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9월13일 목.
[(백)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1코린 8,1ㄷ-7.11-13
복음 루카 6,27-38
◈ [서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2018년 나해 9월13일 목.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연수원의 식당에는 식탁에 꽃들이 있습니다. 작은 화병에 들의 꽃들이
다소곳이 반겨줍니다. 작지만 그 모습이 일상의 삶에 지친 이들을
품어주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들과 대화하면서 교회가 고령화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대도시에 있는 교회는 덜하지만 시골에
있는 교회는 고령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많이 나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 교구의 사제들이 함께
하니 더 깊이, 더 멀리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오늘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금구’라고 부릅니다. 강론을 잘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불러준
호칭입니다. 저는 강론에 관심이 많았고, 논문도 강론을 주제로
제출했습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론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강론 준비에는 4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강론의 주된 재료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을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하느님이 말씀을 선포하는 사제들의 강론을
듣고 싶어 합니다. 가수에게 중요한 것은 가창력이듯이, 강론의
핵심은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의로움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한적한 곳에서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항상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기교에 매달리게 되고,
기교는 깊은 감동을 주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시대의 상황’입니다. 허리가 아픈 사람은 허리를 치료해야
합니다. 머리가 아픈 사람은 머리를 치료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알기 위해서는 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현장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넷째는 ‘삶’입니다. 사제는 선포한 강론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비난하셨습니다. 말은 하지만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실천이 없는 믿음, 행동이 없는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컴퓨터 전문가가 가상의 세상에서 가장 성공하고, 번성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다고 합니다. 폭력과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방법,
시기와 모함을 전문으로 하는 방법, 남의 것은 빼앗고 괴롭히는 방법
그리고 평화와 화합, 용서를 전문으로 하는 방법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수백 번 게임을 했는데 늘 결과는 같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폭력과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성공하고
이기는 것 같았지만 최후의 승리는 언제나 ‘평화, 화합, 용서’를 하는
프로그램이 차지하였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들어도 결과는 같았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스스로는 생명체를 유지할 수 없는 생물과 미생물의
경계선에 있는 개체하고 합니다. 생명체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면
살아갈 수 있지만, 숙주인 생명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인체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다행히도 많이 전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바이러스가 ‘너죽고 나죽자’라는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이러스를 전파할 숙주인 생명체가 바이러스에
의해서 죽어버리기 때문에 널리 퍼질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숙주인 생명체에 살면서 피해를 거의 주지 않는 바이러스는 널리
퍼지게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숙주인 생명체에 도움을 주는
바이러스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갈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공생’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인생의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고, 그 길이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했던 사람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 방법만이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베푸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나와 내
가족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원망, 분노, 미움은 사라지게
될 거라고 합니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체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느님은 [따라쟁이]신가 봐요
2018년 나해 9월13일 목.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6~37)”
남을 내가 심판하면 하느님은 나를 심판, 내가 남 단죄하면 나를 단죄.
내가 남을 용서하면 하느님도 나를 용서하신다니 꼭 따라하신다는군요.
하느님은 [따라쟁이]신가 보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행동방식말예요.
기도 때 뭘 해주세요 청하면서 생각해보니 혼자 ㅋㅋㅋ 웃음 나오네요.
하느님도 네가 먼저 내게 해 주렴 그럼 나도 해줄 건데 그게 순서니까.
달라하고 빌고 청하기만 하니 하느님아빠가 우릴 점점 멀리 미셨겠죠.
설교활동 중 욕심에 찬 그리스도인 누구나 잘못 지적하다 유배 중
사망. 크리소스토모 성인주교처럼 인터넷교리도 적극적 신자 되자
선교합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미워하면 같은 수준이다
2018년 나해 9월13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미워하면 같은 수준이다>
복음:루카 6,27-38
누구를 미워하면 우리의 무의식은 그 사람을 닮아가요. 마치 며느리가
못된 시어머니 욕하면서도 세월이 지나면 그 시어머니 똑 닮아가듯.
미워하면 그 대상을 마음 안에 넣어두기 때문에 내 마음 안의 그가 곧
내가 됩니다. 그러니 그를 내 마음의 방에 장기 투숙시키지 마시고
빨리 용서한 다음 바로 쫓아내 버리세요. 싫어하는 사람을 내
가슴속에 넣어두고 다닐 만큼 그 사람이 가치가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나를 응원하는 친구만 마음에 넣어두십시오. 싫어하는
사람 넣어두고 다니면 마음에 병만 얻습니다.
혜민 스님의 말입니다.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생각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을 닮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에 자주 떠오르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면서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닮는다는 것은 같은 수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내가 미워한다고 내가 그 사람보다 높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높은 수준의 사람이 낮은 수준의 사람을 닮지는 않습니다.
어른이 공갈 젖꼭지를 물고 다닌다거나 아이들처럼 칼싸움, 총싸움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같은 수준이거나 더 높은 수준은
닮아갑니다. 아이가 부모를 닮아갈 수는 있어도, 부모가 아이를
닮으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간다면 그
미워하는 사람은 나와 같은 수준이거나 더 높은 수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수준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게임을 매우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은 아이의 수준일 것입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아이
때 좋아했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다면 더 이상 나뭇잎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준이 변하면 좋아하는 것도 변하게 됩니다.
만약 좋아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마음이 어떨까요?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가서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상대에 대한 미움이 생길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화’이고
‘미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남은 하고 나는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믿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짜 온 프로젝트를 상사가
가로채서 모든 영광을 받을 때 화가 난다면 나도 그 사람처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그 상사와 같은 수준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
상사를 용서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아니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고 하십니다. 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느냐면, 그렇게 내 수준을 들어
높이지 않으면 용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을 좋아하는 수준에서 돈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돈에 무심한 수준이 될 때 비로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마치 애벌레끼리는 서로 잎사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 간 다른 애벌레를 용서하기 어렵지만, 나비가 된다면 용서가
쉬워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해야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용서하면 이미 수준이 높아졌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야, 그리고 상대가 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고통인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형은 아우에게 왜 화가 나 있었을까요? 자신도
술 먹고 돈쓰고 다니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그런 삶이 행복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니 동생이 돌아왔을 때 더
높은 수준에 있던 사람은 동생을 질투하는 형이 아니라 이미 그런
것들에 맛을 잃은 동생인 것입니다.
원수까지 용서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사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안다면 미워하기
보다는 연민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하니 미운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맛을 완전히 끊은
자유를 느껴보지 못해서 그것에 얽매여 있는 사람까지 질투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 마음이 더
아픈 것을 몰라서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 여겨 질투하고 미워하니 자신도 결국 같은 수준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 것엔 흥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내가 관심 없는 것을 가져갔는데 미운 마음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가져가는 사람들까지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사랑의 의무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9월13일 목.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대인관계 속에서 자신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일러주시는 말씀이며, 우리 믿음의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28절)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는 관습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만의 관습이다. 주님의 말씀은
적의를 품은 사람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굶주리는 사람에겐 참을성을 주고 은총의 상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
라고 기도하셨다.
“눈에는 눈.”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29절) 이것은 자비의 극치를 말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29절)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자비를 우리는
스테파노에게서 볼 수 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며 용서를 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신앙인인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0-31절) 우리 인간의 자비는 하느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자비는
더없이 훌륭한 덕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덕목이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고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는 복수심을 없애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37-38절)라는 말씀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우리는 이 두 자선을 행하여야
한다. 베풀고 용서하여야 한다. 우리도 주님께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악행을 되갚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주님 은총 안에 가능한 원수 사랑
2018년 나해 9월13일 목.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주님 은총 안에 가능한 원수 사랑
어제 진복팔단 선언을 통해, 우리의 인생 안에서 가난을 부요함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낮음을 높음으로, 유한을 무한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주신 주님께서, 오늘은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주라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쪽 뺨을 내밀라고, 겉옷을 가져가는 자에게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라, 등등.
주님의 당부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요구인 듯 느껴집니다. 결국
바보천치가 되라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신 자비와
무한한 용서, 한없는 사랑을 생각하면, 셀수도 없이 많은 은혜를 입은
우리 인간 측에서 당연히 노력해야 할 부분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여기저기 시름시름 앓던 시절, 백약이 무효이던 시절, 너무나
힘들던 나머지,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발 좀
치유의 은총을 주십시오. 낳기만 한다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물론 화장실 가기 전과 나온후 생각이 달라지듯이, 치유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우리들입니다. 아무튼 절박한
상황 앞에서 우리 인간은 주님 앞에 뭐든 다하겠다, 재산의 반을
바치겠다, 새 사람이 되겠다, 뭐든 다 약속합니다.
아이들 데리고 판사님들 앞에 섰을 때, 아이들도 비슷하더군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고분고분, 강력한 개과천선의 의지를
표현하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기도 많이 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원수사랑, 정말 어려운 작업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큰 일, 크나큰 은혜,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푸신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생각하면 가능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원수 사랑이지만, 주님 은총
안에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른 뺨 맞은 후 왼 빰
내미는 일,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것 처럼 여겨지지만, 성령의
협조 아래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야겠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 여호수아
2018년 나해 9월13일 목요일
오늘은 “하나님을 믿고 행동하는 여호수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신명기 1장 38절 말씀에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는 갈렙과 함께 가나안 땅에 다녀온 12명의 정탐꾼의
일행입니다. 가서 돌아오는 시간까지 40일이었는데 12명의 가치관은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10명의 정탐꾼은 도저히 쳐들어갈 수 없다는 상황을 조목조목
보고하고 두 명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된다'는 믿음을
철저하게 소리치며 보고를 합니다.
그 결과는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눈앞에 놓여진 상황만을 보고
자신들의 의지로 결정한 결과는 가나안 땅을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들어간다면 모두 다 40년의 생고생을 한 것도 모자라 모두 다
여기에서 죽게 하는 것이냐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이라는 대전제하에 그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그
땅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 당당히 소리쳤고 또 능히 이룰 것을
믿었습니다.
이들의 결과는 그 선포한 그대로 이루어지고 맙니다. 이제부터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모시고 무슨 일에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이라는 대전제하에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9월13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루카6.27-38)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든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포기하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결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납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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