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군자란 문질이 빈빈(文質彬彬)해야 한다 하였다. 즉 형식에 대해 내용이 없으면 여성을 진실하지 않은 목적으로 유혹한다고 하는 것만 번지르르한 제비? 같은 사람이 된다거나 또는 사기꾼 같이 된다거나 또는 탐관오리 같이 된다는 것이고, 내용에 대해서 형식이 없으면 진실한 인정은 있지만 학문이 부족하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곳에 진실한 인정을 반영할 수 없는 투박한 시골사람같이 된다거나 감언이설에 뇌화부동하는 어리석은 군중과 같이 된다거나 예절을 모르고 예의가 없는 무식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사회를 이끄는 리더의 중용의 인격으로서 군자(오늘에 있어서는 民主시민)란 형식과 내용을 잘 어울리게 갖추어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라 하겟다.
불교에서는 이 문질빈빈을 중도의 열반으로 깨달음에 대하여 불타가 육사외도(六師外道)를 설파(說破)한 것과 같이, 용수가 파사현정을 설파한 것과 같이 먼저 사리를 분명하게 따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불교의 통합적으로 발전한 교리를 설하는 화엄종에는 진여자성(眞如自性)에 불변하는 것과 인연따라 생멸하는 2로 분류하고 있는데, 깨닫지 못한 중생은 인연따라 생멸하는 것만 알고 있다는 것으로, 불변하는 것과 생멸하는 것이 둘이 아닌 성과 상의 원융(性相圓融)을 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성상원융의 중도의 경지를 깨달음은 생멸인연상의 현상계에 대하여 불변하는 본체를 깨달아야 가능하다고 하는데, 이를 화엄보살 52계위 차제(次第)에서 제8 부동지(不動地)를 깨달음으로부터 제9선혜지가 나타나게 되고 제10 법운지와 등각 묘각이 순서대로 차례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유식종의 원성실성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의 여래4지의 논리와 여래장사상 등을 토대로 하는 이론인 것이다.
불교는 이론 뿐만 아니라 유교나 도교나 기독교 등에는 없는 깨달음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수행법을 가지고 잇는데,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자신으로부 자신의 영원<불변>하는 마음의 자성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염불 참선 등의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불변>의 뜻은 "없다."와 "없다는 그것이 있다."라는 양방면에 대해서 유마경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곳에서 논란의 주제가 되어 왔었는데, 불교교리가 필경 말이 아닌 깨달음의 실천수행을 위한 근거를 이치적으로 설하는 것이라고 볼 때에,
초조 달마에서부터 6조 혜능에 이르러 조사선의 선수행논리를 체계적으로 완성한 조사선에서는 무(無)심(心)과 무(無)념(念)이 대표적인 선실천 이념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또한 마음이 없다 상념이 없다 아니면 없는 것이 있다 로 문제가 제기 되었었다.
선실천에서 이 두 가지의 대표적인 것이 묵조선과 간화선의 차이가 되는데. 묵조선은 그냥 무(無)에 묵묵히 계합한다. 라고 하고, 간화선은 의문으로 모든 분별을 괄호 속에 넣은 의식의 무분별 상태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무분별의 분별은 없다는 것이 있다 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묵조선은 두 눈을 꼭 감고 없다는 칠통 속으로 들어 가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간화선은 눈을 감는 일이 없으며 6근을 열어 둔체 무분별을 체험하는 논리를 가지는 수행방법인 것이며. 이로 하여금 일상의 행주좌와어묵동정에서도 무분별지를 중도로 닦을 수 있는 수행방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참선수행의 발전과정을 살펴 볼 때에, '없는 것' 또는 '없는 것이 있다.' 라고 하는 불변과 중도의 종파에 따른 해석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말 따라서 더 이상 시시비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하겠다.
만약에 불변의 뜻을 바르게 알고자 한다면, 다만 잠깐이라도 화두를 간하는 참선을 중도로 실천하여 그 참 뜻을 자증해 보거나 아니면 불교를 깨달음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반성해 보는 것이 보다 더 바른 공부인의 자세가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세외님 성불하소서._()()()_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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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