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의 원혼을 달래며 정조를 기리는
아랑각(阿娘閣)
경남 밀양시 내일동 39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원혼을 달래는 사당이다.
영남루의 아래에 자리한 아랑각,
그 전설을 들어본다.
아랑사(阿娘祠,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6호)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수가 없다.
고종15년(1878년)에 밀양부사로 재임한 연서 신석균의 영남루 재영(題詠)에 노승원(老僧院)과 열녀사(烈女祠)라는 단편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을뿐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밀양사람들은 아랑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남루 아래 대나무 숲속에 사당을 세워 아라의 혼백을 위로하고 있었다. 지금의 아랑각은 제향을 올릴수 있는 사당으로 재건한 것으로 1963년 육영수여사가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부탁해 그림을 그려 넣었다. 해마다 음력 4월 16일이면 열리는 아랑제향은 밀양아리랑 축제를 통해 선발된 모범 규수들이 제관이 되어 제를 올린다.
아랑의 슬픈 전설, 아랑의 혼백을 달래주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 아랑사(아낭사),
1930년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정순아랑지묘(貞純阿娘之碑)'라는 묘비를 세우면서 비각을 지어 아랑각이라 불렀다. 이 후 1965년 낡은 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맞배지붕의 정면3, 측면1칸의 사당을 짓고 삼문의 정문인 아랑문을 중창하였다.
영남루에서 아랑각으로 내려가는 길에 오른편으로는 대숲이 강바람을 맞으며 사각거리고 있으며, 아랑문의 옆으로는 육중한 배롱나무가 버티고 선다. 아랑사는 그 보다 높은 계단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아랑문에 들어서 바로 좌측으로 중문이 하나 놓이니 대숲의 사이길을 오르면 '아랑유지(阿娘遺址)'라는 비석이, 정문의 오른쪽 한단위에는 '정순아랑지비(貞純阿娘之碑)' 가 있다.
아랑사에 들어서면 중앙에 아랑의 초상이, 좌우로는 설화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 해 놓았다.
아랑각(阿娘閣),
이곳에는 마치 전설의 고향같은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른바, '아랑형전설(阿娘形傳說)'이라 말하는 것으로 원한 맺힌 귀신의 이야기를 일컫는다.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원령설화(怨靈說話)'가 전해지는 바와 같은 것으로 해석이 된다. 한 여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간의 세계를 떠돌며 복수를 꿈꾸다가 복수를 하고 원한을 풀어 자신의 세계로 간다라는 대략적인 내용,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이야기는'장화홍련전'이 그렇고, 중국의 '해랑전설'과도 비슷하다. 이러한 류의 이야기는 대한민국땅, 팔도 전국에서 떠 돌고 있다. 그러한 아랑형의 전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밀양의 아랑각에 전해내려오는 것으로,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약 400여년전, 조선 중기 명종때의 일이다.
아랑의 성은 윤(尹), 이름은 정옥(貞玉)이었는데, 그녀는 아버지가 영남땅의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함께 밀양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 정옥은 재색을 겸비한 뛰어난 미모로 인근의 총각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는데,
그 중 관아의 관노였던 통인 백가(通引 白氏)가 자신의 신분을 잊은채 정옥을 흠모하게 되었다.
정옥을 볼수록 욕정은 더해져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정옥의 유모를 매수하여 유인해내기로 한다. 어느 달 밝은 밤, 유모는 정옥에게 달구경을 가자며 영남루로 데리고 나오는데 성공하였고, 영남루의 기둥 뒤에서 통인의 인기척이 들리자, 소피를 보러 간다며 자리를 뜨게 되었다. 홀로 남은 정옥을 확인한 백가는 정옥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 하였으나, 정옥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고, 이내 화가난 백가는 강제로 정옥을 품으려 덤벼들었다. 그러나 정옥의 거센 반항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숨겨 두었던 비수를 꺼내들어 정옥의 목에 칼을 꽂게 되었다. 놀란 백가는 정옥의 시신을 영남루 아래의 대숲속에 숨겼다.
이튿날,
졸지에 딸을 잃은 윤부사는 백방으로 딸을 찾았지만, 아무리 수소문을 하여도 찾을 수 없었고, 때마침 통인이 이르기를
"소문에 의하면 아씨가 어느 남정네와 야간도주 했다"며 거짓을 고하게 된다. 이에 크게 노여워 하며
"이는 가문의 수치인지라 더이상의 나랏일을 할수 없으며 불상사가 일어 났으니 근신하리라."며 그날로 밀양땅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신임부사가 부임하는 첫날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원인을 알수 없는 시체로 발견이 되는 기괴한 일이 발생한다. 그 다음 부사도 그러했으며, 그 다음의 부사도 마찬가지였다. 밀양땅에 발을 들여 놓으면 하루도 살지 못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누구도 밀양부사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건장한 청년 하나가 죽을 때 죽더라도 태수한번은 해보고 죽자라는 심정으로 밀양부사를 지원하니 이가 이상사(李上舍)라는 사람이었다.
부임 첫날, 그날 밤에 촛불을 켜두고 책을 읽고 있는데, 음산한 바람이 불며 문이 저절로 열리니 밖을 보니 머리를 풀어해치고 목에 칼을 꽃은 여귀가 나타났다. 그는 놀랐으나 두려워 하지 않고 침착하게 여귀에게 묻기를
"네가 그동안의 신임부사를 죽인 귀신이었느냐?"
"사또, 소녀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옵소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부사는 그 사연이 궁금하여 자초지정을 물으니 여귀의 억울함을 알고
"너의 억울함을 풀어 줄터이니 그가 누군지 말하라" 하였다.
"내일 아침 관속들을 모아 점호를 하실때, 제가 횐나비가 되어 그의 상투위에 앉겠나이다"하더라.
다음날 아침 관아의 모든 관속들을 모아 놓고 점호를 할때, 횐나비 한마리가 날아와 통인 백가의 머리위에 앉았다. 이를 본 부사는 그를 끌어내어 치도곤을 치자 통인은 사실을 실토 하였으며, 영남루 아래 대밭을 파헤치니 과연 썩지도 않은 젊은처자의 시체가 묻혀있었다. 신임부사는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고 그 자리에 아랑각을 지어 그녀의 원혼을 달래 줌으로 밀양땅은 예전의 평화로움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관아에도 더 상의 혼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의 전설일수도 있으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 설화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간관직에 머무는 자들이 항상 문제다. 통인(通引)이란, 수령의 관노로 지방관아에서 관물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던 자들이다. 이들의 부정부패는 실로 엄청났었다 전한다. 백성들의 세금격인 곡물을 중간에 가로치기도 하였으며, 사또의 도장을 함부로 남용하여 자기이익을 챙겼다 한다. 그러고 보면 비록 사또의 딸일지언정 제가 못할일이란 없다고 생각한 생각에서의 발단이었을것이란 것이다. 한 나라의 군왕이 아무리 옳은 정치, 대민정치를 한다해도 그 아래의 수장들의 생각이 제 주뎅이만 생각하고 있다면 나라꼴을 개판인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그 보다도 심한 상태로 군왕마저도 자기배에 굶주려 제 살까지도 갉아먹을 기세이며, 그 아픔을 남에게 물어 죄를 덮어 씌우니 참으로 통탄스럽기만 하다.
가까이 밀양강의 물길이 시원하게 내려 가는 강변에 자리한 아랑각,
억울한 죽음에 대한 혼백을 위로하고,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여인, 정옥의 혼백이 담긴 사당이다. 어찌 되었건 전설이던 설화이건 믿음의 가부는 본인들이 결정할 일이지만, 혼령을 기리는 전각앞에서는 잠시만이라도 숙연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랑사(阿娘祠, 도유형문화재 제26호)
by 박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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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랑각의 이야기 전설등 그리고 아랑각의 모습등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따스한 댓글에 감사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