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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콘느 (Chaconne) *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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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희, 나 오늘 되게 기분 좋은 일 있거든? 5분 후에 집 앞으로 내려와. 알았지?”
사람이 변한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항상 그렇게만 믿어왔다. 난 변화란 걸 참 싫어했었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변해버렸다. 1년 6개월 만에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변해버렸다. 정말 모든 게 다 변해버렸다.
“야, 한재희! 듣고 있지? 어? 대답 안 해?”
“응. 듣고 있는데, 너, 내가 들었을 때, 별일 아닌 거면 오늘 저녁 네가 하는 거다?”
19살에 나는 학교를 그만뒀다. ‘그’가 나를 버린 뒤로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매일 같이 그의 면회를 가다보니, 어느새 학교에 자퇴서가 접수되어 있었다. 단 하루도 제대로 수업 들은 날도 없는 학교라 아쉬울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는 마쳐야 사람답게 살 텐데, 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러기엔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오케이! 대신 네가 들었을 때도 별 거인 거면…….”
“몰라, 그래도 저녁은 네가 해!”
그렇게 몇 개월을 방황하고 미친년처럼 살던 나를 잡아준 건 이 녀석이었다. 내가 모르던 내 밝은 성격을 찾아내주고, 내게 웃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 건지 알려주고, 내게 사랑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려준, 내게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주겠다 말하는 이선규, 이 녀석. 녀석은 나를 달랬다. 울고 싶다 그러면 어깨를 빌려줬고, ‘그’가 보고 싶다 말하면 말없이 그의 DVD나 잡지를 꺼내주었다. ‘그’의 면회를 갈 때도 같이 가주었다. 물론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지만. 내게 얼굴 한 번 안 보여주는 ‘그’ 때문에 울 때도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나를 토닥여주었다.
“미친 한재희. 그게 조건이냐, 어?! 됐고요. 오빠가 쏠 테니까 데이트 하는 거다? 어?”
“자신 있다 이거지?”
외로움에 미쳐 갈 때 쯤 녀석이 내게 말했다. ‘같이 살까, 우리?’라고. 이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를 향해 녀석은 손을 내밀었다. 웃으며 ‘아무 짓도 안할게.’라는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까지 던지면서. 그래서 그 손을 잡았다. 어둠으로 던져진 내게 유일한 빛이었다.
“당근이죠! 5분 후에 내려 와, 알았지?”
그 때부터 많이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면회를 가는 빈도가 현저히 줄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버린 뒤로 나는 ‘그’의 DVD를 틀어놓지 않으면 잘 수 없는 이상한 불면증을 앓았는데, 녀석은 자장가가 그 불면증을 고쳐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그’가 아닌 ‘한재희’를 찾아갈 때쯤, 엑스트라 경력을 쌓아 나름 괜찮은 대학교 연극 영화과에 진학한 20살의 녀석이 내게 말했다. 너도 공부해야지, 라고. 그 때 나는 녀석이 내미는 책을 받아들었다.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무난히 합격했다. 이제 남은 건 수능이다. 별로 대학 갈 생각은 없었지만, 녀석은 ‘캠퍼스 라이프’를 함께 즐기자며 끈질기게 나를 졸라대곤 했다. 그러면서도 끝에 가서는 ‘네가 하고 싶을 때 해, 재희야. 모든 건 네 마음이 가장 중요하잖아.’라고 말해주는 건 잊지 않았다. 녀석은 항상 나를 배려해주곤 했다. 모든 걸 자기 멋대로 하던 ‘그’와는 다르게.
녀석은 언제나 19살에 머물던 내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나를 20살로 자라게 해주었다. 이선규는 내게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19살 전에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나를 녀석이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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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데?”
“오, 한재희. 데이트 안 할 것처럼 굴더니. 쯧쯧. 누가 이렇게 차려 입고 나오래, 어?”
“……뭐야. 싫다는 거야, 지금?”
“그럴 리가. 그런데 심장이 막 뛰는 건 어쩔 수 없다. 책임 져, 어?”
“미쳤냐. 무슨 일인지나 말해.”
퉁명스럽게 받아쳤지만 알고 있다. 녀석의 100% 진심이라는 것쯤은. 모든 게 변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여전히 녀석이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거고, 또 한 가지는 난 여전히 녀석을 ‘친구’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나 이번에 영화 조연 땄어!!!”
“……뭐?”
“단순히 엑스트라나 그냥 뭐 이런 거 아냐! 진짜 남자 조연이라니까? 남우조연상 노릴 수 있는 그거!”
녀석은 연기를 계속해왔다. 웬만한 엑스트라를 넘어서서 이젠 엄연히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된 ‘배우’였다. 다만 주연이나 조연급은 여전히 못 됐을 뿐……. 하지만 녀석은 아무 불만 없이 꾸준히 연기를 열심히 해왔고, 그런 녀석을 보면서 나는 언젠가는 ‘성공’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뭐……?
“나 이제 매니저 형도 생겨!”
“……진짜야?”
“응! 이거 작년에 칸 가서 상 받아온 감독 있잖아. 박희찬 감독. 그 사람 영화라 잘만 하면 남우조연상도 딸 수 있고, 더 좋은 건…….”
“앞으로 배역 좋은 거 많이 들어오겠네.”
“응!! 기쁜 일 맞지? 어?”
“축하해.”
‘그’와 이 녀석은 참 많이 달랐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 주연을 맡아도 기뻐하는 기색 한 번 해본 적 없는 그였다. 그저 당연했으니까, 그한텐 이 모든 게. 내가 그의 옆에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그가 톱스타였던 건 언제나 당연했으니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남들은 다 몰라도 나 혼자만 아는 진실이 있다면 화려한 톱스타였던 ‘그’도 알고 보면 언제 무너질지 몰라 겁내고 있다는 걸, 다만 티를 내지 않을 뿐이라는 걸. 유일하게 내 앞에선 가끔 약한 모습도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래도 달라, 당신과 이 녀석은. 이 녀석은 엑스트라 제의라도 고맙게 여길 줄 알아. 그냥 사소한 거에 다 고마워 해. 내가 5분이라도 함께 있어주면 그거라도 기쁘다고 말해주고, 나를 소중히 해줘. 그게 당신과 이 녀석의 가장 큰 차이점일지도 몰라. 18년을 함께 해도 웃음 한 번 보기 힘든 당신과 이 녀석의 가장 큰 차이점.
그래서……. 여전히…….
“말로만?”
“뭐?”
“뽀뽀라도 한 번 해주면 안 되나?”
“뭐?! 이게 진짜!!!!!!!”
“농담이야, 농담. 이거 농담 두 번 했다가는 너한테 맞아 죽겠다. 우리 데이트나 하러 가자. 응? 영화 촬영 들어가면 나 되게 바빠질 거란 말이야.”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당신을 잊지 못하면서도, 아니, 평생 당신을 잊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만이 내 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알면서도 이 녀석의 손을 놓을 수가 없어. 사랑 받는다는 게 주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걸 알아버렸거든. 버림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거 이젠 정말 힘들어서, 어차피 당신은 이미 나 같은 거 잊어버렸겠지만, 뭐……. 그래, 당신은 그런 남자잖아. 평생을 사랑해도 단 한 줄기의 마음조차 내주지 않을 그런 사람.
그래서 당신의 손을 놓아보려 해, 내가. 당신에게 중독된 한재희가 그 중독을 끊어보려 해. 그 세상을 탈출해보려고 발버둥 쳐볼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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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분위기 되게 좋지?”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너 뭐야, 진짜.”
“뭐긴 뭐야. 그냥 산거야, 산 거.”
“너랑 나랑 생활비 똑같이 내는데 뭘 사!!! 너 나 몰래 돈 숨겨둔 거 있었어? 어?”
“……돌겠네. 이래가지고 한재희 어떻게 데리고 살아.”
“뭐?!”
“깐깐한 마누라 같잖아. 무섭게.”
데이트 하자며 녀석이 못 보던 차에 나를 태우더니 설명 한 마디 없이 끌고 온 곳은 분위기 무척 좋은 재즈 카페였다. 문제는 이미 와봤던 곳이라는 거지만……. 그것도 ‘그’와 함께. 하지만 그런 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녀석은 심각하게 말하는데 장난으로 받고 있어, 짜증나게!
“뭐, 깐깐한 마누라라도 한재희는 봐줄게.”
“됐고, 빨리 말 안 해?”
“아, 진짜……. 아, 그래 말한다 말해. 유명 감독이 좋긴 하더라.”
“뭐?”
“오늘 출연 결정 하자마자 개런티 주던데? 일정 금액 선불로 받은 거긴 한데…….”
“그래서 그걸 썼어, 지금?!”
“응. 뭐, 모자라는 건…….”
“어머니께 손 벌렸지, 너!”
돌겠다, 진짜, 이선규. 도대체 차가 뭐가 필요하다고 개런티 받은 걸 써서 차를 사, 사기를. 솔직히 자기 차 갖는 게 남자들 로망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는 더했지. 면허 따기도 전에 차부터 뽑았었으니까. 아니, 그렇다 해도……. 그 쪽이랑 너랑은 차원이 다르잖아. CF 한 개에 10억을 훌쩍 넘는 개런티를 받고, 드라마 회당 4000만원은 기본으로 따고 출연하는데다가, 영화 한 편은……. 아무튼 쌓여서 걱정일 만큼 돈을 버는 ‘그’와는 다르다.
아무리 유명 감독에 남자 2인자 역이라 해도 아직은 신인이나 마찬가지인 너한테 몇 억씩 던져줬을 리는 만무하고, 받은 돈도 절반 이상 소속사에 줘야 하면서 차를 사는 건 미친 짓이잖아. 안 그래도 우리 부모님 요즘 나한테 생활비 되게 조금씩 보내주시는 바람에 ‘우리’ 집 살림 어려운 판국에!
라고 소리치려다가……. 문뜩 내 꼴이 우스워보여서 그만뒀다. ‘우리’라는 말 평생 ‘그’와 ‘나’를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두 글자 단어지만, 그 단어를 다른 사람과 나를 묶는 데 쓴다는 건 참 가슴 아린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정말 이선규 애인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냥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고 싶다. ‘그’가.
“너무 화내지 마. 알다시피 우리 어머닌 나한테 뭐 못해줘서 안달이신 분이잖아.”
“너희 어머니 이해 안 가, 난 진심으로.”
“뭐가.”
“제 발로 집 뛰쳐나와 사는 아들 뭐가 예쁘다고 그렇게 잘해주신대.”
“……그런가? 뭐, 그래봐야 돈 주시는 거잖아. 돈이야 우리 집에 넘쳐나고.”
한 땐 이 아이가 정말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재벌 2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저 반항하기를 즐기는 철없는 재벌 집 막내아들이 아닐까 생각해봤었다. 같이 산 세월이 꽤 되어가지만 여전히 모른다, 그가 어떤 집 사람인지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적어도 재벌 2세는 아니라는 거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이대로 버려두는 재벌가는 없을 테니.
그 날, 이 녀석이 내게 내밀었던 골드 카드를 기억한다. 서명 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Brothers, Lee. 라고.
“됐고, 너 앞으로 돈 그렇게 네 멋대로 쓰면 죽어, 어?”
“……앞으로도 같이 살아줄 거야?”
“뭐?”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앞으로’라……. 내게 ‘앞으로’가 있을까? ‘그’가 떠나간 뒤로 내게 ‘앞으로’는 없어. 너도 알잖아, 이선규. 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야. 사실은 그래. 그를 잊겠다고, 그를 놓겠다고 발버둥치지만 난 알고 있어. 그를 놓을 수 없다는 걸. 그저 네게 기대고 있을 뿐. 너마저 없으면 무너지겠지, 난.
“아냐. 그런데 여기 분위기 되게 좋지?”
“응.”
“표정 굳었다. 왜 그래? 맘에 안 들어? 나 여기 찾느라 힘들었는데…….”
“……응.”
“와 씨, 반응 봐. 어떻게 찾았냐고 눈을 반짝이며 물어주는 게 예의 아냐?”
“그런가.”
“여기 우리 첫 촬영지야.”
“어?”
“오늘 시나리오 앞부분 받았거든. 거기에 여기 나오기에 감독님께 여쭤봐서 바로 찾아온 거지. 맘에 들지 않아? 실제로 보니까 더 맘에 든다. 여기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도 많이 나온다던데……. 집에서도 가깝고, 우리 가끔 오자.”
“……응.”
“너…….”
첫 촬영지라며 설레면서 말하던 녀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녀석이 알아차린 거였다. 나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아는 녀석이었으니까. 내가 ‘그’에 대해 ‘그’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녀석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뗐다.
“와 봤구나.”
“……응.”
“미안. 몰랐어. 아 씨, 신경 써서 온 건데 일이 꼬이지, 왜. 짜증나게.”
“……여기서 화보 촬영 했었잖아.”
“아, 그 두 번째 화보집에 있는 카페가 여기였어? 편집 제대로 죽이게 했네. 못 알아봤잖아. 하긴 그 새끼가 하도 폼 잡고 찍어서 카페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이의 불문율이 되어 있었다.
“되게 멋있었는데…….”
“한재희.”
“진짜 멋있었는데, 그 때…….”
그런 불문율을 먼저 만든 건 나였다, 사실. 그걸 따라준 건 이선규였고. 그런데…….
“내가 영화 더 멋지게 찍을 테니까 그거 잊어, 재희야.”
“……정은호가 참 멋있었어. 지금도 멋질 테지만.”
“한재희!”
결국 깨는 것도 내가 해버렸다. 오랜만에 불러보는 ‘그’의 이름은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단 하나의 존재였다. 여전히 그랬다.
“보고 싶다, 되게.”
“후……. 넌 정말…….”
“내일 면회 갈래, 나.”
“어차피 너한테 얼굴도 안 보여주잖아!!”
“갈래, 그래도. 마음 바뀌었을 지도 모르잖아.”
“너 되게 잔인한 거 알아?”
“…….”
“어떻게 내가 너한테 처음인 게 없냐, 진짜. 알고는 있는데 되게 비참해, 이런 거.”
이선규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까 가슴 한 쪽이 쿡쿡 쑤셔온다. 뭐랄까. 짝사랑이란 게, 그것도 자신을 전혀 봐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건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얼마나 슬플 지도 알아, 아는데…….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선규야. 난…….”
“됐어. 내가 욕심 안 부리겠다고 약속하고 시작한 관계였잖아, 우리. 지금도 그 약속 안 변했어. 안 변했으니까…….”
이선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생과일주스를 마실 뿐. 뒤에 숨겨진 말은 알고 있다. 내가 정은호를 사랑할 때 그랬다. 그저 정은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새 정은호가 나를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라며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욕심은 점점 커져서, 어느새 그와 사랑을 나눴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었다. 이선규도 마찬 가지일 거다. 짝사랑이란 건 그런 거다. 자꾸만 욕심을 부리게 되는. 내가 이선규 옆에 있는 건 사실 녀석에게 정말 못할 짓인지도 모른다. 이러면 이럴수록 녀석은 더 힘들어질 테니까. 하지만…….
이기적이라 해도 난 그래, 선규야. 너라도 없으면 지독한 외로움에 저 지옥 끝으로 추락해버릴 것 같아. 그래서 네 손을 놓지를 못해, 내가.
“재희야.”
“어?”
“피아노 한 곡만 쳐주라.”
“……에?”
“저기 피아노 있잖아. 한 곡만.”
“나 재즈는 못 쳐. 그리고……! 후……. 너 정말……. 알았어. 대신 클래식이야.”
더 이상 녀석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건 녀석의 눈망울이 참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카페 정중앙에 놓인 피아노로 다가갔다. 까만 그랜드 피아노였다, 그건. 그런데 그 피아노 바로 앞에 선 순간 알 수 없이 저릿한 기분이 들었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게 그리 두렵지 않았으니까. 다만……. 신경이 쓰이는 건……. 문뜩 내 손으로 눈길이 향했다. 손톱은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길어버린 지 오래였다. 정은호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피아노를 잡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왜 피아노를 쳐달라는 거야, 내가 그랬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왜…….
“저 손님, 피아노 치실 건가요?”
“……아, 네.”
게다가 지금 내 심장을 가장 조여 오는 이 기분의 가장 큰 원인은…….
“클래식도 상관없죠?”
“물론이죠. 잘 부탁드릴게요.”
피아노에 앉았다. 손가락을 잠시 움직여보고 가만히 건반 위에 댔다. 1년을 넘게 피아노를 멈추고서도 칠 수 있는 곡은, 악보 전혀 안 본 상태에서도 ‘최고’의 컨디션으로 연주를 마칠 수 있는 곡은 내게 있어서 단 하나 뿐.
BMV 1004. 그가 좋아하던 단 하나의 곡. 샤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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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있어, 정은호? 당신만을 위해 쳤던 그 곡이야. 당신을 위해서 중학생이던 꼬맹이가 대학생도 치기 어렵다는 이곡을 쳤었어. 그것도 완벽하게. 내가 그렇게 당신을 사랑했었어. 이 곡을 칠 때면 당신을 향한 내 끊을 수 없는 중독을 느끼게 돼. 당신은 어떨까.
보고 싶어, 정말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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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박수 받으려고 연주했던 건 아니었는데 엉겁결에 많은 박수를 받게 되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피아노에서 내려오는데 두 개의 손이 동시에 내 양 팔을 잡았다. 순간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다. 오른 팔을 잡은 건 카페의 주인쯤으로 보이는 남자였고, 왼 팔을 잡은 건 이선규였다.
“아, 저……. 학생한테 할 말이 있어서……. 나쁜 뜻은 아니고…….”
“저 사장님. 한 곡만 더 연주하고 이야기 들을게요. 괜찮으시죠?”
“아, 그러지.”
“이, 이선규?!”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 곡만 더’를 이야기 해버리고는 나를 다시 피아노에 앉히는 이선규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내 옆에 앉았다. 뭐, 뭐야. 지금……. 같, 같이 치자고?
“바흐 좋아해?”
“……어?”
“바흐 샤콘느 아냐? 부조니 편곡한 거. 이게 1004번이던가?”
“맞아. 잘 아네.”
정은호는 이 곡이 ‘샤콘느’라는 ‘바흐’ 작곡의 곡이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할 거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알 필요조차 없었겠지. 그저 듣기 좋아서 연주해달라고 했을 뿐. 하나부터 열까지, 알면 알수록 이선규는 정은호와 정말 다르다. 게다가 정은호는…….
“왜 이렇게 어두운 거 쳐.”
“어?”
“좀 밝게 가지. 기분도 안 좋은데.”
“……아.”
“밝은 곡 쳐야 네 기분이 좋지. 안 그래? 난 우울한 곡 치는 거 이해 안 가더라. 한 곡만 같이 치자.”
정은호에게서는 이렇게 피아노를 같이 치자는 말이 나올 리 없다. 무언가를 연주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였다.
문뜩 생각이 났다. 그가 고3때였나. 드라마에서 피아노 치는 장면을 연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바쁜 촬영 스케줄에 쫓기던 감독과 작가는 피아노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배워지는 게 아니니까, 그냥 대역 쓰자고 말했었다. 그날 촬영장이 다 뒤집어졌던 걸 난 생생하게 기억한다. 연기에 대한 자부심,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그에게 ‘대역’이란 상상한다는 것부터가 모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만에 그는 작가가 원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 곡을 연주해냈다. 스태프들은 ‘역시 정은호는 대단한 천재’라며 치켜세우기 바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손에 물집이 잡힐 만큼 피아노를 쳐대던 정은호를. 평소에도 세 시간 정도 자던 정은호가 그 잠 다 포기하고 날 새가며 틈나는 대로 연습했던 정은호를. 완벽함을 위해 내 피아노 선생님까지 불러다가 지도 받았던 정은호를. 제대로 되지 않아 속이 상했던지 피아노에 눈물을 떨어뜨리던 정은호를. 하지만 대중들 눈에 정은호의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피아노마저 잘 치는 완벽한 왕자님’으로 거듭났을 뿐. 물론 그 이후론 피아노 치는 모습 단 한 번도 못 봤지만.
그래, 생각해보면 나만이 알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너무 많아. 당신은 이런 모습 나 아니면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잖아. 그나마 나니까, 당신보다 당신에 대해 더 잘 아는 미친년 한재희였으니까 보여줬던 거잖아. 지금은 어때? 나 없이도 괜찮아? 약한 모습 보일 때 없어서 그저 한 순간도 ‘당당한 가면’을 버리지 못하는 그거……. 괜찮아, 정말?
난 안 괜찮아. 보고 싶어. 어떤 모습이든 다 상관없으니까 보고 싶어, 정말로. 내가 이래.
“야, 한재희!”
“……어?”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 말 아예 못 들은 거야?”
“아, 응……. 미안. 무슨 말 했어?”
“어휴, 유키구라모토 아냐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알긴 안다. 일본의 유명한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유키구라모토. 그의 곡을 몇 개 쳐본 기억도 있다. 뭐, 어쨌거나 전문 분야가 클래식이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재즈나 뉴에이지 장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니, 어쩌면 그 이유는……. 정은호가 재즈나 뉴에이지보다 클래식을 좋아했기 때문일지도.
“Hopeful Tomorrow 악보 기억 나?”
“응. 대충은. 그런데 그걸 같이 치자고, 지금?”
“응. 나 영화 첫 촬영 하는 거 대박 내라고 응원해달라는 거야. 뭐, 덧붙여서 이곡 제목이 우리한테도 적용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이선규는 씨익 웃더니 자기가 먼저 시작해버렸다.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악보를 잠시 떠올린 뒤 약간의 즉흥 변주를 곁들여 그와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Hopeful Tomorrow. 희망찬 내일. 그게 ‘우리’ 그러니까 너와 나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가 희망차게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 넌 그래? 난……. 선규야 나는……. 나는 아직도 그래. 하루하루가 위태로워. 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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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하군요.”
“별 말씀을요.”
“아, 저 학생, 혹시 시간 나면 아르바이트 해볼 생각 없어요?”
“……네?”
이선규가 말했던 ‘한곡만 더’가 끝나자마자 사장님이 우리 두 사람을 잡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 쪽을.
“피아노를 무척 잘 치는 것 같아서. 우리 카페 사람들도 많이 오고 그래서 은근히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 하려는 사람 많아요. 원래 다음 주쯤 모집할까 했는데, 학생 보고 완전히 필 꽂혀서. 어때요? 안 할래요?”
“피,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요?”
“네. 뭐, 바쁜 일 있을 땐 안 와도 되고, 피아노 가끔 쳐주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거고, 또 시급은…….”
“해, 재희야.”
“뭐?”
갑작스러운 제의였다. 피아노.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건. 하지만 정은호로 인해 난 그 꿈을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버렸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피아노를 치는 것’을 꿈꿔 본 적 없다. 그런 내게 전문 피아니스트는 아닐지언정 피아노를 칠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거다, 사장님의 제의는. 그리고 이선규는 이미 내 마음을 꿰뚫고 있다.
“너 피아노 치고 싶어 했잖아. 해, 재희야.”
“……이선규.”
“하나하나 다 제 자리로 돌려놓을 거야, 내가. ‘그’로 인해 네가 잃었던 거 다시 다 찾아줄게.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줄게. 이게 그 처음이라고 생각하자, 재희야.”
내가 정은호로 인해 잃었던 걸 다시 제 자리로 돌려놓겠다고? 다시 다 찾아주겠다고? 그게……. 그게 가능할까, 선규야?
“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요. 내일 저녁에 와줄 수 있죠?”
“네. 그런데 저…….”
“뭔가요?”
“전 재즈나 뉴에이지, 팝 이런 건 거의 못 쳐요.”
“클래식도 좋던걸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선규야, 넌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니?
“샤콘느요. 아까 제가 쳤던 그 곡. 그건 매일 칠거예요.”
난 알고 있어.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왜냐하면…….
“아, 무슨 사연 있는 곡인가보죠? 그렇게 하세요. 뭐, 듣기 좋던데요.”
“……누가 들을지도 모르니까 치고 싶어요.”
왜냐하면 난 잃은 게 없거든, 정은호로 인해서. 정은호로 인해서 잃은 건 딱 하나야. 정은호 그 자체. 넌 내게 그를 찾아 줄 수 없어. 그러니까 불가능해.
“누가요?”
“한재희, 너…….”
“제 신이요.”
그러니까 내게 있어서 새로운 세상도 불가능해. 변하지 않은 또 다른 한 가지는 내가 여전히 그에게 미쳐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여전히 내 유일한 신이고, 여전히 내 유일한 세상이라는 것.
다만 알면서도 나름 변하고 있다고, 변할 수 있다고 애써 믿으려는 것일 뿐이야. 이런 나를 넌 감당할 수 있을까, 선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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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씨, 이쪽 좀 봐주세요.”
“이선규 씨, 이번 드라마는 어떤 역할이죠?”
“신인남우상의 강력한 후보라던데 실감 나시나요, 이선규 씨?”
쉴 새 없이 터져대는 플래시 세례와 달려드는 기자들. 그리고 빨간 레드 카펫. 정은호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언제나 익숙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신인남우상을 받은 정은호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시상식에 참여했다. 매 해 꼬박꼬박 상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남우주연상만 몇 번 거머쥐었다. 한 영화로 여러 시상식에서 쓸어왔으니까 그럴 법도 했다. 게다가 주요 후보로 노미네이트는 거의 매 해 됐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정은호는 이런 자리에 무척 익숙했다.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 당사자에게도. 정은호 덕분에 나는 매해 주요 영화 시상식이나 연기 대상 시상식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유일하게 작년만 빼고……. 훌쩍 군대로 떠나버린 정은호는 그가 없는 자리에서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없는 자리에서 대리 수상으로 상을 받았다고 했다. 이 모든 게 신문에서 본 내용이었다. 항상 실제로만 보던 내겐 오히려 그런 기사가 더 낯설었다. 그래도 축하는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며 그의 DVD를 보았다. 그러다가 스스로가 궁상맞아보여서 그만뒀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난 작년 이후로 다신 영화제고 시상식이고 갈 기회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올해 11월. 난 다시 시상식장에 오게 되었다. ‘유력한 수상자’로 뽑히는 사람과 함께. 대한민국 영화 대상 시상식장에……. 재작년과 다를 바 없이 화려하게 꾸며진 그 시상식장에. 아무 것도 바뀐 건 없었다. 달라진 건 유일하게 하나였다. 그건…….
“되게 떨린다. 상 받을 수 있을까, 나?”
“너 유력하다며.”
“그래도 쟁쟁한 사람들 너무 많아. 그리고 난 처음이잖아. 원래 영화제라는 게 수상자 명단은 다 거기서 거긴 거 알지? 특히 신인상 같은 건 한 사람이 쓸어가는 게 거의 대부분이고. 저번에 대종상에서 받았던 류덕환 선배도 있고, 또 다니엘 헤니 선배도 인기 되게 많고……. 안 될 거 같아, 나. 무지 떨린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정은호가 아니라 이선규라는 점이었다. 이선규는 신인남우상의 유력한 후보로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지를. 대부분 이변이 없는 한 그가 받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는 저리도 떨고 있으니……. 그래, 정말 정은호랑 너랑은 다르구나. 넌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그걸 실감나게 해. 정은호는 너보다 더 쟁쟁한 선배들 많은 데서도 당당했거든. 떨고 있으면서도 그 모습 내 앞에서만 보인 채, 남들 앞에선 철저히 감춘 채 그렇게 당당했거든. 그런데 넌……. 어디서나 솔직해. 특히 내 앞에선 더 하고.
4월에 칸 수상경력이 있는 박희찬 감독의 신작에 남자 조연 역할로 크랭크 인 들어간 이선규는 멋지게 촬영을 끝마쳤다. 영화는 9월에 개봉해서 엄청난 관객을 끌어 모았고, 연기 실력에 비해 인지도는 정말 없던 ‘배우 이선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시상식에 ‘남우신인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기까지 했다. 게다가……. 지금은 인기 드라마 조연으로 맹활약 중이기도 하다. 사람이 어떻게 변할 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곤 하지만, 이선규는 정말인지 내게 놀라운 변화만 보여주었다. 한 때 허풍만 심한 엑스트라 주제에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랬던 나를 비웃듯 그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었다. 어느덧 ‘스타’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시상식장 대기실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선규는 정말로 ‘톱스타’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니까 내가……. 어쩌면 내가……. 이 레드 카펫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너도 고품격으로 못 놀고, 그 새끼는 엑스트라로 평생 찌그러질 테니까.’
그 순간 정은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은호 보고 있어? 넌 무슨 생각을 해, 지금 이선규를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어, 혹시? 그냥 너하곤 상관없는 ‘신인’이야? 하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나 같은 건 너한테 의미도 없었으니, 나와 ‘붙어먹은’ 남자도 너한테 아무 의미 없을 거 아냐. 그냥 스쳐지나가듯 잊었겠지. 아니면 지금은 그냥 지켜보는 중이야? 어디까지 올라가나, 어디 한 번 잘해봐라 그렇게? 어차피 너 같은 톱스타 중에서도 톱스타가 말 한 마디 하면 저까짓 신인 배우 인생 쫑 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래? 그런 거야? 말 좀 해 봐. 듣고 싶어, 정은호 당신 목소리가 무척이나 그리워. 이 자리 되게 어색해. 당신과 함께 있지 않은 시상식은.
“……잘 되겠지.”
“신인상은 올해 아니면 못 받는 상이잖아. 나 그래서 더 떨려.”
“안 되더라도 청룡 남아 있잖아.”
“그래도 정식으로 처음 노미네이트 된 건데……. 받고 싶어, 나. 욕심 많은 건가?”
아니, 전혀. 그 정도 욕심은 내도 돼. 넌 너무 착하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너보단 정은호를 생각하고 있는 이기적인 나와도, 거짓된 오만으로 가득 찼지만 알고 보면 겁 많은 정은호와도 다르게 넌 착하니까.
“재희야.”
“어?”
“상 받으면 내가 뭐라고 수상 소감 말하는지 잘 들어야 해. 알았지?”
“받고나서나 말해.”
알고 있다. 그는 받을 것이다. 하지만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그가 트로피를 들고 무대 위에 서 있는 걸 보면 왠지 모르게 정은호와 겹쳐 보일 것만 같아서. 정말인지 난 이기적인 여자일지도…….
“그나저나……. 대기실 여기보다 좋았지?”
“어?”
“정은호는 여기보다 훨씬 좋은 곳에 있었지?”
“……이선규.”
“아까 보니까 진짜 크고 넓고 깨끗한 대기실 있더라. 그런 곳 썼겠다. 아, 부럽네. 오늘은 거기 누가 쓰나. 이름표도 안 붙어있던데.”
“선규야.”
“꼭 그런 곳 다시 보여줄게. 조금 더 노력해서 더 멋진 남자가 될게. 그 남자처럼 톱스타가 되도록 그렇게 해볼게. 나 이번에 드라마 주연 들어왔다고 했잖아. 그거 진짜 최고로 멋있게 끝내서 연기 대상도 받을게. 알았지? 그렇게 노력해서 내가, 내가……. 최고의 남자를 사랑했던 너 말고, 최고의 남자에게 사랑받는 너로 만들어줄게, 재희야.”
선규야, 고마워. 넌 언제나 내게 ‘사랑받음의 기쁨’을 알게 해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그걸 너만이 느끼게 해줘. 하지만 알고 있잖아. 네가 발전하고 또 발전해도, 그렇게 ‘스타의 길’을 걸어 ‘톱스타’가 된다 해도, 넌 정은호처럼 될 수 없어. 그는 타고난 능력만 있었던 게 아냐. 처음부터 운이 따라줬었고, 처음부터 온 대중의 관심과 온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 됐었어. 신마저도 사랑하는 남자야, 그 남잔. 내가 사랑했던, 아니 내가 사랑하고 있는 그 남잔 그런 남자야. 넌 그처럼 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최고의 남자’에게 사랑받는 기쁨은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그런 게 아냐. 냉정하다 말할지 몰라도 이게 내 대답이야. 그래, 그렇게 이기적이야, 내가.
“후하, 이제 나가자. 완전 떨리네. 손 좀 잡아도 되지?”
“선규야.”
“어?”
이선규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는데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가끔 만지던 정은호의 손은 차가웠는데 이선규의 손은 따뜻하다. 이선규는 소란스러운 시상식 공간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나도 걸었다. 소란스러움을 틈 타 속에만 담아뒀던 한 마디를 꺼냈다.
“……넌 그렇게 못해 줘.”
“……뭐?”
“아냐, 아무 것도. 빨리 가자, 늦겠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규야. 정은호가 아니라면 내게 ‘최고의 남자’가 될 수 없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신의 사랑을 받는 그런 톱스타 대 배우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게 아냐. 그가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난 그를 사랑했을 거야. 그냥 ‘정은호’기 때문에 내게 최고였던 것뿐이야. 네가 정은호가 되지 못하는 이상, 그의 자리까지 올라간다 해도 내겐 최고일 수 없어. 올라간다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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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정말이네?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오랜만이다.”
“……아, 안녕하세요.”
당황했다. 모두의 예상대로 신인남우상을 받은 이선규가 무대 위로 올라가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는 데는 몇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정은호의 매니저였다. 일단 인사를 했다. 그 사이에 이선규는 상을 받고 있었다.
“너 요즘 이선규랑 같이 다닌다더니 정말인가보네…….”
“아, 그게……. 뭐, 어쩌다보니까요. 같은 학교 다녔었거든요.”
“촬영장에도 자주 찾아간다며, 너.”
“……아, 네.”
“소문이 자자하더라. 요즘 이선규 저게 신선한 마스크인데 연기도 잘한다고 주목 엄청 받잖아. 그래서 그 주변 소문도 꽤 많이 돌더라고. 너에 대한 이야기가 그 소문의 대다수였고. 그게 정말일거라곤 생각 안 해봤는데, 난. 그런데 진짜였네.”
무슨 소문을 들었던 걸까 문뜩 궁금해졌지만 뻔한 이야기일 거다. 이선규의 여자 친구니, 동거하는 애인이니 뭐, 이쯤 되겠지.
“쟤 드라마 주연한다며?”
“아, 네. SBS 월, 화 드라마 주연 땄어요.”
“엑스트라로 그 때 마주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많이 컸네.”
“그러게요.”
문뜩 그날이 떠올랐다. 정은호를 위한 도시락을 이선규가 먹고, 정은호는 그런 이선규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그날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정말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란 게 딱 맞는 말이다.
“그나저나 진짜 의외는 너야, 이선규보다.”
“……?”
“난 너, 정은호 아니면 안 되는 애로 봤거든. 아니었어?”
“네? 아…….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저랑 은호 오빠 진짜 애인 아니었잖아요.”
“그거야 알지. 그런데 넌 정은호 진짜 사랑한 거 아니었어?”
“……!”
당황했다. 난 그저 정은호의 매니저가 우리 두 사람이 언론에 떠드는 것처럼 애인 관계는 아니다, 라는 것만 알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은호 보는 눈빛, 정은호 챙기는 손짓 하나하나에서 정은호 없으면 죽을 만큼 정은호를 사랑한다, 뭐 이런 거 보였거든. 난 그래서……. 사실 정은호 새끼 군대 간다 그랬을 때도 네가 나타나서 울고불고 매달릴 줄 알았고, 뭐 좀……. 정은호 없으면 너 정말 못 살 거 같았고. 또 뭐……. 아무튼 그랬었거든. 아니야? 내가 착각한 건가.”
“…….”
“이 바닥이 소문이 빠른 만큼 되게 엉터리가 많잖냐. 정은호랑 애인이었던 한재희가 정은호한테 차인 뒤로 이선규라는 유망한 신인 배우랑 사귄다더라 하는 말이 나오는데, 내가 알던 한재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 난 그저 소문인 줄 알았지.”
“……아 저…….”
“지난 얘기해서 뭐하겠냐. 솔직히 정은호 그 새끼가 정 떨어질 만한 짓 많이 했지. 잊을 만큼 시간도 많이 흘렀고. 그래도 면회는 가끔 가냐? 사랑하는 마음은 없어졌어도, 아무튼 어렸을 때부터 되게 잘 따랐던 오빠잖아.”
무대 위에서 이선규가 트로피를 손에 들고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는 게 보였지만, 미안하게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심장만 쿵쾅거릴 뿐. 이선규와 내 관계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정은호는 ‘잘 따랐던 오빠’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도 여전한,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야 하는데…….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은호 오빠 여기 왔어요?”
“어? 아……. 응. 왜? 봤어?”
눈이 마주쳐버렸기 때문이다. 시상식 VIP석에 동료 배우들과 함께 거만하게 앉아 있던 정은호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댔다. 머리는 많이 짧았지만, 여전히 멋진, 아니 한층 더 남자다워지고 멋있어진 그런 정은호가 까만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초대 받고 온 걸 거다. 시상자로 참여하겠지. 최고의 톱스타 정은호, 그가 옴으로써 시상식의 가치는 몇 배로 더 뛸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건 다 필요 없다. 거의 2년 만에 보는 그를 보는 내 심장이 정말 멈출 것 같다는 거, 그것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아니, 더 중요한 건……. 여전히 나를 보는 그의 눈은 차갑게 식어있다는 것일지도. 아니……. 아니, 정말 중요한 건……. 1초도 안지나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는 그 잔인한 현실일지도.
“정은호 곧 제대하잖아. 그 전에 휴가 나온 건데, 재희야? 한재희? 너 울어? 야.”
다시 한 번 내게 고개를 돌린 정은호의 입가엔 비릿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멀리 있는 그였지만 난 명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제대가 얼마 남았는지도 잊고 있었던, 그러면서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했던 나를 향한 비웃음이었을 거다.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그 순간.
“신인상 주제에 좀 길게 말씀드린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부를게요. 제게 기댄다고 말하지만, 알고 보면 제가 기대고 있는, 정말인지 예쁘고 소중해서 다가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한재희. 이 상 너한테 바치는 거야!!! 고맙다, 내 옆에 있어줘서!!!!!!!”
신인남우상 트로피를 손에 쥔 선규가 활짝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정은호의 비릿한 비웃음과 선규의 활짝 핀 미소가 머릿속에서 교차되면서 난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와 나를 조심스럽게 사랑해주는 남자. 그리고 양쪽을 다 놓을 수 없는 이기적인 미친년 하나.
(+)
8편입니다.
이제 극에 전개가 좀 생기겠네요.
음, 꼬릿말 조~~~~~금만 더 많아지면 3편 정도 폭탄 한 번 쏠게요!
부탁드려도 되죠?
조금만 욕심부려볼게요!! 얍 -ㅅ-
첫댓글 아아악 둘다 너무 좋아서 어느커플을 응원해야될지도 모르겠어요 ㅠ.ㅠ
ㅠㅠ 은호랑 재희 다시 잘될줄 알았는데; 은호 냉정한건 역시나.. ㄷㄷ 선규도 좋긴하지만 그래도..은호가 쪼끔더..ㅋㅋㅋ다음편 기다릴게요! 폭탄 .. 쏘실거져??ㅎㅎ
재밌어요!!!
선규에 재희가 안되면 나라도 혹시 ??
괜히 슬프고 맘아푸지만. 다들 행복하게해주세요ㅜㅜ
오늘 처음부터 봤는데 되게 재미있네요!!~~~폭탄폭탄 원해요!!
아정말너무재밌요
폭탄원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