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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70 (100)
《한군(漢軍)의 대승(大勝)》
한왕이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나 역시 점령한 관중 봉토를 되돌려 주고 싶지는 않소.
그러나 태공 내외분과 왕후를 돌려 받자니, 그 길밖에 없는 것을 어찌하겠소 ? '
그러자 한신이 결연히 말한다.'그 일은 걱정을 마시옵소서. 어떤 일이 있어도 신이 태공 내외분과
왕후를 제 손으로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한신의 얼굴에는 패기가 넘쳐 있으므로, 한왕은 내심 크게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신의 사기를 더욱 부추겨 주기 위해서 일부러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장군의 용맹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러나 항우는 지금 연(燕)나라와 제(齊)나라까지 항복시켜서
그 기세가 등등하기 이를데 없으니, 장군 혼자서 어찌 막강한 초나라를 당해 낼 수가 있겠소?
얼마 전에 항우가 <한신이라는 자가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당장에 사로잡아 버리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하오.그래서 나는 아예 싸우기를 단념하고, 장량 선생과 소하 승상에게 관중 봉토와
포로로 잡힌 나의 가족을 교환하자고 하였던 것이오.'한신은 그 말을 듣고 울분을 금치 못하며
호소하듯 말했다.'항우가 어떤 호언장담을 했어도 대왕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마시옵소서.
대왕께서 출정명령만 내려 주시면 신은 맹세코 항우를 격파하고야 말겠습니다.
만약 제가 항우에게 패하고 돌아오게 되면 그때는 신을 군법에 돌려 중죄를 내려 주시옵소서.'
한왕은 그제서야 적이 기뻐하며 말한다.'원수가 그처럼 말씀하시니, 어떤 묘책을 가지고 계신지
우선 그 내막을 좀 들어 보기로 합시다.'한신이 대답한다.
'신은 함양에 있는 동안에 파초대전(破楚大戰)에 대비하여 이미 수백대의 전차(戰車)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병서(兵書)를 보게 되면 <평지에서는 전차를 써야 하고, 험악한 산중에서는 보병(步兵)을 써야 하고,
적을 추격할 때에는 기병(騎兵)을 써야 한다>는 말이 있사옵니다.영양성과 팽성 사이는 끝없는 평지가
이어지므로 우리가 전차를 이용하면 적을 모조리 격파할 수 있사옵니다.'
한왕은 한신의 계략을 지극히 만족스럽게 여기며 물었다.'전차라는 것은 어떻게 생긴 것이오 ? '
'전차의 외형은 보통의 수레와 다름이 없사옵니다.그러나 앞머리에는 저수통(貯水桶)을 달아서
적의 화공(火攻)을 방지할 수 있고, 뒤에는 포장을 쳐놓아서 포장 속에는 철포(鐵砲)와 궁시(弓矢)를 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옵니다.이와 같은 전차 수백 대를 철갑을 입힌 말(馬) 에게 끌게 하여 일시에 적진을
향하여 달려나가며 공격을 퍼부으면 제 아무리 항우라도 패퇴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한왕은 새삼 감탄의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한다.'장군이 그토록 대단한 전차를 수백대나 미리
준비할 줄을 나는 전혀 몰랐소이다.아무튼 상대가 워낙 막강한 적이니까, 이왕이면 실수가 없도록
전차를 더 만들어 가지고 훈련도 시켜서 전투를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소 ?'
'대왕 전하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영양성 안에서는 그날부터 군사들을 동원하여 전차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전차를 부지런히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 훈련을 맹렬하게 계속하기를
무려 60여일.승상 소하는 그동안에 함양으로 돌아가 군수 물자를 풍성하게 보내 왔기 때문에,
이제는 50만 군사가 언제든지 출동해도 좋을 만큼 되었다.이에 한신(韓信)은 한왕에게 아뢰었다.
'이제는 싸울 수 있는 태세를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항우에게 선전 포고문을 당당하게
보내 주시옵소서.포고문의 내용은 될수록 항우를 분노하게 쓰셔서, 항우가 우리에게 먼저 덤벼오도록
해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항우를 쳐부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한왕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한다.
'마침 항우의 사신이 지금 객사(客舍)에 와 있으니 선전 포고문을 그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어떻겠소 ?'
한신은 그 말을 듣고 놀란다.'항우의 사신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 있사옵니까 ?'
'함양을 접수하려는 사전 교섭을 위해 사람을 보내 왔는데, 항우가 왕릉(王陵) 장군의 노모(老母)를
볼모로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을 보면, 항우가 왕릉 장군을 유인해 가려고 사람을 일부러 보낸 것이
분명해 보이오.''그렇다면 신에게 그자를 좀 만나 볼 기회를 주시옵소서. 신이 그 자를 매수하는 공작을
써 보기로 하겠습니다.'한신은 대궐에서 물러 나오는 길에 객사로 항우의 사신을 직접 찾아갔다.
그런 연후에 좌우를 물리고 나서 황금 열덩이를 넌즈시 건네 주며 이렇게 말했다.
'공도 알고 계시다시피, 나는 오랫동안 항왕을 섬겨 온 관계로 지금도 초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오. 그래서 항왕에게 밀서를 한 통 보내고 싶으니, 나의 밀서를 꼭 좀 전해 주시면 고맙겠소.'
금덩이를 보자 항우의 사신은 얼굴에 희색이 가득 떠오른다.'그런 일이라면 틀림없이 전해 드릴테니,
걱정 말고 밀서를 내게 주시오. 장군이 귀순하시겠다는 말씀인데, 사실 항왕께서는 왕릉 장군의
능력 보다는 한신 장군을 더욱 높게 평가하고 계신다오.
한 장군께서 귀순해 오신다면 항왕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큰일을 맡기게 되실 것이오.
그러면서 장군의 의도를 알린 나의 공로도 빛날 것이 분명하니 밀서를 빨리 써 오시오.'
한신은 <밀서>가 아닌 <선전 포고문>을 손수 써 가지고 항우의 사신을 다시 찾아와 주면서 말한다.
'이 밀서의 내용에는 중대한 사연이 담겨 있으니,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항왕에게 직접 전해
주셔야 하오.만약 밀서의 내용이 알려지는 날이면 공도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오.'
'염려 마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밀서만은 내가 항왕께 직접 전달하겠소.'
항우에게 보내는 밀서의 내용이 <한신의 귀순 사연>으로 철석같이 믿은 사신은 한신에게 건네받은
서신을 품속 깊이 간직하고 초나라로 총총히 귀환하였다.
초나라의 사신이 한신의 밀서를 가슴에 품고 팽성으로 돌아온 뒤, 항우에게 받들어 올리며 말한다.
'한나라의 한신 장군이 폐하와의 구정(舊情)을 잊지 못하여, 우리한테로 귀순해 오겠다는 밀서를
보냈습니다.'항우는 그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뭐야 ? 한신이 나에게 귀순해 올 생각에서 밀서를 보냈다구 ? 한신만 귀순해 온다면 유방은 변변치 않은
장수들만 있으니, 싸움은 끝장 난 것이나 다름없구먼. 그것 참 듣던중 반가운 소릴쎄 ! '
항우가 <한신의 귀순>을 이처럼 기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신이 직접 참여한 전투에서
초군이 승리해 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리하여 항우가 기쁜 마음으로 <한신의 밀서>를 즉석에서
읽어 보았는데, 그 내용은 <귀순 청원서>가 아니라 <선전 포고문>이 아니런가 ?
<한나라 파초 대원수 한신은 초패왕에게 글월을 보내오>
그 옛날 내가 초나라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당신은 나에게 집극랑(執戟郞 : 요즘으로 치면 중대장)
이라는 벼슬밖에 주지 않았소.그러나 나는 불만을 참아 가면서 당신과 함께 의제 회왕(懷王)을 떠받들어
초나라의 발전을 도모해 왔었소.그러나 당신은 엉뚱한 야욕으로 의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제위(帝位)를 찬탈해 버렸으니, 그 어찌 대역 죄인이라고 아니할 수 있으리오.
이에 나는 대역 죄인을 응징함으로써 의제의 원수를 갚아 드리고자 정의의 깃발을 들게 되었소.
그러나 대역 죄인인 당신의 세력이 너무도 막강하여,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뜻을 이루기가 어렵기에
한왕과 협력하기로 하였던 것이오.지난번에 한왕이 팽성에서 당신에게 대패한 것은 내가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나, 이제부터는 나 자신이 3군 총지휘권을 가지고 총공격을 퍼부어
당신의 머리를 양관문(兩觀門)에 높이 걸어 보일 것이니, 단단히 각오하기 바라오.
항우는 한신의 서한을 읽어 보고 길길이 날뛰며 분노하였다.'옛날에는 남의 가랑이 사이나 기어다니던
고부놈이 나를 이렇게나 모욕할 수가 있느냐. 내 이놈을 당장에 박살내 버릴 테니, 모든 군사는
출동 준비를 서둘러라.'항우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범증이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이 서한을 보온즉, 한신은 폐하를 분노케 하려고 계획적으로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하오니 섣불리 출동하셨다가는 적의 위계에 걸려들 위험이 매우 크오니, 폐하께서는 너무
서두르지 않으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말로는 출동을 중지하기에는 항우의 분노가 너무도 컸다.
'아부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귀순을 빙자하여 되먹지도 않은 선전 포고문을 씨부려 온 놈을
어찌 그냥 둘 수 있단 말이오 ?'범증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간한다.
'옛부터 급히 먹는 밥에 목이 메고, 찬 물도 급히 마시면 사래가 드는 법이옵니다. 하오니 노여움을
참으시고 침착한 대책을 강구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항우는 그런 말을 들을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라, 마침내 범증(范增)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참으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요 ? 이번 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신이란 놈을 내 손으로 결딴을 내고야 말테니, 아부는 더 이상 말하지 마시고 어서 물러가시오.'
범증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서 항우의 앞을 물러 나오며 혼자말로 탄식을 하였다.
(아아, 기어코 한신의 계교에 속아 대패(大敗)를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구나 ! )
항우는 범증을 쫒아내고 출동을 서둘렀다.한편, 한신은 항우가 대군을 몰아쳐 올 것을 예상하고
응전 태세를 물샐 틈 없이 준비하고 있었는데, 돌연 장량이 육가와 번쾌등 많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야전 사령부로 한신을 찾아왔다.한신은 장량 일행을 막사 안으로 반갑게 맞아들이며 물었다.
'선생께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별안간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
장량(張良)이 자세를 바로잡고 앉으며 대답한다.
'대왕의 어명에 의하여, 한 장군에게 조서(詔書)를 전달하러 왔소이다.'한신은 깜짝 놀란다.
'대왕께서 신에게 무슨 조서를 .....? '
'대왕께서는 장군을 또다시 대원수에 제수하시었소. 이 조서와 인장(印章)을 받으시오.'
장량이 주는 조서를 읽어 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무릇 장수란 나라의 기둥이니,
장수를 옳게 얻으면 그 나라는 흥하고, 장수를 잘못 쓰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하였소.
한신 장군은 경제에도 밝은 뿐만 아니라 병법에 있어서도 천하에 겨룰 사람이 없으니, 경이야 말로
국가의 주석(柱石)이고, 당대의 호걸이오.
지난날 내가 장군을 물리치고 위표를 총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나의 일생 일대의 커다란 잘못이었소.
이제 경을 다시 대원수에 임명하는 터이니, 경은 가일층 분발하여 초나라를 정벌하는 데 더욱 분투
노력해 주기를 바라오. 나는 경의 공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한신은 조서를 읽어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황은이 망극하여, 저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곧 선생을 모시고 입궐하여 대왕 전하께 사은 숙배를 올리게 해 주시옵소서.'
한신은 예복으로 갈아입고 장량과 함께 입궐하여 한왕(漢王)에게 큰절을 올리며 맹세하였다.
'신 한신은 오늘의 황은에 보답하고자, 천하를 평정하는 데 분골 쇄신할 것을 거듭 맹세하옵니다.'
한편, 항우는 한신을 치기 위해 30만대군을 이끌고 영양성을 향하여 출정하였다.
그리하여 영양성 50리 밖에 진을 쳐 놓고 대장 계포와 종리매를 불러,'그대들은 영양성에 접근하여
적의 허실(虛實)을 소상하게 알아 보고 오라 ! ' 하고 명령을 내렸다.한나라의 밀정들이 그 사실을 알고
급히 돌아와 한신에게 알리니, 한신은 각급 부대장들을 긴급히 소집하여 명한다.'지금 두 명의
초장(楚將)들이 우리의 허실을 정탐하기 위해 많은 첩자들과 함께 우리 주변에 잠입해 올 것이다.
그러니 모든 병사들은 참호 속에 죽은 듯이 숨어 있으라. 그러면 항우가 안심하고 쳐들어올 것이니,
그때에는 모든 부대가 들고 일어나 항우를 생포하도록 하여라.'
이리하여 한나라의 모든 군사들은 수목으로 위장한 참호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겨 버렸다.
계포와 종이매는 그런 줄도 모르고 적진 속으로 깊이 잠입해 보니, 한나라 막사는 텅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계포와 종이매가 본영으로 돌아와 본대로 보고 하자 항우는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말한다.
'한신은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겁을 집어 먹고 군사를 몰고 도망을 갔을 것이다.
감히 싸우지는 못하고 영양성 만을 지키려고 할 것이니, 내가 선두에 나서서 적의 본진을 치기로 하겠다.
환초, 우영, 항장, 우자기 네 장수는 나를 따르고, 그 밖의 장수들은 본진에 대기하고 있으라.'
항우가 대군을 거느리고 접근해 오자, 한신은 홀연 숲속에서 말을 타고 달려 나오며 항우에게
큰소리로 외친다.'대왕을 함양에서 작별한 이후로 오랫동안 못 뵈었소이다.'
항우(項羽)는 한신을 보자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호통을 친다.'나는 지금 네 놈에게서 받은 수모로
원한이 골수에 맺혀 있다. 네 놈의 머리를 쳐버리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물러가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라 ! '
이런 소리를 내지른 항우는 장창을 번득이며 질풍같이 한신을 향하여 말을 달려왔다.
그러자 한신은 겁에 질린 사람처럼 대번에 쫒기기 시작하였다.항우는 그럴수록 맹렬하게 추격을
해오며 외친다.'모두들 달려와 저놈을 붙잡아라 ! '계포와 종리매가 달려 왔으나, 항우의 추격이 어찌나
빠른지 미처 따라갈 수가 없었다.그들은 열심히 항우의 뒤를 쫒아오면서,
'폐하 ! 복병이 있을지 모르니 더이상 따라가지 마시옵소서.' 하고 숨가쁘게 외쳤다.
그러나 그와 같은 충고가 항우의 귀에 들릴 턱이 없었다.한신은 항우가 급히 쫒아오면 급히 쫒기고,
속도를 늦추면 자기도 속도를 늦춰 가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꾸만 쫒긴다.
그러니 항우는 더욱 약이 올라 한없이 추격해 왔다.
항우가 끈질기게 추격해 오므로 한신은 마침내 경색강(京索江) 다리를 건너와 버렸다.
항우는 다리를 건너가기에 앞서 후속 부대에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린다.
'한신은 독 안의 든 쥐다. 이제는 영양성까지 송두리째 쳐부수겠으니, 후속 부대는 연달아 강을 건너오라.'
항우가 강을 건너가고 나서 얼마 후에 후속 부대가 건너가려 하니 어느 새 다리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
수만명의 군사들은 어쩔수 없이 발을 담가 강을 건너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여러 천명의 군사들이 일제히 강을 건너가고 있는데, 그들이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무렵에, 별안간 상류에서 해일(海溢)이라도 일어난 듯, 한 길이 넘는 홍수가 밀려 내려오며 강을 건너던
군사들을 모조리 휩쓸어 가는 것이 아닌가.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한신이 상류의 둑을 막아 놓아
물을 잔뜩 가두어 두었다가 둑을 일시에 터뜨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신은 항우가 이곳까지 추격해 올 것을 알고, 미리 그와 같은 지시를 내려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을 건너던 초군 병사들은 난데없는 홍수로 인해 저마다 아우성을 치며 물살에 떠내려가
물귀신이 되었고, 그나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은 강 하류에서 가까스로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초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버렸다.
한편,항우는 추격을 계속 하다가, 어느 갈림길에서 한신의 뒤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차 ! 한신이라는 놈을 놓쳐버렸구나 ! '항우가 절치 부심을 하고 있는데, 장수 하나가 급히 쫒아오며,
'폐하 ! 아군이 경색강을 건너오다가 난데없는 홍수로 수천명의 병사가 물귀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뭐야 ? 강을 건너 오다가 병사들이 홍수를 만나 물귀신이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 '항우는 경색강에서 자신을 뒤따르던 초군 병사들이 참변을 당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나서 발을 구르며 분노한다.'한신이란 놈, 어디 두고 보자. 네 놈은 조만간 내 손으로
박살을 내고야 말리라 !' 어느덧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폐하 ! 날이 저물고 있으니, 오늘은 돌아가셨다가 내일 군사를 재편성하여 다시 오기로 하십시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항우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음 ... 그러면 오늘은 일단 돌아가자. 그러나 이 원한은 조속히 풀고야 말리라.'
항우는 호위 군사들과 함께 부지런히 본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그런데 어느 숲속을 지나갈 무렵,
별안간 적의 복병들이 사방에서 함성을 울리며 일어나더니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대는 것이 아닌가 ?
그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후에는 수백대의 전차(戰車)가 동서 사방에서 포위망을 구축하고 조여오며,
그들 역시 빗발 같은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아무려니 이때만은 항우도 당해 낼 수가 없다는 판단이 들어,
'두 패로 나누어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자!' 하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철통 같은데다가,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져서 초군 병사들은 아비규환
속에서 낙엽처럼 쓰러져 죽고, 항우만이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 있었다.
한편, 계포와 종리매는 항우가 적에게 포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군사를 몰고 가다 보니,
경색강 다리가 끊긴데다가 홍수가 범람할 듯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다리도 끊기고 강물이 넘쳐 흐르니, 도저히 그대로 건널 수는 없구나. 남계(南溪)로 돌아가자 !'
이렇게 남계를 돌아 어느 산모퉁이를 지나려는데, 이번에는 적장 조덕(祖德)이 한떼의 군사들과 함께
함성을 울리며 앞길을 막아선다.계포는 분연히 나아가 20여 합을 싸워 조덕을 쓰러뜨리고
다시 앞으로 달려나가다 보니, 한나라 군사들이 어느새 계포와 종리매를 겹겹히 둘러싸고 있었다.
이제는 사력을 다해 포위망을 뚫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20리 가량을
도망치니, 그곳에서는 대장 우영과 환초가 만신창이가 되어 신음을 하고 있었고, 항우만이
가벼운 상처를 입은 채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한신이란 놈, 어디 두고 보자. 네 놈에게 이렇게 당한 것은 천추의 유한이로다 ! '하고 분노로 떨고 있었다.
'폐하 ! 저들이 또 덤벼 올지 모르오니 이곳을 속히 떠나셔야 합니다.'
'제까짓 것들이 무슨 재주로 여기까지 온다는 말이냐 ?'항우의 입에서 그 말이 막 떨어지는 순간,
별안간 여기저기서 횃불이 일시에 밝혀지며, 남쪽에서는 적장 시무와 여상동, 부관과 부필이 덤벼 오고,
동쪽에서는 이필과 낙갑, 서쪽에서는 주발, 주창과 설구, 진패가 나타나고, 북쪽에서는 신기와 조참이
덤벼 오고 있었다.10여 명의 한군 대장들이 횃불을 밝혀 들고 사면 팔방에서 포위망을 좁혀 오며,
'항우는 죽고 싶지 않거든 즉각 항복하라 ! '하고 이구 동성으로 항우를 향하여 외쳐대는 것이아닌가 ?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에는 수백 대의 전차들이 화살을 잔뜩 겨눈채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는 것이었다.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도 이때만은 눈앞이 캄캄해왔다.
(항복할 것이냐, 끝까지 싸우다 죽을 것이냐 ! )항우로서는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항복은 안된다. 그것은 죽기보다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항우는 이를 바드득바드득 갈며 포위망을 뚫어보려고 적진을 뚫어져라 둘러 보았다.
적들은 횃불을 밝혀 들었고, 이쪽은 어둠에 싸여 있어서 그 점만은 항우쪽이 유리하였다.
항우가 적진을 살펴보고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신기와 조참이 다가오는 북쪽 부대가 가장 허약해
보였기 때문이었다.'다들 듣거라 ! 나는 지금부터 북쪽으로 돌진해 나갈테니, 모든 군사들은 나를 따르라 ! '
2-71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