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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의 서재에는 철도연구소에서 올라온 보고서가 있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들의 역사로 시작되는 두툼한 보고서.
한때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유목제국들의 고속도로는
둥베이에서 중앙아시아, 터키로 이어지는 대초원이었다.
하서회랑의 실크로드에서 만리장성 북녁 초원과 사막,
그리고 툰드라를 지나 돈황을 거쳐 내몽골의 오르도스로
이어지는 장대한 교통로.
보고서는 주장했다.
『화약시대가 열리면서 기마군단의 위력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벌의 말을 끌고 다니며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기동전술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철도망은 이 시대의 기마군단.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해상무역 때문이다.
해운국들의 주요도시는 대부분 항구.
그러나 내륙 운송은 여전히 빈약하다.
유목제국들의 이동수단은 배가 아니었다.
철도망은 대륙간 운송은물론 내륙운송까지
일거에 해결하는 수단이다.
철도망으로 해운을 대체한다는 것은
유목제국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탁월한 발상.
부동항이 아쉬운 아라사로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기술적 문제가 있으니 베링 해 통과문제는
당분간 접어두자.
당대의 대국, 아라사와 청나라
그리고 유럽을 철도로 연결함으로써 기대되는 경제적 효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짜르 폐하께 영광을, 아라사 우라!』
보고서를 본 케렌스키 외무대신은 철도시대를 여는
안내서라고 했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의 견해는 달랐다.
"실무 안내서라기에는
지나치게 철학적인데...?"
“철도 연구소의 1단계 목표는 국내철도 장악입니다.”
연구소 설립준비 간사 장징웨이가 운을 떼자
시선들이 모인다.
“철도는 열강국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군대를 옮기고 자원운송을 독점하고...
멋대로지요.
하지만 누가 건설했건 결국은 중국의 자산.
그런데 관리상태가 극히 불량합니다.
저마다 자국의 기준으로 건설해
노선간 접속이 어렵고
관리주체가 각각이라 협력도 원활치 않고.
그래서 당면과제는 각종 기준의 통일인데
열강들도 일단은 동의했습니다.
통합기준을 적용, 관리할 주체는 아직 미정이지만
우리 연구소일 수밖에 없겠지요.“
복잡다단하게 얽힌 문제를 시원시원한 인상만큼이나
명쾌하게 요약해낸다.
“기준관리란 일종의 권력입니다.
어기면 운행이 어려워지니까.
이걸 사용해 권리들을 하나씩 되찾아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홍장은 끄덕였다.
‘사람을 잘 뽑았군.’
철도는 세 종류.
표준궤는 폭 1435㎜. 보다 좁으면 협궤, 넓으면 광궤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광궤.
80여 년 전, 나폴레옹 전쟁의 트라우마가 있는 아라사는
유럽철도와 이어지지 않는 광궤를 택했다.
따라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온 중국행 화물은
하얼빈에서 환적을 위한 상하차 작업을 해야 한다.
철도 연구소는 둥베이 철도망 구상의 첫 작품,
동청東淸 철도를 설계했다.
둥베이 북부를 비스듬히 횡단하는 본선은
만저우리滿洲里~하얼빈~쑤이펀허綏芬河(수분하).
블라디보스토크 와 치타 양쪽으로 이어진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장인 철길은
하얼빈 아래쪽으로도 뻗는다.
남쪽 지선. 하얼빈~봉천~대련이었다.
두 달에 걸친 둥베이 순행은
서태후가 새로운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였다.
중원을 세상의 전부라 여기며 살아온 그녀에게
유목제국의 흔적은 충격이었다.
중국이 새외라고 부르던 둥베이는
만리장성 바깥 오지가 아니라 유목민들의 고속도로,
대초원이 시작되는 기점이었다.
돌궐의 고향은 후룬베이얼 초원과 요하 일대.
대초원 양쪽 끄트머리의 터키와 둥베이는 뿌리가 같은 민족,
잊고 살아온 이웃나라였다.
수만리를 격한 이웃나라 사이에는 장대한 초원의 역사가 있었다.
서태후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대 초원의 열린 삶에 비해
닫힌 성에 안주하는 농경사회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
몽골인들 또한 금붙이는 좋아하지만
그건 텡그리 신앙 때문일 뿐이다.
장신구로 지닐 뿐 창고에 쌓아두고 좋아하는 한인들과는 달랐다.
그들이 아끼는 재산은 함께 움직이는 말과 가축이었고
매를 날려 사냥하는 초원생활을 지복의 상태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작림과 함께 봉천으로 향하는 나는
숨통이 턱 트이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톈진 그리고 베이징으로 이어진 5년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마음 붙일 곳 없이 떠도는 부평초 생활이었다.
원래는 좌보귀 부대와 함께 봉천으로 갔어야했다.
일이 묘하게 꼬이는 바람에 돌고 돌아
이제서야 가게 되었다.
“초장 계급장 달고 좋아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자금성 구경까지 하고, 출세했네.”
작림의 어깨에는 밥풀 3개의 상위(대위) 계급장이 반짝인다.
원래의 작림은 말단 병사에서 맨손으로 일어섰던 인물,
‘이제 날개를 달았으니...’
얼마나 화려한 비상을 보여줄지 정말 기대된다.
역대의 성경장군들은 기하인이었다.
황실의 발원지, 둥베이 방어사령관이니 당연한 조치였다.
예하 부대장들 역시 대부분 기하인으로
동북의 지방색이 강하다.
장성 이남의 중국인들은 동북 3성을 한 개의 성으로 싸잡아 본다.
땅은 넓지만 인구가 적은 동북에는 이민,
특히 산동 사람들이 밀려왔다.
중앙과 떨어진 이곳은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동네.
그래서 용맹하고 호전적이다.
하지만 모두가 사발로 술을 들이키고 목숨을 초개같이 여긴다
생각하면 오해다.
산동이나 하북에 비해 점잖고 입담 좋고 논리적이다.
호탕한 것 같지만 궁리가 깊다.
내가 받은 품계인 2등 시위는 군대로 치면 중교(중령)급.
굳이 따지자면 작림보다도 높았지만
문관과 군인을 비교할 일은 없었다.
감찰어사는 관리의 감시역인지라
인사를 나눈 사람들은 뜨악한 기색이었다.
장군부에 도착신고를 마친 나와 작림은
좌보귀 장군을 찾았다.
장군은 여전히 다혈질이었다.
평양에서 한몫 단단히 잡아서인지
신수가 훤해진 장군은 보자마자 어깨를 치며
짐짓 화난 체 했다.
“사람이 어찌 그리 매정한가? 간혹 소식이라도 전했어야지.”
하지만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자금성에서 벌인 황궁사업이나 방직공장 건은 물론
아라사 여행과 둥베이 순행까지...
“첩보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건 자네 아닌가.
듣자하니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고...?
그럼 이제 진 시위로 불러야겠군.”
그는 새로운 소식을 몇 가지 알려주었다.
철도 연구소가 대련에 생기면서 이곳 봉천에
일본인의 왕래가 늘어났다고 했다.
조선 병합이 진행되면서 국경을 장악한 일본군의
대륙 탐색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조짐이었다.
작림과 나는 생도부대와 함께 부임했다.
당초에 기인들로만 편성한 것도 이런 경우를 예상해서였다.
친위대였던 생도부대가 떠나면 주변이 허전해질 센위를 위해
5.5단만큼은 남겨두었다.
봉천 방어군 영장으로 부임한 작림의 첫 행보는
마적들과의 수인사였다.
한때 소악패로 악명을 날리기는 했지만
새까만 쫄병, 장 위팅을 기억하는 두목들은 없었다.
그래서 작림은 이 바닥의 신인이었다.
말쑥한 복장의 신군 부대를 끌고온 작림을
주변 마적들은 주목하고 있었다.
아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타협을 통해 관군과 공존해오던 그들이었지만 이번 상대는 달랐다.
무비학당 출신의 신군과 보위대 출신들은 뿌리부터가 달랐다.
지금까지의 관행이 과연 그대로 지켜질지 의문이었다.
나를 둥베이로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태후나 이홍장으로부터는 어떤 지시도 없었다.
간섭 않을 터이니 마음껏 놀아보라는 듯...
받은 거라고는 신분을 증명하는 은패 하나가 전부였다.
상식적 행보라면 신임 감찰어사인 나는
증기曾祺의 장군부를 비롯한 관부부터 둘러보며 안면을 익혀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 생각이 아예 없었다.
대신 유흥가를 누볐다.
대도회, 홍창회, 가로회, 청방, 보갑단, 보위단, 연장회, 의용단, 유격대, 그리고 마적들...
양지와 음지에서 암약하는 세력은 수 없이 많았고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으며 싸웠다.
유흥가는 그들의 조직원이 빠짐없이 깔려있는 최전선.
신임 감찰어사의 용모파기 정도는 삽시간에 알려지기 마련,
불과 며칠 만에 여러 개의 시선들이 따라다녔다.
나는 주변에 찌푸리거나 불편한 느낌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새파란 나이의 외국인 주제에 시건방지단 소문이라도 나면
이 바닥에 발붙이기 어렵다고
동물적인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장궤들에게 먼저 인사했고
점소이가 내미는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거리로 출몰하면서 한 달 쯤 싸돌아다니자
인사하는 얼굴들도 제법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서 보리라고는 생각도 않던
뜻밖의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톈진 청방 분타의 이사.
5천리 대운하를 장악한 천하의 청방이었지만 봉천은 객지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내게 굽신해 보인다.
“영전하신 소식, 들었습니다.
베이징에서도 활약이 대단하셨는데 기대됩니다.”
< 청방의 유래 >
그를 단골 반점으로 끌고 온 나는
술을 권할 뿐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센위는 둥베이에 가면 상대의 신상을 캐지 말라 했다.
기인들에게 그건 일종의 금기였는데
한인들은 그걸 버젓이 무시한다.
바로 그게 한인과 기인이 친해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고량주를 두어 순배 나누는 동안
나는 묵묵히 경청하며 이따금씩 고개만 끄덕였다.
“진 시위님은 우리 청방 조직의 유래를 아십니까?”
“글쎄, 외국인 주제에 알 턱이 있나?”
이사는 히죽 웃었다.
“그건 이곳 사람들도 잘 모르는 얘깁니다...
소림사가 달마조사로 이어지고
도교가 원시천존, 태상노군을 찾듯
청방의 기원 또한 까마득한 신화시대까지 거슬러갑니다요.
워낙 역사가 되다보니 나관중의 삼국연의에까지 등장합니다.
삼국지의 초선貂蟬은
청방의 전신인 배월교의 신녀였지요.
원래 초선은 한나라 때 시종들의 모자장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여기서는 사람 이름처럼 나옵니다.
그녀의 본명은 임홍창.
나관중은 왜 이름을 숨겼을까요?
또 여포가 죽은 후 초선의 행방은...?
삼국지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다만 구전설화 몇 가지가 전해질 뿐.
관우가 숨겨주었지만 조조가 잡으러들자 자결했다거나
관우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가 평생을 마쳤다거나
조조가 초선을 이용해 관우와 유비를 이간질 했다는 등등...
이 모든 설화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관우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적토마赤兎馬는 나관중이 만든 소설적 허구입니다.
그 말은 여포와(190년) 전장에서 활약했습니다.
관우 죽을 때가 221년.
여포에게 있을 때 어렸다 하더라도 죽을 때는 이미 31살.
수명이 30 - 40년 정도인 말로서는 꽤 고령입니다.
초선과 적토마가 동탁, 여포를 거쳐 관우에게 가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적토가 바로 초선이니까요. 이름부터가 그렇습니다.
초선의 본명 임홍창. 홍紅자와 적토마의 적赤은 대응.
그러면 토兎는?
바로 초선의 신분을 암시하는 글자입니다.
청방의 전신은 배월교.
여신을 섬겼고 신관도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원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와서도
여신숭배는 여전했고.
여와의 위치는 삼황오제 못지 않았습니다.
여성숭배는 음신 숭배인데
음의 대표는 달.
달은 배월교拜月敎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초선은 초선배월貂蟬拜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중있는 신녀.
항아는 달의 여신.
옥토끼玉兎는 신녀이니 적토가 바로 초선이었습니다.
나관중은 초선의 행적을 이런 식으로 기록했지요.
관우는 배월교 신녀, 초선을 후원합니다.
이윽고 교를 장악한 관우는
정교연합으로 세력을 떨치고 교단 또한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러나 호사다마,
세력이 커지면서 지도부에 균열이 생깁니다.
허수아비 신녀라는 위치에 불만을 품은 초선이
세를 불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윽고 초선은 관우에 도전합니다.
초선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관우는
막강해진 초선에 당황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지요.
치열한 암투로 양패구상 당하자
형주는 위기를 맞습니다.
내분을 틈 타 동오와 조조가 움직인 것이지요.
관우가 조조 공격에 나서자 어부지리로 형주를 차지한 동오는
관우와 초선을 제거합니다.
배월교단 또한 분열되어 지하로 숨어들고...
이후 명맥만 이어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의도 점차 변해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형제회로 변하지요.
여신숭배는 금지되고 원래 교의를 따르는 소수파,
즉 초선의 계파는 도태되었습니다.
나관중은 이 소수파에 속한 인물이었지요.
사실을 까발리면 위험해 이런 식으로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초선을 월, 토 등 상징으로 나타냅니다.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의 수壽자 상반부와
초선의 월月자를 결합한 글자, 청靑으로 표현했고...
청은 초선의 이름 홍자와 대응되지요.
구전 민담이나 희곡에서 관우의 복장이 녹색인 이유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나관중은 청룡언월도까지 등장시킵니다.
청룡과 월이 어떤 의미겠습니까?
도刀가 관우의 성명병기가 된 것 또한
숨겨둔 헛점들을 독자가 눈치채기 바래서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의 군대에는 장병대도 류의 무기가 없었으니까요.
여하튼 형제회는 명맥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청나라로 오면서 반청복명 방회들과 연합해
홍문洪門을 이루지요.
홍洪자는 한漢에서 토土를 뺀 글자.
한족이 땅을 잃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청방靑幇으로 개명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듣다보니 결국 청방이 근본 없는 조직이라는 얘기였다.
그 간단한 말을 참 장황하게도 엮어낸다.
여하튼 청방 정도의 큰 방회들은
황실과 조정의 동향에 민감하기 마련.
없는 곳이 없는 그들의 끄나풀은 당연히 태감과 궁녀 중에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황실의 실세인 화석공주의 측근이며
방직회사, 황궁 문화사업 등 주요사업에 개입했지만
미관말직의 외국인인 나는 그들의 관심에서 비껴난 존재였다.
파격적 승진으로 잠시 주목받기는 했지만
봉천으로 오면서 그나마도 사라졌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건 아마도 청방이 나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리라.
“둥베이는 무척 재미있는 고장입니다요.”
이사가 빙글빙글 웃는다.
“뭘 봐? 보는데 왜? 식의 호전적 대화가
이 동네의 풍속도랄까요.”
자못 예리한 지적이었다.
외지사람들은 둥베이라면 대뜸 마적부터 떠올린다.
남자는 깡패, 여자는 기생 식의 편견도...
새 시대의 첨병인 상하이나 톈진의 역동적 분위기와 달리
둥베이는 구태의연한 오지였고 침체의 상징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편거래, 상가 보호비,
표물 운송 따위가 주 수입원이었지요.
그런데 공장들이 생기면서 싹 바뀌었습니다.
저도 이제는 면직물 대리점을 하고 있습니다요.”
비로소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았다.
“사람들은 이제 웬만한 건 직접 만들지 않고 사서 쓰지요.
원하던 물건을 사들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이사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좋은 양무운동을 두고
왜 그리 논란들이 많았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요.”
바야흐로 새로운 시민계급이 탄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현재를 거의 알지 못하고
과거는 무시하고 미래도 예측하지 못한다.
“나 장가들게 생겼어.“
한 달 만에 본 작림의 첫 마디였다.
“그거 잘 됐군. 축하해.”
나는 녀석의 두툼한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 뉘 집 샤오지에를 꼬셨나?”
“그게 말이지...”
신부감을 찾아 봉천 일대를 뒤진 무용담이 한바탕 펼쳐졌다.
그에게 좋은 신부감이란
자식을 많이 낳아줄 후덕한 여자였다.
먼 훗날 이야기지만 그가 고른 방앗간 집 소저는
과연 아들, 딸들을 줄줄이 안겨주며 기대에 부응한다.
조만간 사라질 청나라의 지배체제에
내가 관심가질 이유는 없었다.
체제야 어찌 변하던 꾸준히 명맥을 이어갈 민중 조직에
내가 관심을 쏟는 이유였다.
미래지식의 구도대로 가려면 둥베이는 자치주로 독립해야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존 체제를 최대한 활용해
기반을 조성해야 했다.
아라사 또한 극동 자치주를 세워야 했다.
두 자치주는 대륙철도라는 목표를 공유하며
20세기의 험난한 파도를 함께 넘어야 했다.
짜르에게 호감을 가진 나는 다가오는 가혹한 운명을
경고해주고 싶었지만 아라사 말조차 모르는 형편.
워낙 민감한 내용이라 누군가에게 번역시키기도 어렵고....
고민 끝에 영어로 직접 작성했다.
니콜라이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사위이니 영어를 알겠지.
믿기 힘든 황당한 내용이지만 증거를 보여주면 믿지 않겠는가?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로마노프 왕조는 1917년 전후에 사라집니다.
신빙성을 드리고자 2가지 예언을 알립니다.
다만 출처를 밝히지 못함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1) 내년에 태어날 아기는 딸입니다.
2) 4년 후 얻으실 아기는 아들.
하지만 불행히도 혈우병을 안고 태어납니다.
라스푸틴이라는 요망한 자가
아들 고칠 욕심에 눈이 먼 황후를 기망할 것입니다.』
편지는 화석공주에게 전했다.
스파이 전성시대라 황실간 채널이 그 중 믿을만 해서였다.
한 단어 한 단어 신경 써 작성한 편지를 보내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아라사 황실에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앞으로 어찌하는가는 그들의 선택,
이제는 나 자신과 둥베이 문제를 고민할 시점이었다.
나는 시나리오를 궁리했다.
목표는 둥베이의 자급자족 체제 구축.
권력자들의 공통적 걱정 중 하나가 능묘 훼손이었다.
후손 욕심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이 약점을 겨냥해 장성 이남에 조성할 예정이었던
태후의 능묘를 둥베이의 봉천고궁 일대로 유도해보자.
아울러 공사관리를 위한 분조설치도 추진하자.
베이징에서 능묘까지 운구할 철도까지 깔려면
공사기간은 제법 장기화 될 것이다.
이참에 낙후된 둥베이의 자급자족 체제지원을 요청하자.
둥베이의 인구는 어느 성보다도 적은 7백만 명,
큰 부담은 아닐 것이었다.
1901년 6월.
아라사 황실에 4번째 황녀가 탄생했다.
아라사 측의 요청으로 축하 사절단에 끼인 나는
도착 다음 날, 황궁으로 불려갔다.
나를 맞는 니콜라이 2세의 표정은 심각했다.
“누구보다도 자네를 기다렸다네.
그래 여독은 좀 풀렸는가?”
정중히 머리를 숙인 나는 주변을 살폈다.
타티아나를 제외한 시종들은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찍이 있다.
짜르의 배려이리라.
짜르와 시선을 나눈 나는 잠시 타티아나를 응시했다.
“그 아이는 황실의 조카라네. 내가 보증하지.”
‘음, 그렇다면야...’
유럽의 사회주의 물결을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대신에 어렵게 구한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의
묵직한 영어판과 독일어 판을 내놓았다.
“아라사에는 이 이론을 맹신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해외와 국내에 흩어져 활동 중인데
이들을 검거해도 사태진압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학교가 졸업생을 배출하듯
꾸준한 학습을 통해 그 맥을 이어갑니다.
이 무리들은 새떼와도 같습니다.
날아다니는 새떼는 잡아봐야 몇 마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흩어지면 그나마도 잡을 수 없는데 돌아올 때는
다시 떼를 지어 몰려옵니다.
감당할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부패일소 따위가 아닌
혁명입니다.
아예 체제를 부인하는 거지요.
일찍이 민중과 맞서 이긴 정부는 드물었습니다.”
짜르는 내가 준 책자만 뒤적이며 묵묵부답이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피난처, 다시 말해 망명정부를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혁명세력이 아라사 전역을 일거에 장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극동지역에 저지선을 집중 구축하시면
일단 혁명의 예봉은 피할 수 있다 믿어집니다.”
진한 비현실감이 니콜라이 2세를 엄습했다.
이 청년이 말이 도무지 와 닿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장교들과 막강한 제국 함대들이 건재한데 어떻게...?”
“그 장교들의 지휘에 수십 배도 넘는 병사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물론 충성하는 군대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내전이 벌어지겠지요.
그렇게 되면 혁명군은 구심점인 황실부터 제거하려 들 것이니
바로 위협이 닥칠 것입니다.
피난처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짜르를 방문하고 어언 18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