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랫동안 바빴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고 그동안 내가 이뤄놓은 일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얻은 게 없었다. 그저 가진 것을 잃고 싶지 않아 방어의 벽만 켜켜이 쌓아올렸던 것뿐이었다. 문득 모든 게 외로워졌다. 하늘에 떠있던 구름조각도, 그늘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봄날에 광합성도 못하는 나무도, 길가에 서있는 가로등 옆에 빈 의자도, 봄바람에 슬프게 날리는 꽃잎들도 모두 다 외로워지고 말았다. 이렇게 슬플 때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주는 친구가 필요했다. 나는 아무 연락 없는 핸드폰을 무심코 꺼내들었다. 그리고 폴더를 열고 한자리수의 단축번호를 꾹 눌렀다.
“어, 난데. 오늘 시간 돼? 알겠어. 그럼 너 수업 끝나고 저녁 7시쯤에 'If'에서 보자. 응. 끊는다.”
아주 간단한 전화 통화. 가식과 겸손의 인사말 따위는 없는 진정한 대화였다.
희성이와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얇은 후드를 입고 단화를 꺾어 신은 채 집에서 몇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카페 'If'로 향했다. 카페에 들어서니 온통 공주풍의 레이스로 꾸며져 있었다. 어둑어둑 해지는 저녁하늘이 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자 딸랑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희성이가 들어왔다. 날 발견한 희성이는 살짝 손을 흔들며 내 쪽으로와 자리에 앉았다.
“웬일이냐? 네가 이렇게 일찍 와있고.”
앉자마자 희성이는 의외라는 듯 나에게 말했다. 나는 희성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있던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
“뭐 마실래?”
“난 여기 파르페가 제일 좋아, 파르페 먹을 거야. 넌 하와이안 펀치 마셔라.”
아직 봄인데 하와이펀치를 마시라는 희성이를 잠깐 쳐다본 후 종업원에게 파르페와 캐러멜모카를 주문했다.
“여기 파르페랑 캐러멜모카 주세요.”
종업원이 주문을 받은 후 나는 창가너머의 어두운 하늘과 수많은 건물들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야경으로 감상에 젖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야. 이민정! 어이가 없다. 사람을 불러놓고 혼자 분위기 잡고 있냐? 할 말 있지? 빨리 말해봐.”
희성이가 팔짱을 낀 채 내게 말했다. 나는 괴고 있던 턱을 빼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할 말은 없고 그냥 울적해서 만나자고 한 거야. 봄타나봐.”
“네가 봄 타는데 귀찮게 왜 나를 불러낸 거야?"
그 말에 한번 눈을 흘기니 희성이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야, 농담이야. 농담. 울적하니까 수다나 떨면서 얘기나 하자. 나도 요즘 1학년 때보다 과제가 배로 늘어나서 죽을 맛이었거든.”
과제 얘기로 나는 다시 울적해진 마음으로 지난날을 생각하며 희성이에게 대답했다.
“아, 나는 올해 들어서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뭐하고 살았는지 시간이 어떻게 지난건지. 이런 생활 반복되면 혼자 우울해져서는……. 난, 뭐 이러냐. 울적한데 너 같은 애랑 수다나 떨며 기분이나 풀어야 한다니.”
일부로 과장된 슬픈 표정을 보이며 말장난을 하니 희성이가 실실거리며 말했다.
“널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게 잘못이다.”
“우리 집보다 너네집이 여기랑 더 가깝거든?”
서로 말이 끝나자마자 웃었다. 재밌는 이야기라서 웃는 것도, 재미없어서 억지로 웃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이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것에도 우정이 가미되었기에 맑게 웃을 수 있는 것이었다.
“주문하신 캐러멜모카와 파르페 나왔습니다. 그리고 서비스인 티라미스케이크입니다.”
종업원이 캐러멜모카와 파르페, 케이크를 들고 와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캐러멜모카가 내 앞에 놓였다. 휘핑크림이 부드럽게 캐러멜 시럽과 어울려 있었다. 쫌 살살한 봄날 우울함에 갇힌 나에게 위로를 하듯 부드럽게 모양을 뽐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살짝 뜨거운 잔을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희성이는 서비스로 나온 티라미스케이크를 엄청난 속도로 먹고 있었다. 입주위에 코코아가루가 덕지덕지 묻어있었고 그 입으로 나에게 말했다.
“야, 너 저번에 시간 없다고 동창회 안 갔잖아.”
나는 희성이의 말을 듣고 컵을 만지던 손을 멈췄다. 동창회? 희성이와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곳을 다녔고 그 와중에 같은 반이 된 경우도 많았다. 새 학기쯤 동창회를 많이 해서 희성이가 말하는 동창회가 어떤 동창회인지 기억이 안 났다. 그리고 동창회 연락이 와도 난 단 한 번도 가지 않았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싫을뿐더러 그들과의 관계는 친구라고 하기엔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도 아니었고 그저 얼굴만 알고 서로 의미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굳이 만나러 갈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희성이에게 말했다.
“나 원래 동창회 안가. 귀찮고 만날 필요도 없고…….”
희성이는 내 말을 듣고 놀란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귀찮고 만날 필요가 없다니? 5학년 때 애들이랑 만나는 동창회였어. 거기에 소영이도 겨우 연락돼서 왔단 말이야!”
나는 캐러멜모카의 휘핑크림을 빨대로 뭉개며 희성이의 말을 생각했다. 5학년 때? 소영이?
기억은 희미하지만 뭔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휘핑크림을 거의 녹이다시피 휘저으며 희성이에게 말했다.
“야, 잠깐. 나 초등학교 때 기억이 별로 없어. 그냥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소영이가 혹시 5학년 때 너랑 나랑 같이 놀았던 애였냐?”
희성이는 티라미스 케이크를 남겨두지도 않고 다 먹고 나서 파르페를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듣고 순간 손동작을 멈췄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이민정, 너 완전 실망이다. 우리만큼은 걔 기억해줘야지. 우리가 얼마나 친했었는데! 특히 소영인 나보다 너랑 더 친했어.”
“아……. 그랬나?”
다혈질인 희성이가 공격형 자세를 취하고는 나에게 덤벼들 듯 말했다.
“‘아! 그랬나?’ 이게 아니라 ‘맞아! 우리 친했지!’ 이렇게 나와야지. 어떻게 너는 친한 친구를 잊고 사냐?”
‘잊고 사는 게 한 둘이어야지.’ 라고 가볍게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희성이가 보통 때보다 진지한 모습이었다. 난 또 깊게 생각해봤다.
무엇 때문에 기억을 못하는 걸까? 어쩌면 자연스럽게 잊게 되어버린 거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이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에……. 기억이 과거가 되어버린 것은 무덤 속에 들어간 송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본래의 모습은 썩어버리고 대부분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아주 희미한 흔적만 남기 때문이다. 어쩌면 희성이처럼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나처럼 잊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아주 희미한 기억만 남겨둔 채 말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나 기억력 나쁜 거 이해해. 넌 동창회 간 거야?”
내 물음에 희성이는 다시 편안하게 자세를 고치고 내게 말했다.
“나야 당연히 가지. 그런데 애들은 별로 안 왔어. 너도 안 왔고. 아무튼 동창회 하자고 한 박인하가 어쩌다가 소영이랑 연락이 됐나봐. 무슨 친구의 친구가 소영이랑 같은 학교라고 하면서 연락이 됐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그 자리에 소영이도 왔었던 거야. 진짜 얼마나 반갑던지. 걔도 나 기억하더라. 물론 너도 기억하고 있고.”
희성이가 말을 마치고는 파르페를 퍼먹기 시작했다. 예쁜 모양의 파르페가 처참히 망가지고 있었다. 순간 희성이의 파르페와 땅에 떨어져 서서히 녹고 있었던 아이스크림이 겹쳐 보였다.
‘엇! 내 아이스크림! 이민정! 너!’ 초등학교 옆 분식집. 그곳에서 팔던 값싼 콘 아이스크림. 나의 장난으로 누군가의 딸기 맛 아이스크림이 과자만 남겨둔 채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나의 모습. ‘네 아이스크림 같이 먹으면 되지. 뭐.’라고 말하는 아이. 분명히 웃었던 것 같은데 하얗게 끊어져 기억이 안 나는 그 아이의 얼굴.
“이민정! 대답해봐. 뭘 그렇게 생각해?”
희성이의 말소리에 눈앞에 겹쳐졌던 아이스크림의 모습이 파르페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파르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맛있어 보여서. 보고 있었어.”
희성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수저로 파르페를 더욱더 망가뜨렸다. 그러면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대충 말하자 희성이의 파르페가 아까의 그 파르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변형되고 있었다. 나는 그 파르페를 보며 다시 말했다.
“그거 먹을 수는 있냐? 농담이고. 내가 진짜로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래. 옛날 얘기 좀 해봐. 기억날지도 몰라.”
희성이는 질퍽거리는 파르페를 먹으며 회상을 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너랑 나 5학년 때 만난 건 알지? 나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소영이는 확실히 기억나. 엄청 친했었어. 나는 쫌 늦게 친해진 거였어. 너랑 소영이가 먼저 같이 다녔지. 그 후에 조별숙제였나? 숙제하면서 우리 집에 너랑 소영이랑 몇몇 남자애들이 왔었어. 숙제하다가 남자애들은 축구한다고 하면서 나가고 우리 집엔 나랑 너. 그리고 소영이가 남아있었어. 그땐 너희 둘은 친했는데 나는 혼자 안 친해서 어색해 하고 있었지. 그러다가 소영이가 내 방에 있던 미미인형을 보고 자기도 그 인형 사고 싶었다고 얘기하면서 친해진 거지. 서로 관심사가 비슷했으니까. 그 후 당연히 너도 나랑 친해졌지. 우리 만날 같이 다녔었잖아. 아! 우리가 소영이 염소라고 불렀던 건 기억나? 애가 얼굴은 하얘가지고 눈은 쫌 찢어지고 이름도 임소영이라서 우리가 임소영, 임소 그러다가 염소로 불렀잖아. 걔 턱도 쫌 나와 가지고 우리가 맨날 턱 좀 집어넣으라고 하고 걔 턱 내밀고 하는 표정 따라도 해보고. 아……. 진짜 그립다. 초등학교 기억 중에 5학년 때 기억이 제일 많이 나. 너무 재미있었어. 초등학교 때는 시험이다 뭐다 이런 거 신경도 안 쓰고 놀기만 했지. 5학년 땐 진짜 마음 맞는 친구들 만났지. 그때 정말 행복했던 것 같아.”
희성이의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그랬었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아주 먼 이야기인 듯 희성이가 느꼈던 행복이 내게도 존재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이런 이야기들이 내 마음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행복? 어렸을 적 기억? 지금까지 난 찾아보려고 했었던 적이 있었나?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6학년 때 우연히 너랑 나는 같은 반이 되고 소영인 다른 반이 됐지. 반이 갈라진 거야. 역시 많이 못 보니까 서로 관계가 소홀해졌었지. 그러다가 갑자기 소영이가 이사를 갔어. 이사 간다는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바로 이사가버렸어. 우리한텐 말도 없었고 그 반 애들한테도 당일까지 말을 안했었나? 아마 그럴 거야. 그러고는 연락이 끊겼고 이제야 겨우 연락이 된 거야! 이제 쫌 기억나려고 하지?”
기억날 것 같다. 희미하지만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다.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그 아이가 생각날 것만 같았다.
“희성아. 나 생각해보니까 내일까지 과제 내야할게 있었어. 내일 다시 연락할게. 나, 간다.”
나는 없는 과제를 만들어 내고 휘핑크림이 녹아든 캐러멜모카를 반이나 남긴 채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카페를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에 휴대폰을 꺼내 보니 희성이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죽을래?’
카페에 혼자 남겨진 희성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희성이에게는 어렸을 적 이야기꺼리였겠지만 나에게는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아주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 시절의 기억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겨울이 끝나니 낮이 길어졌다. 추운 겨울날이었으면 꽤 어두웠을 하늘이 지금은 옅은 남색과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석양의 빨간빛과 섞여 알 수 없는 빛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석양의 반대편엔 희미하지만 빛나고 있는 달이 머물고 있었다. 오묘한 하늘과 달이 무척이나 멋있게 보이는 날이었다. 문득 벌써 하늘을 보고 감상에 젖어버린 나를 잊어버리듯 빠르게 집으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왔다.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가 아름다운 하늘과 달을 가려버렸다. 나는 가로등이 비추는 벤치에 무의미하게 잠시 앉았다가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고 다녀왔다고 했지만 집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오늘도 늦게 오시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무색해진 내 인사에 화풀이하듯 신발을 내팽개치고 거실에 앉아 TV를 틀었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면서 생각 없이 보다가 그냥 TV를 꺼버렸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 책상 의자에 앉았다.
희성이의 말을 들은 후 마음이 이상했다. 소영이, 임소영, 염소. 희성이가 말해준 후 그전보다 기억이 나긴 했다. 나는 정리 안 된 책꽂이를 샅샅이 뒤져보며 어렸을 적 기억이 될 만한 물건을 꺼냈다. 초등학교 때 앨범이 나와 처음부터 차근차근 보기 시작했다. 학교 교정을 찍은 사진, 선생님들 사진, 1반부터 8반까지 그때 그 아이들의 사진까지 있었다. 사진 속에는 친했다가 연락 안하는 친구도 있었고 별로 안 친했는데 중학교랑 고등학교 때 만나 다시 친해진 애들도 있었다. 어렸을 적 내 모습도 있었고 희성이의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소영이의 사진은 없었다. 아까 희성이가 말한 대로 소영이는 6학년 때 소리 없이 이사를 가버렸기 때문이다. 앨범에서는 소영이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책꽂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순간 눈에 보이는 낡은 공책이 있었다. 나의 소중한 일기가 담겨있던 공책이었다. 공책에 기록된 날짜로는 5학년 때 거였다. 나는 첫 장부터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1999년 3월 2일 화요일 날씨 맑음 오늘은 새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선생님도 좋은 분 같고 친구들도 좋은 친구들 같다. 깜박하고 지우개를 안 가져가서 옆 친구에게 빌렸는데 엄청 착한 애였다. 이름이 임소영이였는데 얼굴이 하얗고 목소리가 엄청 작았다. 내일은 더 친해지고 싶다.’
‘1999년 3월 4일 목요일 날씨 약간 흐림 어제는 깜박하고 일기를 못 썼다. 오늘부터는 열심히 써야겠다.’
‘…….3월 31일 화요일 오늘은 조별 숙제를 하느라 희성이네 집을 갔다. 남자애들을 장난만 치다가 축구를 하러 나갔다. 소영이랑 희성이랑 있었는데 희성이네 집에 미미인형이 있었다. 소영이가 미미인형을 엄청 좋아했다. 나도 미미인형 좋아하는데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희성이는 애가 밝고 착했다. 나도 희성이랑 빨리 친해지고 싶다.’
‘…….5월 24일 월요일 박인하가 내 짝꿍이 되었다. 박인하는 장난을 너무 많이 친다. 빨리 짝 바꾸고 싶다.’
5학년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글 솜씨가 없는 내 일기를 보며 혼자 피식거렸다. 그러면서 여러 일기를 쭉 읽고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몇 개의 장면만 기억날 뿐 진짜 이랬나? 라는 생각만 들었다. 일기는 몇 장 없고 5장정도 아무것도 안 쓰여 있고 남아있었다. 나는 무심코 마지막 장을 넘겼다.
‘우리 우정 영원히♡’
서툰 글씨체로 공책 마지막장에 낙서가 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안날정도로 오래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는 ‘뭐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무언가 기억날 것 같아서 책상위에 낡은 공책, 그 공책을 앞에 두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렸을 적 아주 행복했을 때, 그때의 기억. 아주 멀어진 추억을 나는 꺼내고 있었다. 예전의 우리 집 그리고 나의 아담한 방, 그곳에 놀러온 작은 여자아이, 아무것도 아닌데도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마구 웃어대던 나와 그 아이. 내가 가장 아끼던 공책을 꺼내서 당황하게도 만들었었던 그 아이, 그 공책 뒷면에 가장 아끼던 팬으로 정성스럽게 썼던 짧고 사랑스러운 글귀. 그 아이는 소영이었다. 하얀 얼굴, 쌍꺼풀 없는 눈, 잘 빗어 넘긴 머리, 떨어진 아이스크림 때문에 미안해하던 날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웃는 얼굴이 생각났다. 하얗게 끊어졌었던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고 우리가 같이 했던 모든 것은 끝나있었다. 소영이가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떠난 후부터 추억은 끝나있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바로 눈에 들어오는 글귀.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나는 애써 외면하듯 어린 날의 추억 덩어리인 공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서랍장에 대충 넣어버렸다. 아무래도 추억을 감상하는 일이 나에게는 서툰가보다. 추억을 생각하고 웃는 일은 아직 나에게는 버거울 뿐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민정아, 금요일 날 너무 힘들지 않니? 우리 시간표를 잘못 짠 것 같아.”
대학교 친구인 은주가 엉망인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은주가 말한 만큼 우리의 시간표는 절박했다. 도시공학과로 과제도 어마어마한 양이고 실습으로 밤을 새는 일이 허다한 우리는 금요일이면 낮10시부터 12시까지 엄청나게 나른한 목소리를 지니신 교수님께서 가르치는 사람과 도시(Ⅱ)를 배워야 하고 2시부터 6시까지는 중급설계실습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6시 15분부터 7시 40분까지 컴퓨터 응용인 캐드를 배운다. 아침엔 실습이 아니니까 잠을 견뎌야 하고 그 다음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실습을 하고 그리고 엄청나게 어려운 캐드를 접해야 하는 말만 들어도 기운 빠지는 시간표를 짜버린 것이다.
“진짜 우리 집 컴퓨터가 쫌만 더 빨랐다면 이렇게 안타까운 시간표는 안 나왔을 텐데…….”
은주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피곤한 듯 강의실 의자에 널브러졌다.
“하아, 그래. 아침에 사람과 도시는 견딜 수 있어. 설계실습도 어렵지만 견딜 수 있어! 하지만 캐드 절대 내 실력으로 따라가기 힘들어. 1학년 때 쫌만 더 꾸준히 수업을 제대로 들었다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크서클이 눈 밑에 진하게 새겨진 은주가 후회를 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은주의 옆자리에 앉아 책을 꺼내며 말했다.
“지금부터 학원 다녀봐. 아직 우리 2학년이야.”
“그래. 새겨들을게. 아, 피곤해.”
은주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피는데 강의실 앞문으로 누군가 들어와 칠판에다 대문짝만하게 글을 썼다. 순간 은주의 표정이 밝아지며 주먹을 꽉 쥐고 나이스를 연발했다.
-사람과 도시 휴강.
“나이스! 하늘이 날 도왔어. 정말 행복해. 민정아! 동아리방 가있자. 빨리!”
은주가 급하게 날 잡아 끌면서 동아리방으로 데려갔다. 동아리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주는 가장 넓은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가지고 피곤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책을 보려고 꺼내놓고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나는 어땠지? 어렸을 적 나는 밝은 성격이었다. 쫌 엉뚱한 면도 있었지만 사람을 좋아했고 사람들과 지내는 일을 좋아했다. 주위에는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도 많았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인간관계를 가볍게 생각했다. 모든 사람을 쉽게 사귀고 쉽게 잊어버리는 나 자신이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때는 계산하지 않고 사람을 대했다. 그때의 나는 순수했고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았던 적이 많았다. 그만큼 웃음도 많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많은 사람을 만나보니 어떤 상황엔 이 사람을 이렇게 대해야 하고 다른 사람은 이렇게 대하고 또 다른 사람은 다르게 대하는 나를 보았다. 모든 사람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타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타산적으로 변한 나 때문에 혼자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변했고 나는 스스로 내가 나쁘지 않다고 합리화해왔었다. 지금도 나는 그 합리화를 깨부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편하게 앉아있던 은주가 날 힐끔 보며 물었다. 나는 무언가 들킨 것 마냥 손을 흔들어대며 아무생각 안했다고 했다. 하지만 은주는 날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무슨 고민 있지? 말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 나 고민상담 잘하는 거 알잖아?”
은주는 편한 친구였다. 사람을 대할 때 예의를 알았고 가끔 자기 의견을 내세울 때가 있었지만 그건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였다. 무엇보다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성격과 그에 따른 조언을 서슴잖게 해주는 믿음이 가는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내 심정을 말했다.
“하아, 은주야. 아주 오래전 나한테 엄청나게 친했던 친구가 있었어. 그런데 친했던 그 친구가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친구를 서서히 잊어갔어. 아주 당연히……. 근데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 친구가 기억도 안 나는데 주위에서는 나를 막 이해 못하겠다고 해. 어떻게 친했던 친구를 잊을 수 있냐고……. 너라도 내가 이해가 안가?”
은주는 턱을 괴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말했다.
“잘 모르겠다. 내가 그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네 마음은 이해가 될 것 같아. 사람이 사람을 잊는다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어쩌면 너는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그 친구가 실망스러워서 기억을 지웠던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오랜 시간동안 그 아이를 못보고 그 시간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기억 못하는 걸지도 몰라. 지금 네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친구가 아니잖아.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소중한 게 항상 바뀌지. 주위사람들이 그런 너를 나쁘다고 해? 아냐. 난 나쁘다고 생각 안 해. 설마 너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 건 아니지?”
자책이라……. 희성이가 소영이를 기억 못하냐고 물었을 때부터 난 내 자신이 왜 이렇게 변했을 까라는 생각과 소영이를 기억하고도 부담스러워서 기억을 억지로 하지 않으려고 한 내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어떠하든 난 지금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부끄러웠어. 변한 내 자신이……. 누군가 이렇게 변한 내 모습을 알까 두렵고…….”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자책하지마. 사람이 변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건 어떠한 사람도 알고 있어. 네가 나쁜 게 아니야. 아무 잘못도 없어. 그냥 ‘친했었구나.' 라고 생각하면 돼.”
은주의 말이 맞다. 내 합리화가 맞다. 내가 끝까지 우겼던 합리화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합리화였다. 누구든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바뀌어버린 자신을 위해 변호하는 방어의 벽을 만드는 것이다.
“은주야. 고마워. 도움이 됐어.”
점심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캐드시간이었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빨간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한참 수업을 하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희성이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너 오늘 늦게 끝나는 날이지? 같이 고기먹자.’
수업 때문에 7시 40분까지 밥도 못 먹고 수업을 듣기 때문에 희성이가 말하는 고기가 무척이나 간절했다. 나는 빠른 속도로 답장을 했다.
‘나 7시 40분에 끝나. 어디서 먹을 건데?’
‘너희 학교랑 가까운 곳에서 보자. 8시에 [백돼지흑돼지] 오케이?’
‘OK'
문자를 마치고 고기 생각으로 시계만 쳐다봤다. 캐드수업은 점점 복잡해졌고 끝날 때쯤에 교수님께서 내일하고 일요일은 쉬니까 과제를 많이 내주겠다면서 책에서 엄청 어려운 부분을 하라고 하시고는 수업을 끝내셨다. 많은 학생이 교수님을 외쳤지만 과제는 피할 수 없었다. 가방에 책과 이것저것 물건들을 넣고 은주와 다른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섰다.
붉었던 하늘은 밝은 남색으로 변해 있었고 구름은 검게 깔려있었다. 그런 하늘을 잠시 바라본 후 나는 길을 걸었다. 저녁이 되니 현란한 색상의 네온불빛들이 길을 비췄다. 옆에 도로에는 부앙- 부앙- 거리는 찻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길가엔 같은 학교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나는 [백돼지흑돼지]로 가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도로 옆 길가와는 다른 느낌의 길이었다. 회색의 벽이 좁게 쌓아올려져 있었고 그 벽에는 아무렇게나 붙여진 광고종이들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골목으로 더욱 들어가니 낡은 간판에 [백돼지흑돼지]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희성이가 아직 도착 안했을 것 같아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전화를 건 순간 내 뒤에서 낯선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내가 뒤를 돌아보니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희성이와 마주쳤다. 희성이는 자기 핸드폰을 보며 나에게 말했다.
“안 들어가고 뭐해? 들어가자.”
나는 핸드폰의 폴더를 닫고 희성이와 고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뿌연 연기와 이곳저곳에서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자리를 잘 살피고 외진 곳에 비어있는 자리로 갔다. 그런데 뒤에서 희성이가 내 등을 툭 치며 “이쪽이야.” 라고 말하며 날 다른 테이블로 안내했다. 희성이가 안내한 테이블에는 웬 낯선 여자가 앉아있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와 뿌연 연기 사이로 보이는 여자. 낯설었지만 낯설지 않은 여자였다. 연기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하얀 피부색을 가진 여자였다. 왠지 어렸을 적 소영이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나는 희성이와 그 여자를 뿌연 연기사이로 번갈아 보면서 의아해 했다. 소영이로 보이는 그 여자는 나를 보며 조금 반기는 얼굴을 보였고 나는 그 얼굴을 순간 외면해버리고 싶었다. 희성이가 어색해 하는 날 보더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앉아봐.”
희성이가 나를 잡아끌며 앉으라고 했고 나는 얼떨결에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내가 앉고 바로 희성이는 바로 말을 꺼냈다.
“야, 민정아. 기억나지? 그 때 말한 소영이. 우리 5학년 때같이 잘 놀았잖아.”
당연히 기억난다. 낡은 공책, 그 글귀의 주인공. 추억속의 그 아이.
눈앞에 있는 여자는 내 기억 속 아이와는 많이 달랐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커버린 모습, 어렸을 적 얼굴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많이 변해버린 얼굴. 그리고 이 공간에 흐르는 공기부터 이미 예전과는 너무나도 변해버렸다. 어렸을 적 운동장에서 날리던 모래와 밀폐된 고기 집의 연기는 절대 같지 않았다.
내가 소영이로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입을 열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민정이 맞지? 이민정! 반가워!”
엄청 조그마한 목소리도.
“나 기억나지? 소영이. 너희가 만날 염소라고 놀렸잖아.”
조심스러운 말투도.
“나 이사 가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예전과는 다르게 모두 변해버렸어. 너무나도 당당해진 모습으로 변해버렸어.
“너무 급히 떠나느라 연락처도 못 남기고……. 민정아?”
소영이의 목소리가 끊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멍한 나의 초점을 소영이가 애써 맞추고 있었다. 나는 순간 웃었다. 진짜 웃음이 아닌 어떠한 의미도 없는 웃음을 지어버렸다.
소영이나 나나 이미 많이 변해버린 사람들이었다. 단지 서로를 기억하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이미 은주한테 답을 얻었다.
“맞아. 그 소영이. 당연히 기억나지! 왜 그렇게 말없이 이사가버렸어?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가장 그럴싸한 말로 겉을 포장해버리는 내 모습에 또다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아줌마! 여기 ‘백돼지흑돼지 세트’ 3인분이요!”
희성이가 오른손을 흔들며 주문을 했다. 아주 빠르게 밑반찬들이 상위에 놓였다. 주위는 시끄럽지, 사람들은 바쁘지, 내 앞에는 10여년 만에 만난 낯선 친구가 앉아있지, 여러 가지 문제로 난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세트로 시킨 음식이 놓이며 불판위에 삼겹살이 구워지기 시작했다. 여기 오기 전까지 고프던 배가 감각이 없었다. 스스로 기름을 짜내고 있는 삼겹살 또한 먹음직스러워 보이기는커녕 매스꺼웠다. 소영이가 나에게 젓가락을 건네며 삼겹살 좀 먹으라고 말했다. 나는 젓가락을 받고 억지로 삼겹살을 양념에 찍어 입안으로 넣어 꼭꼭 씹었다.
“맞다. 소영아, 너 왜 말도 없이 이사 간 거야?”
희성이가 소영이에게 물었다. 내가 가장 궁금해 했었던 물음을 희성이는 아주 가볍게 물었다.
“아~ 나 사실 자존심이 엄청 세거든. 근데 6학년 때 아빠 사업이 쫌 문제가 생긴 거야. 너희한테 말할까도 생각했는데……. 어린나이에 자존심도 상하고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도 안하고 이사가버렸어. 엄청 후회했었어. 그렇다고 해서 너희를 만나러 갈수도 없었어. 너무 멀리 이사 갔었거든.”
희성이가 어디로 이사 간 거냐고 물어보니 소영이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외국으로 나갔었어. L. A에서 한동안 살았었어. 진짜 외국생활은 적응 못하겠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친구들도 쉽게 사귀기 힘들고……. 무서운 건 잦은 지진 때문에 접시가 깨지고 난리가 나는데 같이 있어줄 친구가 없었다는 거야. 그렇게 두렵고 힘들 때마다 너희 생각이 엄청 간절했어. ‘내가 이사만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이면 그 친구들과 예전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루에 수백 번도 더했지.”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기억들로 머릿속을 채워갔지만 소영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소영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동정의 눈길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나와 소영이는 같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옛이야기가 시작되고 모두들 이야기를 위해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몇 안 되는 기억을 남겨둔 채 희성이와 소영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에게 없는 추억을 그 아이들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 예전에 같이 줄넘기 연습한다고 운동장에 남아 있다가 어두워져서 무서워했던 날 기억나? 그때 민정이 너였나? 네가 무서운 얘기까지 해서 우리 완전 울고 난리 났잖아.”
소영이가 옛날이야기를 꺼내며 웃는다. 나와 희성이도 따라 웃었다. 희성이가 웃다가 나에게 물었다.
“야, 그때 네가 했던 말 기억나?”
“엇! 고기 탄다!”
희성이의 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던 나는 고기가 타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하나 집어먹었다.
“아, 소영아 그런데 그 무서운 얘기가 뭔지 알아?”
희성이는 내가 더 탈까봐 골라냈던 고기를 집어먹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희성이의 물음에 소영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아니. 잘 기억 안나.”
희성이가 고기를 입에 문 채 웃으며 말했다.
“밤 12시가 되면 이순신동상이 움직이면서 소영이 네 얼굴로 변한다는 내용이었어. 사실 그냥 들으면 웃겼을 내용인데 그날 밤에 들으니까 엄청 무서운 거야. 너도 무서웠는지 막 울었었는데!”
희성이와 소영이가 하하거리며 웃는다. 분명 재밌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 웃어지질 않았다. 이 자리에서 웃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괜스레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옆에 있던 많은 양의 휴지를 손에 꽉 쥐고 땀을 닦아낸 후 후드티에 달린 주머니 속에 넣고 다시 젓가락을 집었다.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없이 먹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가고 환풍기도 제대로 돌아가는지 뿌옜던 연기가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고기 기름 때문에 얼굴이 번질거렸다.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내 파우더로 빨리 수정을 했다. 그걸 보던 희성이가 나에게 질책하듯 말했다.
“야! 이민정! 너는 무슨 친구들 앞에서 화장을 고쳐. 우리가 무슨 남이야?”
나는 그 말에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희성이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희성이는 몰라도 아까부터 소영이가 불편하게 느껴져 스스로 어색해하고 있었기에……. 나는 조용히 화장품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다 먹었으면 가자. 나 주말에 과제 때문에 바쁘다고.”
희성이는 일어나는 내내 나보고 분위기를 못 맞춘다는 등 오랜만에 소영이를 만났는데 2차도 못가냐는 등 해코지를 하듯 나에게 말했다. 나는 먼저 [백돼지흑돼지]를 나섰다. 하늘이 더 어두워져서 그런지 회색의 벽들도 더 어두워보였다.
이윽고 소영이와 희성이가 따라 나왔고 나는 순간 소영이의 옷을 보고 놀랐다. 고기집안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소영이의 옷차림은 꽤 비싸 보이는 옷으로 세탁을 맡기면 돈이 꽤 나가는 옷들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야, 소영아. 너 고기 집 오는 거 몰랐어? 왜 그런 옷 입고와. 고기냄새 배면 얼마나 처리하기 힘든데.”
소영이가 다시 한 번 멋쩍은 듯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을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소중한 친구들인데 당연히 차려입어야지. 오랜만에 보는 내 모습을 꽤 깔끔한 이미지로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저렇게 보일정도로 우리가 중요했나? 나는 소영이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은 미안함과 죄책감이었다.
나는 소영이를 잊고 있었지만 소영이는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와 희성이를 변함없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인연에 연연하는 거지? 소영이가 아무리 나를 기억해주고 생각했어도 정작 나는 그 아이를 반갑다고 느낀 것도, 다시 만나서 기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을 또 한 번 만나는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
우리 셋은 아무 말도 없이 골목을 빠져나왔다. 골목을 나서자 소영이가 나에게 말했다.
“민정아. 네 핸드폰 좀.”
나는 소영이의 부탁대로 핸드폰을 건넸다. 소영이는 자신의 번호를 내 핸드폰에다가 입력하고 저장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면서 말했다.
“염소라고 저장했어. 나중에 꼭 연락해.”
나는 손에 건네진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잠시 보다가 희성이를 보면서 말했다.
“아, 이제 가야겠다. 희성아, 너는 민정이랑 같은 방향이지? 지하철 타고 가는 거야?”
“응. 너는?”
“버스로 바로 가는 거 있더라고. 버스타고 가려고. 난 그럼 갈게. 나중에 보자.”
소영이는 짧은 인사를 하며 반대편 길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 아이의 ‘나중에 보자’라는 말이 한참을 내 마음에 걸렸다.
역으로 향하는 길에 희성이가 나에게 말했다.
“야, 내가 아까 분위기상 말 안한 게 있는데……. 너 어제 카페에서 돈 안내고 가서 내가 다 냈다.”
생각해보니 어제 자리를 피하 듯 뛰쳐나갔기 때문에 돈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나는 희성이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하며 나중에 꼭 파르페 사주겠다고 말했다. 희성이는 맘대로 하라고 하며 다른 말을 꺼냈다.
“야. 너 소영이 별로 반갑지 않았지? 고기 집에서 내가 봤어. 너 엄청 어색해 하는 거. 왜 그런 거야? 나한테 말해봐.”
나는 희성이의 물음에 속에 있던 응어리들을 풀어내듯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모두 말했다.
“어제 네가 카페에서 소영이 얘기했잖아. 그 얘기 듣고 혼자 집에서 옛날 물건 꺼내고 어렸을 적 생각을 해봤어. 그런데 나한테 너무 버거운 거야. 너랑 소영이는 웃으면서 얘기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너무 낯설었어. 그 때 행복했던 것도 기억나고 엄청 친했던 것도 기억나는데 지금은 아니었어. 난 스스로 너무 낯설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야……. 오늘 같은 과 친구한테 물어봤어. 내가 잘못된 거냐고. 걘 아니라고 했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기억들이 생겨남에 따라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한 게 바뀌었다고 말해주더라. 그 말 듣고 마음이 편해졌어. 그런데 오늘 소영이가 외국에 있었을 때를 말했을 때 너무 미안했었어. 나는 어렸을 적 수많은 기억과 추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아인 우리와 지냈던 추억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 소영이처럼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지 않아서 너무 미안했어.”
희성이는 내말을 듣고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지하철을 타고 군자역까지 오고 나니까 그제야 희성이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나는 내가 소영이를 기억하고 있어서 너도 당연히 기억하고 만나면 기뻐할 꺼라 생각했어.”
나는 희성이를 보면서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괜찮아~ 빨리 집에나 가.”
“그래. 너도 잘 가라.”
집으로 돌아가는 희성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축 쳐진 어깨위로 추억의 짐이 무겁게 쌓인 것처럼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왔니?”
오늘은 가족들이 다 일찍 집에 있었다. 내 인사가 무색해지지 않게 엄마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라고 대답하며 내방으로 들어왔다. 입고 간 후드티는 고기 냄새가 배어있었다. 나는 그 옷을 벗고 세탁기에 던져버리듯 넣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내 방으로 와서 침대에 누워버렸다. 나는 바지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쭉 보았다. 중간쯤에 새로운 이름이 보였다.
‘염소’
나는 소영이의 번호가 저장된 핸드폰 폴더를 닫아버렸다. 아마 연락은 안할 것이다. 하지만 그 번호를 삭제하면 내 자신이 너무 매정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아 남겨두었다. 나는 머릿속을 정리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일어나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그렇게 피곤했던 것 같지 않았는데 거의 하루의 반을 자버린 나 자신이 신기했었다. 나는 컴퓨터로 캐드 과제와 밀려있던 과제를 하다가 쓸데없이 인터넷을 하며 히히거리기도 했다. 아침 겸 점심으로는 대충 라면을 먹고 잠시 침대에 누워있기도 하면서 집에서 혼자 주말을 즐겼다. 너무나도 무의미하게 혼자 시간을 보냈다.
널려져 있던 옷을 꺼내서 입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여느 날처럼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하고 어떤 구두를 신을까 고민을 하는 내가 있었다. 몇 번 여러 종류의 구두를 번갈아 본 다음에 고른 건 운동화였다. 가장 무난해 보이는 흰색 운동화를 신고 급하게 군자역으로 달려갔다. 겨우 숨을 고르고 주위를 살펴보니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열차가 들어온다는 방송이 들렸다.
-지금 장암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다행이다. 딱 맞춰서 왔네.’ 하며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손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들어가 있었다. 꺼내보니 꽤 많은 양의 휴지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빨래 할 때 같이 빨아져서 원래의 형태를 잃고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휴지조각들이었다.
‘언제 쓰레기를 넣어놨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열차가 들어오면서 지하철 특유의 냄새와 함께 인위적인 바람이 불었다. 그때 손에 들려 있던 휴지조각이 날렸다. 아주 천천히, 멀리,
잡을 수 없이, 잡아야 할 이유도 없이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다.
이미 학교를 가야할 시간은 늦어버렸다. 장암행 열차는 이미 지나갔고 난 열차가 떠나면서 남긴 먼지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 먼지 때문에 나는 아주 슬프게 울어버렸다.
변형 되어버린 주머니속의 휴지조각처럼 나의 추억은 꺼내지 말았어야 하는 하나의 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꺼내어 봐도 다시는 원래로 돌아올 수 없는 주머니 속 휴지조각같이 말이다. 흩어져 버린 휴지 조각처럼 더 이상은 쓸모없이 하찮게 느껴지는 추억을 나는 잡을 수 없었다. 잡고 싶었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영원히 잃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린 나 때문에 추억의 덩어리들은 조각조각 흩어져 버렸다.
세월이 흐르고 모든 사람들은 변해간다. 바로 내 옆에 사람들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그리고 나조차도……. 순수함이란 어린 날의 사치로 변하고 추악함이란 미덕이 되어버린 나에게 잡을 수 없는 추억은 내가 변했다는 걸 더 절실하게 느끼게 했다. 그리고 변한 것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했다.
첫댓글 호오... 약간만 표현을 덧붙이거나 돌려서 말하기 같은것을 넣으면 더 좋을것 같네요,.... 조회수 14 덧글 하나!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만 표현을 덧붙이거나 돌려서 말하기 같은것.을 사용하지 않은것은 제 글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글마다 모두 돌려서 말하기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그저 소설을 하나의 관점으로 보는거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리플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10대가 지난지 반년이네요. 20살이 되고나서 바쁜일이 많다보니 친구라는 자체가 멀리 느껴질때가 많습니다. 아마 나이가 지날수록 주인공보다 더 심하게 저런 감정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