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축일]
요한 14,6-14
그리스도 몰입 연기를 위해 성령의 술이 꼭 필요한 이유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하시며, 삼위일체 신비를 알려주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만날 때 성모님 태중에 하느님 아드님이 계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힘으로 알아보았을까요? 성령의 힘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하느님을 당신 태중에 잉태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은 이들은 어떻게 그 일이 이뤄지는지 깨닫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1-43)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두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잉태되는 장면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시는 장면을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범죄도시로 18년 만에 돈과 무관하게 살다가 지금은 스타가 된 장이수 역할의 ‘박지환’ 씨가
유퀴즈에 나와 갑자기 잘 되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가 연극계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오디션에 참가하면 항상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가 왜 그런지 카메라에 녹화된 내용을 보았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어떤 매력도 없는 무색무취의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알바한 돈으로 몇 대 사서 직접 오디션 장면을 녹화해 보았습니다.
자신도 자기 같은 사람을 뽑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캐릭터가 온전히 묻어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연기에 좌절을 느끼며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습니다.
카메라를 끄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녹화된 자기 모습을 보았는데, ‘앗,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연기 잘하는 자연스러운 배우가 하나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너무 매력이 있었고 캐릭터가 다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캐릭터를 가리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카메라에서 연기하고 있는 자신이었다면 이제 막걸리가 그를 완전히 그 캐릭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무아의 경지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짝 눈치를 챘습니다.
‘카메라는 요물이구나! 웬만큼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거는 받아주지도 않는구나.’
그때부터 본 오디션은 다 합격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입니다.
진짜 캐릭터가 자신 안에서 완전히 살아 숨 쉬려면 자기를 완전히 잊게 만드는 막걸리 한 사발과 같은 무언가가 필요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도 그와 같은 분들이셨습니다.
특별히 필립보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지만, 베드로와 안드레아처럼 십자가에서 순교한 면이 그리스도와 매우 닮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도와 닮은 면이 있어서 예루살렘의 첫 주교가 됩니다.
그를 보면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포도주를 마시며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할 수 있을까요?
술기운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기운에 나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병헌은 연기 천재입니다.
그가 연기를 잘하는 이유는 현장에서 대본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틀에 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다만 그 캐릭터의 감정선에만 집중합니다.
대사를 틀리면 다시 찍으면 됩니다.
그러나 틀에 매이면 캐릭터가 죽고 자기가 삽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은 연기가 어색하게 되고 분심들게 됩니다.
또 현장에서는 긴장하면 안 됩니다.
이완되어야 긴장을 만들지 않고 캐릭터 정서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한잔하고 온 사람과 같습니다.
연기할 때 캐릭터만 살고 최대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으면 평화가 옵니다.
저도 강론하거나 강의 할 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직은 자아가 강해서 제가 보면 몸이 오그라듭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아져 가려 합니다.
우리도 내 안의 예수님께서 그대로 표출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의 술에 취해 살아갑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인물 몰입형 연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 요한 14,6-14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후줄그레한 작업복 차림으로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던 저를 한 형제님이 불러세웠습니다.
“저기요! 여기 사무실이 어딘가요?”
“무슨 일로 그러세요?”
“양신부님 만나 뵈러 왔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제가 양신부입니다.”
형제님은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시더니 그러셨습니다.
“설마, 그럴리가요. 농담하지 마시고 빨리 알려주시죠.”
자신들 앞에 서 있는 양신부를 두고, 양신부 어디 있냐고 묻는 분들 보며,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저는 예수님의 심정을 아주 조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도 높은 정신 교육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자들은 스승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는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웃기게도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복음 14장 8절)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요, 분신, 그분 자체이신 예수님을 오랫동안 뵈었으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니,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으시고, 다그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주십니다.
더불어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금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예수님을 뵌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것.
자상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백성을 위해 ‘자! 이게 내 얼굴이다.’며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강론>
(2024. 5. 3. 금)(요한 14,6-14)
<하느님을 직접 뵙는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 14,6-10).”
1) 여기서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라는 요청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한 번 구경해 보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한 말입니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확신’이 또 필요한 것인가? ‘믿음’과 ‘확신’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믿음’에도 여러 단계가 있고, ‘믿음의 깊이’도
사람마다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믿음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도들처럼 조금씩 믿음이 깊어지고, 한 단계, 한 단계씩 성숙해집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아는 단계에서 믿는 단계로, 믿는다고 머리로 생각하는 단계에서 그 믿음을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는 단계로, 그다음에는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인생 전부를 걸고 ‘온 삶으로’ 사는 단계로......
순교는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고, 믿음의 마지막 단계인데, 사도들은 첫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순교 단계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2)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라는 말씀은, 믿음의 성숙이(발전이) 더디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있지만, 아직 미성숙한 초보 단계라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도 비슷한 상태였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예수님의 ‘꾸중’은 제자들을 성숙시키기 위한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입니다.
<‘이토록 오랫동안’이라는 말에서,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사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벌써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느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를 다시 남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아기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서툽니다.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훈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리를 놓아두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성숙한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히브 5,12-6,1ㄴ.3).”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거나 미숙한 상태에 있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좀 더 성숙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3) 사도행전에 ‘하느님을 직접 뵌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스테파노 순교자입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사도 7,55-56).”
스테파노 순교자는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면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게 가졌을 것이고, 그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스테파노에게 보여 주신 일은, 또 예수님께서 함께 나타나신 일은,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과 순교가 결코 헛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증해 주신 일로도 해석합니다.>
스테파노 순교자가 하느님을 직접 뵌 일은 ‘내적 체험’이 아니라, 또는 자신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만난 일이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뵌 ‘실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보고 스테파노 혼자서만 본 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직접 뵙는 일’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사람만 받는 특별한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하느님을 직접 뵙는 은총을 받았다고, 또는 ‘하느님 체험’을 했다고 우월감을 가져도 안 되고, 그 은총을 못 받았다고 열등감에 빠져도 안 됩니다.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 체험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운 대로 믿고, 믿는 대로 살면,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늘 직접 뵙고 섬기면서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묵시 22,3-4).>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