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고려를 구국한 최승로의〈시무 28조〉
비록 귀하게 군주가 되셨지만,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고, 재산을 많이 가졌지만 교만하고 자랑하지 않는다면 복은 애써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재앙은 기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할 것이니, 성군께서 어찌 만 년이나 살지 않으며 왕업이 어찌 백세만 전할 것인가?
고려의 충신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렸던 〈시무 28조〉의 상서 연유이다.
12살의 어린 최승로는 고려의 태조 왕건 앞에서 《논어》를 막힘없이 줄줄 외웠다고 한다. 왕건은 이 천재소년의 영민함에 대혹하여 원봉성(고려 초 왕명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훗날 현종 때 한림원으로 바꿈)의 특별 장학생으로 천거하며 당대의 굉유(宏儒)들로 하여금 이른바 영재교육을 하게 하였다.
최승로가 장차 고려를 위해 큰일을 할 재목임을 한눈에 알아본 왕건의 안목이 실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여하튼 태조 왕건의 혜안(慧眼)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된 최승로는 2대 혜종을 거쳐 6대 성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 임금을 모셨다.
건국 이래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고려시대는 외부로부터의 가장 혹독한 침입의 고초를 겪어야만했다. 북방으론 거란과 몽골, 홍건적의 잦은 침입이, 남방에선 왜구(倭寇)들이 틈만 나면 고려를 괴롭혀 댔다.
고려 초, 몹시도 혼란했던 시기에 왕좌를 물려받은 성종(고려 6대)은 즉위 이듬해인 982년. 정5품 이상의 모든 고위관리들에게 시무(時務)와 관련한 상소를 올리라는 대명을 내린다. 특히나 겉을 봉해 왕이 직접 뜯어보게 하는 이른바 “봉사(封事)의 소”를 명했는데, 이때 최승로는 천고에 길이 빛날 역사적인〈시무 28조〉를 상소한다.
이 〈시무 28조〉의 주요 내용은 - 광종 때 공덕제를 실시하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는 사실을 들어 이를 없앨 것을 건의한 것(2조)에서 시작하여, 불보(佛寶)의 돈과 곡식을 고리(高利)로 이용하는 것(6조)과, 승려가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여 임금의 총애를 얻는 것을 금지하고(8조), 승려가 객관(客館)이나 역사(驛舍)에 유숙하면서 행패부리는 것을 금지하고(10조), 금·은을 사용하여 불상을 제작하는 사치행위를 비판하며(18조), 왕실의 지나친 숭불을 신랄히 비판하는(20조) 등 당시 불교의 각종 부정부패의 만연과 관련된 것들 이었다.
물론 이는 6두품 출신의 유학자로서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한 정치형태를 추구한 최승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승로는 그저 불교의 폐단을 비판했을 뿐이지 불교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교를 믿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하며 불교의 개인 종교적 차원을 인정하였다.
반면 토속 신앙과 관련해서는 팔관회의 축소(13조)와 미신 타파의 일환으로 음사(淫祀)의 제한(21조)처럼 무속 신앙의 병폐를 시무책으로 지적했다.
현인(賢人)들의 세상을 보는 눈은 대체로 비슷한 것인지, 〈시무 28조〉의 내용 중 당시 무속 신앙 숭배의 만연으로 인한 사회적 물의를 냉철하게 지적한 최승로의 상소(13조, 21조)는 2012년1월1일자 김동길 교수의 프리덤 왓치 / 새로운 이야기들 / 김동길의 종교이야기(5)에서 지적하였던 내용과 흡사하여 잠시 인용하자면,
『 이 땅에 가장 오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무속입니다. 그런데 우리만이 그런 게 아니고, 세계의 어느 부족 어느 민족에게 있어서나 다 그러하였습니다. 원시시대를 살면서 원시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신앙은 무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무당의 역할이 매우 큰 것이어서 무당이 권력의 주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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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종교는 인류가 영원히 간직하고 존경하는 인물들을 배출하여 우리들의 도덕적 생활의 수준을 높여줍니다. 공자와 석가와 예수가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우리들의 삶은 계속 ‘기복’으로 일관하고 우리는 무당만 쫓아다니는 한심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
최승로는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중국 문물의 무분별한 도입을 삼가고 우리 실정에 맞도록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조). 또한 북방의 여러 침입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적으로 방비해야 함을 지적(1조)하는 안목을 지니기도 하였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결국 성종에 의해 전격적으로 채택·단행되어 고려 전기의 혼탁했던 세상을 바로잡는데 크나큰 역할을 했다. 성종은 최승로의 정책건의와 보좌를 받고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 시기 고려가 안정된 국가의 큰 기틀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최승로의 공로임에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다행히도 천 년 만에 지존을 만나 재주 없이 직책을 더럽히며 서원에 있네.
문장이야 감히 같이 있는 현사들을 바라보랴만, 임금의 깊은 총애 모름지기 자랑하여 후세에 보여주리.
크나큰 감명으로 눈물만 흘리고, 뛸 듯한 기쁨에는 오히려 말이 없네.
보답할 방법 생각하나 끝내 얻지 못하니, 오직 남산 갈 길 빌면서 성은에 절할 뿐...
최승로가 죽기 전 주군(主君) 성종의 성은에 감읍(感泣)하여 삼가 찬양한 글이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과 당시 고려의 건국 초기 상황이 제법 유사한 듯싶다. 북한의 끊임없는 남침야욕, 정치인의 거짓으로 인한 국민분열, 국가안보를 배제한 이념적 갈등, 잣대가 모호한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 등은 한마디로 이 나라가 심한 어려움에 처했다는 의미일진데, 고려 초기 구국충신 최승로의〈시무 28조〉처럼 우리를 위기로부터 구해줄 "난세의 영웅"이 나타나길 그저 간절히 소망할 뿐 !
어느 유명한 철학자의 말대로 정치가 썩으면 사회 전체가 썩는다. 더욱이 교육과 종교가 썩으면 국가의 밝은 미래는 절대 있을 수 없음을 국민 모두가 각성하여, 반만년을 굳건히 지켜온 배달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세계만방에 보여주자.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