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라이언
1911년 이탈리아는 3만 명의 병력(兵力)을 동원(動員)하여 호시탐탐(虎視眈眈) 노리던 리비아를 침공(侵攻)하였습니다.
이곳의 종주권(宗主權)을 잡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는 일단 격렬(激烈)한 저항(抵抗)을 하였으나 근대식(近代式) 무기를 앞세운 이탈리아의 공격군을 방어하기에 급급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고대 로마제국의 군대(軍隊)와는 달리 이탈리아군의 실력(實力)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어서 오스만투르크 점령군(占領軍)을 쉽게 압박(壓迫)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세누시(Senussi) 저항군(抵抗軍)을 지원(支援)하기 위해 온 무스타파 케말 파샤(Mustafa Kemal Atatürk, 1881년~1938년 11월 10일)
↑이탈리아는 자신 있게 침공을 하여 투르크 점령군과 교전합니다
하지만 1912년 발생(發生)한 발칸(Balkan)전쟁으로 인하여 오스만제국의 코앞에 위기(危機)가 닥치자 투르크는 이탈리아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締結)하고 리비아의 종주권(宗主權)을 이탈리아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탈리아는 그렇게 소망(所望)하던 해외식민지(海外植民地)를 획득(獲得) 할 수 있게 되었고 고대(古代)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勝利)하여 제국(帝國)으로 발전(發展)하여 나갔던 것과 같은 영광(榮光)을 재현(再現) 할 것으로 기대(企待)하였습니다.
↑투르크는 본국에 위기가 닥치자 강화조약을 맺고 철수합니다
그러나 리비아를 두고 이탈리아가 투르크와 벌인 전쟁은 포에니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가 지배(支配)하려는 리비아는 투르크가 통치자(統治者)였을 뿐 주인(主人)은 아니었습니다.
리비아의 주인은 대대로 이곳에서 살고 있던 베르베르(Berber)인(人)들이었습니다.
회교도(回敎徒)로 오래전에 개종(改宗)한 이들은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登場)한 이교도(異敎徒) 이탈리아인들에게 반감(反感)을 가지고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展開)합니다.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베르베르 가족 풍경, 알제리
↑원주민들이 새로운 점령자 이탈리아인에게 저항합니다
↑스페인-모로코 전쟁 당시 항전한 베르베르 전사
투르크를 몰아낸 이탈리아는 베르베르인들의 투쟁(鬪爭)에 효과적(效果的)으로 대처(對處)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탈리아가 실질적(實質的)으로 점령(占領)한 곳은 아프가니스탄의 소련처럼 지중해(地中海) 인근의 해안선(海岸線)뿐이었고 내륙(內陸)의 대부분은 리비아 원주민(原住民)들이 지배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독립(獨立)을 쟁취(爭取)하려는 리비아인들과 이탈리아의 20여 년간의 기나긴 전쟁에 돌입(突入)합니다.
진정(眞定)한 포에니전쟁이 재현(再現) 된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침략자와 원주민 사이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됩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명장(名將) 한니발이 카르타고를 영도(領導)하였다면 2,000년 만에 재현된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대신한 리비아를 지휘하였던 영웅은 오마르 무크타르(Omar Mukhtar 1862~1931)였습니다.
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사막의 라이언(Lion of the Desert)이 바로 오마르 무크타르의 일대기(一代記)를 다룬 영화(映畫)였는데, 이 영웅(英雄)의 투쟁(鬪爭)은 한니발 못지않은 위대(偉大)한 것이었습니다.
↑영웅 무크타르(左)와 영화 사막의 라이언 포스터
무크타르가 사막(沙漠)과 산악(山嶽)을 이용한 뛰어난 전술(戰術)로 현대 병기(現代兵器)로 무장(武裝)한 이탈리아군을 계속 패퇴(敗退)시키자 간악(奸惡)한 제국주의(帝國主義) 이탈리아는 무자비(無慈悲)한 양민학살(良民虐殺)로 맞서고 결국 리비아 사막 수백 마일에 철조망(鐵條網)을 설치(設置)하여 베르베르인 수천 명을 강제 수용소(强制收容所)에 수용하여 아사(餓死)시키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蠻行)을 저질러 무크타르를 생포(生捕)하는데 성공(成功)하였습니다.
↑제국주의 이탈리아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릅니다
1931년 무크타르를 생포(生捕)한 이탈리아가 베르베르인들의 영웅(英雄)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公開處刑)함으로써 20년에 걸친 전쟁을 종결(終結)하고 드디어 리비아 전체(全體)에 대한 지배권(支配權)을 확보(確保)하였습니다.
마치 그 모습은 마치 3차 포에니 전쟁에서 小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 BC185~BC129)가 카르타고를 불태워 없앰으로써 기나긴 포에니 전쟁을 종결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로마군을 재현한 사진. 용병 중심의 카르타고와 달리 로마는 자영농 중심의 국민개병제였다. 그래서 로마는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는 패전한 사령관을 사형 등 가혹하게 처벌했지만 로마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등 관대하게 대했다.
↑마치 카르타고 최후의 날 같은 초토화작전으로 독립의지를 꺾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설펐던 제국주의 이탈리아의 건방진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후 로마제국의 부활(復活)을 주장하며 국민들을 현혹(眩惑)시킨 허풍장이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이 통치(痛治)한 이탈리아는 제2차 대전의 주체세력(主體勢力)으로 당당히 전쟁에 뛰어들었으나, 전쟁 내내 단지 독일의 조연(助演)으로만 깔작대다가 패전국(敗戰國)이 되었습니다.
↑무크타르를 잡고 좋아하는 침략자들 하지만 머지 않아 그들도 피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단지 로마제국이라는 과거의 달콤했던 영화를 재현하려는 시도(始賭)만 하였을 뿐, 지난 역사에서 타인(他人)에게 고통(苦痛)과 피해(被害)를 주었을 때 결국은 시간이 흘러 최후(最後)의 결과(決科)가 비참(悲慘)하였던 적이 많았다는 교훈(敎訓)을 망각(妄覺)하였던 어설픈 제국주의 이탈리아에게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봅니다●[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