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한지(楚漢誌) 2-72 (102)
《왕릉(王陵) 장군의 어머니》
위표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야망을 밝히자, 여이기 노인은 더 이상의 설득은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영양성으로 돌아와 한왕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한왕(漢王)은 크게 실망하며 묻는다.
"그렇다면 위표는 머지않아 우리에게 덤벼 올 텐데, 그쪽의 장수들의 면면은 어떠합니까?"
여여기가 대답한다."최고 사령관에 백장, 총대장에 백직을 비롯하여 각군 대장으로는 보장,
경택, 기장, 풍경 등등이 있기는 하오나 모두가 한결같이 대단치 않은 장수들이옵니다."
한왕(漢王)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백장 따위가 어찌 우리의 한신 장군을
당해 낼 수 있으리오. 다만 그중에는 풍경이라는 자가 가장 현명한 편이나,
그자도 우리의 관영 장군은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오."그리고 즉시 한신을 불러 명한다.
"장군에게 정병 10만을 줄테니, 지금 곧 조참, 관영 장군등과 함께 위표를 쳐부수도록 하오."
한신(韓信)은 왕명을 받자,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아뢰었다.
"신은 어명을 받자옵고 곧 출정하겠사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나라로 출정한 줄 알면,
항우가 반드시 허를 찔러 대군을 몰아쳐 올 것이니 대왕께서는 거기에 대한 대비도
강구해 주시옵소서.""음 .... 항우가 장군이 위표를 정벌하러 간 줄 알게 되면 우리의 허를 찔러
공격해 올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 된다...하면, 우리는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좋겠는지,
장군의 의견을 말씀해 주시오.
"한신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조용히 들며 아뢴다.
"신이 생각하옵건데, 많은 장수들 중에서 그만한 큰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장수는 오직
왕릉 장군이 있을 뿐이옵니다.그러니 왕릉 장군을 영양성 수호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자 한왕은 대번에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그건 안 될 말슴이오. 지금 항우가 왕릉 장군의
어머니를 볼모로 붙잡아 두고 있기 때문에, 왕릉은 전력을 다해 싸울 형편이 안 될 것이오."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왕릉 장군의 어머니는 현명한 부인이기 때문에 자식을 키울 때에
지조(志操)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해 키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왕릉은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변하는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허니, 대왕께서는 왕릉을
최고 지휘관으로 삼고, 진평을 참모로 삼으시면 항우를 충분히 감당해 낼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싸움에서 불리한 기색이 보이거든 장량 선생과 상의하시어 처리하시면
되실 것이옵니다."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안심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장군의 의견대로 할 테니, 장군은 위표를 정벌하는 대로, 속히 돌아와 주시오."
한신이 조참, 관영등과 함께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포판(浦坂)땅에 이르니, 위군(魏軍)은 어느 새
강을 앞에 두고, 진을 치고 있었다.한신이 군사들에게 말한다.
"적의 군사들은 강 건너에 진을 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도강에 필요한 배가
백여척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어찌 10만 군사가 일시에 도강(渡江)을 할 수가 있겠나 ?
그러나 내게 비책(秘策)이 있으니, 그것은 목앵(木罌)을 만들어 일시에 강을 건너는 것이다."
그러자 관영이 묻는다."목앵이란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옵니다.
목앵이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목앵을 장군도 모르고 계셨소?
목앵이란 나무를 엮어 만든, 일종의 뗏목으로써 부교(浮橋)를 말하는 것이오.이것을 넓고
튼튼하게 만든다면 많은 군사는 물론이고 전차(戰車)와 수레까지 한번에 싣고 강을 건널 수가
있을 것이오."
관영은 수백명의 군사를 차출하여 불과 2,3일 만에 목앵을 수없이 만들어 놓았다.
목앵을 다 만들어 놓고 나자, 한신은 관영에게 새로운 군령을 내렸다.
"장군은 1만명의 군사를 군선(軍船)에 나누어 싣고 강을 건너 가면서 금방이라도 쳐들어갈
기세를 보이시오.그러면 적은 크게 혼란해질 것이니, 저들이 혼란해지거든 본격적으로
공격을 퍼부으시오."관영이 명령을 받고 군사들을 몰고 강으로 달려나가자,
이번에는 조참을 불러 별도의 명령을 내린다."장군은 2만 군사를 데리고 목앵을 타고
하양(下陽)에서 도강하여 안읍(安邑)에서부터 적의 후방을 기습하시오.나는 후진(後陣)을
거느리고 별도로 도강하여, 관영과 함께 삼면으로 공격하면 위표를 생포할 수가 있을 것이오."
조참도 명령을 받고 하양으로 떠났다.한편, 위표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오려고 하는데,
홀연 강 건너편으로부터 적병이 수백 척의 군선을 나눠 타고 강을 건너오며 함성을 지르고
군고를 울려대는데, 그 기세가 천지를 뒤집을 것만 같았다.
위표의 군사들은 적의 공격을 받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해 하는데, 이번에는 하양으로부터
비마가 달려와,"한나라 장수 조참이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배를 타고 하양으로 건너와,
안읍에서 대왕가족을 생포해 가지고 지금 이리로 진격해 오고 있는 중이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 아닌가.위나라 군사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데, 후방에서는
어느 새 조참이 덜미를 눌러 오고, 전방에서는 한신과 관영이 거의 동시에 앞길을 막으며
죄어 오는 것이 아닌가.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되자 위나라 군사들이 혼비 백산하여
도망을 가는 바람에 위표는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신의 손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한신은 위표를 땅바닥에 꿇어 앉혀 놓고 추상같이 꾸짖는다.
"주상께서는 초나라를 치기 위해 그대를 총대장으로 발탁하셨거늘, 그대는 주색에 미쳐
30만대군을 대패하게 하였다.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인자하신 대왕께서는 그대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아니하시고, 다만 고향에 돌아가 편히 쉬게만 해 주셨다.
그런데 그대는 그와 같은 은총을 모르고 오히려 반기를 들고 일어났으니, 그대의 죄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씻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내 손으로 죽이기는 안 되었으므로,
영양성까지 끌고 가 주상께서 직접 단죄를 내리시도록 하겠다."그리하여 위표를 <감차>에
가두어 감시를 엄하게 하고, 평양성에 입성하여 민심을 평온하게 수습하였다.
그리고 옥중에 갇혀 있던 대부 주숙을 불러 내어, 그로 하여금 평양성을 지키게 하였다.
초패왕 항우가 팽성에 머무르고 있는 어느 날, 첩자가 달려와 항우에게 급히 아뢴다.
"폐하 ! 지금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로 쳐들어가 위왕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묻는다.
"뭐야 ? 한신이 위나라에 가 있다고 ? 그러면 영양성은 지금 비어 있을 것이 아니냐 ?"
영양성을 쳐들어갈 기회는 바로 이때다 싶어 항우는 즉석에서 범증을 불렀다.
"한신이 위나라로 원정을 갔다니, 우리는 이 기회에 영양성으로 쳐들어가 유방을 생포해
버리는 것이 어떻겠소 ?"범증(范增)은 신중히 생각하며 대답한다.
"우리가 신속히 손을 쓴다면 유방을 생포하기는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옵니다.
그러나 한신은 워낙 용의 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에, 원정을 떠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 놓았을 것이분명하므로, 어디까지나 신중을 기하셔야 하옵니다."
그러자 대장 용저(龍沮)가 말한다.
"주상께서 직접 출정하신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다고 아부께서는 그런 걱정을 하시옵니까 ?"
그러나 범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큰일을 도모할 때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여야 하는 법이옵니다."
항우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대장 이봉선(李奉仙)에게 3천 군사를 주어
선봉 부대로 삼고, 자기 자신은 후진이 되어 영양성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한왕은 항우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량과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한신 장군이 없는 틈을 타서 항우가 우리에게 쳐들어 온다는데,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이까 ?"
장량(張良)이 대답한다."한신 장군이 떠나기 전에 말한 대로, 왕릉 장군으로 하여금
막아 내게 하면 될 것이옵니다."한왕은 왕릉을 급히 불러 군령을 내린다.
"지금 초패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으니, 장군이 급히 나가 저들을 막아 주시오."
왕릉(王陵)은 주저하는 빛을 보이며 한왕에게 아뢴다."초패왕의 군세가 워낙 막강하여 무력으로
저들과 맞서게 되면 우리쪽의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오니, 정면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저들이 쉽게 접근해 올 수 없도록 개울을 깊게 파놓고 시간을 끌면서 비책을 쓰게되면, 저들은
도망을 가게 될 것이옵니다.""비책이란 어떤 계략을 말하는 것이오 ?"
"비밀이 누설되면 안 되므로 대왕 전하께만 아뢰옵겠사옵니다."
그리고 왕릉은 한왕의 귓전에 입을 갖다 대고 무엇인가 비밀을 속삭였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왕릉에게 말했다."장군이 그런 비책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소. 그러면 진평을 군사로 임명할 테니, 크게 승리를 거두어 주기 바라오."
한편, 초군 선봉장 이봉선은 3천 군사를 몰고 영양성으로 먼저 달려왔으나, 성은 사대문이
굳게 닫힌 채 적은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성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고,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이게 웬일일까 ?)
선봉장 이봉선이 항우에게 아뢴다."폐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적은 모두 겁에 질려
도망을 쳐버린 것 같사옵니다."그러자 항우가 신중을 기하며 말한다.
"우리가 먼 길을 오느라고 모두들 지쳐 있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적정(敵情)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에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자."이리하여 초군은 저마다 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였다.한편, 왕릉은 그날 밤 먼 길을 달려 온 적들이 피곤에 지쳐 잠들기를 기다려
동서 남북 사방에 마른 풀을 여러 군데 쌓아 놓고, 한밤중에 야습을 감행할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가고 있었다.그리고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5백 명의 돌격대에게는 머리에 붉은 두건을 씌우고,
옷도 붉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손에는 횃불과 단도 하나씩을 가지고 있게 하였다.
그야말로 <붉은 도깨비>의 형상이 치솟아 오르는 모양을 갖추도록 시킨 것이었다.
이런 태세가 갖춰지자, 이번에는 대장 하후영에게 군령을 내린다.
"잠시 후에 사방에서 불길이 우리의 <붉은 도깨비 부대>는 적진속으로 총돌격을 감행할 것이오.
그러면 적들은 처음 보게되는 <붉은 도깨비>의 내습에 크게 당황하여 모두 도망을 치게 될 것이니,
하후영 장군은 그때를 놓치지 말고 3만 군사로써 도망하는 적들을 모두 베어 버리시오."
초나라 군사들은 이같이 무시무시한 야습이 준비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모두들 정신없이
잠에 떨어져 있었다.잠시 후,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 오름과 동시에, 손에 손에 횃불을 밝혀든
5백여 명의<붉은 도깨비 부대>가 괴성과 함께 진고를 울리며 초군 진지의 한복판으로 밀려
들어가니,잠 속에 빠져 있었던 초병들이 혼비 백산하여 도망을 치기 바빴다.
"이게 웬 난데없는 날도깨비들이냐 ? "붉은 도깨비 놀란 초군이 정신없이 도망을 치며
그런 소리를 외쳤는데, 실상 도깨비 부대는 5백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겁에 질려 도망을 가는
초군 병사들의 눈에는 1만이 넘어 보이는 무시무시한 대부대였다.
초병들이 어둠 속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후영의 부대가
도망가는 초병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장검으로 베어 죽여서, 들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붉은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중군(中軍)에서 자고 있던 항우가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무장을 갖추고 달려와 보니, 한 사람의 적장이 도깨비 부대의 선두에서 종횡 무진하며
아군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크게 분노하여 장검을 휘두르며
적장을 향하여 비호같이 달려갔다."이놈아 ! 싸우려거든 어디 나에게 덤벼 보거라 ! "
항우(項羽)는 적장을 한칼에 찔러 죽일 요량으로 고함을 지르며 번개처럼 돌진해 갔다.
그러나 적장은 항우가 생각한 것처럼 만만치가 않았다.적장은 번개처럼 덤벼오는 항우의 공격을
옆으로 살짝 비키더니 오히려 반격을 가해 오는 것이었다.이렇다 보니 두 사람은 정면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웬만한 장수들은 항우 앞에서는 독수리에게 쫒기는 병아리처럼 맥을 못 춘다.
그러나 지금 항우와 겨루고 있는 적장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항우가 아무리 질풍같이 덤벼도 <붉은 도깨비 부대의 대장>은 그때마다 몸을 가볍게 피하면서
날카롭게 반격을 가해 오곤 하였다.
항우는 약이 오를대로 올라, 이번에는 장여(丈餘)의 철퇴(鐵槌)를 바람개비 처럼 휘둘러댔다.
아무려니 <도깨비 대장>도 그것만은 당해 낼 수가 없었던지, 그제서야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항우는 위신이 손상된 것에 크게 분노하여, 적장을 얼마간 쫒아 가다가 추격을 멈추고
부하에게 이렇게 물었다."지금 나에게 덤벼들다가 도망간 적장은 도대체 어떤 놈이냐 ?"
부하가 대답한다."그는 다름 아닌 한장(漢將) 왕릉(王陵)이옵니다."
"뭐야 ? 그자가 바로 내가 평소부터 유인해 오고 싶어했던 왕릉이란 말이냐 ?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다시 쫒아가서 그자를 붙잡아 와야만 하겠다."
항우는 진작부터 왕릉의 고명을 들었던 터인지라, 그를 자기 부하로 삼고 싶어 했었다.
그리하여 지금이라도 왕릉을 붙잡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계포, 종이매, 용저등 모든 장수들이 앞을 가로 막으며 만류한다.
"폐하 !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폐하께서 직접 잡아오지 않으셔도 왕릉을 제발로
걸어오게 할 수있는 좋은 방법이 있사옵니다.""어떤 계략인지, 어서 말해 보아라."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왕릉의 어머니를 볼모로 잡아 두고 있사옵니다.
왕릉은 누구보다 더 효성이 극진한 사람이오니, 왕릉의 어머니를 이 자리에 끌어다 놓고
죽이려고 하면, 왕릉은 꼼짝없이 제발로 달려오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왕릉을 붙잡아 두게 되면 영양성도 우리 손에 쉽게 함락시킬 수 있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계략을 듣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다.
"과연 명안 중의 명안이로다.그러면 사람을 급히 보내어 왕릉의 어미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여라 !"
항우의 명령에 의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데려오려고 비마가 팽성으로 급히 달려갔다.
한편, 왕릉이 <도깨비 부대>의 야습으로 커다란 전과를 올리고 돌아오니,
한왕은 원문까지 마중을 나와왕릉의 손을 잡으며 치하한다."장군은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격파했으니, 그 전공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간밤에 전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오나,
항우가 아직 물러간 것은 아니오니 우리는 금후의 대책을 긴급히 세워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자 쟝량과 진평이 함께 나서며 한왕에게 아뢴다."한신 장군이 위나라를 평정했다고는 하오나,
그쪽 사정이 복잡하여 속히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그러므로 지금 당장 우리는 항우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이 아니라, 한신 장군이 돌아올 때까지는 지키기만 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한왕은 장량의 말을 옳게 여겨, 공격을 회피하고 수비 위주로 나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항우는 영양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한 번도 싸움을 걸어 오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
그렇다 보니 오히려 이 편에서 불안감이 점점 증폭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사 하나가 왕릉에게 달려와 아뢴다.
"장군님 ! 큰일났사옵니다. 항우가 지금 장군님의 자당(慈堂)어른을 팽성에서 이리로 끌어다 놓고
죽이려 한다고 하옵니다."왕릉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항우가 볼모로 붙잡아 두었다는 나의 어머님을 이리로 끌어다 놓고 죽이려 한다고.... ?
너는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느냐 ?""자당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드님을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최후의 말씀을 저쪽에서 전하는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장군께서 지금 당장 달려가시지 않으면
자당을 영원히 못 뵙게 되리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왕릉은 그 말을 듣고 목을 놓아 울다가 한왕에게 달려가 자신의 고충을 사실대로 아뢴다.
"신의 노모가 70 이 넘었사오나, 신은 아직까지 노모에게 변변한 효도 한 번 한 일이 없사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항우가 신의 노모를 볼모로 끌어와 죽이려 하므로, 노모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신은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어머니를 구해 보고 싶사오니, 신이 항우를 찾아갈 수 있도록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신이 비록 항우를 찾아가더라도 대왕에 대한 일편 단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이옵니다."한왕은 그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장량을 불러 물었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지 선생께서 슬기로운 지혜를 알려주소서."
장량은 오랫동안 심사 묵고하다가 조용히 머리를 들며 왕릉에게 말한다.
"장군이 노모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소. 그러나 노모를
구하기 위해항우를 찾아 가겠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오.
항우는 며칠 전 장군에게 대패했기 때문에, 장군을 쉽게 제거해 버리려고 이런 못된 사술(詐術)을
쓰고 있는데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면 어떡하오.노모께서 실제로 항우의 진지에 끌려 오신지
확실한 사실조차 모르면서 심부름꾼의 말만 믿고 달려가면 어떡하느냔 말이오.그러하니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어, 노모가 그곳에 나와 계신지부터 확인해 보는 것이 순서일 듯 하오.
아울러 노모께서 일선에 붙잡혀 오셨다면, 노모의 친필 서한을 받아 오게 합시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항우를 찾아 가는 것은 그 후의 일이오."
과연 장량의 논리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었다.
한왕은 장량의 논리에 크게 감탄하면서, 왕릉에게 달래듯 말했다.
"자방 선생의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이오. 그러면 모사 숙손통(叔孫通)을 보내, 자당께서 정말로
항우의 진영으로 끌려 나와 계신지 어쩐지 우선 그것부터 확인하기로 합시다.
이 후의 문제는 확인이 되는대로 다시 논의하기로 합시다."모사 숙손통이 어명을 받들고 초진으로
항우를 찾아가니, 항우는 매우 퉁명스러운 어조로 숙손통에게 말한다.
"왕릉은 나와 고향이 같은 패현(沛縣) 사람이오. 따라서 왕릉은 같은 고향사람인 나를
섬겨야 옳을 일인데,그자는 유방을 도와 나를 크게 해치고 있소.
그래서 나는 그자의 어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지금이라도 그자가 나를 찾아와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을 한다면, 어미와 함께 아들을 모두 살려 줄 용의가 있소.그러나 그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자의 어미를 죽여 불효자의 악명(惡名)을 천추에 남게 할 생각이오.
"이렇게 말하는 항우의 기세는 매우 험악하였다. 숙손통이 조용히 반문한다.
"왕릉 장군의 어머니를 한 번 만나 뵙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오 .... 여봐라 ! 왕릉의 어머니를 이자리에 끌어내 오너라! "
이윽고 왕릉의 노모가 형리들에게 끌려 나오자 숙손통에게 묻는다.
"귀공은 어디서 오신 누구시기에, 나 같은 늙은이를 만나자고 하시오 ?"
숙손통은 허리를 굽혀 정중한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다.
"저는 왕릉 장군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랍입니다.자당께서 지금 고초를 겪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왕릉 장군이 몹시 괴로워하고 계시옵니다.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장군께서는 자당을
구하시기 위해 이리로 직접 찾아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라옵건데 자당께서는 아드님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을 한 장만 써 주시옵소서. 장군께
그 서한을 전달해 올리면 즉시 이곳으로 달려오실 것이옵니다."
숙손통은 왕릉의 어머니가 이같은 아들의 전갈을 들으면 응당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 죽게 된 자신을 아들이 달려와 살려 주겠다는데,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나 ?
그러나 왕릉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노파는 숙손통의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얼굴에 노기를 띠며 큰소리로 꾸짖는 것이었다.
2-7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