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574]이산해7절-증승(贈僧)
증승(贈僧)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南湖昨夜解春氷 남호작야해춘빙
楮島晴波接廣陵 저도청파접광릉
待得巖花紅映水 대득암화홍영수
扁舟歸去喚林僧 편주귀거환림승
지난 밤 남호에 봄 얼음이 녹으니
저도의 맑은 물결이 광릉에 닿았구나.
바위틈 붉은 꽃이 물에 비치거든
조각배 타고 돌아가 숲 속 중을 부르리.
원문=鵝溪遺稾卷之四後集 / 露梁錄
贈僧
露石投竿坐。仙臺策杖登。
風沙春作霧。水月夜明燈。
跡逐漁樵伴。心如粥飯僧。
今年倍衰謝。瘦骨轉稜稜。
隔水禪宮鎖夕霏。廣陵春浪碧參差。
只今人世無靑眼。爲問僧中有舊知。
南湖一雨解春氷。楮島晴波接廣陵。
待得巖花紅映水。扁舟歸去喚林僧。
중에게 주다.
솟아난 반석에 앉아 낚싯대 던지고 / 露石投竿坐
빼어난 대에 지팡이 짚고 오르노라 / 仙臺策杖登
봄철 모래 바람은 안개처럼 뿌옇고 / 風沙春作霧
물에 비친 달은 밤중에 등을 밝힌 듯 / 水月夜明燈
자취는 어부와 나무꾼 따라 어울리고 / 跡逐漁樵伴
마음은 죽과 밥만 축내는 중과 같아라 / 心如粥飯僧
올해에는 곱절이나 늙고 쇠약하여 / 今年倍衰謝
여윈 뼈가 더욱더 앙상하게 드러났네 / 瘦骨轉稜稜
물 저편 절간엔 저녁 부슬비 자욱한데 / 隔水禪宮鎖夕霏
광릉의 봄 물결이 푸르게 출렁이누나 / 廣陵春浪碧參差
지금 세상엔 반겨 맞아 줄 이 없으니 / 只今人世無靑眼
묻노라 승려들 가운데 친구가 있느뇨 / 爲問僧中有舊知
남호에 한줄기 비 봄 얼음을 녹이니 / 南湖一雨解春氷
저도의 맑은 물결이 광릉에 닿았구나 / 楮島晴波接廣陵
바위틈에 붉은 꽃이 물에 비치거든 / 待得巖花紅映水
조각배 타고 돌아가 숲 속 중을 부르리 / 扁舟歸去喚林僧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1997
이산해(李山海,1539,중종34∼1609,광해군1)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이지함(李之菡)의 조카다.
1561년(명종16)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가 되고 왕명으로 경복궁 편액을 썼다.
1563년 저작으로 사가독서 하고, 이듬해 수찬, 정언을 지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이조정랑, 응교, 전한을 거쳐,
1570년 동부승지, 1572년 이조참의, 대사간이 되고,
1575년 부친상을 당했다. 1577년 대사성, 도승지가 되고,
1579년 대사헌, 병조참판이 되었다. 1580년 형조판서,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고, 1583년 우찬성에 올랐다.
다음해 이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고,
1585년 좌찬성, 1588년 우의정에 올라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해 좌의정,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의 표문을 지은 공으로
아성(鵝城)부원군이 되었다.
이듬해 정철(鄭澈)이 왕세자책봉 문제를 일으키자 탄핵케 하여
강계로 유배시키고, 윤두수를 비롯하여 서인들을 몰아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을 호종하다가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평해(平海)에 유배되었다. 1595년에 풀려나서 영돈령부사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9년 영의정에 다시 올랐다.
저물녘에 밖으로 나감 (暮出)
바닷가 바람은 자고 해는 노을에 잠기어 물가 우거진 갈대가 저녁 이슬에 젖네.
여윈 말을 거꾸로 타고 모랫길은 멀어 깊은 밤 밝은 달 아래 어가에서 자노라.
海天風定日沈霞 蒲葦洲邊夕露多 瘦馬倒鞭沙路迥 夜深明月宿漁家 (箕雅 卷3)
이 시는 그가 평해(울진)에 귀양 가서 1593년 5월에 지은 칠언절구로
가(歌)운과 마(麻)운을 통운하였다.
그는 <아계유고(鵝溪遺槀)> 기성록(箕城錄) 발(跋)에서
“문장은 작은 재주이고 시는 문장에 대면 더욱 말단 여기(餘技)다.
시에 비록 공교해도 군자는 능사로 여기지 않는다.
하물며 공교하지 못한 바에야.
(李山海, 鵝溪遺稾 卷2, 箕城錄 跋.
文章一小技也 詩於文章 又其緖餘 詩雖工 君子不以爲能 況未工乎.)”라고 하여
스스로 시에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그러나 훗날 자손을 위해
전날 수창한 것을 모아두었으나 병란에 모두 타버리고
평해에 귀양 온 이후에 지은 것을 모았다고 하였다.
이 시는 그의 귀양 생활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마치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전원생활을 읊은 듯하다.
기구와 승구는 저물녘 바닷가의 풍경이다.
노을에 물든 하늘과 저녁 이슬에 젖는 물가의 갈대를 보여준다.
전구와 결구는 시인의 행동이다. 달 밝은 밤 해변의 모랫길에서
말을 거꾸로 타고 한가롭게 다니다가 어느 어부의 집에서 잔다고 하였다.
사실의 직서이지만 여유롭게 그려낸 풍경과 행동에서
귀양지의 상황을 보여준다기보다 전원생활을 묘사한 듯한 느낌을 준다.
작은 객점 (小店)
대숲과 띠풀에 덮인 작은 객점, 남은 생애를 동해 바닷가에서 보내네.
한밤중 나뭇잎은 바람에 떨어지고 시월의 비는 온 산에 내리는구나.
도성을 떠날 때 넋을 어디에 부칠까, 집이 없어 꿈결에도 돌아가지 못하네.
요즘 와서 옷소매가 무거운 건 눈물 닦은 자국이 많아졌기 때문이네.
小店篁茅裏 殘生嶺海間 三更風落木 十月雨連山
去國魂何托 無家夢不還 邇來衫袖重 添得淚痕班 (箕雅 卷6)
이 시는 1593년 가을에 귀양지 평해에서 지은 오언율시로 산(刪)운이다.
귀양객의 쓸쓸한 심정과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아계유고>와 <대동시선>에는 미련의 끝 글자가 “얼룩(斑)”으로 되었다.
수련은 자신의 귀양 사는 정경이다.
대관령을 넘어 동해 바닷가 평해의 작은 객점에 몸을 붙이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함련은 쓸쓸한 가을밤을 그린 것이다.
한밤중에 떨어지는 나뭇잎과 시월에 내리는 가을비는
좌절과 절망을 상징하는 상관물이다.
북인의 영수로 정국을 주도하다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하자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책임이 그에게로 돌아갔고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가게 되었던 것이다.
경련은 절망감의 절정이다.
임금이 파천한 평양을 떠날 때는 넋을 잃을 지경으로 황망하였고,
서울이 이미 왜군에 점령되었으므로 돌아갈 집도 없어져 버려서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음을 말했다.
미련은 연군지정(戀君之情)이다.
귀양지에서 심신을 추스르고 남은 생을 보낼 때
임금을 잘 보필하지 못하여 이러한 국난을 초래하였다는
자책과 회한으로 임금을 생각하는 정이 솟구침을 주체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물가에서 읊음 (江潭雜咏)
메밀꽃은 피고 들녘의 풀은 시드는데 다리 밑에 흐르는 물은 울며 감도네.
숨어사는 이는 지팡이 짚고 돌아가길 잊어 생각이 비단 같은 가을 산 사이에 있네.
木麥花開野草殘 橋頭流水咽鳴環 幽人倚杖忘歸去 思在秋山錦繡間 (箕雅 卷3)
이 시는 1594년 가을에 평해 귀양지에서 지은,
같은 제목의 네 수 중 셋째 수로 칠언절구 산(刪)운이다.
가을 풍경을 바라보면서 늙어가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 속에 귀의하고
싶은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기구는 계절감이다.
칠석이 지나 피어난 메밀꽃과 여름의 생기를 잃은 가을 풀을 읊어서
계절감을 표현하고 자신도 50대 중반에 이르렀음을 암유하고 있다.
승구는 냇물에다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 것이다.
다리 밑을 흐르는 물이 울며 감돈다고 하여 조정에 대한 미련과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내면의 갈등을 상관물에 이입시켰다.
전구는 자신의 모습이다. 귀양지에서 숨어사는 늙은이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현실로 돌아가기를 잊고 있다.
임란이 강화 국면에 들어가고 아직 전란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는 현실에 비켜서 있는 귀양객이었던 것이다.
결구는 자연에 귀의하고 싶은 소망이다. 한때는 정국을 주도했던
북인의 영수였지만 지금은 조용히 자연 속에 파묻히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였다.
선방 (禪房)
건물은 신라 때 지은 것이요 시내와 산은 예맥의 옛 땅이네.
어둑한 벽엔 글씨가 이끼에 덮였고 발에 가려진 사이로 나무가 섰네.
불전엔 향불의 재가 쌓이고 바람 부는 회랑엔 목어소리가 울리네.
포단 위가 너무 편안하니 하룻밤 묵고 오두막으로 돌아가야겠다.
棟宇羅朝舊 溪山濊貊餘 壁昏苔蝕字 簾礙樹承虛
佛榻堆香燼 風廊響木魚 蒲團上方穩 一宿當還廬 (箕雅 卷6)
이 시는 1594년 늦가을 귀양지 평해의 산사에서 지은 오언율시로 어(魚)운이다.
<아계유고>에는 미련 출구의 “편안하니(穩)”가 “따뜻하니(煖)”로 되었다.
귀양지의 절을 찾아 마음의 평화를 얻고 평담한 심정으로
절의 분위기와 자신의 상황을 풀어놓았다. 수련은 절의 내력이다.
신라 때 지은 절이라니 의상이 창건했다는 울진 불영사(佛影寺)가 아닌가 싶다.
절이 자리잡은 불영사 계곡은 옛날 예맥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함련은 절 주변의 모습이다. 이끼가 먹어 들어간 듯하게 암벽의 글씨는
분명치 않고, 절 난간에 가려진 발 틈으로 나무가 보인다.
경련은 불당 안의 모습이다. 불전에 피어오르는 향과 회랑에서
울리는 목어소리가 공감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미련은 절집 선방에서 느끼는 편안함이다.
그가 불교에 호감을 가졌던지 포단 위에 앉아 귀양살이의
고단한 마음을 평안히 다스릴 수 있는 안정을 얻고 있다.
그는 2년 반 동안의 귀양살이를 이렇게 자연 친화와 스님처럼
수양하는 마음으로 극복하였다고 하겠다.
중에게 줌 (贈僧)
지난 밤 남호에 봄 얼음이 녹으니 저자도의 맑은 물결이 광릉에 닿았구나.
바위틈에 붉은 꽃이 물에 비치거든 조각배 타고 돌아가 숲 속 중을 부르리.
南湖昨夜解春氷 楮島晴波接廣陵 待得巖花紅映水 扁舟歸去喚林僧 (箕雅 卷3)
이 시는 1603년 이후 만년에 노량진에 머물 때 지은
같은 제목의 셋째 수로 칠언절구 증(蒸)운이다.
<아계유고> 권4 노량록(露梁錄)에는
기구의 “지난 밤(昨夜)”이 “한줄기 비(一雨)”로 되었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1599년(선조32)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이듬해 사직하고 서울 근교의 여기저기에 머물면서
시를 짓는 한가한 생활로 돌아갔다.
이 시는 배를 타고 한강을 오르내리며 생활하는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기구와 승구는 이른 봄날 한강 동쪽의 풍경이다.
봄비에 얼었던 강이 녹아서 저자도 부근 남호에 맑은 물이
남쪽 광주 언덕에 닿았다고 하였다.
지금 강남구 청담동 앞의 한강 풍경이 아닌가 싶다.
전구와 결구는 꽃이 피면 강가 봉은사의 중을 찾아가겠다는 약속이다.
아마 시를 받는 상대방이 봉은사에 있는 스님인가 보다.
바위틈에 진달래가 피어 강물에 비치면 그때 조각배를 저어
강 건너 편 숲속에 있는 봉은사 스님을 찾겠다고 하였다.
벼슬을 내놓고 한강을 오르내리며 한가하게 노니는 그의 만년을 짐작할 수 있다.
우연히 짓다 (偶題)
강가에 쓸쓸히 사립 닫고 사노니 계절은 분분히 빨리도 바뀌는구나.
병은 친한 벗인 양 꾸짖어도 가지 않고 시름은 뜰의 풀같이 베어도 다시 자라네.
검은 구름 갈라진 사이로 가을하늘은 멀고 소나기 걷히니 저녁 산봉우리 밝아라.
본래 장한(張翰)이 벼슬길에 마음 없어 귀향할 생각은 순채국에 있었던 게 아니네.
索居湖外掩柴荊 節序紛紛遞送迎
病似親朋嗔不去 愁如庭草剗還生
碧雲坼處秋空迥 白雨收來暮巘明
自是季鷹無宦興 未應歸思在蓴羹 (箕雅 卷9)
이 시도 1603년 이후 만년에 노량진에 머물 때 지은 시로 칠언율시 경(庚)운이다
. <아계유고>에는 미련 대구의 “미(未)”가 “불(不)”로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서울 근처에서 병을 조섭하며 전원생활을 하는
여유로운 모습이 드러난다. 수련은 노량진에 은퇴하여 쓸쓸히
노년을 보내는 상황이다. 강가 오두막에 사립문을 닫고 사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
다. 함련은 병과 시름을 직유와 대구로 제시한 것이다.
병을 친한 벗에다, 시름을 뜰의 풀에다 비유한 솜씨가 아주 적실하다.
그는 1586년, 1588년, 1590년에 병으로 벼슬을 사양한 적이 있을 만큼
지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608년 2월에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처결했던 만큼 정치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서울 근처에 머물며 국정을 걱정했으므로 근심도 많았을 것이다.
경련은 비온 뒤의 풍경 묘사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구름 사이로 보이는
가을 하늘의 청명함과 저녁 하늘 아래 드러난 산뜻한 산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이런 풍경묘사 뒤에 국난을 겪은 후의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암시했다고 하겠다.
미련은 진나라 장한의 고사를 끌어와서 전원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진나라의 장한이 낙양에서 대사마의 동조연(東曹掾)을 지내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인 강동 오강(吳江)의 순채국과 농어회를 떠올리며
‘사오강가(思吳江歌)
’(張翰, 思吳江歌. 秋風起兮佳景時 吳江水兮鱸魚肥
三千里兮家未歸 恨難得兮仰天悲.)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고사를 말하고
그가 순채국이 생각나서 귀향한 것이 아니라
벼슬에 마음이 없어서였다고 했다. 자신도 그런 심정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