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한지(楚漢誌) 2-69 (99)
《장량(張良)의 계략》
수하의 말을 듣자 영포(英布)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혼자말로 투덜거렸다.
'음 .... 나에게 의제(義帝)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놈은 분명히 항우였었다.
그런데 그자가 이제 와서는 모든 죄를 나에게 뒤집어 씌워 나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그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자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그러자 수하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만류한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이 사실이 항우에게 알려지면, 그는 장군을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옵니다.'그 말에 영포는 화를 발칵낸다.'귀공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지난 날
진황 자영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도 항우였고, 시황제의 여산릉 무덤을 파헤치라고 명령한
사람도 항우였고, 구강에서 의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나에게 내린 사람 역시 틀림없는 항우였었소.
이렇게 나는 항우에게 충성을 다하느라고 차마 못할 일을 모두 감행했는데, 항우는 나를 써먹을 대로
다 써먹고 나서, 이제 와서는 상을 주지는 못하나마 모함으로 나를 매장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내 어찌 그런 자를 그냥 내 버려둘 수있겠소 ?'
수하의 술책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적이어서 영포는 이를 갈며 분노하고 있었다.
수하는 영포의 감정에 충격을 주기 위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장군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의제를 시해한 대역죄인>이라는 오명만은 깨끗이 씻어 버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군의 오명은 천추에 길이 남게 됩니다.
영포는 생각할 수록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가슴을 두드리며 말한다.'그러니까 항우란 놈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다는 것이오. 두고 보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항우를 죽여 없애고야 말 것이오.'
수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말한다.
'항우는 워낙 용맹하기 때문에 그를 죽여 없애기는 용이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설사 항우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오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명을 깨끗이 벗어나시려면 방법을 달리 하셔야 합니다.'
'의제 살해의 누명을 깨끗이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고요 ? 그것이 무엇이오 ? 선생이 방법을
알고 계시는 모양인데, 어서 내게 말씀 좀 해주시오.'
영포는 수하에게 바짝 다가서며 대답을 재촉하였다.
그러자 수하는 깊이 생각해 보는 태도를 보이다가 머리를 조용히 들며 말한다.
'누명을 깨끗이 벗으려면, 한왕과 손을 잡고 항우를 공동으로 쳐부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왕은 <대역죄인 항우를 섬멸하겠다>는 깃발을 뚜렸하게 내걸고 있으니까, 한왕과
한 패가 되어 항우와 싸우면 대역 죄인의 오명은 절로 벗겨지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
영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과연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한왕이 나하고
손을 잡으려고 할까요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들어 아시겠지만, 한왕은 도량이 크셔서
어떤 사람이 귀순해 와도 반갑게 맞으실 분입니다.더구나 한왕은 평소에도 장군을 각별히
흠모해 오셨기 때문에 장군께서 찾아가시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정말로 나를 반갑게 대해 줄까요 .... ? '
'지금까지 직접 전투의 상대가 항복이나 귀순을 했어도 그들 모두를 반갑게 맞아 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도 결심이 서신다면 제가 한왕께 장군의 뜻을 전해 올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귀공이 나의 뜻을 한왕께 꼭 좀 전해 주시오. 나는 한왕을 도와서 항우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겠소.'이렇게 영포가 한왕에게 귀순할 결심을 굳혔을 바로 그때, 항우로 부터 뜻하지 앟은
조서(詔書)가 날아왔다. 항우가 보낸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구강왕 영포 장군은 보시오.장군은 근자에는 일신상의 안일만 도모하면서,
내가 제나라를 치는데도 지원병을 보내 주지도 않았고, 유방이 팽성을 점령하여 전투를 치룰 때에도
출병을 하지 않았으니 그 무슨 심사요.
그대는 자신의 무용(武勇)만 믿고 군신지의(君臣之義)를 지키지 않으니, 이는 분명히 반역 행위요.
나는 이제부터 모든 군사들을 규합하여 유방을 처없앨 생각이니, 이번에는 지원병을 보내도록 하시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니 각별히 유의하시오.그야말로 오만스럽기 짝없는 으름장이었다.
영포는 항우의 조서를 읽어 보고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즉석에서 조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며
울부짖듯 외쳤다.'나를 대역 죄인으로 몰아버린 자가 무슨 낮짝으로 이런 으름장을 놓는단 말인가 ....
여봐라 ! 이 조서를 가지고 온 자를 당장에 능지처참시켜라.'
항우의 조서를 가지고 온 자를 극형에 처하라는 엄명을 내린 영포는 모사 비혁을 불러 부탁한다.
'나는 이제부터 수하 선생과 함께 영양성으로 가서, 한왕(漢王)에게 귀순할 생각이오.
공은 나의 가족들을 데리고 수일 안으로 영양성으로 오도록 하오.'
결국 항우의 조서는 영포의 귀순을 촉진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영포는 수하와 함께 영양성으로 한왕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한왕은 영포가 귀순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밖까지 몸소 마중을 나와 주었다.'용명(勇名)을 천하에 떨치는 영포장군께서
나를 찾아와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려. 오늘의 이 우정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두 사람이 함께 대전(大殿)으로 올라오니,
그 자리에는 장량, 진평 같은 중신들이 영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포는 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잠시후에 벌어진 환영연에 자리를 함께 하였다.
영포가 환영연에 참석한 중신의 면면을 살펴 보면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명을 받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 자리에 참석한 중신과 대부들 간에 웃으며 주고 받는 대화가 마치 친구처럼 화기
애애한 것 이었다.(한왕이 인후하신 군주임은 진작부터 들어왔지만, 군신지간에도 이렇게 다정 다감하고
화기 애애할 줄은 정말 몰랐구나. 과연 한왕이 이런 성군이라면 누가 한왕을 위해 목숨을 아낄 것인가 ! )
영포는 귀순해 온 것이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한왕에게 새삼스럽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은 구강성에 3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사온데, 모든 군사를 오늘로서 대왕 전하께 바치고,
대왕을 측근에서 모시고 싶사옵니다.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구강성의 성주를 친히 임명해 주시옵소서.'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며,
'그러면 팽월 장군을 구강성주로 임명하여, 초나라 군사들의 군량 수송로를 막아내도록 합시다.'
한편, 항우는 영포가 한왕에게 귀순한 사실을 알고 엄청나게 분노하며 당장 군사를 일으켜 구강성을
치려 하였다.그러자 군사 범증이 간한다.'영포쯤 배반했기로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옵니다.
우리가 힘을 길러 삼진을 탈환한 뒤에 함양까지 밀고 올라가면 한왕과 한신인들 어쩔 것이옵니까 ?
함양만 점령하고 나면 제후들은 절로 머리를 숙이고 모여 오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 그도 그럴 성싶어 그의 말을 쫒기로 하였다.
영포가 귀순해 온 바로 그날 밤, 한왕은 장량을 불러 조용히 말한다.
'우리가 영포를 귀순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오로지 선생의 덕택이었습니다.그런데 나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 하나 있습니다.'장량이 두 손을 읍하고 조용히 묻는다.
'무슨 일이시온지 시원스럽게 말씀 하시옵소서.''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한신 장군에 관한 문제요.
지난번에 팽성으로 출정할 때, 한신 장군이 그토록 만류하는 것을 내가 고집스럽게 출정을 감행했더니,
한신 장군은 그 일이 몹시 비위에 거슬렸던지, 아직까지도 나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있소이다.
혹시나 한신 장군이 엉뚱한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닐지요 ?'사실 한왕은 한신의 태도가
몹시 걱정스러웠다. 전공이 혁혁했던 한신을 까닭 없이 대원수의 직책에서 해임하여 함양에
눌러 앉게 한 것도 후회스러웠지만, 한신이 그 후로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
은근히 걱정스러웠던 것이다.한신의 태도에 대해서는 장량도 약간의 의아심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장량은 한왕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한신 장군의 문제는 별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소하 승상께서 때마침 군량미를 수송하는 문제로 지금 함양에 와 계시다고 하니, 신이 승상을 만나 뵙고,
한신 장군의 문제도 의논해 볼 겸, 내일쯤 함양에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신이 함양에서 돌아올 때에는 한신 장군도 함께 와서 대왕을 배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왕은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다음날, 장량(張良)은 영양성을 떠나 함양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함양에 도착하는 대로 승상부에서 소하와 함께 술잔을 나누며 지나가는 말처럼 소하에게 물었다.
'한신 장군을 본 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 한신 장군도 잘 계시옵니까 ?'
그러자 소하(蕭何)가 즉각 대답한다.'한신 장군은 대원수의 직책에서 해임당하고 나서 부터는
매우 울적하게 지내고 있습니다.한 원수는 나에게 말하기를, 삼진을 격파하고 함양을 공략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건만, 주상께서는 자기를 해임하고 보잘것 없는 위표(魏豹)를 총사령관으로 위촉했다고
크게 불평하였습니다.더구나 주공께서 팽성 전투에서 참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일체 두문불출할 뿐만 아니라, 내가 찾아가도 만나 주지도 않습니다.
짐작컨대 한신 장군은 주공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사과의 말씀을 들려 주시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군신지의(君臣之誼)에 벗어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제가 가도 만나 주지 않을까요 ?'
'모르기는 하지만, 선생이 가셔도 만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음 ! 한신 장군의 감정이 몹시 상한 모양이군요.'장량은 눈을 감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만약 한신이 배반을 한다면 천하 통일의 대업은 이루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큰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한왕이 한신을 찾아가 사과를 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군신지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주종(主從)이 바뀌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니런가 ?)
장량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대책을 강구해 보다가 마침내 묘계(妙計)하나를 생각해 내었다.
그리하여 장량은 심복 부하들을 불러 방문(榜文) 넉장을 써주면서,
'이 방문을 함양성 사대문(四大門)에 한 장씩 붙여라 ...'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 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왕이 팽성전투에서 대패하여, 관중(關中)의 모든 봉토(封土)를 항왕에게 반납하기로 하였다.>
사대문에 이런 방문이 나붙자 소문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서, 마침내 한신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신은 그 소문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그러나 그는 얼마 후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측근에게 말했다.'그 방문은 장량 선생이 나를 움직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써붙인 허위의
방문일 것이다.한왕이 아무리 대패하였기로 애써 점령한 관중의 땅을 항우에게 고스란히
내줄 리가 없지 않겠느냐 ?'과연 한신의 추측은 명철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러자 측근이 대답한다.'성안의 공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원수께서는 너무 방심하지
마시옵소서.'마침 그때 누군가 대문을 급히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느냐 ? '하고 한신이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승상부의 특명으로 가가호호(家家戶戶) 호구 조사(戶口調査)를 다니는 중이옵니다. 댁에는
식구가 몇 사람이나 되시옵니까 ?'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한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승상부에서 무슨 일로 급작스럽게 호구 조사를 한다는 말인가 ?'
'잘 모르기는 하옵니다만,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한왕께서 지난 번 팽성 전투에서 대패했을 때,
태공(太公) 내외 분과 여 왕후(呂王后)를 항우에게 빼앗겼다고 하옵니다.
그리하여 한왕께서 몹시 고민을 하시다가, 일가족을 돌려받는 대가로 그동안 점령하였던 관중의
봉토를 모두 초패왕에게 되돌려 주기로 하셨답니다.그래서 장량 선생이 한왕의 명을 받고
함양성 안의 인구 조사를 하려고 지금 승상부에 와 계시다고 합니다.아마 호구 조사는 초패왕에게
보낼 현황서의 일부인 모양인데, 소생은 그 때문에 인구 조사를 나온 것이옵니다.'
조사원의 말을 들어 보면 사대문에 나붙은 방문은 노상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나라의 위급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나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칩거해 있을 수 만은 없는 일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한신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승상부로 말을 달려나갔다.
장량은 한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소하 승상과 함께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한신 장군이 자진하여 이리로 왔다니, 우리들의 계획이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나는 잠시 뒷방으로 피해 있을 테니, 승상께서 먼저 한신 장군을 만나도록 하소서.'
장량이 뒷방으로 숨어 버린 뒤에 소하는 한신을 반갑게 맞아들여 말한다.'내가 그동안 장군을
여러 차례 찾아갔건만 장군이 나를 만나 주려고 하지 않았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 '
한신(韓信)이 대답한다.'주상이 저를 버리셨으니 제가 무슨 면목으로 승상을 만나 뵐 수 있으오리까.
모든 일이 부끄럽기만 하여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소하가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주상께서 장군을 버리고 위표를 총대장으로 등용하셨다가
팽성전투에서 크게 패하셨는데, 그것은 주상의 잘못이지 장군의 잘못은 아니지않소?
그런데 부끄럽기는 뭐가 부끄럽다는 말씀이시오? 솔직히 말하면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주상이지,
장군은 아니오.''승상의 말씀을 듣고 보니 많은 위안이 되옵니다.그런데 떠도는 소문을 듣자니,
주상께서 관중의 봉토를 항우에게 고스란히 넘겨 주기 위해 장량 선생을 이곳에 보내셨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옵니까?''모두가 사실이오. 주상이 팽성 대전에서 참패하실 때, 불행하게도
태공 내외분과 왕후까지 항우의 손에 포로가 되어 버리셨소. 그래서 주상은 관중의 봉토를 돌려주고,
그 대가로 가족들을 돌려받고 싶어하시오.모든 장수들은 봉토와 대왕의 가족을 바꿀 것이 아니라,
항우를 무력으로 때려부수고 태공과 왕후를 우리 손으로 구출해 오자고 주장하지만,
장량 선생만은 반대를 하고 계시지요.''장량 선생이 반대를 하신다구요 ? 대왕의 일가족을
우리 힘으로 빼앗아 오는 것이 뭐가 마땅치 않아 많은 물자와 병사를 희생하며
애써 점령한 귀중한 관중 봉토와 바꿔치기를 한다는 것입니까 ?'
소하가 다시금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장군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장량 선생은 본시가 한(韓)나라
사람이오. 그가 자신의 부귀와 평안만 누리면 그만이지, 뭐가 답답해서 싸우려고 하겠소.
그러니 장량 선생이 항복을 강력히 권고하면서 이미 초나라에 우리가 이번에 점령한 봉토와
한왕 일가족을 교환하기로 통보하고 지금은 초나라에 알려 줄 인구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이곳에 와 계시오.나도 달갑지는 않지만 왕명이니 어쩔 수가 없어 이러고 있는 중입니다.'
소하는 장량과의 사전 논의대로 모든 잘못을 장량에게 돌려 버렸다.
그 말을 들은 한신의 얼굴은 매우 착잡하였다.한신은 아무런 말도 없이 심사 묵고하다 문득 얼굴을 들며
결연히 말했다.'승상 각하 ! 우리가 천신 만고 끝에 점령한 관중의 봉토를 항우에게 되돌려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태공 내외분과 여 왕후께서 포로가 되셨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무력으로
쳐들어가면 얼마든지 구출해 올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 '
'사태가 복잡해지면 항우가 태공과 왕후를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기에 그러는 것이오. 주상은 그런 점을
염려하셔서 관중 봉토와 바꿔치기를 하시려는 것이라오.'그러자 한신은 고개를 힘차게 흔들면서,
'항우는 성품이 워낙 포악하여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범증은 사려가 무척 깊은 사람인 관계로 태공과 왕후를 죽이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관중 봉토와 교환할 생각은 일단 단념하시고, 우리 힘으로 태공을 구출해 올 계획을
논의하십시다.만약 지금이라도 저를 초나라로 쳐들어가게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기필코
태공과 왕후를 탈환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승상께서는 속히 허락을 내려 주소서.'뒷방에서 엿듣고 있던 장량은 너무도 기뻐 한신 앞으로
달려 나와 그의 손을 덥석 움켜잡으며 감격스럽게 말했다.
'장군의 의지는 정말 대단하오. 나는 장군의 입에서 그런 말씀이 나오게 하려고 무척 애를 써 왔소.'
한신은 그제서야 이 모든 것이 장량의 계략이었음을 알아채고 장량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선생의 깊으신 계략에는 새삼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장군이나 나나 모두가 나라를 위하는 길이
아니오 ? 항우는 세력이 워낙 강대하기 때문에, 장군이 쳐들어가도 승리를 거두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오.
까딱 잘못하다가는 팽성의 대패를 되풀이할 뿐이지, 태공과 왕후를 구출해 오기는 어려울 것이란 말이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 노기를 띠며 장량을 나무란다.
'지난날 저를 대원수로 추천해 주신 분은 바로 선생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찌하여 저를 그처럼
가볍게 보시옵니까.지금 항우의 세력이 강대하다고는 하지만, 항우 자신만 강대할 뿐 그의 부하들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어서, 소장은 그들을 호되게 밀어붙여, 대번에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자신이 있사옵니다.'장량이 조용히 대답한다.'원수는 초군을 무척 가볍게 보고 계시는 듯 하오.
그러나 범증이라는 사람은 신출 귀몰한 지략을 가지고 있는 모사인데다가, 용저와 종리매 같은 명장도
있으니, 어찌 그들을 혼자서 당해 낼 수 있겠소 ? '한신은 그 말에 형용하기 어려운 모욕감을 느꼈다.
한신은 발끈하며 장량을 나무라듯 말한다.'자방 선생 ! 제가 만약 용저와 종리매를 쳐부수고 범증을
생포해 오지 못하거든 선생이 저의 목을 베어 주소서. 그래도 저는 원망을 아니하겠습니다.'
장량이 그 말을 듣고 소하에게 묻는다.'한신 장군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승상께서는 한 장군의 출정을
허락하심이 좋을 줄로 생각됩니다.그러나 저는 왕명을 받들고 함양의 인구를 조사하러 왔는데,
그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러자 한신이 얼른 대답을 가로맡는다.
'그 일은 조금도 염려마시옵소서. 제가 선생을 모시고 영양성으로 가서, 대왕을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초나라 사신이 와 있다면 그자의 목부터 베어 버리겠습니다.'
소하가 그 말을 듣고 손을 흔든다.'사태가 복잡한 이 판국에 초나라 사신을 죽여 버리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 것이오. 그보다도 사대문에 나붙어 있는 방문부터 빨리 떼어 버리기로 합시다.'
소하는 관리들을 시켜 사대문에 나붙은 방문을 모조리 떼어 버리자, 백성들은 한왕이 봉토 교환을
철회한 것으로 알고 모두들 크게 기뻐하였다.다음날 장량은 한신, 소하 등과 함께 함양을 떠나
영양성에 도착하여 그 길로 한왕을 찾아 뵙고, 지금까지의 경과를 소상히 보고한 뒤에,
'한신과 소하를 만나시거든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시옵소서.'하고 미리 말을 하여두었다.
이윽고 소하와 한신이 입궐하자, 한왕은 소하의 손을 밥갑게 붙잡으며 말했다.
'승상은 포증에 계시면서 백만 군사들의 군량을 공급해 주시느라고 참으로 노고가 많으셨소이다.'
그리고 나서 한신의 손을 정답게 붙잡았다.'내가 장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대군을 일으켰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으니, 부끄러워 장군을 대할 면목이 없소이다.'
그러자 한신이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대왕께서 팽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은 아무런 도움도 되어 드리지 못해 면목이 없사옵니다.장량 선생의 말씀을 듣자옵건대, 우리가 점령한
관중의 봉토를 항우에게 반환하신다고 하옵는데, 그런 일은 아니 하심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2-70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