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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탐꾼과 라합
수 2:1-7
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수 2:1-7 /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돕는 라합]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진영이 싯딤에 있을 때 정탐꾼 두 사람을 가나안 땅으로 몰래 보냈다. 가나안 땅의 사정이 어떠한지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특별히 여리고성의 규모와 형편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두 정탐꾼은 그 성읍 안으로 들어가 그날 밤을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의 집에서 묵었다. 그 여인은 몸을 파는 사람이었다. 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스라엘 사람 몇 명이 우리 땅을 몰래 살펴보려고 지난 밤에 우리 성읍으로 들어왔습니다.' 3) 그 말을 들은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전갈을 보냈다. `어젯밤에 네 집에 들어와 묵은 자들을 이리로 끌어내라. 그들은 우리 땅을 몰래 살펴보려고 들어온 자들이다.' 4-5) `예, 몇 사람이 어제 저녁에 우리 집에 찾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는 몰랐습니다. 성문이 닫히기 전 해거름 때 그 사람들은 저희 집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떠났는지 모르겠어요. 급히 뒤쫓아가면 혹시 붙잡을지도 모르겠군요. 한번 뒤쫓아가보시지요.' 6) 이렇게 말하는 라합이 사실은 그 두 사람을 숨겨 두었다. 그들을 자기 집 지붕에 숨겨 놓고서는 그곳을 삼대로 위장하였던 것이다. 7) 라합의 집에 찾아왔던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뒤쫓아 요단강 나루터까지 갔다. 그 사람들이 성읍을 빠져나가자 성문이 닫혔다. 성문을 닫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여인 라합과 사라가 더불어 나옵니다. 라합은 비록 기생이었지만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국과 가나안 땅의 죄악을 제거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가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파견함(1)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가나안 정복을 위해 먼저 한 일은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 그 땅을 정탐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패는 전략이고, 그 전략은 정보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탐을 위하여 두 사람을 보냈는데 그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가 머문 곳이 바로 기생 라합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에 머문 이유는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므로 여리고의 상황이나 사람들의 민심 그리고 군사적 동태를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왕이 정탐꾼들의 여리고 잠입을 알게 됨(2) 여리고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광야를 지나 요단 강 건너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여리고 왕은 당시 그 성을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를 가리킵니다. 당시 가나안은 한 사람의 군주가 통치하는 중앙집권체제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통치자를 가지고 있는 성읍 국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12:9). 따라서 여리고 왕은 가나안 전체의 왕이 아니라 여리고 성읍만 다스리는 군주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왕에게 몇 사람이 정탐하러 성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라합이 재치 있는 행동으로 정탐꾼들을 구해줌(3-7)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탐꾼들을 끌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라합은 정탐꾼들을 지붕에 있는 삼대에 숨기고, 그들이 자신의 집에 왔었으나 성문 닫을 때쯤 떠났는데 급히 따라가면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 병사들은 요단 강 나루터까지 추격하였고, 여리고 성문은 닫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기생도 사용하셨습니다. 라합은 죄로 가득 찬 가나안을 심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귀하게 쓰임받습니다.
적용: 라합은 기생이었지만 부지중에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적이 있거나 현재 쓰임을 받고 있으면 함께 나누어 봅시다.
百折不撓[백절불요] -채중랑집 태위교현비. 백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시련에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시련과 역경을 만나면 삶을 고통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고통이 지나쳐 한계에 부딪히면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이럴 때 강한 의지는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만큼 중요합니다. 여리고의 문화에 홀로 믿음을 지키며 정탐꾼을 목숨 걸고 숨겨 줬던 라합의 믿음처럼 가진 것들이 믿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데 쓰임받는 도구가 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여리고의 정탐꾼
여호수아 2:1-7
본문 및 적용
광야 40년의 연단을 마친 이스라엘 군대는 요단강 동편의 싯딤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요단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 도하에 앞서 두명의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냅니다. 요단강을 건너면 첫번째 만나게 되는 성읍이 여리고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한가지 의문을 남깁니다. “왜 정탐꾼이 필요했을까?”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6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리고성은 전쟁으로 무너진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성을 13바퀴 돌고 함성을 지르자 무너졌습니다. 전략이나 전술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정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린다라는 결과론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정탐은 의미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 하는 불신앙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리를 향하여 가는 길에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읽기
1.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라고 규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는 이미 멸망되기로 결정된 성읍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성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 주변을 굳이 돌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성을 무너뜨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편하게 들어가 그냥 살게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그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탐도 해야 하고 성주변도 돌아야 하며 때론 전술도 짜야 하고 때로는 칼을 들고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들어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싸우기 위해 계획하고 준비하며 실행해야 합니다. 그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고 조정하시며 그 뜻을 펼치십니다. 복권에 당첨되기를 기도한다면 최소한 복권을 사야 하는 것입니다. 바람결에 당첨된 복권이 날아와 내 주머니에 담길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위장한 몽상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행위를 요구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 얻어집니다.
2.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 일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방식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적소에 만남을 예비하십니다. 정탐꾼들은 기생 라합이라는 뜻밖의 조력자를 만나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만남의 축복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향방이 결정되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과정에 반드시 사람을 예비하십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속에 포석처럼 놓여져 있는 것이 우리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항상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을 품지 못하고 흩어 버리거나 잘라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녀가 바알의 신전에서 남자들과 몸을 섞어 음행의 제사를 드리는 성창이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우상의 신전에서 남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창녀와의 만남은 하나님의 백성과는 참 안 어울리는 조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창기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품으십시오. 사람을 품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품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종말론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읽기
1. 한 영혼에 관심이 있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는 사실 라합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여리고는 이미 멸망이 결정된 성읍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정탐꾼들과의 하룻밤 만남을 통해 여리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습니다. 라합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라합은 그 자체로 여리고 성이 멸망되기로 결정된 이유였습니다. 즉 라합은 죄악된 여리고의 상징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가장 먼저 멸망되어야 할 라합과 그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멸망의 문턱에서 기꺼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 얻는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그림언어로 제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에서도 구원 받을 한 영혼을 찾으십니다. 두명의 정탐꾼은 사실 그 한 영혼 라합을 위해 보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라합을 찾는 두 정탐꾼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라합을 마주칠지 모릅니다. 우리의 손에 건져지기로 예정된 라합과 그 가족을 우리는 찾아내야 합니다.
2. 죄인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
라합은 나중에 유다지파의 살몬과 결혼하게 되며 예수님의 조상이 됩니다.이방인이며, 우상숭배자이며, 창기였던 여인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역설을 창출하신 것이지요. 죄인 중의 괴수인 라합으로부터 나오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한 사람의 죄인 중의 괴수를 찾고 계십니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라합을 위한 구원 섭리 안에서 구원받아야 할 한 영혼을 찾아내는 정탐꾼의 사명은 오늘도 여전히 계속 되고 있습니다.
3. 성도의 승리하는 삶의 관점에서 읽기
하나님께서는 예배 공동체를 찾으십니다. 신앙은 집단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룹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성읍 전체가 멸망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한 한 죄인은 건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구원은 목숨을 건 두 정탐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한 개인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4. 영적전쟁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읽기
하나님께서는 라합과의 만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에 존재하는 두려움의 씨앗을 말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수없이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너무도 연약하여 강하고 담대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적들의 상태를 보여주시는 방식으로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본문보다 한참 후의 이야기이지만, 기드온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기드온이 고작 300 용사로 미디안의 185,000의 대군을 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적군들의 입을 통해 기드온이 승리할 것이라는 말을 듣게 하셨습니다. 여리고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여리고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라합의 정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합이 전해준 정보는 여리고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인해 간담이 녹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이 했던 결정적인 역할은 라합의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담대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영적전쟁이 가장 첨예하게 벌어지는 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간절히 얻기 원하시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아는 대적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늘 마음을 헤집어 놓습니다. 마음의 세 요소인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공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결국 신앙생활은 마음지킴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어떻게 지키는가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먼저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두 정탐꾼이 이스라엘 전체의 마음을 지키게 했던 것처럼, 공동체의 마음을 지키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적용 질문
1.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하십니까, 입으로만 믿으십니까?
2. 하나님께서 주신 만남의 축복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3. 사람들을 품어 주십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잘라 내십니까?
4. 사람들이 같이 있기 편해 하는 사람입니까,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입니까?
5.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분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라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6.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마음을 잘 지키십니까, 늘 떡이 되어 있습니까?
라 합
수 2;1-7
한 사람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온 인류에게 죄가 입장되었고, 한 사람 예수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한 사람 아간 때문에 아간 식구 전체가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한 사람 노아때문에 8식구 전체가 홍수에 멸망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한사람 요나때문에 배가 흔들려 전체 사람이 고생하였고, 한 사람 롯 때문에 롯의 가정이 구원받았습니다.
본문은 한 사람 라합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발을 딛게 되었고, 한사람 라합 때문에 온 그의 가족이 복받은 이야기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보잘것 없고 쓰레기 같은 인생 라합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70인역 성경에는 매춘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그만 디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녀는 드러누워 돈을 버는 직업이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업중 가장 비참하고 천한 직업이다>
그러나 라합은 괄목할만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라합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라합이라고 하는 뜻은 <거만함> <결렬함> <광대함>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라합은 정말 거만한 사람같은 기생이었지만 나중에 광대한 일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1. 바꾸는 믿음
라합은 주변을 온통 바꿀 줄 아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어떤 것을 바꾸었습니까?
(1) 민족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여리고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속의 땅이었지 고국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남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정탐꾼은 여리고에 들어가 제일 접근하기 쉬운 술집에 들어가 라합을 만났습니다.
놀랍게도 라합은 이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 될 것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누구도 거스릴 수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라합 하나 때문에 여리고 민족의 역사가 비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소망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2)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46명중에 라합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마 1:5). 그 중에 5명이 여자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거룩한 여자가 아니라 창녀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공헌한 5대 여걸 중에 하나입니다.
(3) 가정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여리고 사람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라합 가정만 살았습니다. 한 사람 라합 때문에 가정 전체가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라합 하나 때문에 민족의 역사가 바뀌고, 기독교의 역사가 바뀌고, 가정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주변이 바뀌도록 하여야 합니다.
2. 칭찬받는 믿음
라합의 믿음은 칭찬받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칭찬하신 믿음이 몇 번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가버나움의 백부장 믿음을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그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방문하시게 되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은 못 고치실 병이 없으신 분임을 소문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 몇 명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l 장로들이 예수님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4-5)
예수님은 회당을 지은 백부장이라는 말을 들으시고 그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 때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게 하였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6-8)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9)
이렇게 예수님이 칭찬하신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믿음도 칭찬받는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바울이 칭찬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
히브리서의 저자를 루터는 아볼로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터틀리안은 바나바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르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설이 제일 유력합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서 바울은 16명의 믿음의 거성, 신앙의 거목, 일꾼의 거인들이 등장합니다. 누가 인정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인정한 16명입니다. 그중에 15명이 남자입니다. 단 한명 라합만이 여자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라합을 높이 보고 있는 것일까요? 굉장한 바울이 놀랍게 라합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칭찬한 믿음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수아 2장에서 온통 라합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있는 믿음이라고 라합을 칭찬했습니다. 마태는 메시야 믿음이라고 라합을 칭찬하였습니다. 바울은 종합적으로 라합을 칭찬하였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김제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한 이 자익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은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끼니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얻어 먹었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고 가출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다니다가 온 곳에 곡창지대 김제였습니다. 그는 어느 부자집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밥만 먹여주면 머슴이 되겠습니다. 시키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머슴으로 써주었습니다. 그는 죽을 둥 살 둥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집을 떠나면 굶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미국 남장로교 최 의덕 선교사가 김제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일찍 들어 간 곳입니다. 이 선교사가 마방을 드나들면서 전도하다가 이 자익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이 자익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 가족도 함께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무식한 이 자익은 주인 아들이 독방에서 한문자 읽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암송하면서 한문자를 배웠습니다. 어깨 너머로 공부한 것입니다.
최 의덕 선교사는 김제를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점점 늘어 나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금산교회입니다. 선교사는 주인 조 덕삼과 머슴 이 자익을 교회 일군으로 함께 임명하였습니다.
최 의덕 선교사 선교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이 자익 청년을 설교자로 임명하였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맡길 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조 덕삼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설교자가 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은혜도 충만히 받았습니다. 조금도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08년이었습니다.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데 조 덕삼과 이 자익이 장로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투표를 하였습니다. 투표 결과 이 자익은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조 덕삼은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 때 조 덕삼이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교우들이여!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자익은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젊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열심히 있습니다. 우리 이 자익을 장로로 잘 받들어 교회를 성장시키십시다>
모두가 감격속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1년 후에 조 덕삼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 자익 장로는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서 머슴인 이 자익 목사를 잘 받들어 섬겼던 조덕삼 장로는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크게 세움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모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모두 칭찬받아야 할 믿음들입니다. 라합도 어느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이름이 떠오를 때 칭찬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하여야 합니다.
3. 지혜롭게 혀를 놀리는 믿음
우리는 말 잘 하는 사람보다 잘 말하는 사람을 더 좋아 합니다. 하나님도 물론 그렇습니다. 라합은 지혜로운 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정탐꾼이 숨어 들어와습니다. 여리고 왕이 정보를 알고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라합은 이미 지붕위 삼대속에 2명의 정탐꾼을 숨겨 놓았습니다. 이제 2명의 정탐꾼의 운명은 라합의 혀에 달렸습니다. 이때 라합이 대답하였습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 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4-5)
처음에는 긍정하였고 나중에 부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고, 나중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지혜의 입술이었습니다. 모두 부정하면 라합이 죽을 것이고, 모두 긍정하면 두정탐꾼이 죽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모두는 따라갔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지혜의 입술을 가집니다. 남에게 혀로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육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는 오래가는 법입니다.
나이가 지긋이 들은 최 상필이라는 백정은 장터에 푸줏간을 경영하며 고기를 팔았습니다. 양반 두 명이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그 중에 한 명 <얘! 상필아! 쇠고기 두 근을 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기 두 근을 잘라 주었습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자기보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이에게 반말하기가 미안하여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최 서방! 고기 두 근만 주게나>
기분좋게 대답한 최 상필은 큰 칼로 고기를 선뜻 베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산 양반의 고기보다 두 배나 많았습니다. 먼저 고기를 산 양반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놈아! 넌 눈도 없냐? 같은 고기 두 근인데 어째서 이렇게 두 배 차이가 나냐?>
그러자 최 상필이 대답하였습니다.
<예. 그야 손님 고기는 상필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신네 고기는 최 서방이 자른 것이니까요>
사람이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둡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지혜로운 말만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라합은 지혜로운 입술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내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파하여서는 안 됩니다.
4. 아는 것을 행하는 믿음
라합은 아는 것을 행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라합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이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으미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 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부모님과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① 간담이 녹았습니다
② 마음이 녹았습니다.
③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고 행하여 하나님께 돌아온 자는 라합 하나뿐이었습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 다는 것을 알면서 정직하게 사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사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이길 확률은 1/100입니다. 바클레이의 견해입니다.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생활에 지쳐 있었고 여리고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공격해야 하고 여리고는 방어하면 족합니다. 이스라엘은 무기가 없지만 여리고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할 것이라는 믿음은 조롱거리의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라합의 믿음에는 동의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라합의 결단에 박수치는 이도 없었습니다. 라합의 생각에 박수치는 이도 없었습니다. 라합의 방향에 따라오는 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정말 믿었기에 확고하였습니다. 확고하였기에 양보할 틈이 없었습니다. 초대교부 크리소스톰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느냐? 좋다. 그러면 내가 온 세상을 반대하리라>
라합은 정말 믿었기에 참으로 행동하였습니다.
미국 뉴욕 뉴저지에 한 교회가 있습니다. 한인교회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여선교 회장이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3 에이커 그러니까 3,600 평 대지에 잔디밭이 있고, 풀장이 있는 으리으리한 집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주일에 이 회장이 이런 광고를 해달라고 목사님에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폐품을 모아서 돈을 모으고 싶습니다. 주의 선교사업을 위해서 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광고를 좀 해 잘 해 주시죠>
그 날 아침 목사님은 이렇게 광고를 했습니다.
<본 교회 여선교 회장님께서 이 시간 폐품을 모집하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회장을 위해서 폐품 수집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버려둔 폐품을 전부 가지고 오십시요. 가져오시면 교회에서는 그것을 팔아서 여선교 회장의 생활비와 용돈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광고를 들은 여선교 회장이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말자 목사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목사님, 저를 거지로 알았습니까? 제가 언제 폐품 팔아서 먹고 산다고 했습니까?>
목사님이 여선교 회장에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당신은 예수님보다 부자입니까? 그러면 당신은 예수님을 거지로 알았습니까? 폐품이나 쓰레기같은 것 주워다가 예수님께 드리려 합니까?>
이 말을 들은 여선교 회장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습니다.
<오 주여,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소서>
목사님도, 여선교 회장님도 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보통 분들이 아닙니다. 바르게 책망하고 즉시로 받아 드리는 자세가 얼마나 좋습니까?
라합의 믿음은 아는 것을 행할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언행일치의 믿음이었습니다.
5. 모험의 믿음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모험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험을 합니다. 모험을 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왕이 라합의 집에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정탐꾼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라합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이 때 군사들이 온 집안을 뒤져 두 정탐꾼을 찾아냈다고 하면 라합은 민족적 배반자로 극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공개 처형감이었습니다. 간첩 동조죄였습니다. 참된 믿음은 정말 믿기에 미친듯이 일하기에 타인이 보면 마치 모험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모험을 감행합니다. 믿음의 별명은 모험입니다.
6. 온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
믿음의 사람은 온 가족을 구원합니다. 라합은 온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라합 하나 때문에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공부를 죽도록 하기 싫어하는 자식 때문에 속을 썩고 있는 부모가 찾아 왔습니다. 자식이 공부를 그렇게 안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박사에 의사에 교수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나는 당신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철길 건널목을 철부지 아이 하나가 건널려고 하고 있습니다. 기차가 달려 들고 있습니다. 그 옆 거의 비슷한 거리에 시장에서 허레 일을 하는 지게꾼과 내가 서 있습니다. 당신 생각에는 누가 아이를 구하려고 먼저 뛰어 들 것같습니까?>
<지게꾼이 먼저 뛰어 들 것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아무리 기생이라도 라합은 여리고성에 살고 있는 이중에서 미래에 소망을 바라보는 가장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6가지 특징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1. 바꾸는 믿음
2. 칭찬받는 믿음
3. 지혜롭게 혀를 놀리는 믿음
4. 아는 것을 행하는 믿음
5. 모험의 믿음
6. 온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
정탐꾼을 숨겨준 라합의 용기
수 2:1-7 / 우인택 목사
여호수아는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에 앞서 요단강 건너에 위치한 여리고 성에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차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5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라”
1:6에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1:9에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라는 가나안 정복과 승리에 대한 확약의 말씀을 거듭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도 그 말씀에 힘입어 ‘3일 후에 요단강을 건널 것임’을 백성에게 선포했습니다(1:11).
또한 선봉에 서게 될 요단 서편의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로부터 충성 맹세도 받았습니다(1:16-18).
그야말로 자신감이 넘칠 대로 넘쳐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호수아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여리고 성에 정탐꾼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1절).
그는 여리고 성에 정탐꾼을 보내어 적의 동태를 면밀히 파악하여 조그마한 실수라도 없이 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실수하고 실패할 때는 매사에 일이 잘 풀려지고 자신감이 넘쳐날 때입니다.
오죽하면 성경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했겠습니까?(고전 10:12)
바로 그러한 점에서 가나안 정복 직전에 정탐꾼을 파송한 여호수아의 신중한 태도는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지도자와 참된 신앙인은 일단 벌어진 실수에는 대범하고 관용하게 대하지만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신중에 신중을 기하도록 요구하며 그 자신 또한 세심하게 마음을 쓰면서 신중을 기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딤전 4:14).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라” 권면했습니다(딤전 4:15).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잃어버리는데, 그 결정적인 요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탄은 우리를 흔들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에 임할 때에는 매사에 신중해야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호수아의 신중함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맹종하는 자세는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하게 신뢰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인간의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을 전제합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가르는 것 같은 전적인 하나님의 기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단지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것만을 요구하실 때도 있습니다(출 14:13,14).
그리고 그때는 인간적인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을 때이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 언제나 그런 기적적인 방법으로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대개 믿음을 동반한 우리의 노력을 통해 그것을 얻도록 하십니다.
믿음은, 때로는 기다리는 것을 요구하고, 때로는 노력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력을 게을러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 위해 나는 어떤 믿음의 행동으로 반응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런데 두 사람의 정탐꾼은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 알게 되듯이, 이는 우연이 아니라 기생 라합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여리고에서 구원할 사람으로 죄많은 여인이었던 기생 라합을 선택하신 것일까요?
라합은 기생이라고 하는 천한 신분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리고 사람들 중에서 라합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혈통을 소중히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메시아의 혈통을 기록한 이 족보에는 놀랍게도 유대인들의 관습으로는 족보에 끼일 수 없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와 이방인은 유대인의 족보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방인 출신 여인이 3명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과 '룻'과 오늘 본문의 '라합'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시아버지와 동침 한 가나안 여인이며(창 38장),
룻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 가운데 들어올 수 없다고 한 모압 족속의 여인이며(신 23:3),
라합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 여리고 사람으로서 더구나 기생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로서 족보에 기록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신분이나 혈통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됨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설교에서도 들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혈과 육으로 받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이 아니라 믿음을 보십니다.
누구든지, 비록 라합과 같이 천한 신분일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게 됩니다(히 11:5).
여러분 모두,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스라엘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 잠입했다는 첩보를 들은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체포하고자 했습니다(2-3절).
그러나 라합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미 그 두 사람을 숨기는 등 오히려 그들을 보호했습니다(4-6절).
이러한 라합의 행위를 도덕적, 윤리적인 입장에서 평가한다면, 이보다 더 반국가적이요 반민족적인 매국 행위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 조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잠입한 적의 첩자를 숨겨 주면서, 자기 나라의 병사를 속인 이러한 그녀의 행위는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히브리서 11:31과 야고보서 2:25에서 그녀의 행동이 ‘믿음의 행위요 의의 행위였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조국은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멸망당할 '악의 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 조국이라고 해도 악한 조국에 충성하는 것은 그 악과 함께 멸망당하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사람을 죽이는데, 자기 남편이 하는 일이라고 함께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 그녀 또한 살인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살인하는 남편을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그 남편의 살인을 말리면 그것이 바로 남편을 살리는 길이요, 자신도 살인을 면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악은 모양이라도 따르지 마시되, 악한 일에서 떠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때 그 길을 선택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한낱 기생에 불과한 라합이 목숨을 건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여리고 왕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더 두려워할 대상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0-11절).
이와 비슷한 예가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데,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산파들에게 모든 출생하는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산파들은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들은 애굽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는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 할 분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 두려움 때문에 악한 명령을 따르게 되고, 악하고 비굴한 행동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거부하고 진리를 따르는 참된 용기와 경건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용기와 경건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이를 위해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라합은 기생에 불과한 천한 삶을 사는 여인이었지만, 자신의 악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죄악된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영원한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그 삶이 변화되는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죄악된 세상 영광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참으로 복된 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여호수아, 두 정탐꾼, 라합, 그리고 하나님
수 2:1-7
1. 정탐꾼을 파송하는 여호수아
여호수아 왜 정탐꾼을 파송했을까? 정탐꾼 하면 여호수아에게는 뼈아픈 기억이 있다. 40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자신과 갈렙을 포함한 12명이 정탐꾼으로 활동하고 돌아와서 백성들에게 보고한 결과 10명의 목소리가 더 커서 결국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그 결과 40년 광야 생활을 하게 되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호수아는 이런 결정을 하였을까? 보내는 두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믿음’의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2. 순종하는 두 정탐꾼
익명의 두 정탐꾼은 목숨을 건 순종을 하였다. 만리장성보다 더 견고했다는 여리고성, 이미 철기 문명의 발달로 인한 강력한 무기체계, 라합의 집을 곧 조사하러 온 것을 볼 때 뛰어난 보안망까지 갖춘 성이었다. 그런 성에 스파이로 침투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순종을 한다. 아마도 살아 있는 두 전설 여호수아와 갈렙의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런 믿음의 결단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은 그때까지 살아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3. 라합
정탐꾼을 숨겨줄 뿐 아니라 자국의 왕과 군인들을 속이고 두 정탐꾼을 숨겨 준 라합. 스파이가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설픈 아마추어다. ‘우리 집에 스파이가 왔었다. 그런데 급히 성 밖으로 도망갔다. 지금 급히 따라가면 붙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행동은 정말로 지혜롭고 담대하다. 어떻게 이런 담대함과 지혜가 있었을까? 후한 점수를 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과 담대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라합은 훗날 보아스-오벳-이새-다윗... 예수님의 큰 할머니가 된다.
4. 하나님
라합의 등장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녀의 선택은 순간적, 우발적 결단이 아니라 오랜 믿음 끝에 가진 결단이었다. 하나님께서 지구상에서 씨를 말려버리시고 했을 정도로 죄로 찌들고 타락한 가나안에 어떻게 이런 믿음의 여인이 있었을까? 광야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대한 소문을 다 들었다. 하늘에서 만나, 반석에서 물을, 특히 요단강 건너편의 아모리, 헷, 시돈 이런 나라들을 이긴 이야기들... 이런 소문을 들었을 때 그녀에게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 맞다.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있는 동안 라합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일들을 귀로 듣기만 하고도 이런 정도의 큰 믿음으로 자라고 있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믿음의 한 여인을 준비해 놓으시고 순종하는 두 정탐꾼을 그 많은 집들 중에서 하필 라합의 집으로 그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두 정탐꾼, 라합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온 이스라엘에 구원을 주시고 승리를 주셨다. 여호수아, 두 정탐꾼, 라합 그들의 믿음과 순종도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이 모든 일에 단연 돋보이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셨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순종하기만 하면 되었다. 순종보다 쉬운 것이 없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라합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강하게 담대하게’ 만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