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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2.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묵상글 ( 03:50, 05:15~:2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반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 03:50 )
- 김찬선 신부님: 05:2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15 추가.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05:15 추가.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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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2.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11 20:37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1,29-32
군중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도,
‘더 확실한 보증’을 내놓으라 조른 것입니다.
보증을 요구하는 자리에는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사랑도 그러합니다. 증명을 요구하는 사랑은 이미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만을 주시겠다 하십니다.
요나가 누구입니까?
원수의 도시 니네베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싫어서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친 예언자입니다.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낮과 밤을 지낸 뒤,
마지못해 니네베로 가서 한마디를 외쳤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성의 없는 외침, 마음 없는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도시 전체가 회개했습니다.
여기에 두 겹의 표징이 있습니다.
첫째, 요나가 사흘 만에 물고기 배에서 나왔듯
사람의 아들도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요나의 ‘말씀 선포’가 니네베를 돌이켰듯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징의 핵심은 기적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그런데 슬픈 대조가 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성의 없는 요나의 한마디’에 회개했는데,
‘요나보다 더 크신 분’ 앞에서도 이 세대는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 땅끝에서 달려왔는데,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 곁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리게네스가 말했듯,
말씀은 이미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부족한 것은 ‘열린 마음’입니다.
친절·선행 주간의 눈으로 보면
요나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하느님의 친절’입니다.
니네베는 이스라엘을 짓밟은 잔혹한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원수의 도시에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그것이 못마땅해 화를 냅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어찌 저 큰 성읍 니네베를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우리 안에도 ‘요나’가 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잘되는 것, 용서받는 것이
괜히 불편해지는 마음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친절은 늘 우리의 울타리보다 넓습니다.
어제 임금이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부르셨듯이.
친절의 첫걸음은, 미운 이의 회개와 행복까지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더 확실한 표징(보증)’만 요구하며 믿음을 미루지 않는가?
나는 이미 주어진 말씀 한마디에 마음을 돌이키는가?
내 안의 ‘요나’ ―원수의 회개를 못마땅해하는 마음― 는 없는가?
나의 친절은 하느님의 넓은 친절을 닮았는가?
주님,
표징을 요구하며 믿음을 미루지 않게 하소서.
주어진 말씀 한마디에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고,
원수에게까지 넓으신 당신 친절을 닮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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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2.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집은 우리의 여정이 시작되는 성소입니다.
2026.10.11. 17:04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영혼은 영원히 깊은 시간 안에 머물며, 우리를 과거와 미래로 부드럽게 부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집으로 돌아감(귀가)!
집은 우리의 여정이 시작되는 성소입니다.
2026년 10월 11일 일요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김은 곧 우리의 참된 자아로 돌아가는 귀가(歸家)입니다.
—일리아 델리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영적 여정인 '귀가(歸家, homecoming)'가 어떻게 해서 과거와 미래 사이의 긴장을 품어내는 것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성찰합니다:
'집'이라는 원형적(原型的) 관념은 동시에 두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뒤로 이끌어, 어머니의 몸에서 시작된 최초의 일치(合一)에 대한 암시와 맛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의 집에서 왔습니다—때로는 불완전하거나 상처가 있는 집일지라도—그곳은 이상적 낙원의 가능성을 심어주는 씨앗이 됩니다. 그러나 ‘집’은 또한 앞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합니다. 그 일치의 암시와 맛이 실제로 참되다는 깨달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것은 내적 나침반, 혹은 영혼의 귀가 장치처럼 우리를 인도합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집, 곧 이타카 섬은 여정의 시작이자 끝이 됩니다. 칼 융은 이를 간결하면서도 중대한 통찰로 표현했습니다: "삶이라 불리는 것은 두 위대한 신비 사이의 짧은 에피소드일 뿐이며, 그 두 신비는 사실 하나이다."
어떻게든 끝은 시작 안에 있고, 시작은 끝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슬프거나 학대받은 어린 시절을 지닌 이들조차도 여전히 '집'이나 '어머니'를 이상화된 형태로 그리워하며, 언젠가 다시 돌아가서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저는 하나의 위대한 신비가 시작에서 드러나며, 영원히 우리를 그 완성으로 부르신다고 믿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이 심겨진 약속을 놓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영혼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내주하시는 성령이라 부르며, 또 다른 이는 단순히 향수나 꿈의 시간이라 부를지도 모릅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은, 그것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를 과거와 미래로, 우리의 기초와 우리의 미래로 부르십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넘어서는 은총처럼 느껴집니다. 영혼은 그러한 영원히 깊은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주시려는 것을 우리 안에 갈망으로 심어 두셨다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이를 더 잘, 그리고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향수(homesick)'라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보통 이 말은 슬픔이나 그리움, 혹은 만족을 찾아 과거나 미래를 바라보는 공허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단어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시면서 동시에 당신께로 이끄시는 동일한 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들이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께서 알파이시며 오메가이시다라고 고백할 때 의미하는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깊은 향수와 같은 그리움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림을 받습니다. 이 내적인 갈망과 불만족은 우리를 보내고 동시에 끌어당기며, 그것은 하느님과의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일치에서 비롯됩니다. 과거와 미래로 보이는 것은 사실 동일한 집, 동일한 부르심, 동일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는 "천 년이 하루와 같고, 하루가 천 년과 같다"(시편 90,4)고 하였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웨일즈어에는 히라에쓰(hiraet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흔히 ‘향수(homesickness)’로 번역되지만, 그 의미는 훨씬 더 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때 알았다고 믿는 집과 사랑에 대한 깊은 그리움입니다—이 세상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더 아름답고 더 완전한 집, 그리고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고 더 깊은 사랑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것은 언젠가, 어딘가, 우리가 알았다고 믿는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이 그리움은 영혼을 가득 채워 몸으로도 느껴질 만큼 강렬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갈망이지만,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그리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그리움입니다.
—Sue N.
Reference
[1] C. G. Jung, Selected Letters, 1909–1961, ed. Gerhard Adl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77.
Adapted from Richard Rohr, Falling Upward: A Spirituality for the Two Halves of Life, rev. ed. (Jossey-Bass, 2024), 55–5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내적 성소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가 누구인지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을 밝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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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2.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12 05:17
- 악의 여러 종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세대 사람들을 보고 악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악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악이란 선의 결핍이라는 주장이 있고 저도 이 주장에 동의합니다.
이 말은 악을 선의 반대 개념으로 얘기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악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100이 선이라면 99는 1이 부족한 악입니다.
1만큼 부족한 악이라고도 하고 1이 곧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선이란 내가 원하는 것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는 철학적 개념이 깔려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좋다고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나쁘다고 하잖습니까?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악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선악 개념입니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은 좋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내가 싫어하면 나쁜 겁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이런 선악 개념이 더 문제인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고 좋다고 하신 하느님 창조물인 선도
내가 원치 않고 싫어함으로 악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기에 당신이 좋으실 대로 만드실 수 있고
그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다 선입니다.
이것이 철학적 또는 신학적인 악이라면 윤리적인 악이 있지요.
죄의 결과로서 생긴 악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지 말라고
법으로 정한 것이나 남이 싫어하는 것을 하는 악이요,
신앙적으로는 하느님의 계명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죄악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악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결이 좀 다른 악인 것 같습니다.
하늘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는 악이고,
하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악이며
그래서 하느님께로 돌아서거나 향하지 않는 곧 회개하지 않는 죄의 악입니다.
주님보다 훨씬 못한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남방 여왕은 왔고
주님보다 훨씬 못한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했는데
솔로몬보다 훨씬 뛰어난 주님의 지혜를 듣고자 하는 열망이 없고
그래서 주님의 지혜로운 설교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죄의 악입니다.
폭풍 같은 설교를 듣고도 꿈쩍하지 않고,
면도칼 같은 설교도 마음을 파고들지 못하는 완고함의 죄와 악입니다.
완고함과 악함을 합쳐서 우리는 흔히 완악(頑惡)하다고 하는데
이 완악함이 내게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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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2.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12. 04:32
우리의 주님께서는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눈앞에 서 계시며 직접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듣는 특전을 누렸습니다(루카 11,29).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자신을 찾기보다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표징이셨는데도 말입니다(루카 11,29-30).
그런데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주시고 사랑의 말씀을 건네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인간은 예수님을 만나고도 그분을 외면하거나 잊어버리곤 합니다(갈라 3,1).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을(갈라 2,20) 어떻게 잊고, 외면하고,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느님의 아드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욕되게"(히브 6,6) 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보고 듣고 만나려는 의지를 갖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적인 것에 정신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 한 우리가 주님의 현존을 의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주시는데도 영의 눈으로 우리 앞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자기중심성, 자기 집착, 나르시시즘은 모든 것을 가려 하느님조차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분을 거부하고 마음을 굳게 닫아버리는 것이지요...
요 며칠간 저도 음악회와 농사 등으로 정신 없이 지내면서 정작 집중해야 할 영적인 수양을 외면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용적이고 실리적인 일, 즉 세상적인 일에 정신을 집중하다 보니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을 별로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이 어둠의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오십니다. 이렇게 고요한 새벽에 주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도록 저에게 이 시간이라는 선물을 주시니, 다시 한번 마음을 모아 주님의 현존과 그분의 보호하심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거부하고 외면할지라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는 시간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하듯이,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신 분"(2티모 2,13)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통해서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혹독한 거부의 시간에 마리아께 당신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9,26). 이는 우리가 더 이상 그분을 버리지 않고, 모든 이들을 충실히 사랑으로 이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돌보아 주시도록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으니,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자 하는"(묵시 12,17) 당신 자녀들을 분명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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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2.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6201
2026.10.12 04:21
하느님을 향해 돌려진 마음 1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하기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우리 마음이 머무는 곳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자주 생각하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함께 소중히 여기듯이, 그리스도와 벗이 된 사람은 조금씩 그분의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분과 함께 머무는 기도는 그분처럼 살아가려는 갈망을 낳고, 그 갈망은 일상의 관계 안에서 구체적인 선택이 됩니다. 우정이 깊어진다는 것은 그분에 관하여 더 많이 아는 동시에, 나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을 닮아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다른 것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기도할 때에는 자신을 내어드리지만, 사람을 만나면 인정받고 싶고, 의견이 어긋나면 옳음을 증명하고 싶으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집니다. 주님께 향했던 마음이 어느새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자리가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바로 이 나뉜 마음을 주님께 가져가, 우리의 삶 전체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내어드리는 여정입니다.
보나벤투라가 『생명의 나무』에서 드러내는 갈망도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힘으로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여, 모든 갈망의 목적이신 그리스도께 이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길 잃은 이에게 구원이 되시고, 지친 이에게 힘이 되시며, 고통받는 이에게 위로가 되시는 그분 안에서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찾던 선의 충만함을 바라봅니다. 이 갈망은 우리가 무엇을 더 소유해야 하는지를 묻기보다, 누구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마음은 한 사람의 삶이 모이는 중심입니다. 마음에는 생각과 감정만이 아니라 기억과 의지, 욕망과 결단이 함께 자리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무엇을 소중히 여길지 정하고, 무엇을 지킬지 선택하며, 누구에게 자신을 내어줄지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하느님께 돌린다는 것은 잠시 경건한 감정에 머무는 일을 넘어, 삶의 방향을 그분께 맡기는 일입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위해 힘을 쓰는지,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다시 살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보물은 입으로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실제로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곤 합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마음이 몹시 흔들린다면 인정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의 옳음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이 계획에서 벗어날 때 사람에게까지 분노한다면, 내가 기대한 결과가 그 사람보다 앞서 있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물음은 자신을 몰아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자유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우리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머무르실 자리와 거처를 마련하라고 권고합니다. 기도는 이 초대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이미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현존이 우리의 생각과 선택에 스며들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 거처는 흠잡을 데 없이 정돈된 사람에게만 허락되지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 상처받은 마음, 사랑하고 싶으면서도 사랑하기 어려워하는 마음도 주님께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숨기지 않고 열어 드리는 바로 그곳에서 관계는 깊어집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이 가라앉고 문제가 해결된 뒤에야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해결되지 않은 삶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풀리지 않는 원망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서운함, 부끄러운 질투와 되풀이되는 두려움까지 그분께 가져갑니다. “주님, 지금 제 마음은 이러합니다.” 이 정직한 고백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감추는 일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만나 주시는 사랑에 몸을 맡깁니다.
이러한 기도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오직 자신의 집중력과 의지로 이루어야 하는 과제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으려는 갈망이 일어나고, 다시 사랑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며, 굳어진 판단에서 돌아서려는 작은 움직임이 시작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 이끄심에 귀를 기울이는 응답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성자와 결합되고,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친교에 참여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 친교의 방향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먼저 구할 때, 우리 마음의 중심은 조금씩 옮겨 갑니다. 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느님의 선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뜻대로 되어야 안심하는 마음은 아버지의 뜻을 함께 찾는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또한 ‘우리’의 양식과 용서를 청하는 기도는 나 혼자만의 안녕에 머물 수 없게 합니다. 아버지 앞에 선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녀이며, 그들의 필요와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기도는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아버지께 가까이 가면서 형제를 지속적으로 멸시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을 그의 잘못 하나에 영원히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기도 안에서 받은 사랑은 관계 안에서 새로운 태도를 요청합니다. 그 요청 앞에서 우리는 기도가 삶을 얼마나 깊이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강조한 마음의 순수함도 이 관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은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이나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뒤섞인 동기를 알아차리면서도 거듭 사랑의 방향을 선택하는 마음입니다. 봉사하면서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드러나면 그것을 숨기지 않고 주님께 내어드리고, 충고하면서 상대를 이기고 싶은 마음을 발견하면 잠시 말을 멈추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내 뜻에 맞추려 했음을 깨달을 때, 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리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수함에는 내적 가난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물건뿐 아니라 자신의 역할과 경험, 평판과 상처까지도 소유하듯 붙들 수 있습니다. 오랜 수고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새로운 시도를 막기도 하고,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상대를 계속 판단할 권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적 가난은 경험이나 상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지금의 만남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내려놓는 일입니다. 내가 겪은 일이 나의 전부가 아니며, 내가 내린 판단이 상대의 전부도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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