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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주차에 서툴러 그 세 평 남짓한 네모칸 안에 차를 집어넣는 일도 꽤나 고역이란 걸 알았다. 지하주차장에서의 사투를 끝내고 엘리
베이터에 오르며 시계를 확인했을 때 열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요즘은 고등학생들도 이런 시간에 칼같이 귀가하진 않을 텐
데. 사실 시간보다는 선주가 이미 집에 가고 없길 바라는 쪽에 마음은 더 기울어 있었을 것이다. 비밀번호를 풀고 문을 열었을 때,
집 안은 온통 적막이었다. 어디선지 모르게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 외에는 불도 다 꺼진 채였다. 현관에 낯선 신발이 없는 것을
보며 조금 안심했던 것 같다. 조용히 구두를 벗고 들어와 내 방으로 막 들어서려다 그 불빛이 작업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먼저 옷을 갈아입을까 하다가, 들어왔다는 인사를 하는 게 우선인 것 같아 작업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 왔어- 라는 인사는 하지도 못했다. 작업실 책상 위로 스탠드 하나를 밝게 켜둔 채 엎드려 잠든 그를 보았다. 늘 그랬듯 맘에 내
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애꿎은 종이 위에 화풀이를 하듯 그림을 그려나가던 습관대로, 바닥에 널브러진 몇 몇 도화지들은 나와의
통화 이후 불편해했을 그의 심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기를 내내 반복하면서 나를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을, 그의 동그란 등
을 보고 있기가 미안해진다. 깨우기보다는 작은 모포라도 덮어주는 것이 낫겠다 싶어 조심히 걸음을 떼려다가, 그의 목소리에 발
목이 잡혔다.
“왔다고 인사라도 해.”
“..자는 줄 알았어.”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그가 나를 본다. 나를 보고, 시계를 본다.
“늦었다.”
“내가 여고생이니.”
“아니니까 하는 소리잖아.”
“아빠처럼 굴지마.”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왜 입에선 마음과 다른 말들이 제멋대로 쏟아지는 걸까. 늦은 시간, 나를 기다리고 있어준 그가 고마
워 죽겠으면서. 밤 운전 하느라 고생했을까봐 걱정해 준 그가 사랑스러워 죽겠으면서. 난 정말 아빠의 관심에 짜증내는 사춘기 여
학생처럼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에 방으로 향하다, 그의 방 앞에 놓인 작은 트렁크를 발견했다.
“이거.. 뭐야?”
그리고 난 그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선주의 말을 기억해냈다. 크리스마스엔 무슨 일이 있어도 휴가를 내서 진언이랑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가고 싶다고. 기억을 되짚는 동안 그에게서도 비슷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주말에 걸쳐, 벌써 내일이 크리
스마스 이브였다.
“언제 가는데..?”
“내일.”
지나치는 말로라도 같이 가자는 말은, 끝내 해 주질 않는다. 그 말을 기다리는 고집으로 계속 제자리에 선 채 그를 응시하지만 알
면서 외면하는 듯, 혹은 알면서 난처해하는 듯. 복잡한 내 심정으로는 지금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둘 만의 여행. 좋지. 늘 당
연하게 ‘셋’이었던 완전체에서 뚝 떨어져 나온다는 기분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비참했다. 아무리 둘이 연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려
해도 비뚤어지기 시작한 맘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여행 앞둔 사람 표정이 왜 그래.”
“너 두고 가는 거, 안 내켜서.”
“말했잖아. 너희 둘 연애에 만큼은 나 끼워 넣지 마.”
“.........”
“피곤하다. 자야겠어.”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지우고, 정신이 번쩍 들만큼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침대 모서리에 멍하니 넋을 놓고 앉아서 무슨 생각
을 하는지도 모르게 시간을 버리다가 불을 끄고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요즘 들어 그와 나 사이가 눈에 띄게 삐그덕거리는 걸
느끼는 건 나뿐일까. 그게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할 만큼 애가 타는 것도 나뿐일까. 마음을 숨기고 조용히 혼자서 사랑하는 일에도
이렇게나 어려움이 많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더 아픈가보다.
바보. 그래서 ‘친구’는 사랑하는 게 아니라잖아.
§
잠을 제대로 잤을 리가 없었다. 자다가 깨고, 자다가 깨고. 그렇게 쪽잠으로 이어진 긴긴 밤 시간 동안, 나는 여러 개의 단편적인
꿈들을 꾸었다. 신기하게도 모두 다 기억나지 않는 엉망진창의 꿈들. 눈을 뜨면서 여전히 그의 방 앞에 놓여 있을 트렁크를 생각
했고, 그를 배웅해야 할 내 모습들을 상상했다. 어젯밤과 같이 불편한 심기를 잔뜩 드러내며 구겨진 표정으로 내키지 않는 인사를
하는 ‘나’ 보다는, 그래도 잘 다녀오라고 언제나처럼 웃어주는 쪽이 맘이 편할 것 같다. 이불 밖의 공기가 너무 선뜻해서 좀 더 늦
장을 부리다가 게으른 백수처럼 일어나 짚업을 입고 후드까지 덮어 쓰고서 방을 나왔다.
“..뭐해?”
고양이처럼 몸을 잔뜩 늘이는 기지개를 하며 주방으로 갔을 때 아니, 가기 전부터 뭔가 고소한 냄새가 난다 싶더니 그가 어설픈
모양으로 토스트를 굽고 있었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그가 렌지 위의 프라이팬을 건드려 하마터면 굽고 있던 베이
컨이 다 엎어질 뻔했다. 아침 당번은 나인데 일찍 일어나 선뜻 이런 것들을 준비한 의도가, 현관 앞에 놓인 트렁크 때문이라고 해
도 내 맘이 온전히 편해질 리야 없겠지만. 그의 이런 가상한 노력은 마땅히 가산점을 받을 만하다. 그래서 나는 세수도 안 한 얼굴
로 그것들을 맛있게 먹어 주었다. 꼭 선주와 함께여서가 아니라도, 그가 떠나는 간만의 여행에 짐을 지우긴 싫었다.
“스키장으로 간다구.”
“응.”
“하긴, 선주 겨울이면 늘 노랠 불렀었잖아.”
“그랬지.”
“잘 다녀와, 이틀 동안 이 집은 내가 지킨다.”
그를 배웅하는 것까지 완벽히 소화해 내기로 마음을 먹은 계획대로 아주 순조로웠다. 현관 앞에서 마지막으로 그의 피코트 어깨
에 붙은 작은 먼지 하나를 떼어주며 나는 마음을 다해 웃어주었다. 2박 3일. 그가 자릴 비운 시간동안 혼자 남을 나는 그렇게라도
스스로에게 보호막을 두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문단속 잘 해.”
“응.”
“건성으로 대답하지 마. 자기 전엔 꼭 확인하란 말이야.”
“알았다니까. 나 중학생 아니야.”
“차라리 니가 중학생이면 더 맘이 편하겠어.”
“칫, 무슨 말이 그러냐. 얼른 가기나 해.”
“그리고-”
“.........?”
“그리고, 되도록. 다른 사람은 들이지 마라.”
“뭐야 그게,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모르면 됐고. 간다.”
“..잘 다녀와.”
“내 말, 흘려 듣지마.”
§
그를 보내놓고, 오피스텔 앞 상가로 나가서는 DVD를 잔뜩 빌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군것질거리가 될 만한 것들도
한 아름 사가지고 돌아왔다. 거실 가장 넓은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한 쪽에는 DVD와 리모컨, 한 쪽에는 귤이며 과자 같은 것들을
산처럼 쌓아놓고 본격적으로 자릴 잡았다. 내가 하는 짓이 딱 지지리 궁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해야 덜 우울할 것 같
았다. 그가 비우고 나간 자리, 혼자 남겨진 처연함 같은 것들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주변을 계속 바쁘고
시끄럽고 정신없게 만들어 놓아야만 했다. 브라운관 안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헐리우드 배우가 해적 분장을 하고 이리저리 뛰
어다니기 바쁜데, 정작 내 머릿속은. 저 큰 TV를 우리가 번 돈으로 처음 들여놓던 날 서로 손뼉을 맞부딪치며 좋아하던 모습들이
그려졌다.
시계가 늦은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새하얀 눈밭에 두 사람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 나는 어쩐지 약을 먹어야겠
다는 생각이 들어, 며칠 전까지 먹다가 남겨둔 몸살 약을 꺼냈다. 유치하지만, 뭔가 치유받고 싶었던 심리였을까. 나는 약을 한 입
에 털어 넣고 그것들을 꿀꺽 삼켰다. 재미없는 DVD를 다른 영화로 교체하고는 소파에 앉아 무의미하게 화면을 바라보다 깜빡 잠
이 들었다.
“진언아, 불 좀-”
잠에서 깼을 때 몇 시 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집 안은 온통 캄캄했다. 소파에 엎어져있던 몸을 일으키며 나도 모르게 그를 부
르다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헝클어진 머리 그대로 소파에 앉아 눈을 껌뻑 거리던 나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려 자리에
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TV도 DVD 플레이어도 모두 전원이 꺼져 있었다. 탁. 탁. 거실 벽의 스위치
를 여러 번 눌러보지만 불이 켜지질 않았다. 정전이구나. 나는 터벅터벅 제자리로 돌아가 풀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았다.
그가 있었다면, 관리비를 그만큼씩 받아가면서 이만한 오피스텔에 정전이라니 말이 돼? 라며 열이라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
실 적응이 빠른 우리는 곧 초라도 켜고 나란히 앉아 우스갯소리로 상황들을 즐겼을지도. 문득 곁에 둔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
다.
연우야, 나 토할 것 같아...ㅠㅠ
선주로부터의 문자였다. 토할 것 같다니. 놀러가서 실컷 재미있게 놀고 있을 애의 말투가 아니잖아. 무슨 일 있냐는 내 물음에 곧
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진심, 죽을지도 몰라.. 차가 너무 밀려서 아직도 도로 위에 서 있어..
피식. 풉... 푸하하! 나는 소파위에서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정말 너무 미안하지만, 쌤통이다. 나 혼자 두고 가서 원하는대로 마냥
재미 좋을 줄 알았니? 나는 뭐라고 답장을 보낼까 문자창을 띄워두고 몇 자 적다가 웃고, 몇 자 적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잔뜩 약
을 올려주려다가, 그건 그것대로 또 내 방식이 아니어서 못내 위로의 뜻이 담긴 문자를 보냈다. 나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야. 정
전이거든- 하고. 우리는 몹시 다정한 친구가 되어 몇 번 더 서로를 위로하는 문자를 주고받았다. 아마 그 애에겐 말 그대로 못 견
디게 힘든 시간일 테지만 정전된 오피스텔에 혼자 남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과 교통체증 도로위의 차 안에 갇히는 것 중 어느 하
나를 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꼭 눈 올 것 같다, 돌아가면 얘기 많이 해줄게.
-라며 선주가 보내온 포토문자에 그와 선주가 나란히 웃고 있다. 씁쓸한 얼굴이 되어 액정속의 얼굴들을 보고 있자, 전기 충격을
받은 붕어가 팔딱이듯 급작스럽게도 팟- 하고 집 안이 환하게 밝혀진다. 익숙지 않은 밝음에 잔뜩 찡그린 눈을 하면서 깨달았다.
어두울 때 보다, 밝은 곳에 휑뎅그렁하게 남겨진 내 모습이 훨씬 더 초라해 보인다는 걸.
초라하더라도, 사람들이 많고 북적이는 곳에 있는 게 덜 외로울 것 같았다. 지극히도 감정적인 나는 이러다가 냉장고 속의 맥주라
도 벌컥벌컥 들이킬 태세였다. 스스로 해로울 일을 피하기 위해 바깥바람을 조금 쐬는 쪽을 선택한다. 거실 이외에 필요 없는 불
을 모두 꺼두고, 외출할 요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따뜻한 기모면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후드에 부들부들한 털이 달린 봄버를 걸
쳤다. 필요 이상의 치장을 해 봤자 보여줄 사람도 없으니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신발을 신고 현관의 잠금을 해제시켰다.
문 앞에 누군가 있을거란 생각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와, 이건 정말 대단한 우연.. 아님 필연?”
“선배.. 여기서 뭐해요?”
“너야말로 어디가는거야, 지금 막 벨을 누르려던 참인데.”
선배가 벨을 누르려던 손가락 모양을 그대로 유지시킨 채 내게 물었다. 잠시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나는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 들어가고 싶다.”
“아, 나도 참. 들어와요.”
“그럼 실례.”
오는 길에 또 커피를 마셨을까. 카푸치노 향을 풍기며 안으로 들어서는 선배의 뒤를 따라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선다. 악. 맙소
사. DVD와 과자들로 잔뜩 어질러진 소파 위를 수습하기 위해 나는 젠장젠장을 외치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첫댓글 꺄 도헌이 역시 제 스타일이예요! 이제 좀 적극적으로 나가는 도헌이를 보면서 안도가 되는걸요ㅋㅋㅋ 진언이가 흘려듣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터지는건 아닐까 걱정이예요 ㅠㅜㅋㅋㅋ
걱정마세요, 별다른 일이야 있으려구요^^ㅎㅎ 지금처럼 편하게 지켜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매일매일 챙겨봐주시고 덧글로 응원해주셔서 힘이 되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연우가 도헌의 사랑에 빠져들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일은, 저조차도 장담할 수 없지만 바라시는 부분도 가능성이 없진 않은 것 같아요^^ 늘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허, 진언이가 그리 누누히 일렀건만...결국 연우는 도헌이를 집에 들이는것인가~아,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모르겠어요 아로님, 전에도 말했다시피 전 도헌이랑 연우가 잘 됐으면 하고 바라는데, 근데도 도헌이가 적극적으로 연우에게 다가가는 그 기분이 마냥 좋은건 아닌듯, 에잇.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걸까요? 저. 아, 이번편도 너무 잘봤어요. 특히 이번편에선 여우에 심리적인 부분이 잘 부각돼, 제가 연우가 된것처럼 그 쓸쓸함과 외로움이 잘 와닿았다고나 할까요? 토할것 같다는 민주의 문자 메시지에 저까지 풋하니 잠깐 웃었습니다. 맘이 급해요 얼른 다음편보러 가야할듯~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