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과업을 향한 공동체의 리더십
사도 5,27-33; 요한 3,31-36
부활 제2주간 목요일(성스타니슬라우 주교 순교자 축일); 2024.4.11.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고, 한량없이 성령을 주신다.(요한 3,34)
오늘 미사의 복음과 독서에 담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파생되는 하늘과 땅의 이치에 대한 계시와 이에 대한 사도들의 담대한 선교 활약에 대해 전해줍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우선순위로 일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어 당신 말씀을 들려주시므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높은 산의 정상, 예를 들어 지리산의 천왕봉에 올라가서 둘러보면 사방이 다 내려다보여서 산 아래에 있는 것들의 제 위치와 정확한 높이를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의 존재이유인 선교는 교회의 영향력으로 생겨나는 복음화의 과정 및 결과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세상 사람들이 먼저 교회가 가르치는 사상과 실제 이루고 있는 구조 그리고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삶과 사도직 활동에 주는 매력을 느껴야 가능합니다. 또 이 매력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리더십과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이룩하고 있는 물질문명이 제공하는 삶의 질보다 더 높다는 자신감에서 파생됩니다. 그리고 이 자신감은 다른 어느 무엇보다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대변하는 가치 즉 복음이 현세에서만이 아니라 내세에서까지 유효하며 또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증을 해 주셨다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 보증의 표시가 공동체이고 공동체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현존 영성이 원동력으로 작동합니다. 이 원동력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선교 - 복음화의 영향력 – 매력 – 리더십과 자신감 – 복음 – 공동체 – 영원한 생명, 이 모든 것들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 즉 진리입니다. 땅이 전부인 줄 아는 세상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이 천상적 가치를 종종 몰라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처음에는 몰라보았다가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그 진가를 알아보았는데, 오직 세례자 요한만이 처음부터 그분의 참 모습을 알아보고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1,29; 3,30) 그렇게 세례자 요한의 안목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많았고 니코데모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초창기의 열두 제자 출신이건, 이들이 모은 예순 명을 합한 일흔두 제자 출신이건, 최고의회 의원 출신의 아리마테아의 요셉 같이 숨은 지지자이거나 예루살렘에서 ‘물동이를 들고 가는 남자’로 지칭되던 익명의 토박이 지지자 출신이건, 또는 예수님 일행을 뒤에서 돕던 여인들이건 간에 초대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에 목숨을 걸기도 하고 일생을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이들이 알아 본 바 예수님이 하느님이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그들 안에 현존하시며 사기지은으로 기운을 주고 계심을 깨닫게 된 진리는 그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이 진리를 증언하기도 하고 이 진리에 따라 신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할 무렵, 대사제와 그 악당들이 사도들을 박해하려고 들었지만 사도들은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땅에서 난 사람들은 현세적으로 당장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에만 온통 관심을 쏟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해서는 물론 공동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난 사람들 가운데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이들은 다른 이들, 특히 가난한 이웃들에게 필요한 것들에 먼저 관심을 쏟기 때문에 하느님은 물론 공동체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궁핍한 이들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남아 있는 궁핍한 이들에게는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러기 위해서 가진 것들을 자기 것이라고만 여기지 않고 모두의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교회에서 거행되는 전례와 성사는 위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하느님께 대해서만 들었을 뿐 그 하느님의 업적인 공동체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어줍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전례와 성사 안에는 부활의 영성이 바탕이 되어 있고, 파스카 과업의 목표가 항상 전제되어 있으며, 교회의 리더십을 위한 신자들의 공동체 형성이라는 당면 목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성사는 ‘사랑의 성사’(베네딕도 16세, 2005)입니다.
세례성사는 이제 막 영적인 몸을 받고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 한 지체로서 이어 줍니다. 견진성사는 그 새 영세자의 영적인 몸이 성장하도록 성경 지식과 교리 지식과 실천 경험으로써 영적인 자양분을 줍니다. 성체성사는 그 새 영세자의 영적인 몸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되도록 함으로써 전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와 일치하게 해 줍니다.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는 그 새 영세자가 죄로 인해 약해지거나 병으로 인해 소외되거나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교회 공동체가 사제를 통해 다시 손을 잡아 주는 배려입니다. 그러면 그 당사자는 다시금 교회 공동체의 건강한 일원으로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성품성사와 혼인성사는 직접 공동체를 이루어주는 성사로서, 성품성사는 위에 언급한 성사들을 집전 봉사하는 사제를 내세우는 성사이고, 혼인성사는 위에 언급한 성사의 은총에 따라서 평신도들이 직접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실천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사도들을 이어받아 교회가 수행하고 있는 파스카 과업을 향한 공동체의 리더십입니다. 이로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세상에 봉사합니다. 따라서 남은 과제는 이 성사의 은총을 드러내는 사회적 실천입니다.
한국 초대교회 시절에 성사적 열망에 불타올랐던 이벽과 그 동료10명의 선비들이 불과 5년여 만에 4천여 명, 주문모 신부와 함께 다시 10여년 만에 만여 명을 입교시켰던 역사에서 보듯이, 사회적 실천으로써 우리가 성사의 은총을 드러내면 머지않아 놀라운 선교적 성과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역사적 기억이 지금 우리 교회 현실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사제의 수효와 성사가 거행되는 성당의 수효도 박해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정작 이 성당의 전례에 참례하여 성사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기운을 얻는 신자들의 수는 엄청나게 줄어들었습니다. 단지 숫자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전례의 활력도 눈에 띄게 가라앉았습니다. 기계적으로 성사를 집행하고 습관적으로 성사를 배령하는 탓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성사 거행 시에 반드시 들려오게 마련인 하느님의 말씀에 소홀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정성을 기울이더라도 성사 그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성사가 의미하는 바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데에는 무관심한 탓이 더 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사적 실천에 대한 무관심은 사회 현상 안에 반드시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시대의 징표를 무시하려는 게으름이나 아예 식별하려 들지 않는 무명(無明)의 태도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콜로 3,1-3)
교우 여러분!
민주주의와 민생경제와 평화의 위기를 불러온 검찰 독재 정치를 심판하려는 민심이 이번 총선으로 나타났습니다. 사회악의 죄를 압도적인 표로 심판했으니 정부와 여당도 이제부터는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에 따라 국정기조를 바꾸어야할 터이고 이는 정치권과 새로 구성될 국회가 해야 할 몫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로서 이제는 공동선의 실천으로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야 할 사랑의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이 민심에 나타난 시대의 징표를 유심히 관찰해서 우리의 신앙과 공동체 그리고 사도직 실천이 우리 사회를 하느님의 빛으로 이끌어주는 공동체의 리더십으로 발휘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천상적인 가치로 이끌어 주시어 우리 가톨릭 신앙이 복음적 매력을 회복하기를 아울러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고 계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한량없이 사기지은의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 3,34)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복음적 리더십을발휘하게 되는 일, 그리고 그 리더십으로써 우리 사회와 한민족이 민족의 파스카 과업에로 나아가게 되는 일, 이야말로 세상을 위한 사랑의 심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