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곳도 아무 데가 아무 데가 아니었다
저 달의 뒤편을 가로지른 적 있었네.
거기, 榜 한 줄이 길게 날 따라 흘렀네.
“아무도 여기 이 그늘 읽어가지 마시오.”
「기러기」전문
박 : 문과 이 시간 함께 여행할 박입니다.
문 : 우리 처음 보죠? 수전증에다 악필에다 사인하기 제일 겁나요. 어이구 완전 지렁이 같네. (문이 사인을 하고 있다. 적막 소리)
문 : 좋은 시인들 많은데 절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여행 좋죠. 개인적인 습관인데 집을 떠나 여기저기 다녀오면 분명히 시가 잘 돼요. 시 쓰고 싶은 욕심으로 비교적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이에요. 어쩌면 이것은 웃기는 일이고 문제적 태도가 될 수 있어요.
박 : 여행이 시 쓰는데 동기부여가 되고 발견이 된다는 말인가요?
문 : 일상은 포장도로와 같은 것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잘 때까지 반복되는 시간들은 그대로 흘러가 버리죠. 일상이라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시간은 하루하루가 정말 후딱 흘러가버려요. 하루도 한달도 한해도 그렇게 후딱 흘러 보이지 않는 속도, 그 느껴지지 않는 속도가 일상 속에 있어요.
그러나 여행은 일상이 아니에요. 여행은 새로운 광경과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처음 겪어보는 어떤 사건 같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여행은 일상을 갈아엎는 쟁기질 같은 거예요. 쟁기질로써 땅이 더욱 싱싱해지는 것처럼 여행이야말로 깜깜하게 가려진 일상 너머로 대상을 더욱 새롭고 명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일 때 논갈이는 농사에 있어서 풍년을 약속하는 농사 일정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죠. 논이나 밭을 갈아엎으면 흙이 매우 튼튼해지고 비옥해지는데 갈아엎은만큼 산소 공급이 잘 돼서 농사가 잘 되는 거죠. 여행지에서 보는 숲, 나무, 새, 강물, 하늘, 구름 등은 사실 자기가 사는 곳에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일상을 떠나 여행지서 새롭게 볼 수 있고 재해석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거죠. 여행자체도 즐기지만 시 쓰고 싶은 욕심과 재미가 없으면 못 갔죠.
박 : 쟁기질 효과라는 말이 참 와 닿아요. 매년마다 땅을 부지런히 갈아엎어야겠어요.
문 : 겨우내 언 땅을 갈아엎으면 쟁기날을 물고 흙덩어리가 일어서게 돼요. 결국 표면이 늘어나고 갈아엎으면서 산소가 공급이 되는 거죠. 매년 농부들은 새농사를 짓는데 이걸 새땅 새농사 효과라고 볼 수 있어요.
박 : 일상을 아스팔트로 비유하셨는데 아스팔트를 갈아엎고 새땅 새농사를 짓고 싶어져요.
문 : 나는 주로 도시의 바닥에 관심이 많은데 도시의 바닥이 어떠한 절경보다 나을 때가 많아요. 사람의 냄새가 나는 곳은 바닥에서예요. 아스팔트는 잘 닦여서 튼튼하고 발걸릴 염려가 없어 보이죠. 우리 생활은 편리할지 몰라도 무언가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 생각, 충동, 충격의 계기가 일상에서는 잘 없어요. 그러나 여행은 다르죠.
박 : 최근 여덟 번째 시집『적막 소리』출간과 북콘서트와 지역문학회 특강 그리고 여행 등으로 바쁘신 나날을 보내시는데 이 외 특별한 일과가 있다면요.
문 : 2006년 시집 출간 후부터 아내로부터 재정 자립이 가능해졌어요. 심사와 특강 등의 일이 재정에 많은 부분 도와줬어요. 한편으로 자연스레 여행도 되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여러 가지로 보탬이 됐어요. 그러나 뭐든지 차츰 줄어드는 게 당연지사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박 : 늦은 나이로 등단을 해서 문단 내에서 겪은 고초나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문 : 이거 좀 사소하고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문학판에서의 호칭 문제에 늘, 얼마간 곤혹스러움을 느껴요. 동갑이거나 한 두 살 비슷한 나이에 내가 그를 부를 때와 그가 나를 부를 때, 그 호칭이 이래저래 곤혹스러워요. 은근히 선후 군기가 센 데가 문단입디다. 시집을 주고받을 때 도 마찬가지 사정이에요. 우리말 호칭에도 ‘미스터’가 있으면 좋겠네요. 으, 몹시 불편해요.
박 : 다섯 번째 시집『동강의 높은 새』자서에서 “여행시란 없다”고 말한 적 있어요. 우리는 그저 여행의 도중에 서 있다는 말인데요. 문은 그때 내 삶의 궁기를 볼 수 있다고 말했어요. 시라는 것은 그때의 그 궁기를 베껴 쓰는 거라고요.
문 : 나는 내 일상을 여행이라는 쟁기로 갈아엎어서 시를 써요. 내 시에 여행지의 유적과 유물 이런 걸 소개한 적은 없어요. 흔히 말하는 관광을 한 적도 없고 그곳의 역사나 문화를 베낀 적도 없지요. 다만 여행지에서 내 인생을 봤을 따름이에요. 여행지에서 내 삶을 재발견하고 확인했을 따름이지요. 사는 곳에서는 구름도 안 보이고 쭈그려 앉아 있는 시장에서의 할머니도 안 보이고 내 삶의 고단함도 안 보였는데 여행지에서 내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강원도 정선 같은 경우는 여인숙 방에만 틀어박혀서 2박을 낭비한 적도 있어요. 그리고서 밖으로 나와 시를 썼지요. 그때 시는 여인숙 방에서의 절절 끓는 방바닥에서 오히려 잠을 뒤척인 내용이라든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과 찬 물이 얼룩덜룩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수도꼭지를 타고 칠해지면서 조양간 강물소리가 내가 내일 넘어가야할 고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이별한 적 없는데 누군가와 이별한 듯한 서러운 심정이지 격하게 밀려오더라고요. 감정이 좀 격하면 어때. 그게 가라앉고 시가 될 수 있는 거죠. 나는 여행지에서 내 인생을 봤어요.
박 : 그러면 내 삶의 궁기를 가장 처절하게 볼 수 있었던 여행지는 어디였습니까?
문 : 단연코 정선이에요. 내 여행의 처음과 시작과 끝은 고향 성주이지만 내 내면을 가장 측은하게 볼 수 있었던 곳이 정선이었어요. 측은지심. 고향땅 성주가 내가 여기까지 흘러나오게 된 나의 발원지라면 정선은 한의 본향, 내 한이자 이 땅의 모든 사람의 한이 서린 곳이에요. 내 몸이 엄마와 아빠에게 안겨있던 곳이 고향 성주라면 정선은 내 전생의 고향이 아닐까. 고향과 관련된 시들을 보면 엄마와 아빠를 얘기하고 그곳에서의 이웃인 농민들의 농사와 삶과 뛰놀았던 상처와 놀이 등을 이야기하면서 내 몸의 뿌리를 얘기했어요. 그러나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정선은 누구나 잘 살고 있을 거 같고 누구나 즐겁고 행복할거 같은데 혼자 있는 시간에 복받쳐 오는 무엇이 무척 강렬했어요.
아리랑의 본원이 정선아리랑이라 알고 있는데 정선은 1990년도에 처음 들어가봤어요. 고개를 몇 개를 넘었을까? 대구에서 출발해서 안동 봉하를 거쳐서 태백쪽으로해서 정선으로 들어갔지요. 봉하-노룻재-넛재-싸릿재-쇠재-정선읍 이 고개를 넘어 들어가는데 고개 하나 넘을 때마다 뒤가 철커덕철커덕 잠기는 거 같았어요. 노룻대와 넛재가 경상북도와 강원도 경계사이에 있는데 봉하에서부터 강원도의 서늘한 그늘같은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험한 고개를 넘고 돌아보면 그 고개가 거대한 산이 되면서 내 뒤를, 나의 퇴로를 감가버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마지막 쇠재를 넘어서 정선에 들어서니까 넘어온 고개들이 자물통으로 잠그는 소리가 났어요. 문제는 그게 두려움과 갇혔다는 답답함이 아니라 아, 돌아왔구나 하는 느낌이라는 거죠. 여기 처음 왔는데 드디어 돌아왔구나 하는 느낌. 올 곳에 왔구나. 정선이 나를 안아들이는 느낌이 들었어요.
박 : 아, 그때 감정을 조금만 더 말해 주면요.
문 : 서러움이 복받쳤어요. 정선아리랑의 한에 갇혀서 안기는 느낌 이것과 고개들이 열쇠 자물통 잠그는 느낌. 뒤가 잠기는 느낌이 오히려 좋았어요. 돌아왔다는 느낌. 떠돌다 돌아와 안겼다는 느낌. 그 이후 정선이라는 데가 나에게는 고향 다음으로 자주 가고 싶은 곳이 된 거죠.
박 : 왜 하필 정선인가요?
문 : 아리랑을 근거로 해요. 아리랑이 신나는 축제의 노래가 아니라 자기의 내면을 가는 명주줄처럼 정선 조양강이나 동강에서 험악한 산악을 타고 올라가는 물안개같은 풀려나고 싶은 욕망 그러나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러한 근거가 아리랑이에요. 무지랭이들이 부르는 정선아리랑은 상품화가 잘 안 된다고 봐요. 음정도 제멋대로 곡조도 제멋대로 부르는 게 더 어울려요. 아리랑이 이 지역 저 지역 전승되면서 그 쪽 풍토에 곡조도 달라지는데 하나같이 한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한이 무엇이냐면 그 무엇으로도 번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죠. 원한, 원망, 저주, 절망이라도 해도 무엇으로도 번역이 불가능하죠. 한은 원망도 없고 저주도 없어요. 한자말로도 풀이가 어려운 정서인 거죠. 그것은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만져볼 수 없는 정서예요.
박 : 한편 여섯 번째 시집『쉬!』의 제4부는 인도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인도에 가면 시적인 영감을 받는데요.
문 : 나는 사실 얼마 십여 년 전만해도 해외여행은 낭비일 뿐이다라고 했죠. 우리 것이 아니라는 편견 때문이었죠. 지금도 삐까번쩍하는 선진국 여행은 그렇다고 생각해요. 어느 시인이 인도는 환상도 아니고 신비도 아니고 인도는 인도라는 현실이다라고 말하더군요. 인도의 낯선 문화와 인도만이 갖고 있는 풍토를 우리는 착각하고 착시하는 거지요. 자기 나름대로의 인도라는 나라를 세워서 환장하는 거예요. 나는 인도에서 인도여자의 눈빛을 보고 왔어요. 인도 여인들의 그 크고 깊고 검은 눈엔, 그 어떤 분노도 저항도 절망도 원망도 구호도 없지요. 사람이 붙어살 수 없는 기어오를 수 없는 절경엔 사람의 냄새가 없지만 인도의 바닥엔 온통 사람의 냄새가 있고 인도의 그 눈빛이 있고 짜이 향기의 모성이 있지요. 인도의 바닥 거기야말로 바로 진정한 절경이었어요.
박 : 선생님에게 여행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여행이 있다면요.
문 : 아주 최근, 울산 광주 등 이곳 저곳 행사에 초청돼 가 다녀오긴 했지요. 그것 말고 여행을 위한 여행을 했지요. 십 수 년 전부터 지금까지 가끔 소위 아무 데나 가보기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집 부근에 그러니까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동부시외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더러 여길 이용해요. 참 볼일 없는 날엔 여길 갑니다. 대합실 벽에 붙은 행선지들을 봐요. 마음에 드는 지명 하나를 골라 편도 한 두간 걸리는 곳을 잡지요. 당일로 돌아오기에 별 무리가 없는 곳들이에요. 주로 경주 포항을 거쳐 강릉 속초까지 가는 동해안 노선이나 울산 쪽을 택하지요. 매표를 해서 무작정 버스에 올라 차창 가에 앉지요. 차창 풍경은 대게 그냥 흘려보내지요. 매표대로 가지 않고 어느 읍동네에 내릴 때도 많습니다. 거기, 가는 날이 장날이면 아주 좋고요. 점심국밥이나 잔치국수가 맛있거든요. 언젠가 아무 데나 가보기를 산문으로 써 모아보고 싶기도 해요. 아무 데나 가보기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도 아무 데나는 없어요. 말마따나 세상 그 어디에나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 어디나 또한 아무나 사는 데가 아니었거든요.
박 : 일제강점기, 6,25전쟁, 절량농가, 초근목피 등의 고된 삶의 골격을 이룬 분들에 관한 애착이 상당하신데요. 이러한 애착이 시로 완성되고, 완성되려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문 : 그것이 바로 방금 말한 내 시의 발원지,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 참담한 역사와 인간모독적인 궁핍을 그저 살아낼 수밖엔 없었던 이들을 내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의 그 기억들을 깜냥 껏, 그러나 딴엔 절실하게 그려본 것이 고향 관련 시들입니다. 고향, 그렇지요. 당연히 애착이 갈 수밖에 없는 대상이지요.
박 :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나의 시가 있다면요.
문 : 역시 고향관련 시들이 내 땅 같아요. 이 쪽 시들로 거의 한 권을 채운 제 3시집『홰치는 산』을 가장 아껴요. 아니, 가장 나의 시라고 했나요. 그 말은 단1편을 골라잡으라는 것인데…, ‘앉아보소’라는 시, 아니 ‘보리’, ‘간통’, ‘심우도’ 등 등…
박 : 문의 쟁기질을 돌아보면요.
문 : 난 사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글이랍시고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여느 문예반 친구들처럼 똑같이 문학소년?청년시절을 보냈지요. 그런데 1966년 군입대와 더불어 모든 문우 그러니까 모든 문학인구와 문학환경으로부터 도망쳤지요. 아니, 꺼져버린 거지요. 1969년 제대 후 그 어디에도, 무엇에도 자리잡지 못한 채 온갖 데 객지를 떠돌았어요. 가끔, 혼자 뭘 끄적거리긴 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지향도 없는 자위적이고도 소모적인 글쓰기였지요. 등단 후 한 두 해가 지난 다음에야 내 글재주라는 게 이미 기본부터 거의 마멸됐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나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네요. 지금은 40대~50대 데뷔가 예사이지만, 내가 1985년 갓 마흔에 등단했으니까 아마 늦깎이 원조 그룹에 들겁니다. 자랑할 게 못되지요.
그런데요, 꼭 자탄할 일만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나를 좀 아는데 1945년 생인 내가 만약에 천재적(?)으로 1960년대 초반에 등단했거나 늦어도 1970년대 초반에 정상적으로 문단엘 나왔다면 정말 그랬다면, 모르겠네요, 지금처럼 열심히 문학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뭐, 그리 크게 후회되지도 않습니다. 입학이 늦은만큼 졸업도 늦겠지요. 아니요, 오래오래 시 쓰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글쓰기에 대한 마음가짐을 말하는 겁니다. 어쨌거나 벌써 시집8권, 동시집1권을 냈어요. 어느 날 툴툴 털고 전 걷을 수도 있지요. 아니, 그럴 작정입니다.
문 : 맛있는 얘기가 있었는데 꼬리를 감춰버리네. (문이 호두알을 손에 넣고 굴리고 있다. 적막을 깨는 소리)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달북」전문
인터뷰어·정리 / 박송이 사진 / 박병란
문인수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늪이 늪에 젖듯이』『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뿔』 『홰치는 산』『동강의 높은 새』『쉬!』『배꼽』『적막 소리』 동시집『염소똥은 똥그랗다』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편운문학상, 시와시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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