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기에 역풍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혼자서 풍랑의 세상을 향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예수님께 의지해서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제자들의 삶을 지탱해주시는 분입니다. 요즘은 영적으로나 세상적으로나 살기에 어려움이 많은 시대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지탱해주신다는 믿음으로 용기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믿고 주님께 탁 맡기고서 내가 가야할 길을 성실히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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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첫 마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스승을 보고 베드로도 자신이 물 위를 걸어 스승께로 갈 수 있도록 청합니다. “오너라” 하시는 예수의 말씀에 용감하게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 거센 바람에 스승 예수를 향한 믿음이 송두리째 사라지면서 첫 발을 디뎠을 때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게 되고 결국 베드로는 물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물 위라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례나 견진을 받았을 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을 통하여 처음으로 확신하던 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확고했던 첫 마음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역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이것저것 추구하면서 살다보면 신앙을 쉽게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세례를 받았을 때나, 아니면 우리를 신앙으로 이끌게 된 그 어떤 사건을 경험했을 때 가졌던 그 마음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까? 그 마음이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처음 가졌던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지금은 신앙의 첫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세례 받을 때의 첫 마음을 기억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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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정석 라파엘 신부님]
<밑져야 본전>
저는 가끔 꿈속에서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것은 아니지만 껑충껑충 뛰다 보면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몸이 솟구쳐 오르는 꿈. 그런데 늘 같은 생각으로 꿈을 깨곤 합니다. ‘어, 이러다 떨어지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라치면 꼭 꿈에서 깨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어, 정말 내가 물 위에 서 있는 것 맞아?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갑자기 호수가 나를 삼켜버리면 어쩌지? 분명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나 베드로는 진짜 물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심이 베드로를 덮치는 순간 호수가 그를 삼켜버립니다. 믿음은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뛰어넘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안다고 믿고 있던 세계를 부정할 때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마르 8,34)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을 때 군중은 그분을 ‘알아봅니다’. 마태오복음은 이 단어를 아주 특별하게 사용합니다(마태 7,16.20; 11,27; 14,35; 17,12). 누군가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그분의 정체를 파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아버지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 치유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 아니라 저분이라면 꼭 나를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분을 붙들었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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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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