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4. 주일 큐티
에스라 3:1 ~ 5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
관찰 :
1) 비로소 예배를 드리려 모이다
- 1절.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 고레스의 칙령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은 모두가 다 예루살렘으로 몰려가서, 그곳에서 예배만 드리는 삶을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4만여 명의 귀환자들은 각자의 성읍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착하고 적응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일곱 달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안주하고 하나님을 예배함을 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결단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페르시아를 떠나 온 것이기에 지도자들의 지도를 따르면서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무조건적이고 비이성적인 신앙을 따른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하고 차근차근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개척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에 순종하고자 초막절을 기점으로 이들은 회집하게 된 것입니다.
- 2절.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해서 돌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력을 따라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칠 개월이 지나서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상황에서 그제야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율법에 기록한 대로의 번제를 드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진작에 준비하지 못한 것처럼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그들이 현실을 이해하고, 그 현실과 이상의 차이 속에서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기쁨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을 반기는 것은 대적들의 냉대와 적의 가득한 눈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대적들의 성난 이빨을 드러내는 의도가 도처에서 드러나는 상황에서 가나안에 정착하던 포로 귀환 백성들은 그제야 위기의식을 느끼고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2) 두려움을 극복하고 예배를 드리다
- 3절.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 포로 귀환 백성들은 주변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의를 가지고 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특별히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지극히 적대적으로 대했습니다. 그것이 이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다시금 간절히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도 움직이신 하나님, 고레스 대왕을 움직이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도록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이렇게 나아와서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아침 저녁으로 번제의 제사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이 때는 아직 성전이 세워지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그 터”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곳이고,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 있었던 곳이고, 다윗의 장막이 세워졌던 곳이고,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던 “그 곳”입니다. 사실 아침, 저녁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초막절 때만이 아니라 날마다 드려져야 하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야 그러한 제사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7개월 이라면 생각보다 긴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용인해 주시고 있습니다.
- 4절.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 “초막절”은 `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3대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장막절' 혹은 `수장절' 이라고도 불리우며, 땅에서 산출되는 모든 곡식, 술, 기름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절기는 유대력으로 디스리월, 즉 7월(보통 달력으로는 10월) 15일에 시작하여(민 29:12) 8일 동안 지켜졌으며,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가 있었습니다. “초막절”에는 수송아지, 수양 등을 제물로 바쳤으나, 곡식은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짐승만을 제물로 삼으신 까닭은, 가나안 족속의 추수제와 초막절을 엄격히 구별시키려는 의도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정수대로”는 초막절 절기가 지켜지는 8일 동안 날마다 동일한 수효의 제물이 드려진 것이 아니었음을 가리킵니다. 즉, 수송아지의 경우에 첫날에는 13마리가, 둘쨋날에는 12마리가 바쳐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막절 절기 동안 바쳐져야 했던 가축의 수는 모두 215마리 였습니다(민 29:13~38).
- 5절.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 “그 후에는” 이란 포로 귀환 후에 드려진 첫 초막절 절기 이후에 드려진 제사에 대한 언급이라는 말입니다. 즉, 초막절 절기를 기점으로 해서 이스라엘이 드리던 제사 규례를 따라서 정상적인 제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항상 드리는 번제”는 평상시에 아침 저녁 하루 두 차례씩 드려지던 상번제를 의미합니다(출 29:42; 민 28:3~6). “초하루”는 월삭 현상이 일어나는 매월의 첫날에 베풀어지는 종교적 축제를 의미합니다. 이전의 이스라엘은 이 절기는 매번 반드시 지키지는 않았으나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도 꼼꼼히 지켰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는 `무교절'(레 23:5~8), `맥추절'(레 23:15~21), `나팔절'(레 23:23~25), `초막절'(레 23:33~36), `속죄일'(레 23:27~32) 등에 드려져야 할 번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모든 절기는 여호와의 절기로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드려야 하는 제사였다는 것을 에스라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드리는 예물”은 특정한 절기와 상관이 없이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 것을 가리킵니다. 이렇듯이 초막절을 기점으로 포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여서 온전한 제사를 모두 회복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르침 :
1) 각자의 성읍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일곱 달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각자의 삶의 정황이 정리된 다음에 모인 것입니다. 이것은 흩어지기 전에 이미 약속을 했던 것이던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예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모이게 한 것이든지, 모종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여야만 하게 되었던지, 정확하게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배경의 스토리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포로 귀환한 이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으로 모여서 모두가 모여 제사만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정황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2)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제사장 그룹과 유다 지파의 리더 스룹바벨을 위시로한 지도자들이 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지도자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들은 백성들을 하나로 규합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제사를 드리려 한 것입니다. 이들이 고레스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생각과 기대와 다른 상황들이 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맹목적인 믿음과 사명감만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이들을 이끌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인도하고 지도하는 리더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3) 3절을 보면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이 나온다. NIV에서는 “Despite" 라고 하고, 쉬운 성경의 표현은 “그들은 주변에 사는 다른 나라 백성들을 두려워했지만”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이 있었지만, 예루살렘 주변의 상황은 그와 달랐고, 다른 민족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의 주시하고, 질투하고,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대에 자신들의 민족 신과 조상 신, 그리고 지역 신을 섬기고, 그것을 밀어내는 상황은 곧 전쟁이 되는 상황에서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이 돌아와 바벨론의 마르둑 신을 섬기는 것도 아닌,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상당한 견제와 방해, 아니 그 정도가 아닌 전쟁의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이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믿음의 행동이었던 듯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제단의 연기는 지대가 높은 예루살렘이기에 감출 수 없이 주변의 민족들에게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지만 이들은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4) 이들은 황폐화된 곳에서 임시로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렸지만, 솔로몬의 황금으로 덮인 성전에서 드리지 못하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전쟁을 감수하고 드리는 거룩한 예배입니다. 비록 초라하고, 과거의 영광은 없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재현되는 진정한 의미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론 우리가 가진 훌륭한 치장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중심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다 부서지고, 타서 없어진 폐허 위에서, 법궤도 없어서 제단을 다시 만든 그러한 상황에서 드리는 예배가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축하는 말씀입니다.
5) 겉으로 드러난 상황으로는 부족한 것 투성이의 제사였지만 초막절을 기점으로 율법에 명시된 대로의 제사를 회복하는 포로 귀환 백성들의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적용 :
1) 오늘 나는 무너진 터 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초심으로 돌아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중심이 존재하는가? 상황과 여건이 갖추어지면 진실한 예배를 드리겠다고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장소가 좋은 곳이 마련되면, 그 때 더 온전한 예배를 드릴 것이라는 생각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보다 중심을 더 우선적으로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려야 더 좋은 장소에서 여상한 예배를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그가 가진 스펙이나 어떤 능력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외적 조건들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자신을 더 낮추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알고, 오직 하나님 앞에 나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가식과 가면을 찢어 버리고, 주님 앞에서 서는 것이 나의 예배를 회복하는 길이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 자신의 중심으로 나아가기를 더욱 더욱 훈련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