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팔 끓고나서 4분간』
정우련 소설집
정우련|240쪽|국판 변형(135*205)|978-89-6545-628-5 03810|15,000원
발행일 : 2019년 9월 30일
분류 : 소설 > 한국소설
“팔팔 끓고 나서 4분이 지나면 다 사라질 거야.
삶도, 사랑도.”
다 자라지 못한 마음을 끌어안고
끓는점을 서성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작가 정우련의 두 번째 소설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이 출간됐다. 『빈집』 이후 16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으로 오랫동안 공들여 집필한 단편들이 모였다. 전작 『빈집』에서 유년시절 가족과 집을 소재로 가족 균열의 모습을 담담히 드러냈던 정우련은 이제 시선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각 소설에 단단한 깊이를 더한다.
정우련의 소설 속에서 화자의 시선은 다양하다. 화자는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일 때도 있으며, 때론 남편과의 끊임없는 언쟁에 소모감을 느끼는 중년의 여성이기도, 친구 앞에서의 모습이 전부인 청소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모두 팔팔 끓거나, 끓었거나, 끓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삶과 사랑에서의 4분의 의미와 무용함을 되새긴다.
가장 뜨거웠던 시간 후에
뭉근한 삶의 궤적을 돌아보다
표제작 「팔팔 끓고 나서 4분간」은 대학 강사와 수강생 ‘나’의 만남을 통해, 뜨겁지만 4분이 지나면 그뿐인 사랑의 덧없음을 그린다. ‘나’와 ‘그’는 폭력에 대한 아픔을 공유하며 깊은 사이가 되지만, 사랑은 점점 식어간다. 소설은 점차 바래가는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요양병원에서 연명하는 아버지의 삶을 교차한다. 아버지의 삶은 ‘4분 후’로 비유되며, 빛나는 시간이 지나버린 삶에 대한 쓸쓸함을 되뇌게 한다.
이런 정우련의 삶에 대한 무거운 시선은 「처음이라는 매혹」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서 살아가는 88세 독거노인의 어느 하루를 그린다. 노인은 권태에 찌든 채 이제 본인에게 남은 매혹적인 순간은 죽음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나’는 노인의 권태를 들여다보며 나의 삶을 관조한다. 「통증」은 전쟁의 상흔을 몸속에 품고 있는 조각가 남편을 바라보는 소설가 아내 ‘나’의 이야기이다. 둘은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오던 사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결국 서로를 연민하는 동시에 증오하게 된다. 이렇게 정우련은 뜨거웠던 순간이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네며, 독자에게 각자의 삶의 궤적에 대해 반추하게 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아픔을 긍정하며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태도
정우련은 전작에 이어 유년기의 ‘성장’에 주목한다. 「말례 언니」는 이웃집 가사도우미 말례 언니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는 초등학생인 ‘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말례 언니의 불안한 삶을 관찰하는 ‘나’는 그 과정에 얽혀 비극을 겪지만 결국 성장한다. 「까마귀 길들이기」에서 역시 사춘기 소녀들의 아픈 통과의례와, 그 후의 성장 과정을 이야기한다.
한편 유년기의 성장을 반추하며 ‘지금’의 시선에서 나의 성장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우리들」에서는 B여상 동창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여상 시절을 회상한다. ‘우리들’은 어느덧 다 성장하여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외롭고 거칠었던 성장기도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처럼 정우련 작품 속의 인물은 성장과정과 성장 이후의 시기에도 어두운 현재를 지나지만, 늘 빛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정우련을 이를 통해 아프지만 가능성 있는 성장의 힘을 이야기한다.
흑색과 백색의 무미건조한 삶 속에서
와락 얼굴을 묻고 싶은 촉촉한 작품들
마지막 작품 「만선」은 실화를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이다. 소설은 1982년 인도양에서 참치잡이 만선을 하고 돌아오던 중 96명이 탄 베트남 난민선을 만나 그들을 구조한 선장의 이야기를 전한다. 베트남 난민을 외면하라는 정부와 회사의 지시를 거부한 선장의 내면적 갈등을 공유하고, 96명의 생명을 구한 일을 ‘만선’이라고 본 선장에 대한 외경심을 이야기한다. 정우련의 소설에서는 이처럼 건조한 삶을 버텨내는 촉촉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삶에서 ‘4분’의 쓸쓸함을 말하지만 결국 삶을 긍정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또한 단편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풍부한 주변 인물의 설정에서,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돋보인다. 작가는 결국 4분 뒤에 남는 것은 사람이며, 그들은 때로는 어깨를 내어주고, 울고, 웃음 지으며 ‘함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작가가 건네는 일곱 편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친구와, 가족의 4분을 들여다본다.
첫 문장
그들은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출발할 때는 그녀가, 휴게소를 두어 번 지나서는 그가 운전대를 잡았다.
책속으로 / 밑줄긋기
p.14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어디서부턴가 자신이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어떻게 되짚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갱년기와 함께 느닷없이 찾아온 그 느낌은 흰옷에 남은 묵은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도무지 문장이 되지 않는 지옥 같은 날들. 숨길 수 없는 것이 어디 감기와 사랑뿐일까. 소설가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도 금방 탄로 나고 마는 일 중 하나였다. 그녀는 초조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하지만 잠들지 못하는 밤에 책상에 앉는다고 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도 호소할 길 없는 피로감이 쌓여갔다.
p.16 나무에 결이 있듯이 돌에도 결이 있다구. 어떤 물질이든 결을 거스르지 않고 깨나가야 스스로 제 몸의 긴장을 풀지. 몸을 열고 긴장이 풀린 돌을 깨는 거야 두부 자르기보다 쉬운 일이야. 남들은 그 큰 돌을 어떻게 깨냐고 놀라지만 알고 보면 다 요령이 있는 거라구.
p.176 물이 끓기 시작해서 4분 후면 계란이 알맞게 익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끓고 나서 4분 후면 끝이라는 거. 그다음은 잡지의 부록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란 생각이 들더라. 그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또 내일과 같은 그런 반복이거나 연명에 지나지 않는 삶이잖아.
p.181 엄마는 해 질 녘이면, 누군가 내다 버린 의자를 기운 누더기 같은 다 쓰러져가는 집 앞에 갖다 놓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곤 했다. 어딘가 이승 저 너머에 가 있는 것 같던 그 공허하고 외로운 눈빛. 살짝 취해서 비칠대며 골목을 걸어 들어오던 노인의 입가에 걸려있던 어딘지 민망해하는 듯 권태가 묻어나던 희미한 웃음. 이상하게도 그런 모습들이 떠오르면 울컥 울음이 치밀었다. 가난과 죽음이 잠복해있는 도시의 뒷골목으로 흘러들어 온 노인에게서 문득문득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p.184~185 그러고 보면 요즈음 들어 엄마는 말끝마다 ‘생전 처음’이란 말이 입에 붙었다. 독감이 나아서 퇴원한 뒤부터는 유독 더 그랬다. 늘 먹던 음식인데도 생전 처음 먹어본다고 감탄하거나, 약 먹을 시간을 놓쳐서 통증이 느껴지면, 세상에 이렇게 아프기는 생전 처음이라고 쩔쩔맸다. 이리 땐땐하고 맛있는 감은 생전 처음 먹어본다거나, 봄도 아닌데 딸기를 먹어보기도 생전 처음이라든가, 자주 꾸는 연탄불 피우는 꿈을 꾸고 나면 그리 불이 안 붙기도 생전 처음이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우련
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문단에 나온 이후 「자수정 목걸이」로 2000년 제5회 부산소설문학상을, 소설집 『빈집』으로 2004년 제4회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2017년 끝에 산문집 『구텐탁, 동백아가씨』를 발간한 뒤 비로소 소설 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차례
통증
까마귀 길들이기
우리들
말례 언니
팔팔 끓고 나서 4분간
처음이라는 매혹
만선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