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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 및 대야주가 진덕여왕 2년(648년)에 신라에 의해 회복되었다고 판단 하는 이유(추가)
선덕여왕 11년 (642년) 백제 의자왕에게 40여성을 빼앗기고 아울러 대야성까지 함락당하는
사건과 대야성주 품석과 김춘추의 딸 고타소가 죽어서 김춘추의 원한을 사게되어 훗날 백제 정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별다른 이의가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김춘추는 위험을 감수하고 적국인 고구려와 일본으로 청병사신을 자청하여 다닐 정도로
원한이 깊은 사건입니다.
대야성 함락이후 신라는 대가야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고 경산, 대구를 중심으로한 압량주를
최후 방어막으로 삼고 김유신을 압량주 도독으로 임명하여 방어에 급급하게 됩니다.
그러나 644년 김유신으로 하여금 백제의 가혜(加兮),성열(省熱),동화(同火) 등 일곱 성(城)을 공격하여
대승(大勝)을 거두고, 낙동강 상류지역으로 비정되는 가혜진(加兮津)을 개설(開設)하지요.
이때 부터 신라와 백제는 서로 공방을 계속하지만 실상 백제가 대부분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며
김유신은 고군분투 방어에 급급하거나 역전시키는 정도의 전투가 계속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북쪽에서는 고-당전쟁이 벌어지는 한마디로 난세의 시기였습니다.
647년 선덕여왕이 비담의 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사망하고 대신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
비담의 반란을 제압한 김춘추, 김유신의 실권이 강화되면서 신라의 군권을 김유신이 장악하게 되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진덕여왕 2년(648년)에 다시 의직이 침공하여 요거성 10여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이후 옥문곡 전투에서 대패하여 거의 단신으로 탈출하는 내용이 삼국사기 본기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대야성 보복을 먼저 제의하여 몇달간 준비한 뒤에 대야성에 진입하여
백제군을 옥문곡으로 유인하여 승리하면서 1천여명을 사로잡거나 참수시키면서 백제장수 8인과
김품석 부부 유해를 교환한 뒤에 다시 백제 경내로 더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城)을 쳐서 함락시켰고
2만여 급(級)을 참수하였으며 9천명을 사로잡아 그 공로로 이찬(伊飡)으로 승진되면서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의 직질(職秩)을 더하게 됩니다.
본인은 이부분에서 신라본기와 백제본기가 서로 맞질 않고
특히 김춘추는 분명히 648년에 청병사신으로 당나라에 파견된 것은 답설인귀전에 나타나기 때문에
사실이지만 본기에서는 겨울 년말에 김춘추가 당에 청병 사신으로 떠난 시점이 의심스러울 뿐더러
열전에 실린 내용과 정황이 너무 틀려 오히려 열전의 내용이 보다 정확한 원전에서 나온 내용이 아닌가?
추론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본기대로라면 4월의 옥문곡 전투를 그해 겨울에 떠나는 김춘추가 모를리가 없고
열전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면 열전의 내용이 오류이든지 아니면 본기의 내용이 오류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본기의 내용이 명백히 의심스러운 것은 당태종에게 "지난 해(647년)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수십개의 성을 점령하여,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라고 보고를 합니다.
그런데 진덕여왕 원년에는 비담의 반란 제압과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의 전투에서 비록 비녕자등이
희생되었지만 김유신에 의해 크게 승리한 전투뿐입니다.
저러한 본기 내용을 어떻게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할까요?
물론 반론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대야성을 이때 회복했다면 신라가 자랑스러워 해야할 큰 사건인데
열전에만 기록되어 있고 본기에 빠졌으며 이런 큰사건이 본기에 빠지는 사례가 있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물론입니다 대야성과 대야주는 신라가 빼앗긴 것을 다시 되찾는 사건에 불과 하지만.
정말로 신라본기에서 방방떠야할 큰사건, 반드시 기록되어야만 할 큰사건이 빠진 사례가 더러 있지요.
첫째로 진흥왕 시절에 함경남도까지 진출하여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그것도 진흥왕이 직접
납시어 "나는 태왕"이노라 하고 영역을 넓힌 사건은 비문으로도 증거가 있는데
어찌하여 이러한 방방뜰 자랑스런 내용이 신라본기에서는 취급도 안되었는지?
아무리 눈이 아프도록 기록을 찾아봐도 아예 보이질 않습니다.
둘째 열전에서는 엄연히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동사강목 모두 실려있는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희대의 사건이 삼국사기 본기에는 쏙 빠져있습니다.
김유신의 출생, 사망, 그리고 심지어는 김유신의 처를 부인으로 책봉한 기록까지
본기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신하가 대왕으로 추봉된 희대의 사건이 본기에서는 무었때문에
빠졌을까요?..삼국사기 신라본기가 이모양입니다.
그런데 대야성 회복이라는 내용이 본기에서 빠졌다고 뭐가 그리 대단한 내용이 되겠습니까?
셋째 상대등에 대한 기록이지요
심지어 중시의 임명기록과 상대등 임명기록이 본기에서 잘 기록되었다가
김유신 사망(673년)이후 부터 문무왕 20년 김군관이 상대등으로 임명되는 공백 7년기간의 상대등
기록은 왜 빠뜨렸을까요?
상대등이 그냥 상대등입니까?..조정의 최고 수장을 임명하는 기록이 반드시 본기에 나타나야
하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요?
물론 본기에서 큰 사건이 반드시 기록되어야 함은 정상이나 이러한 큰 사건들이 흔히 누락되거나
탈락된 현상이 많다는 것입니다...따라서 본기의 오류들이 이러할진데
대야성 회복이라는 기록이 빠졌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요.
문제는 654년 김춘추가 무열왕에 즉위한 이후입니다.
대야성에 원한이 깊어서 죽음을 무릎쓰고 고구려, 일본, 당나라까지 스스로 찾아다니며
백제에 원한을 갚기 위해 청병을 구걸한 장본인
백제를 멸망시키자 가장 먼저 찾아내어 즉시 대야성을 잃게 만든 검일의 사지를 찢어죽이고 모척을 참수한
도무지 도량을 베풀수 없을 만큼 원한에 사무쳤던 무열왕 김춘추!
덩달아 그의 아들 법민도 항복한 백제왕자 부여융을 말앞에 꿇어 않히고는
"너희 아비가 나의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이고 옥중(獄中)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 아프게 하였는데
오늘날 네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다."라고 원한을 토로한 김춘추의 가족!
그런데 삼국사기 어느구석을 뒤져봐도 열전에서 나오는 648년 대량성 보복전투이후로
대야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나 전투가 단 한번도 없었다는게 이상하질 않습니까?
그것도 대야성이 신라에서 도무지 쳐들어 갈수 없는 백제 내륙 깊숙히 위치한 장소도 아니고
예전에 신라 자신의 땅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 어째서 무려 660년까지 12년의 긴 세월을 쥐죽은 듯이
참았을까요?..그렇다고 신라가 코앞의 잃어버린 대야성을 도무지 넘보지 못할 정도의 군사력을
지닌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의자왕이 항복하자 자연스럽게 신라에 귀속되다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께 감히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대야성이 신라에 귀속되었는지? 무슨 정황으로 그렇게 보는지?
만일 그렇다면 분명한 것은 661년 압독주를 대야주로 옮긴 이후에도 합천 대야성의 바로 인근지역인
거창의 거열성은 흠순과 천존에게 도륙당하도록 처절하게 저항을 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
도무지 의자왕 항복이후 자연스럽게 신라에 항복 귀속될 만한 정황이 눈꼽만큼도 없는 상황인데도
아무런 설명없이 그냥 의자왕이 항복하니 자연스럽게 귀속되었다라는 주장은 한마디로
무책임한 주장일 뿐입니다.
소비자에게 다이몬드를 팔기위해 천연석이며 그 순도를 설명하는데 뜬금없이 국내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증명하라는 논리와 다를바 없는 고고학 증명을 요구하지는 말아주십시요..
만일에 고고학적 증명이 결정적이라면
반론자가 주장하는 대야성이 신라에 귀속된 년도의 고고학적 증명을 먼저 하시고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자신의 의견 역시 개인 추측에 불과하면서 상대방에게 고고학적 근거를 대라니 이건 심히 난감하군요... 자신의 의견은 추측이면서 반론에 대한 재반박의 여지만으로 자신의 의견이 근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마셨으면 합니다. 지금 본문은 ' 내가 볼 땐 이 상황이 확실하니, 신라가 대야성을 함락한 상황이라고 봐야 하지 않느냐 ' 인데; 네, 그 상황이 전혀 설득력이 안 느껴지고 공감이 안됩니다. 본기나 열전이나 647~8년 주변 전후 전쟁 기사들이 상세히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그 ' 보복전 ' 만 빼고 본기와 열전 내용은 그대로 다 매치가 됩니다. 자, 뭉텅이로 몇년씩이 빠진 것도 아니고
말뜻을 전혀 못알아들으니 역시 답변의 가치가 없군요...차라리 님께서 본문으로 정리해 주시죠.
말뜻을 다 알아듣고 반박했건만, 이런 반응이라면 본문을 써도 마찬가지겠지요~ 오히려 못알아들은 쪽이 어느 쪽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덧붙여 ' 합리적인 설명과 추론 ' 하고 ' 함부로 당연시하는 개인의 믿음 ' 을 혼동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 ' 전쟁 기사 ' 가 없다는 겁니다. 백제가 20여 성을 빼앗기고 3만여명까지 잃은 관산성 전투급 패배 (어쩌면 그 이상이겠군요) 를 당했다면, 그 다음해에 또 도살성 전투가 그렇게 쉽게 일어난다고 보세요? 본기에도 적혀 있네요~ 의직의 공세를 막고 역습해서 추격하여 병사들을 거의 다 죽였다고.... 그러한 이후 추격전이 크게 과장되어 적혀 있는 것이 열전의 내용이라 봐야지요.. 더군다나 651년 백제가 입조했을 때도 당이 백제에게 말렸을 정도라면 (이미 그 전 전투의 신라 승전과 태평송을 바친 이후) 신라가 그렇게 20여 성과 3만여명을 죽일 정도의 공세로 전환될 정도면 신라가 뭐가 아쉬워서 당에게 태평송까지 바쳐가며
이 부분도 님의 추측이니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니군요..뭐 본문과 님의 댓글을 비교하면서 본 내용을 보시는 여러 회원님들이 판단하시겠지요!
" 백제좀 쳐줘요 " 이럴까요? 그리고, 말씀하신 661년 이후 거창과 함양에서의 부흥운동시기의 혈전은, 661년에 신라가 대야주를 접수한 이후 거창과 함양 쪽에 머물러 있던 부흥백제군 병력이 벌인 혈전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데요? 본문대로, 신라는 660년까지 잘 참고 한방 모아 당과의 공동작전이 성사되자 ' 백제의 도성 ' 을 쳤습니다. 왜 그들의 포커스가 대야성에 맞춰져 있었을 거라고 단정합니까? 아니, 대야성에 맞춰져 있었다 한들, 김춘추가 이를 갈고 복수를 다짐해도 대야성을 쉽사리 뺏지 못한 이유는, 그만큼 그 당시 신라 단독만으로는 백제에 비해 수세였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당에도 건너간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야성은 언제 신라에 귀속되었지요?
제가 ' 대야성은 어느 시기에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 귀속되었다 ' 라고 밝혔습니까? 대야성의 신라 귀속을 저는 역시 661년의 대야주 설치에 관련해 보고 있습니다만, 여타 다른 그림이야 다양하게 제시할 수 있죠.... 문제는 앞뒤가 맞고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느냐지요~ 제가 말하는 건, 소호님의 대야성의 신라귀속의 논지가 정황 흐름상 공감이 안되어, 그럴듯하다고 여기기엔 섣부른 일반화라는 지적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뭐지요?..대야성이 백제의 것이든 신라의 것이든 분명히 어느 시기에 어느쪽으로 귀속은 되어야지요..그래서 나름대로 피력한 것인데 그것을 반론할려면 님이 언제 귀속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찾아서 이런 연유로 다르다라고 반론 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이도 저도 아니면 차라리 가만히 계시고 그냥 님혼자서 생각하셔야지요..남의 주장에 자신의 답은 없고 자신이 이해가 안된다 하여 그냥 딴지만 거는 것 밖에 아무것도 없잖아요?..문제는 님이 공감이 안되면 전부 공감이 안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지요?
말했잖습니까? 661년 대야주 설치와 더불어 귀속된 것으로 보는 게 적어도 ' 소호님 펼치는 논지 ' 보다는 더 자연스러운 그림이라고....... 적어도 660년 전까지 백제가 대야성을 털린 일은 없고, 다만 그 주변 일대에서 광범위한 격전이 벌어졌을 거라구요... 땅따먹기 게임마냥 현대 영토 국경선 가르듯이 언제는 여기쯤에서까지 그런 걸 낱낱이 전쟁사로 추정해 밝힌다는 게 이 사료 적은 고대사 논쟁에서 의미나 큰 공신력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다만, 거시적으로 대야성이 648년에 신라로 넘어가고 공세가 뒤바뀔 정도의 저 논지는, 642년부터 660년까지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 신라의 수세 정황상 설득력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이미 토론을 그만두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평행선을 달리면서 서로에게 이견만 제시하고 합의점을 못본다면 더이상 지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네요. 이정도 선에서 토론을 끝내시길 바랍니다.
운영자님의 고충을 십분 이해합니다..상대가 여러 사료와 정황을 들어 나름대로 결론을 짓거나 피력을 하였으면 반론자는 오류된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여 다른 사료나 증거를 들어 반론하여야 올바른 토론이 되는 것 아닌지요?..스스로가 얼마든지 본문으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 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댓글로.아무런 결론이나 상대의 오류를 지적하질 못하고 저렇게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는 딴죽을 거는 댓글들에 무슨 합의점이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불리한 주장인 대야성 함락 기록이 삼국사기에 없는 이유는 삼국사기가 오류가 많은 역사서이고, 김유신열전에는 왜 없냐니까 그냥 누락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하고 648년 대야성 함락이 확정적이라고 단정지으니, 이런 무의미한 논쟁이 거듭되는거 같습니다. 비사인님의 말씀을 존중합니다만, 이점은 꼭 집고 넘어가고 싶군요. 부여장님께서도 지적했지만, 왜 본인에게 불리한 주장은 어떠한 근거도 없이 그저 누락이라고만 단정지으며, 남이 주장한 증거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나 사료를 제시하라고 하는지가 황당할 따름입니다. 소호금천씨님이 제시한 주장역시 심증은 될지 몰라도, 확증은 될수 없습니다.
운영자님의 요청으로 이선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백제사랑님의 지금 댓글은 다시 정리하여 공개적으로 반론예정입니다..고고학적 증거나 사료를 백제사랑님이 먼저 거론하셨기에 고고학 증명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본문의 글임에도 님께서는 이상한 댓글을 쓰시는군요..본문을 다시 앍어 보시지요.. 본인이 뜬금없는 고고학적 증명을 제시하란 적이 없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예 옳은 지적입니다..애초부터 잘못된 입씨름입니다...상호 발전적으로 본문의 주장에서 오류된 부분이나 누락시킨 부분을 지적하여 나름대로 반론하다가 견해차가 심하면 따로 스스로 나름대로 피력하는게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이 되지만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 하여 본문의 취지를 무시한 처음부터 딴지를 거는 댓글은 소모성 입씨름으로 이런 댓글에서 해답을 찾는 것 보다는 차라리 본문의 오류나 아니면 공감을 찾는것이 보다 옳은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백제사랑님과 新羅大將軍金庾信님. 이번 토론에서 불필요한 언사를 보여주신 부분은 안타깝습니다. 또한 토론 이후에도 이에 대해서 상대방에 대해 부정적인 말씀을 하시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부여장님과 소호금천씨님과 함께 일주일간 활동정지 처분을 하오니 이해해주시고 차후 토론에서는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