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창조 사업의 완성은 평화입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오늘은 구름만 끼고 흐린 날씨입니다.
비도 아주 조금 내렸습니다.
바다에 안개가 가득합니다.
오탁수 방지막은 또 이리 저리 뜯겨져 있고
케이슨으로 둘러싸인 중덕 구럼비 앞 바다는 우물처럼 조용한데
케이슨 밖은 파도가 거셉니다. 바람이 심하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공사장 정문을 확장 공사를 하려는 듯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확장 공사를 하는데
서귀포 경찰 경비과장과 정보과 형사들이 공사장 감리단 처럼
둘러보고 논의 하는 모습이 참 이해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아마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공사는 경찰이 하청을 맡은 듯합니다.
내일 6월 4일 투표일입니다. 꼭 투표해야 합니다.
투표로 정의를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6월 3일 화요일 성 가를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주례 강론 김성환
제가 소속된 예수회 대표 신부님은 로마에 계십니다.
이분 성함이 리콜라스 신부님이신데 원래는 스페인 출신인데
일본으로 선교사를 오셨고 젊은 시절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이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본 신자들이 생각하기에 일본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뭔가 2%정도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겨 놓는 것 같다.”입니다.
일본의 성직자 수도자들이 자기 자신들이 보기에
100%몽땅 하느님께 바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신자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100% 몽땅 자기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겠죠.
이것은 비단 일본의 성직자 수도자들만 해당되지 않는 다고 봅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도 해당되고 적지 않은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도
해덩 될 수 있습니다. 좀 더 넓게 보면 성직자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맡기신 일을 완수 하셨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상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신 후
돌아가십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이야 말로 2% 남기지 않고
몽땅 100% 자기 자신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첫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이라고 가정법을 쓰십니다.
그렇지만 사실 바오로 사도도 100% 몽땅 자기 자신을
이미 바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첫 독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 당신 자신이
예루살렘에 들어 가면은 투옥과 환난이 닥칠 것을 알지만도
그곳으로 들어가십니다.
어제 제가 몸담고 있는 예수회 정일우 신부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만 8년여 병상의 생활을 접고 하느님 품에 안기시는데
이분을 생각하면 100%에 가깝게 당신 자신을
봉헌 했던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분은 원래 미국분인데 1961년 한국에 와서 사제 생활의
대부분을 도시 지역의 빈민들과 농민들 즉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1994년 이분의 환갑 잔칫날 이었습니다.
그곳에 오신 손님의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 평민들이었습니다,
좀 귀티가 나는 사람들은 예수회 회원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님 밖에 없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그날 오신 이유는 한때 정일우 신부님이
김수환 추기경님의 영적 지도신부였기 때문입니다.
정일우 신부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위해서
100%가깝게 자기 자신을 바치는 삶을 사셨고 그래서
우리 예수회 후배들이 본 받아야 할 선배 신부님 이십니다.
2% 자기 자신을 남기지 않고 100% 몽땅 자기 자신을 바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우리들에게 따라옵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 중에
첫 번째 이며 가장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가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치 내 앞에 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보고를 하고 또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처럼 제 자신도 하느님께 그렇게 가깝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은근히 질투심도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 다음에 제자들을 위해서
오늘 복음에서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친밀하면 당연히 우리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당신의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그렇게 친밀 한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 자신들도 예수님 당신께
또 하느님 아버지께 친밀을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