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구 망우동 한 귀퉁이에서 십 수년 동안 작은 식당을 지켜온 부부를 만난 건 4년 전 시드니 올림픽이 한창인 때였습니다. 돈가스부터 칼국수까지 안되는 것이 없는 메뉴판이 걸려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는 이 집의 대표메뉴는 만두와 쌈밥이었지요. 만두는 아저씨의 주종목이었고 아줌마는 쌈밥 담당이었습니다.
이 가게의 전신은 원래 무허가 판자집이었다지요. 그것이 스무평 남짓의 버젓한 식당으로 탈바꿈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는지는 아주머니의 굽은 허리가 잘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요즘엔 보기 드문 꼬부랑 할머니의 초보 단계였지요.
특이한 점이라고는 눈씻고 봐도 없는 범상한 식당이었지만 기이할 정도로 이 집엔 손님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양수리에서 먹으러 왔다는 손님, 주차장도 없는 식당에 차 끌고 와서는 차 대 달라고 떼 쓰는 손님.... 폭풍같은 점심 시간을 비껴나서야 저는 그나마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아침부터 점심 나절까지 손이 하얘지도록 매만지던 반죽과 속을 떼놓고 뭔가를 쓰고 계셨으니까요. 촬영꺼리가 있나 싶어 어깨 너머로 훔쳐보던 저는 헛웃음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 아저씨 시를 쓰고 계시더군요.
시상(詩想)이 용솟음치는지 조그만 메모지에 일필휘지 써 내려가는데 제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모릅니다. 시인 지망생 치고는 지나치게 노숙한 아저씨에게 영문을 물었더니 팔을 들어 사방의 벽을 가리킵니다.
"여기 걸려 있는 액자들 다 제가 쓴 글들이에요. 시라기보다 반성문이죠.”
천하에 다시 없는 한량이었다는 주인장. 신혼 무렵에는 물려받은 것도 있고 해서 집도 있고 땅도 거느렸지만 10년쯤 지나고 보니 연기처럼 사라졌다지요. 돈 쓰는데는 천하의 인재였지만 돈 버는 데는 백치에 가까웠던 자신이 방안에 뭉개고 앉은 동안 아내는 무허가 판자집에서 식당을 시작했습니다. 고된 식당일에 점점 휘어가는 아내의 허리를 보면서 남편은 가슴을 쳤고 한량의 기름기와 왕년의 자존심을 깎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집에서 한량 친구들을 대접할 때 맛있다 소리를 들었던 김치 만두를 빚기 시작한 게지요.
첫맛은 은은하게 맵다가 종국엔 입 전체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화끈함을 자랑하는 이 집 김치만두는, 동네 여학생들이 시집을 가서 입덧을 할 때 애타게 이 만두를 찾는 바람에, 타지의 초보신랑들로 하여금 하염없이 이 주변을 헤매게 만들었다는 동네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두 먹고 눈물이 날만큼 맵다고 하지. 그러면 나도 만들면서 많이 울었다고 그래요. 사람들은 매워서 울지만 난 매워서 운 게 아니지.”
아저씨는 처연한 얼굴이 되어 자신이 걸어놓은 액자 앞에서 그 안에 담긴 자작시를 읽어내립니다.
" 정말로 그리도 좋을까
정말로 그리도 기쁠까
지하 월세방에서 일층 전세방으로 이사하던 날
끌어당기면 밀어내던 당신이
내 손을 꼭 잡고는 소리 죽여 운다
일백 예순 여덟평 땅과 집이 빚에 넘어갔어도
울지 않던 당신
얼마나 좋았으면 나를 껴안고 울까.....“
수년간 만두를 빚고 쌈밥을 지어낸 끝에 지하 월세방을 탈출하던 날은 공교롭게도 아내의 생일이었습니다. 이 시는 아내의 생일선물로 쓰여진 것이었지요. 매운 김치 속과 마늘 양념탓이었는지 그날 장사를 치를 만두를 만들면서는 유달리 많은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감동어리게 읽어 내려야 할 아내는 그 선물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시를 쳐다보기만 해도 아저씨의 만두속을 생으로 먹은 듯 눈물이 북받쳐 올라오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