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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조도 (加助島)
면적 | 면적 5.78㎢, 해안선길이 20.3㎞ |
소재지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창호리 |
요약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창호리에 있는 섬.
내용
동경 128°34′, 북위 34°57′에 위치한다. 거제도의 북단 사등면 성포리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진 진해만 해상에 있다. 면적은 5.78㎢이고, 해안선 길이는 20.3㎞이다. 거제시에서 칠천도 다음으로 큰 섬인데, 2009년 7월에 섬의 남쪽과 거제도의 성포리를 연결하는 가조연륙교(길이 680m, 너비 13m)가 개통되었다.
거제도에 딸린 섬으로 거제도를 돕고 보좌한다는 뜻에서 가조도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가좌도(加佐島)라고도 불린다. 옛날에는 가지매섬으로 불렸다고 한다.
섬은 중앙의 좁은 지협부에 의해 남북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섬의 북부 지역은 옥녀봉(332m)을 주봉으로 하는데, 원추형으로 생겨 원추화산과 착각하기 쉽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소하천은 방사상으로 뻗어 있고, 해안 쪽에 형성된 완경사지에는 농경지와 취락이 자리하고 있다.
섬의 남부 지역은 해안선의 드나듦이 심하고, 남동쪽에는 두 개의 작은 만이 분포한다. 옥녀봉 정상에는 정자나무와 건들바위가 있는데, 옥녀라는 선녀가 바다에서 목욕하고 올라와 구름치마를 입고 춤추며 놀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기후는 난류의 영향을 받아 습윤한 난대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4.2℃, 1월 평균기온은 2.5℃, 8월 평균기온은 25.6℃, 연강수량은 2,007㎜이다. 식생은 온대낙엽수와 상록활엽수의 혼합림이 생육하고 있다.
현황
2010년 기준으로 인구는 1,167명(남 582명, 여 585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세대수는 512세대이다. 취락은 섬의 북부 지역 해안가에 주로 분포하고, 섬의 남부 지역에는 동쪽의 만입부와 서쪽 해안의 중앙부에 형성되어 있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 0.43㎢, 밭 1.70㎢, 임야 3.21㎢이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의 10% 정도이고, 대부분은 어업과 양식업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콩과 고구마가 재배되고 있으며, 연안의 양식장에서는 피조개·우렁쉥이·홍합·바지락·전복·굴 등을 양식한다.
2009년에 가조연륙교가 개통됨으로써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섬의 중앙부에 창호초등학교와 사등면 가조출장소가 있다.
거제 가조도 옥녀봉
국제신문 입력 : 2017-03-29
상쾌한 바람 살랑살랑…남도 섬산 설레는 '春心'
- 거제도 주변 섬 중 두 번째 큰 섬
- 약 7㎞ 거리 백석산~옥녀봉 코스
- 시 조성 '노을길' 중간 가로막혀
- 돌아간 길에 만난 해안 조망 감탄
- 중요지점 이정표 없는 점 아쉬워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은 봄맞이 섬 산행을 위해 경남 거제 가조도를 찾았다. 자고로 가을 산행은 북쪽에서 시작하고 봄 산행은 남도의 섬부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거제도를 보좌한다는 뜻을 가진 가조도는 거제도 부속도서 중 칠천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중앙의 좁은 지협부에 의해 남북이 구분된다. 산행은 남쪽의 아담한 백석산(206m·현지 신전산)과 북쪽의 옥녀봉(333.2m·작은 화산 분화구 모양)을 잇는다. 옥녀봉은 옥황상제의 딸인 옥녀가 약수터에 내려와 목욕한 뒤 사슴과 놀았다 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고 산세가 여성을 닮았거나 주위에 여성 관련 지명이 많을 경우 붙여지기도 한다. 옥녀봉은 전국에 수십 곳이 있고 거제도에도 장승포·칠천도·가조도 등 세 곳에 있으니 가조도를 꼭 기억하자.
산행 코스는 가조도 논골 버스정류장~백석산~도로~'노을이 물드는 언덕' 전망대~사등면 가조출장소~옥녀봉 들머리~임도 갈림길~옥녀봉~신교마을 버스정류장으로 약 7㎞ 거리에 순수 산행시간은 3시간30분가량 걸린다.
산행은 가조연륙교(길이 680m·2009년 7월 개통)를 건너 약 400m를 직진해 만나는 논골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한다. 논골마을 입구와 동백관광 버스차고지 사이에 있다. 약 200m를 되돌아 우창블루오션 맞은편으로 오른다. 금룡정사 이정표를 따라 100m가량 오르면 백석산 들머리가 나온다. 거제시는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길이라는 뜻으로 '노을길'을 만들어 이정표에도 새겼다.
기분 좋게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 초기 어미와 새끼 노루 두 마리와 마주쳤다. 먼 거리였지만 순식간에 모자 노루는 사라졌다. 섬에 들어서니 공기가 상쾌하다. 이래서 봄이 되면 섬산을 찾나 싶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외부에서도 많이 찾을 것 같은데 리본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지자체에서 노을길 조성을 위해 붙인 것 같은 빨간 띠만 간간이 보인다. 아기자기한 봉우리를 몇 차례 오르고 내리지만 크게 힘들진 않다. 어느새 백석산 정상이다. 정상석도 없고 별다른 조망도 없어 서둘러 하산길로 접어든다. 저 멀리 이날의 최고봉인 옥녀봉이 보인다. 정상 부근의 경사가 가팔라 보인다. 백석산에서 가파른 내리막을 걸으면 도로로 내려선다. 도로 맞은편 112m 봉 능선을 따르면 된다.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겼다. 들머리가 나뭇가지로 막혀 있고 옥녀봉 이정표에 '폐쇄'라고 쓴 종이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다. 개인적으로 산행에 나섰다면 무시하고 진입했을 텐데 독자들이 뒤따를 것을 생각하니 정확한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다. 확인 결과 '폐쇄'라는 글을 써 붙인 주체는 믿기 어렵지만 거제시였다. 벌이 많은 데다 산주가 최근에 집을 지으면서 노을길을 폐쇄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란다. 이해되지 않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벌이 많아 길을 폐쇄할 정도라면 노을길 조성 때는 이런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았던 것인지, 산주를 설득해 길을 열 노력은 해봤는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폐쇄'라고만 붙여놓을 게 아니라 대체 노을길을 안내라도 해주든지. 어떤 것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취재팀은 이런 내용을 확인하는 데 1시간을, 또한 대체 산행로를 찾느라 1시간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우려했던 대로 도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무책임한 행정에 화가 치밀었다. 애초에 백석산 입구에 이런 사실을 공지했다면 다른 산을 택할 수도 있었고 폐쇄 구간에 접어들었더라도 대체 노을길을 안내했다면 이런 불편함을 겪지 않았을 것 아닌가. 취재팀은 아예 다른 산을 올라야 하나 심히 고민했지만 되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도로에 내려선 뒤 울며 겨자 먹기로 길을 따라 왼쪽으로 이동한다. 백석산에서 제대로 된 조망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아스팔트 길을 걷는데 뜻밖에 해안선 조망이 괜찮다. 30분 가량을 걸으면 '노을이 물드는 언덕'을 만난다. 화장실과 2층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해안을 조망한 뒤 도로를 따라 계속 내려가다 실전마을 삼거리에서 사등면 가조출장소 오른쪽으로 빠진다. 가조 보건진료소, 119와 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약 300m를 직진하면 옥녀봉 들머리다. 옥녀봉까지 1㎞임을 알려주는 이정표도 서 있다.
절반인 500m까지는 어렵지 않게 나아간다. 임도 갈림길이 나오고 간단한 운동기구와 전망대가 있다. 여기서 직진해 전망대로 오른다. 밑에서 볼 땐 별 전망이 있겠는가 싶었는데 불과 5~6m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니 시선이 나무 높이를 살짝 넘으면서 멋진 경치가 펼쳐진다.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500m인데 이제부터 된비알이다. 괜스레 다리가 뻑뻑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500m가 높이가 아니라 거리라는 점이다. 숨이 가빠지려고 할 무렵 이정표가 나타난다. 정상을 지나면 신교마을(1.2㎞)과 계도마을(1.3㎞)로 갈 수 있단다. 30m 앞이 옥녀봉이다. 정상에는 정상석과 작은 문이 달린 팔각정이 마련돼 있다.
하산길은 신교마을과 계도마을 두 곳이 있는데 내려서는 곳은 다르다. 취재팀은 신교마을로 하산한다. 팔각정 너머 하산길에서는 쥐가 파먹은 듯 보이는 취도(떠나기 전에 참조)와 멀리 동쪽에 보이는 쌍봉인 앵산을 바라본다. 절묘한 각도로 세워진 흔들바위도 보인다. 약 900m를 내려가면 신교마을(0.3㎞) 이정표가 나오며 이어 갈림길에서는 왼쪽을 택한다. 신교마을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선다. 신교마을 쪽에는 옥녀봉 들머리를 알리는 어떤 표지도 없다. 정상 팔각정에 문 달지 말고 적재적소에 이정표를 세워주면 어떨까 생각하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 떠나기 전에
- 러일전쟁 승전기념탑 '우뚝'…일제강점기 아픔 간직한 취도
가조도 인근에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한 '취도'가 있다. 쥐가 파먹은 듯한 섬으로 옥녀봉에서 신교마을 쪽 해상으로 바라보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러일전쟁(1904~1905년) 때 일본군은 총탄과 포탄으로 연습 사격해 취도를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 후 일본 해군이 러시아 동양함대 '마카로'호 등 37척과 3000명의 병사를 전멸시킨 기념으로 소화 10년(1935년) 러일전쟁 승전기념비인 취도기념탑을 세웠다. 높이 4.17m, 폭 2m의 하얀 탑 상단에는 포탄이 하늘을 보고 박혀 있다. 일본 군인들의 사기 진작과 일본 영웅(침략자)을 신격화시키는 작업이 전부로 우리에게는 뼈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경술국치일(1910년 8월 29일)에 맞춰 2010년 8월 28일 취도기념탑에 평화의 돌탑을 쌓았으나 누군가 무너뜨려 원래의 모습이 남아있다.
한편 거제 송진포에 세웠던 전승기념탑에는 도고 헤이하치로가 러일전쟁 당일의 기록을 직접 새긴 화강암을 부착했다고 한다. 해방과 동시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파괴돼 거제 장목면의 파출소 계단으로 이용되다 1980년 거제경찰서로 옮기던 중 일부 파손돼 현재 거제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으로의 이전이 논의되고 있다.
# 교통편
- 거제 고현버스터미널서 43·43-1번 시내버스 타고 논골 버스정류장 하차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오전 6시부터 10~20분 간격 출발)를 타고 거제 고현버스터미널로 향한다. 고현터미널에서 가조도로 갈 때는 시내버스 43번과 43-1번(오전 6시10분, 8시25분, 10시25분, 12시25분)을 이용해 논골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산행 후에는 신교 버스정류장에서 방향 상관없이 버스(오후 3시, 5시, 7시, 10시)를 타고 종점인 고현터미널에서 하차해 부산행 시외버스를 이용한다. 차량 이용 시 내비게이션으로 동백관광(거제시 사등면 가조로 216)을 검색하면 된다. 돌아올 때는 위와 같이 신교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자신의 차량이 있는 논골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글·사진=유정환 기자 defiant@kookje.co.kr
문의=스포츠레저부 (051)500-5147 이창우 산행대장 010-3563-0254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⑩ 바다와 섬, 공존 지혜가 필요하다
현대해양 기사 승인일: 2018.12.10.
김준 작가
거제시 가조도 창호리
[현대해양] 거제바다에 해가 뜨기 직전, 아침 그물을 보기 위한 배들이 가조도를 잇는 다리를 지나 정치망에 기대어 그물을 털고 성포로 향한다. 호수 같은 바다에 긴 사선을 남기며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그물이 묵직했던 모양이다.
그 사이 거제도에서 붉은 기운이 치솟더니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어제 광이바다를 지나 고성으로 지던 노을이 다시 거제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옥녀봉을 감싼다.
큰 호수를 품은 섬
가조도는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에 있는 장고 모양의 섬이다. 북쪽에는 옥녀봉이 남쪽에는 백석산이 좌정을 했다. 옥녀봉은 섣달그믐에 산제를 지냈고, 2월에는 바람신인 ‘할만네’를 모시는 영험한 산이었다.
거제도와 불과 600m 떨어져 있으며, 2009년 7월 거제도 성포리와 연결하는 다리가 개통되어 무시로 차들이 오간다. 거제도에 딸린 섬으로 칠천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한국지명총람’를 보면 ‘창호리’로 소개되어 있다.
창호리에는 창외, 신전, 창촌, 실전, 유교마을이 있었고, 후에 군령포, 계도, 신교까지 더해 8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법정리는 창호리 외에 창촌리, 실전리가 있다. 큰 섬 거제도를 돕고 보좌하는 섬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주민들은 ‘가지미섬’, ‘가재미섬’이라 부른다. 기록에는 가좌도, 가조도가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창호리’라는 지명은 곡식을 보관하거나 운송을 기다리는 것을 ‘창’에서, ‘호’는 가조도가 서북으로 길게 제방 역할을 하면서 만든 ‘안바다’ ‘호’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풀이한다. 실제 가조도에서 동서 양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모두 호수다.
다리가 놓인 가조도는 전과 비교하면 사뭇 다르다. 가장 많이 찾는 사람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요, 다음은 바다를 보며 커피 한잔 즐기려는 연인들이다. 곳곳에 펜션과 커피숍 그리고 귀촌한 사람들이 지은 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 중에 변화가 눈에 띄는 곳은 계도이다. 닭섬이라 부른다. 가조도 북서쪽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마을 앞 작은 섬 ‘닭섬’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그 섬을 근거지로 유어장과 해상펜션 등이 운영외고 있다. 일찌감치 어촌체험마을로 인정을 받아 해상낚시는 물론 지금은 카누 보트 등 해양레저까지 곁들인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를 담당하는 직원이 체험마을 사무실이 상시근무하고 있다.
오래 전 계도마을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가 되었다. 펜션과 카페가 들어서고 주차장에는 차로 가득하다. 당시 처음 만난 사무장은 생면부지 나그네에게 따뜻한 밥상을 마련해 주었다. 그 사무장은 지금은 화성 백미리 어촌체험마을에서 일하고 있다. 밥상의 인연은 이렇게 질기고 길다.
작은 섬에 러일전쟁의 흔적을 남기다
계도마을로 가는 해안에서 본 광이바다는 온통 하얀 부표가 떠있는 굴양식장이다. 그 사이로 흰 표지석이 세워진 작은 바위섬이 있다. 주민들이 ‘독수리섬’이라 부르는 취도다. 작은 바위섬에 하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35년 8월 23일 일본의 진해해군사령부가 세운 ‘취도기념비’이다.
당시 총사업비 200원 73전 동원인원 393명으로 50여 평의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그 내력은 이렇다. 광무 8년(1904) 2월 10일 러시아와 일본이 극동침략과 조선 지배를 둘러싸고 전쟁을 펼쳤다. 일본이 요동반도 여순을 점령하자 러시아가 발틱함대를 극동으로 이동시켰다.
이를 눈치챈 일본은 1905년 5월 27일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발틱함대를 거제도 송진포에서 급습해 큰 타격을 주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동양함대가 아간사격의 표적지로 삼은 곳이 독수리섬이다. 함포의 표적지로 간신히 흔적만 남은 돌섬에 그 기념비가 오롯이 남아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 진출을 시작했다. 수산자원의 수탈의 흔적은 가조도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왕실의 바다에서 제국의 바다로
거제도 북쪽 바다를 ‘괭이바다’, ‘광이바다’라고 한다. 거제, 고성, 진해로 둘러싸인 바다를 말한다. 진해만 안쪽에 있는 광이바다는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어기(어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일본인 어민들이 광이바다에서 조업을 위해 들어왔다. 한일통어장정(1889) 조약에 의해 어업권의 조차, 건어 및 염장이 가공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가조도는 괭이바다 안쪽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를 잡아 좌우로 안정된 어장을 갖추고 있다. 견내량을 통해 바닷물 소통이 좋고 어의도, 수도, 지도 등 작은 섬들이 있어 주변에 어류들이 서식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선 왕실과 사직에 이곳에서 대구, 청어, 명태들이 올라갔다. 일제는 마산만, 진해만 등 고성과 거제와 통영에 일본인 어민들을 이주시켜 멸치를 잡아갔다. 일본에서는 화학비료가 개발되기 전에는 기름이 많은 멸치, 정어리, 청어 등은 ‘벼를 키우는 물고기’로 대접을 받았다. 해삼, 전복, 상어지느러미 등은 배위에서 가공해 가져갔다. 이를 위해 일제는 이곳에 많은 일본인 어민들을 이주시켰다.
1908년(융희2) 7월 광이바다를 중심으로 일본어민 두명이 발기하여 만든 ‘가좌어기조합’은 1909년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과 ‘거제한산모곽전조합’으로 발전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시행된 ‘한국 어업법’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단체로 기록되어 있다. 수산업협동조합의 효시로 보고 있다.
두 조합은 1910년 통합되어 ‘거제한산가조어기모곽전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일합방 후 1912년 11월 조합원은 모두 302명에 어선 30척이며, 이 중히로시마현에서 어민 20가구가 입주하여 건착망 어장을 운영하였다. 조선 해역에서 멸치잡이를 처음 시작한 일본인은 히로시마현 어민들이다.
1885년 경 마산 부근에서 시작했다. 그 후 거제도, 마산만,진해만, 고성, 통영, 남해도, 사량도, 욕지도 등으로 확대되면서 멸치를 잡았다. 허가를 받은 어업이 아니라 무단어획이었다. 어업법이 발효된 이후 가조도도 멸치잡이 어민들이 정착을 해 광이바다를 중심으로 멸치잡이를 하며 수산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인근 주민들이 기억하는 어업조합은 진두(나루꼬지)에 있었다고 한다.
공장과 어장은 공존이 가능할까
가조도 바다는 멸치와 대구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대구어장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어민의 이주로 권현망이라는 멸치잡이 기술이 소개되어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60년대 70년대 광이바다를 중심으로 피조개 종패와 양식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인근 어의도 일대에서 가조도까지 이어지는 바다는 피조개 종패를 생산하는 인큐베이터였다. 거제 큰 섬이 부럽지 않았다. 천혜의 조개육묘장이자 대구, 방어, 멸치가 철철이 들었던 바다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진해만와 마산만에 공업단지기 조성되면서다.
이와 함께 인구밀집 도시가 형성되면서 생활폐수도바다로 쏟아졌다. 그나마 미더덕 양식, 홍합양식, 굴양식 등이 빈자리를 대체하면서 어업의 명맥이 유지하고 있다. 피조개 종패로 ‘노다지’를 캤다는 바다는 이제 굴양식장으로 바뀌어 하얀 부표로 가득하다.
실전마을 뒤 언덕에서 시작되는 옥녀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대신에 등산하는 시간이 짧다. 정상에 오르면 거제바다와 광이바다 등 진해만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옥녀동에서 본 가조도 주변은 흰 부표로 포위되어 있다. 굴 양식장 시설들이다. 옛날과 달리 양식장에서 직접 채취해 세척한 후 뭍에서 굴을 까는 박신작업만 하고 있다. 이마저도 굴 까는 작업을 할 사람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최근 ‘굴 정식’ 식당이 전국에 하나 둘 생기면서 알이 큰굴이 많이 소비되고 있다. 대부분 코스요리로 굴전, 굴무침, 굴튀김, 굴구이, 굴밥, 굴회, 굴국 등 큰 굴로 만들어 가격에 따라 가지 수를 더하고 뺀다. 최근에는 굴 김, 굴 스테이크, 굴 라면, 굴 스넥 등을 개발해 상품화하고 있다. 거제와 통영일대에서 양식한 굴이 많이 소비되고 있다.
이런 수요에 맞추려면 숙력 된 박신전문가들이 필요한데 모두 고령이다. 힘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니 외국인을 불러다 대체하기도 어렵다. 해서 섬마을에 박신작업장은 문을 닫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쌓이는 굴 껍질 처리이다.
산업폐기물이 되어버린 굴 껍질은 가조도 맞은 편 통영시 용남면에는 마을 부근에 산처럼 쌓여 있다. 이제 증식이 아니라 나오는 껍질 처리를 고민해야 할 때다. 어디 굴뿐일까. 전복, 꼬막, 바지락 등 껍질이 발생하는 이매패류는 모두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제 바다도 수산업도 재생과 재활용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다. 멸치그물을 터는 어장 너머로 대형 조선소가 또렷하다.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곳이 거제바다다. 가조도에서 다리가 놓이면서 거제도 조선소나 공장과 기업을 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적한 어촌생활을 즐기기 좋은 곳이라 들어왔다 카페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다.
가조도와 광이바다는 왕실의 바다에서 제국의 바다로, 주민의 섬살이의 터전에서 또 다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연도교가 만들어지고, 거제와 부산을 있는 다리도 개통이 되면서 가조도는 이제 더 이상 섬 안의 섬이 아니다. 그럼에도 섬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위치와 경관을 갖추고 있고, 옥녀봉이라는 산이 있어 낚시, 데이트, 등산 등을 할 수 있어 찾는 층이 다양하다.
외지인이 들어와 커피숍과 펜션을 시작하고 있다. 가조도는 이제 주민들의 섬이 아니다. 과거의 어촌공동체나 마을공동체는 큰 변화에 직면해 있다. 건강한 바다와 지속가능한 섬살이의 공존을 기대해본다.
거제시 가조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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