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근원으로
이덕주 지음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1865년 6월 11일에 캐나다 온타리오 주(Ontario) 할디만(Haldiman)에서 태어났다. 하리영(河鯉泳)이라고도 불리었다. 로버트 하디의 초기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칼레도니아(Caledonia)에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마친 후 잠시 교사로 일한 바 있으며, 1886년에는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2학년 재학 중 학생 자원 운동(SVM)의 영향을 받아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며, 보다 직접적으로는 한국 선교사였던 토론토대학교 출신인 제임스 스카트 게일(James Scarth Gale)의 영향을 받았다. 로버트 하디는 1890년 봄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고,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청년연합회(YMCA)의 파송을 받아 그해 9월 30일에 내한하였다.
로버트 하디가 내한했을 때는 제중원 원장 헤론이 이질로 사망(1890년 7월 26일)한지 두 달이 지난 때였고, 후임 의사 빈톤(Dr. C. Vinton)이 내한하기 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버트 하디는 빈톤이 내한하기까지 제중원에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1891년 4월까지 약 6개월 간 제중원의 임시 원장으로 일하였다. 그 후 영국인 세관원 헌트(J. H. Hunt, 하문덕)의 초청으로 1891년 4월 14일 부산으로 와 부산 세관 직원 전용 의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1892년 11월 18일에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가기까지 19개월간 부산에서 활동하였다.
원산으로 이주한 하디는 시약소를 운영하면서 1893년 12월 자신의 선교센터를 건립했다. 그는 북부의 영덕 및 북청과 남쪽의 원주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직접 복음전하고 환자들을 돌봤다. 그러던 중 1898년 미국 남감리회로 이적하면서 이듬해 개성으로 자리를 옮겨 남성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사역을 시작했다.
1900년 12월 15일 원산으로 다시 파송을 받은 하디는 미북 감리회 선교사 맥길(William B. McGill)로부터 의료와 복음사역을 인수받고, 1901년부터 원산과 강원도 통천 지방에서 개척선교사로 3년간 선교활동을 하였지만 별로 결실이 없었다. 그는 청일전쟁의 와중에서 절호의 선교 기회를 잡았음에도 그 결실이 없음을 인해 낙망하고 심한 패배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중국의화단 사건을 피해 1903년 원산으로 피신해 온 여 선교사 화이트(Mary C. White)와 캐나다 장로회 출신 여 선교사 맥컬리(Louise H. McCully)는 한국인의 영적 부흥을 위해 기도회를 시작했다.
맥컬리는 하디에게 효과적인 기도를 위한 세 가지 필수 요소들에 관한 세 번의 강연을 부탁했다. 하지만 하디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무엇인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자신이 선택한 성경본문에서 말하는 신앙이 자신에게 없었고,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회를 준비하던 하디는 자신이 말씀과 깊이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그리고 기도회를 인도하는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통회했다.
이 기도회를 통해 그는 백인으로서 갖는 인종적 우월감, 의사로서의 신분적 교만함, 성령 충만이 없이 해 온 사역 등을 고백했다. 이는 하디 개인의 회개와 통회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성령의 임재가 임하는 통로를 만들어 준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회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하디는 자신의 깊은 영적 체험을 간증하고 회개운동을 촉구함으로 집회마다 참석하는 이들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 은혜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이들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디 선교사는 한국 교회사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룬 중심인물이 되었다.
1908년 원산구역이 지방회로 승격되자 그는 그 지방 감리사뿐만 아니라 선교책임자로 임명되어, 원산구역, 주한명과 함께 영동구역 그리고 이화춘과 함께 간도 지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원산, 평양 부흥운동을 통한 죄의식의 각성과 회개는 한국인의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윤리 및 인권의식 제고와 사회개혁으로 이어져 평양대부흥 이후 1909년까지 950여 개의 기독교 학교가 세워졌고, 한국교회는 금주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한국교회는 축첩제도 폐지, 강제혼 금지, 남녀의 평등한 교육기회 부여, 조혼 금지 등을 주장했다.
이후 서울에서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장 혹은 교수로 활동하면서 구약 신학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1916년에는 감리교 최초의 신학 전문지인 『신학 세계』를 창간하였는데, 이를 통해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문필가로서 혹은 신학자로서 활동하였다. 1935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44년간 한국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던 로버트 하디는 1949년 6월 30일 84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로버트 하디는 신학적으로 비평학을 수용하는 복음주의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감리교 계통의 협성신학교에서 일하였으나 반드시 알미니안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로버트 하디는 보편적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고 선교지에서 기독교의 전파라는 관점에서 복음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로버트 하디는 많은 글을 남겼는데, 『신학 세계』 창간호에서부터 성경을 소개하고 주석을 집필하였고, 『웨슬레의 일기』, 『웨슬리의 도리적(道理的) 강도』[1918] 등의 책을 통해 감리교 신학을 소개하고자 힘썼다.
특히 1920부터 1934년에 걸쳐 성서 고고학, 구약 개론, 구약사, 모세오경, 예언서 등에 관한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신명기 법전」과 「제사 법전」은 매우 중요한 논문으로 간주되었다. 또 양주삼(梁柱三)·도이명(都伊明)·김인영(金仁泳) 등과 함께 한국 감리교 구약 연구에도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이외에도 『신약 총론』[1918], 『구약 총론』[1921] 등 성경 개설서, 주석적 논문과 성경 연구법 등에 대한 글을 남겼다. 『기독 신보』에 「구신약 강해」라는 글을 약 100회 연재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