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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3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루카 8,16-18
성경 말씀을 더 깊게 이해하고 깨닫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고 하시며, 반드시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인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며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만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성경의 앞뒤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앞에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말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뒤의 내용은 진정한 당신의 참 가족은 당신의 핏줄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씨가 우리 안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내용 안에서 이 부분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때문에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더 많은 은총을 받으려면 열매를 맺으려 해야 합니다.
그 열매는 길과 같지도 않고 돌밭과 같지도 않고 가시밭과 같지도 않아야 맺힐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세속-육신-마귀, 곧 탐욕과 성욕, 교만을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읽어야만 그 깨달음이 있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는 5세기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약 17년 동안 깊은 죄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12세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매춘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회심은 여전히 죄 많은 삶을 살면서 군중을 따르려는 호기심과 열망으로 예루살렘 순례에 합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 현양 축일에 성 십자가를 공경하기 위해 무덤 성당에 들어가려 했으나 초자연적인 힘이 그녀의 길을 막았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 끝에 마리아는 자신의 죄악된 삶이 자신을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깊은 통회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성당 밖에 서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이콘을 바라보며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를 존경하게 된다면 회개하고 자기 삶을 바꾸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기도 후에 그녀는 저항 없이 교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심오한 회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전례 중에 루카 복음에서 이 말씀을 듣고 그녀는 깊은 회개를 경험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그녀는 앞서 자신이 기도했던 이콘 앞에 돌아가서 감사기도를 올리고 이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요르단을 가로질러 세례자 요한이 살았던 광야, 즉 예수가 세례 받은 곳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찾아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그 즉시 광야로 들어가 이후 47년을 세례자 요한처럼, 야생의 열매를 먹으며 속죄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기간에 그녀는 극심한 유혹과 육체적 어려움을 견뎌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전생에 대한 기억과 음식과 위안의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기도와 말씀 묵상, 금욕으로 이러한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생애 말년에 요르단 근처 수도원에 살고 있던 성 조시마(Zosimas)라는 수사를 만났을 때 알려졌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막에서 거룩한 은수자를 찾던 조시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그녀의 무식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신성함과 성경 지식에 놀랐습니다.
그녀는 성경에 대한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암기했습니다.
마리아는 조시마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성체를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1년 후 조시마가 성체를 모시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고, 조시마가 그녀를 묻어 그녀의 거룩함을 확인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세.육.마.에서 자신을 이기려는 이들에게 깨달음과 빛을 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정원에 앉아 있을 때 근처 집에서 라틴어로 "Tolle, Lege", 곧 "집어서 읽어라." 라는 문구를 부르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근처에 있는 성경으로 달려가서 무작위로 펼쳤고, 그의 눈은 로마서 13,13-14의 한 구절에 머물렀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3-14)
이 말은 번개처럼 아우구스티노의 마음을 강타했습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 순간을 즉각적인 명확성과 확신의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그 순간 이전의 삶을 버리고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른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해박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도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라는 말로 완전히 바뀌었고,
성 프란치스코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로 완전히 변화되었으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미지근한 삶에서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0)
라는 말로 바뀌기 지작하였습니다.
모든 말씀이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게 만드는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들로 자기를 변화시키려 할 때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을 읽는 방식이고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방식입니다.
자신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사랑이 많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지향으로 읽어야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수준에 따라 항상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3일 [피에트랄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복음: 루카 8,16-18
기적이나 환시, 특별한 체험, 그거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열심한 교우들 가운데, 기적이나 환시,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 뵐 때마다 꼭 말씀드립니다.
“그거 결코 좋은 것 아닙니다.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아주 예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그런 현상을 허락하십니다만, 그로 인한 기쁨과 황홀함은 한순간 뿐입니다.
그 뒤로 남게 되는 것은 혹독한 고초와 오해, 편견과 십자가 길입니다.
그걸 묵묵히 감수해야만 하는 긴 여정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딱 그러셨습니다.
그분은 사제가 된 지 1년이 지난 1911년 9월 7일부터 몸에 예수님의 오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구름처럼 비오 신부님에게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비오 신부님은 매일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새벽 1시부터 몰려와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성당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에게 발생한 특별한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은 관구는 1919년부터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습니다.
정말 괴로웠던 일 한 가지는, 안 그래도 오상으로 아프고 쓰려 죽겠는데, 의사들은 상처 위아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상처 내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비오 신부님은 천상의 비밀이 모독당하는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1923년부터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일체의 편지에 대해서도 답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비오 신부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3천여 명의 신자들이 격렬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오 신부님은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고, 고백성사도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당국이 비오 신부님에게 허락한 것은 오직 미사와 고백성사뿐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미사와 고백성사를 온갖 정성을 다해 집전했습니다.
1시간 넘게 지속되는 미사는 늘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보통 사제들은 1분도 채 안 걸리는 거룩한 변화의 기도는 5분 이상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기도를 드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집전하신 미사에 참석했던 한 사제는 ‘머리털 나고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본당으로 돌아간 그 사제는 자신이 봉헌했던 성의 없던 미사에 대해 크게 반성하면서, 지극정성을 다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답니다.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비오 신부님께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오상을 똑같이 받았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그의 생애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카푸친 수도자로서 보여준 무조건적인 순종과 한없는 겸손의 삶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으로 인해 숱한 오해와 중상모략을 받으면서 깊은 수도원 안에 유폐되곤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교회에 대한 신뢰, 장상에 대한 순명의 강도는 점점 더 커져만 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강론>(2024. 9. 23. 월)(루카 8,16-18)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신앙의 증언은 ‘말’보다 ‘삶’으로 먼저 해야 합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6-18).”
1) 이 말씀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등불’과 ‘빛’은 예수님의 복음을, 또는 그 복음 말씀대로 사는 ‘신앙인의 삶’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는 “너희는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지도 말고, 침상 밑에 놓지도 마라.”이고, “복음을 감추지 마라.”, 또는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마라.” 라는 명령입니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는 “너희는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하여라.”이고,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는 “신앙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복음을 감추지 말고 알려라.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명령을 잘 새겨듣고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신앙을 증언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신앙이 강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그 길을 더 잘 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선교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금방 체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숨기면, 결국에는 신앙을 잃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복음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기도하지도 않고, 선교활동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냉담’ 상태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17절의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를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읽으면, “너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가 올 텐데, 그때가 되면 ‘복음 전하는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받을 몫’이 없다.”로 해석됩니다.>
2) 선교는 교회의 설립 목적이고, 모든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신앙인의 임무는 복음을 전해 주는 것까지입니다.
그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은 신앙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집’은, 사도들과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뜻하고, ‘마땅하지 않은 집’은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이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을 뿐이고, 사도들과 선교사들의 책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3)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인 자신이 믿는 대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는 사람은 신앙을 증언할 수도 없고, 남에게 믿으라는 권고를 할 수도 없습니다.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이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4-47).”
여기서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라는 말은, 당시의 신자들이 ‘말’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 아니라 ‘삶’으로 감화시켰음을 나타냅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의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박해 때문에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꾸준히 신자 수가 늘어났던 것은,
‘신앙인들의 삶’이 조선 백성들을 감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모진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디면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그 모습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되었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인답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말’만 잘하는 사람보다 선교활동을 더 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은 잘하는데 ‘삶’은 신앙인답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