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575] 李清照 -詞- 여몽령(如夢令) 2수
李淸照의 詞《如夢令》이다.
이 작품의 형식은 사이기 때문에 「여몽령(如夢令)」은 작품의 제목이 아니고,
악보에 해당하는 사패(詞牌) 또는 사조(詞調)이다.
현 산동성 濟南 출생의 이청조는 북송(960~1127) 시기 易安居士로 자칭한,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詞人 작가다.
詞는 중국 고전 문학 중의 운문의 일종으로서
5언시나 7언시, 민간 가요에서 발전한 것으로,
唐代에 처음 만들어진 뒤 宋代에 가장 흥한 문학 형식이다.
원래는 음악에 맞추어 노래 부르던 일종의 詩體였으며,
句의 길이가 歌調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長短句라고도 부르고,
詩餘라고도 칭한다.
小令과 慢詞의 두 종류가 있으며,
보통 上下 양결(兩闋)로 나누어진다.
이청조의 초상화
이청조가 지은 詞 如夢令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常記溪亭日暮,沈醉不知歸路。興盡晚回舟,
誤入藕花深處。争渡,争渡,驚起一灘鷗鷺。
李清照가 지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49수의 詞 가운데
이《如夢令》은 단지 2수 뿐이다.
두 수의 내용은 엇비슷한데 경치에 취한 상태의 심정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으로서
중국인들에게 많이 읊어지고 있다.
참고로 나머지 한 수는 이렇다
昨夜雨疏風驟,濃睡不消殘酒。
試問卷簾人,卻道海棠依舊。
知否知否, 應是綠肥紅瘦。
다해 봤자 총 33자 밖에 되지 않는 위 사 가운데
제목에 해당되는 如夢令은 詞牌名인데
“憶仙姿”, “宴桃源”이라고도 불린다.
출전은《清真集》“中吕調”이다.
측운은 五仄韵,一叠韵이다.
주요 단어에 대해 뜻풀이를 하면 常記는
늘 하는 오랜 기억이고,
溪亭은 물가에 지어진 정자나 누대를 말한다.
興盡은 주연의 흥취를 한껏 발산하다는 의미이며,
藕花는 荷花의 다른 명칭으로서 연꽃이다.
争은 怎, 怎麽 즉 왜, 어떻게, 무슨이라는 대명사다.
鷗鷺은 해오라기과의 새인데 여기선 물새들의 총칭으로 보면 된다.
위 사를 작사의 배경과 지은이 이청조의
당시 심정을 고려해서 한글로 옮기면 대략 아래와 같다.
냇가 정자에서 해가 질 때까지 질펀하게 놀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집에 돌아가는 것마저 잊었던 걸 떠올린다네.
놀다가 흥이 다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배가 연꽃들이 피어 있는 깊은 연못으로 들어가게 됐구랴.
어찌 해야 하나?
어찌 해야 하나?(어찌 배를 저어 빠져 나갈 수가 있을까?)
조심하지 않아서 물새들이 놀라 다 날아가 버리게 했구나!
그런데 위 사에는 술을 마셨을 것이라고
알게 해주는 말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경치를 감상하면서,
한 곳에서 해 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놀면서
술이 없었다는 것도 퍼뜩 이해하니 힘 든다.
아마도 "沈醉"가 술을 마시면서
빼어난 경치에 취한 게 아닐까 싶은 실마리일 수 있다.
제1수와 對ㄹ 이루는 제2수에는 어제 밤에 마시다
"남은 술이 없어지 않았다"는 "不消殘酒" 句가 나온다.
또한 중국 측의 어떤 해설서에는
술에 취한 것이라고 해석한 해설도 없지 않다.
어쨌든 지은이는 아름다운 경치에 흠뻑 취해
놀이가 끝난 뒤 이미 집에 돌아가는 길도
분간 못할 만큼 취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저자는 “不知歸路”라고 읊었는데
귀갓길을 모르겠다는 것이고,
이를 “沈醉”로 표현해서 나타냈다.
대체 얼마나 취했길래? 얼마나 경관이 뛰어났기에
집에 갈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이 대목은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 동원된 것으로 보이는데,
흥취가 최고조로 올랐음을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고 하니까 말이다.
다음으로 "誤入藕花深處"는 앞의 “不知歸路”와
상응하는 표현으로서 지은이의 忘情心態를 드러내고 있다.
배를 타고 연꽃이 피어 있는 곳으로 잘못 들어갔지만
그곳의 아름다운 광경에 흠뻑 취한 심적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또한 두 번이나 연거푸 “어찌 건너나"(争渡)라고 한 것은
지은이 자신이 제대로 바른 길을 찾기를 바라는
심사를 드러낸 것임과 동시에 평화롭게 노니는
물새들을 날려보내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려는 심사를 표현한 것이었으리라.
둘째 수
李淸照如夢令詞云、
昨夜雨疏風驟,濃睡不消殘酒。試問捲簾人,
卻道海棠依舊。 知否?知否?應是緑肥紅瘦。
이청조의 如夢令 詞에 이르기를,
어젯밤 비 성글고 바람 세차더니
깊은 잠에도 남은 술기운 사라지지 않네
주렴 걷는 이에게 물어보니
도리어 해당화는 예전대로라네
아는가? 아는가?
분명 초록 잎은 푸르고 붉은 꽃은 시들었으리라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 한 가지!
중국어 노래는 우리말로 옮기면 말이 길어져서
옮긴 말로 노래를 부르면 어울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중국어 노래가 다 그렇다.
그래서 중국어 노래는 중국어음 그대로 부르는 것이
뜻도 운치가 있고, 가사의 장단에서도 알맞다.
이하=동아일보입력 2020-04-24 03:00
이준식의 한시 한 수
어젯밤 듬성듬성 빗발 뿌리고 바람은 드세게 휘몰아쳤지.
/깊은 잠 이루고도 술기운은 사그라지지 않네
./발 걷는 아이에게 넌짓 물었더니
/해당화는 여전하다는 뜻밖의 대답.
/모르는 소리, 네가 알기는 해?
/초록은 더 짙어졌을지라도 붉은 꽃은 져버린 게 분명하리니.
(昨夜雨疏風驟, 濃睡不消殘酒. 試問捲簾人,
郤道海棠依舊. 知否, 知否? 應是綠肥紅瘦.)
―‘여몽령(如夢令)’ 이청조(李淸照·1081∼1141?)
간밤 비바람에 스러져갈 봄꽃이 아쉬워 봄앓이라도 한 것일까.
흠씬 술을 마신 탓에 시인은 숙면을 이루고도 아직 취기가 다 가시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불현듯 스치는 걱정. 얘야, 그 붉던 해당화는 다 지고 말았겠지?
아이의 대답이 심드렁하다. 그대론데요.
저에게는 바람 불고 꽃 피고 지는 게 그저 밋밋한 일상에 불과할 터,
개화든 낙화든 새삼스러울 것 하나 없는데 웬 수선인가
싶었을 것이다. 나이라는 짐짝에 짓눌리다 보면 자연의 성쇠나
계절의 변화에 유난스레 민감해진다는 걸 알 리가 없다.
그 무심한 대답을 힐책하듯, 생떼라도 부리듯 시인이 일갈한다.
네가 알긴 뭘 알아. 단언컨대 초록 잎은 무성해져도
꽃은 이미 다 지고 말았으리니.
‘녹비홍수’(綠肥紅瘦·초록은 살쪘을지라도 붉음은 야위었다),
떠나는 봄을 절묘하게 요약한 시인의 이 한마디는
봄의 끝자락을 형용하는 성어가 되었다.
이 작품은 노래 가사, 즉 사(詞)라는 송대에 유행한 운문이다.
노랫말 특유의 섬세함과 감성이 풍부했기에 내용이나
분위기가 시보다 자유롭되 엄숙한 맛은 덜했다.
사는 제목 대신 곡명을 사용했는데 ‘여몽령’이 바로 그것이다.
‘꿈결 같은 노래’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청조는 여류시인으로 음악, 회화
그리고 금석학에도 일가견을 가진 팔방미인이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