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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의 신앙고백
수 2:8-14
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수 2:8-14 / 정탐꾼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라합은 지붕 위로 올라가 9)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이미 주셨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곳 지방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척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 벌벌 떨고 있어요. 10) 애굽을 나올 때 여호와께서 홍해를 말리신 일을 우리는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들이 요단강 동편에 사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쓰러뜨렸는가도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11) 그 소문을 듣고 우리는 무척 겁이 났습니다. 무서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모두들 풀이 꺾여 앞으로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있던 중입니다. 당신네들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지요. 당신들이 받들어 섬기는 하나님이야말로 위로는 하늘을 다스리고 아래로는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2) 자, 지금 내게 맹세해 주시지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두고 맹세해 주세요. 내가 이토록 당신들을 잘 대해 주었으니 당신들도 나와 우리 집안 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겠다고 말입니다. 자, 지금 그렇게 하시겠다고 내게 징표를 주시지요. 우리를 죽이지 않겠다는 표를 주세요. 13)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 남동생들, 그리고 우리 자매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우리 식구들에게 딸려 있는 식솔뿐 아니라 재산까지도 손대지 않겠다고 말해 주세요.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해 주세요. 그렇게 맹세하였다는 징표를 우리에게 주시지요. 진실하고 분명한 표를 주세요' 14) 그러자 그 두사람이 라합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 땅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네 목숨을 보장하겠소.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신네 식구들을 보호할 터이니 아무 염려마시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실 이 땅에 우리가 들어오는 날, 당신네 식구들의 신변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도록 할터이니 걱정 마시오. 우리가 알아서 잘하리다.'
기생 라합이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겨 주었던 행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고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 승리에 대한 라합의 확신과 신앙고백(8-11) 라합은 두 정탐꾼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지붕으로 올라가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고백하였습니다. 여리고의 사람들은 이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을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들의 간담이 녹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듣고서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다는 것은 아브라함 이후 그의 후손들에게 반복해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창 17:8; 28:4; 출 6: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성읍 여리고에 사는 한 부정한 여인의 입에서 그와 같은 사실이 고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합과 두 정탐꾼 사이의 언약 체결(12-14) 라합은 두 정탐꾼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선하게 대우해 주었으니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살려줄 것을 맹세해 줄 것과 그에 대한 증표를 줄 것을 정탐꾼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누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라합과 그 가족들을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인자하고 진실하게 대우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죄악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우상과 거짓 신들을 섬기고, 자신이 기생이었기에 음란함과 부패함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라합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일들을 듣고서 여리고도 멸망될 것을 예견하고 하나님 편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라합이 하나님에 대하여 듣고 믿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적용: 라합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듣고서 믿게 되어 정탐꾼을 선하게 대하였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열매가 나타납니다. 당신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열매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꽃은 벌을 꿈꾸지 않습니다. 꽃이 피면 나비는 저절로 날아들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발견하고 나누는 일은 타인들과 함께 할 수 있지만 기쁨의 능력은 우리의 가슴에 꿀주머니처럼 들어있습니다. 현재의 삶에 충분히 뿌리를 내려 경험의 빛을 향해 가슴을 열고 꽃을 피우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거듭났음을 증명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되새기며 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억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변화되고 여전히 지금도 변화되어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구원의 증거인 것입니다.
< 설 교 >
라합의 믿음
수 2:8-14
예수님 시대에 있어서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만약 믿음이라는 문제를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옆에서 수종을 드는 것만으로 얘기한다면 제자들은 모두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직업까지 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는데 그만한 믿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잘 알았다면 몰라도 알지도 못한 사람이 '나를 따르라'고 하는 한마디에 자기의 일을 다 버리고 좇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도, 적어도 우리는 대단한 믿음이라고 여기는 그 믿음도 결국 자기 죽음이라는 엄청난 권세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나디고 설교를 들었던 그 모든 세월들이 '자기 죽음'을 극복할 힘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당시 제자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구원과도 상관없는 믿음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는 우리들의 행위들이 과연 죽음을 이길만한 힘이 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당당하게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이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직접 말씀을 들으며 살았는데 십자가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도망을 치고 만 것입니까?
믿음이라는 문제는 인간 쪽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믿는다고 해서 믿고 있는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의 확신도 아닙니다. 믿음에 대한 확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믿음이 과연 내 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아닌 것으로 발각되는 것은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빈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이 믿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를 생각하면 뭔가 부족한 것은 있을지라도 '나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내 행동에 있어서는 부족한 것이 있지만, 내 마음은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에 자기가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믿음을 확인하라고 성경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자를 등장시킨 것입니다. 믿음에는 이러한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본받아서 이 사람처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과 같은 삶이 아니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를 예로 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창 22:12).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한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을 우리에게 남겨주심으로서 믿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지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신 10:12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랑이 있다는 증거는 자기 사랑이 부정되어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자기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공존할 수도 병행 될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가 있으면 필히 다른 한쪽은 물러나야 합니다. 타협도 있을 수가 없고 화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에게 적이고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사랑이 부정되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먼저 자기 사랑에 대한 부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이것을 확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자기 사랑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힘으로는 되어질 수 없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이고,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자질과 의지와 믿음은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부정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것을 버리고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믿음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안될 일도 되어진다는 자기 최면과 몽상으로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여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주여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믿습니까'를 연발하는 것이고, 불안하기 때문에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조용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자신을 채우고 있다면, '믿는다'고 소리칠 이유도 없고 악을 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데, 믿음이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인데 굳이 예수님에게 자신이 믿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바로 나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현실이지 세상을 현실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현실이 주어진 것이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는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단순히 자신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줬기 때문에 여리고성이 멸망당하는 가운데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시대 상황에서 정탐꾼이란 찾아볼 수 없고, 따라서 정탐꾼을 숨겨주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란 점을 생각해 본다면 라합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정탐꾼을 숨겨준 것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사건 이전에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낸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정탐꾼을 보내서 여리고 성을 살피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정탐꾼을 보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이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땅인데 정탐꾼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탐꾼을 보낸 여호수아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뭔가 불안했기 때문에 미리 점령할 땅을 살펴보고자 했던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불신앙에 대한 책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부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낸 것은 곧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냄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서 기생 라합을 만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을 통해서 믿음을 보임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국 라합은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이 입장에서 라합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라합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의 실체는 버림과 얻음입니다. 버림과 얻음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 정탐꾼이란 곧 간첩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탐한다는 것은 여리고를 점령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여리고에 있어서는 위험천만한 인물들입니다. 반드시 잡아서 죽여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탐꾼을 숨겨준다면 그것은 단지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차원을 지나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것보다는 간첩을 숨겨주는 것을 더 중한 죄로 여깁니다. 간첩과 똑같은 자로 여겨버립니다.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줬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건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정탐꾼에게서 자기 목숨을 내걸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을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단순히 인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탐꾼이었다면 라합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래도 숨겨 줬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의 정탐꾼이었는가하는 것은 9-12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이것이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에게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냥 신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상천하지의 하나님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에게 무너진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가 몇 명인지, 힘이 얼마나 센지 이런 것을 따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 줬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 여리고 성은 무너진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탐꾼을 선대하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라합에게 다급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정탐꾼이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곧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시고 아모리 사람을 전멸하게 하신 일을 알고 있는 라합으로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스라엘이 곧 쳐들어 온다는 증거인 정탐꾼을 볼 때 다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급함 속에서 라합이 취한 행동은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정탐꾼을 숨겨주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나라에게는 반역입니다. 자기 나라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여리고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이기심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나 살자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나라를 배신한 행위는 아주 파렴치한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라합은 설사 여리고가 무너진다고 해도 끝까지 여리고 편에 있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탐꾼을 숨겨주고 자기 나라를 버리고 이스라엘 편에 선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 11:31절에서도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없었다면 라합은 여리고에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아니면 멸망당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라합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탐군이 들어왔음을 아는 자가 라합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정탐꾼이 들어온 것을 목격을 했고, 그 사람은 그 사실을 여리고 왕에게 고했습니다(2절). 그리고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기별해서 여리고를 탐지하러 온 정탐꾼을 끌어 내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라합은 자신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또 이미 성밖으로 도망을 쳤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서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똑같이 정탐꾼을 목격한 입장인데 왜 한쪽은 그들을 보호하고 한쪽은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쉽게 생각하면 내 나라를 해치는 정탐꾼을 잡아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국가를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라합이 국가를 배신하고 이스라엘 편에 선 이유입니다. 그것은 라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져 있음을 믿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면 가나안의 멸망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자신들의 운명이 약속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들을 가리켜서 순종치 아니한 자라고 말합니다.
정탐꾼을 죽이려고 한 것이 왜 순종치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여리고 왕에게 정탐꾼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를 하기라도 했습니까? 그러나 지시는 하지 않았다고 해도 가나안 땅을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정탐꾼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고자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탐군을 죽이고자 한 것은 자기 세계를 보존하고자 한 것이고, 영접한 것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라합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말고 자기 세계를 위해서 살지 말고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믿음으로 살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는 약속을 믿는 자입니다. 약속의 확고함을 믿고 흔들림이 없이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가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의로운 자입니다. 믿음이 이미 그를 의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생은 분명 세상 도덕적으로 볼 때 나쁜 일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창녀 일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그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 행위를 본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다말과 유다의 경우와도 같습니다. 다말이 스스로 창녀로 위장을 해서 유다와 동침한 것은 분명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의로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말이 유다의 후손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 때문에 다말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행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든 죄인입니다. 다말이 창녀로 위장을 해서 유다와 동침을 했든 안했든 그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여겨지는 것은,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다말 역시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 여김 받은 것입니다.
라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라합은 여리고 왕의 물음에 대해서 거짓을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정탐꾼을 살리고자 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거짓말한 것은 나쁜것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저는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은 인간의 행위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으로 규정됩니다. 약속을 믿는 자는 옳은 자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른 자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약속에 대한 확고함입니다. 세상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확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일을 따라가기에 여리고라는 자기 세계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도 담보로 내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라합의 믿음입니까? 약속에 대한 확고함으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을 믿고 살아갑니까? 이 세상은 멸망당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확정되어진 일에 대한 확고함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세상에 대해서 미련도 없고 아까울 것도 없이 사는 분입니다. 얼마든지 라합의 자리에서 정탐꾼을 영접할 수 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정탐꾼을 보내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정탐꾼을 새로운 세계를 몰고 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여러분에게 말할 때 그가 바로 여러분이 믿음을 확인하는 정탐꾼입니다. 그럴따 하나님의 약속의 확고함에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정탐꾼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보다는 자기 세계를 붙들고 자기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필시 정탐꾼을 밀쳐 낼 것입니다.
라합이 자신이 나라인 여리고를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를 볼 수 있었고 그 나라에 자기 인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라는 여리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기에 여리고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에 남은 인생을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약의 능력
수 2:8-14
중심내용: 약속과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설교목적: 믿음의 본질을 깨우치기 위함.
서론
1. 이스라엘은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가나안 지역의 첫 성은 가장 강력한 ‘여리고 성’이었다. 여리고 정복을 위하여 이스라엘은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다.
2. 두 정탐꾼은 가장 숨기 쉬운 성벽 위에 있는 기생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머물면서 여리고 성을 탐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리고 성 주민들의 신고로 이들의 정체가 발각되었다.
3. 여리고 성의 수비대가 라합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이러한 낌새를 차린 라합이 지붕의 삼대 사이에 두 정탐꾼을 숨긴 후였다. 라합은 수비대에게 ‘그들이 정탐꾼인지는 몰라도 낯선 사람 둘이 왔었지만 성문을 닫을 즈음에 성을 빠져 나갔노라.’고 대답하여 따돌렸다.
4. 수비대가 떠난 후, 라합은 두 정탐꾼과 생명을 위하여 단판을 짓는 거래를 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 성을 이스라엘에 주신 것을 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선대했으니, 너희도 우리 집을 선대하여 성을 점령할 때에 살려줄 약속을 하라.’고 요구했다.
5. 정탐꾼들은 ‘우리를 고발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하면 너희 가족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의 표로 성밖에서 볼 수 있는 창문에 ‘붉은 줄’을 매도록 했다. 라합은 창문에서 줄을 내려 정탐꾼들을 탈출시켰다.
6. 전쟁은 시작되었으며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졌고 함락되었다. 이스라엘은 약속대로 라합의 집을 고스란히 보존하도록 했다. 그 후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에 합류했으며, ‘다윗’왕의 증조할아버지인 ‘보아스’를 낳음으로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라합은 인생의 대역전을 이루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I. 지혜가 믿음으로 인도하는 첫 관문이다(vv8-11).
A. 본문
1. 본문8-11절을 보자.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라합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합은 가나안의 거민들이 그러했듯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부터의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다.
2. 다른 사람들은 단순한 사실로 알고 있었지만 라합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임을 믿고 있었다. 본문10절에서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화와께서 너희 앞에서… ”라고 했으며, 11절에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고 고백한다.
3. 라합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언한다. 11:31절이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합이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지혜였다.
4. 기생 라합은 천한 여자였지만 이 세상의 권세자들이나 여리고 성주를 무서워하지 않고 홍해를 갈라서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고 강한 바로의 군대를 멸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단의 세력들은 간담이 녹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B. 적용
1. 우리가 전도하든지 선교할 때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천사들을 보내셔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악한 세력들이 더 두려워한다는 사실도 알고 담대히 나가야 한다.
2.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가나안 복지를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는데 이방 여인이요 천한 여인인 기생 라합 만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증거로 하나님께서 홍해도 가르시고 요단강을 가르사 육지같이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3. 또한 그 강한 아모리의 두 왕을 멸절 시키신 일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가나안 족속을 멸하시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것을 확실이 믿게 되었다.
4. 이것은 사물에 대한 깨닫는 힘이 강했다는 증거이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자연계시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자연계시를 보고 하나님을 깨닫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말씀을 주신 것이다.
II. 약속은 믿음을 전제로 한다(vv12-13).
A. 본문
1. 수 2:12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2.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 기생 라합은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온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해주고 도와준 그가 도리어 그 정탐꾼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3. 그것은 그가 사는 여리고 성은 분명히 망할 것이요 지금은 나의 도움을 받고 있는 두 명의 정탐꾼이 얼마 있으면 심판하러 여호수아 장군과 함께 올 때 자기들도 여리고 성 사람과 함께 멸망하지 않고 구원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도움을 구하고 있다.
4. 그가 도와주고 있는 정탐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은 이 땅 여리고 성은 분명히 망하고 지금 도움을 받고 잇는 사람들이 승리하고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그 때는 지금과 정반대로 기생 라합과 그 가족의 생사 권을 바로 이 정탐꾼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때를 생각하고 미리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장면이다 놀라운 믿음과 지혜이다.
B. 적용
1. 말씀이 있으면 오늘과 내일이 두렵지 않다. 약속의 말씀만 있다면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원수 사랑하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면 원수가 어디 있겠는가?. 희생하란 말씀이 내 안에 있다면 누구와 결혼한들 무슨 두려움 있겠는가?.
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주님은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는 말씀만 있다면 교회에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III. 신뢰는 믿음을 생산하는 원천이다(v14).
A. 본문
1.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14절)."
2. 비록 민족을 배반한 것이지만 라합은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라고 하신 로마서12:9절 말씀대로 선을 택한 것이다. 라합의 선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다.
3. 라합은 출애굽 때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즉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믿음이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그 믿음이 없어서 광야를 40년 동안이나 헤매고 다녔는데도 말이다.
4. 앞서 보았던 히브리서11:31절에서,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했다. 즉 라합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한 지혜였다.
B. 적용
1. 죠지 크라슨의 '바벨론의 거부'에서 아키드란 머슴은 주인에게서 부자되는 법을 배워 바벨론의 부자가 된다. ①돈은 집과 가구 사는데 좋다 ②맛있는 음식을 살 수 있다 ③세계 여행 할 수 있다 ④성전을 지을 수 있다 ⑤남을 도울 수 있다 ⑥헌금하며 도와주며 영적 기쁨 누릴 수 있다. 보람을 건질 수 있다. '평생 십분의 일은 쓰지 말고 저축하고 살자' 그리하여 십분의 일을 저축하고 투자하고 저축했더니 부자가 된 것이다.
2. 이것은 물질의 저축 원리이다. 모든 원리는 영적으로 저축의 원리이다. 십일조와 감사와 구제와 시간과 몸과 헌신, 독경, 새벽기도 모두는 저축이다. 엄청난 축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3. 라합은 은총이 있었다. GQ가 높았다. Gloria 와 Grace Qutient이다. 하나님의 은혜 지수가 엄청났다. 창녀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의 역사이다. 우리에게 Grace가 높기에 Gloria도 높아야 되겠다.
결론
1. 라합의 지혜로운 믿음의 선택과 행동의 대가는 자신과 온 가족의 구원이었으며,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이었다.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
2.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지혜로운 선택과 결단과 행동으로 자신과 가정과 이웃을 주님께 속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이루시기를 축원한다.
3. 매일 순간의 삶을 선택하면서 살고 있다. 여러분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인가? 지혜로운 선택이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잊지 말자.
소문을 듣고 믿은 라합
수 2:8-14
1. 라합이 살던 여리고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의 대상으로 이미 제쳐 놓은 땅이었습니다.(신7:2, 신12:2-3절) 창세기 15:16절에도 벌써 여리고의 멸망은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악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했는데 그 기간이 400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수아 때에 이르러 멸망될 그 당시에 얼마나 죄악이 관영했을까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제단들로 가득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신7:5) 라합은 바로 그 땅에 살고 있던 여인입니다. 바로 그 여리고 성벽위에 살고 있었습니다.(15) 그것도 주막집을 경영하며 술과 웃음과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그녀의 삶의 내용과 태도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롬3:23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 소문을 듣고 믿은 라합(8-11절)
(1) 우리는 여리고 성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성의 규모가 내벽은 12feet(3.6m) 외벽은 6feet(1.8m) 높이는 30feet(약 9m) 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이름을 우리가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그 사람은 기생라합입니다.(히11:3, 약2:25)
(2) 정탐꾼을 숨겨준 여인(4절)
여호수아의 명을 받아 여리고를 정탐하러 간 두 사람이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하고 있다는 정보가 여리고 왕에게 보고 되었습니다. 여리고 왕은 즉시 군사들을 라합의 집에 보내어 정탐꾼들을 끌어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어떻게 했습니까? 정탐꾼들을 급히 데리고 지붕위로 올라가 건조시키기 위해 널어놓은 삼대더미 속에 숨겼었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이 왔을 때 성문을 닫을 때쯤 어디론가 떠났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기생라합의 행동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생명을 담보한 모험이었습니다. 만약 후에라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기뿐만 아니라 일족이 멸문될 일입니다. 또 자기 민족과 왕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 만약 그녀가 정탐꾼을 고발했다면 많은 상금을 받을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결단을 했던 것입니까?
(3)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10절 봉독)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전에 애굽에서 탈출한 놀라운 구원과 홍해를 건넌 이야기, 아모리 족속을 전멸시킨 승전보까지 다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정보는 이미 여리고 성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거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라합과 그의 가족뿐이었을까요?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잘 될 사람, 축복받을 사람은 좋은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게 해석하고, 들은대로 믿고 행동합니다. 안 될 사람들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꼭 못된 소문만 듣고 다닙니다. 그러니 그들의 입에서는 못된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남을 헐뜯고, 비판하고, 음모하다 입으로 시인한대로 못 될 수밖에 없고 남도 못되게 하고, 그가 속한 공동체도 못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를 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좋은 소리, 잘 되게 하는 소리, 구원에 이르는 소문과 소리만 듣고 명품 귀를 가진 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어떤 믿음이 생겼습니까?
①그녀는 온 우주와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배를 믿었습니다.(1절)
그렇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 우리가 예배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시며 그 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을 믿고 있었습니다.(9절)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들었을 뿐인데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꼭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몸으로 체험하고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심지어 장로들까지 약속을 불신하므로 죽어가는 판에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 진실하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구원받을 증표를 받아 낸 라합(12-14절)
(1) 라합은 자기와 자기 나라에 다가오는 운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의 결말의 열쇠는 성경말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나라가 정복될 것을 미리 알고 믿음으로 정복자들에게 은총을 구했습니다. 이 세상 나라도 예수님에게 반드시 정복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 노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했습니다.(히11:7)
(2) 라합은 자신 뿐 아니라 자기의 친척들의 생명까지 구원 약속을 받았습니다.(13절)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라합은 남편이나 자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부모와 형제들의 목숨까지 걱정하고 구원받게 해 줄 것을 요구한 배려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 베푼 친절의 보상으로 물질이나 출세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생명구원 만을 요구했습니다. 라합은 끝내 구원받을 증표를 받아냈습니다. 서로 은혜를 갚는 것은 자연의 천리(天理)입니다. 나무도 흙에 잎을 떨어뜨려 은혜에 보답합니다. 새와 나비 등도 꿀을 빨아 먹는대신 꽃가루를 운반해줍니다. 정탐꾼들은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하겠다고” 맹세하면서 다짐을 받고 증표를 제시했습니다.
①자기들을 숨겨 둔 사실을 누설하지 말 것(14절, 20절), 주의 비밀을 슬기롭게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은 주의 비밀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②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 것(21절)
이것은 출애굽 시 문인방과 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장자의 죽음을 보호받은 사실과 같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양심에 뿌려질 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우리도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안전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집에 함께 있을 것(18절)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멸망 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구별된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로, 롯이 소알로 피한 것처럼 약속된 장소로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들거리는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동요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있어야 할 곳에서 해야 할 일을 더욱 열심히 감당해야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좋은 성품과 종교적인 행위들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은 믿음 뿐 입니다.(엡2:8-9절) 라합이 여호수아를 신뢰한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을 신뢰하십니까?
라합의 믿음
수 2:8-14 / 서해원 목사
예수님 시대에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가를 발견합니다. 우선,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 표적, 이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적을 보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인 십자가의 죽으심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보다 기적에 더 관심을 갖고 있어서 좀처럼 그들의 고정된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권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군중의 지지를 받아 유대나라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열심당이라는 당시 독립운동단체에 속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가룟유다’였습니다. 결국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 기대를 못 미치자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얼마나 권력과 명예에 관심이 있었는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 말은 곧 예수님이 권력을 갖게 되면 자기들을 총리와 비서실장이 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도 한심했지만, 이 말로 분쟁이 일어난 것은 더 큰 실망이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모르고, 관심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람들을 칭찬하거나 책망한 것은 오직 믿음인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물에 빠지자 그를 건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또한 백부장을 보면서 유대 땅에 이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고 칭찬했고, 향유를 부은 여인의 믿음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알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믿음의 씨와 성장과 믿음의 열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이런 믿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오셨고, 고난을 당하시다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주님처럼 ‘믿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믿음의 씨가 심겨졌는지, 나의 믿음은 어떤 수준인지, 나는 믿음에 따르는 열매가 맺어지는지 끊임없이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라합’입니다. 라합은 어떤 믿음의 사람이기에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아는 믿음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 중에 있었던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장벽은 여리고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정복을 위해 두 사람의 정탐군을 성에 보냅니다. 그들은 여리고에 들어가 라합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때 라합이 고백한 말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으며, 또 당신들이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전멸시켜서 희생 제물로 바쳤는가 하는 소식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했고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 위에서, 과연 당신들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라합은 먼저 이스라엘에 대하여 누군가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요, 섬기고 믿어야 할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라합을 보면서 먼저 배우는 귀한 신앙입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알고, 고백한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는 지식’이라는 책에서 ‘신앙인의 삶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기록한 성경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고 믿음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믿음을 갖지 못하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잘못되고, 실패하고, 심판 받고, 망하게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몇 가지로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먼저 주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또한 비전이 없어도 망한다고 말합니다. 꿈과 비전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호세아 선지자가 본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성경을 가까이하여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는 법입니다. 전에 성경을 덮어놓고 믿으라고 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되는 길입니다.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태국을 다녀왔습니다. 우리교회에서 후원하는 김문수선교사님이 태국 북부지역의 대학도시 람빵에 선교센터를 건립하여 헌당식을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을 세웠습니다. 앞으로 그곳을 통해 태국에 많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한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태국사람들의 무지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이긴 합니다만 태국사람들도 좀처럼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고, 얼마 되지 않는 태국기독교인들도 책을 읽지 않고, 결국 성경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데 큰 장애가 되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경건 서적은 제쳐두고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많이 알고, 깊이 아는 것이 튼튼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 하고, 읽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도 이제 새봄과 함께 다시 성경공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라합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라합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무엇보다도 행함이 뒤따르는 믿음임을 강조합니다. 본문을 포함한 2장 전체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쓰여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아는 것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제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먼저, 정탐군을 영접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당시 모르는 외부사람이 집에 들어왔는데 그들을 도둑으로 신고하지 않는 것만도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나라의 사람이 아니어서 도둑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신고하여 처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영접합니다.
또한, 라합은 그들에게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놀라운 행동입니다. 당시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아는 자들은 라합 외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도 고백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믿는다고 고백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에 따라 그는 하나님을 알고, 고백하는 행동을 통해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그의 행동은 정탐군을 숨겨주고 도와준 일입니다. 이 일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정도의 행동이 아닙니다. 이미 여리고의 성은 정탐군이 왔다는 정보를 알고 왕이 이 첩자들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명령에 정탐군을 돕거나, 신고하지 않고, 거역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입니다. 라합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두려움 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뭔가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그의 행동하는 믿음이 자기와 가족이 구원을 얻고, 특히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예를 얻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의 믿음입니다. 그는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의 의지를 확고히 세워 행동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의 모든 기록은 한결같이 그의 행동하는 믿음을 인정하고 칭찬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라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에 대해서는 이게 전부입니다. 단 한 줄로 기록한 라합의 믿음을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행동입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군들을 영접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라합의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 야고보서는 이렇게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는 믿음에 따르는 행동을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신앙인의 행동을 강조하는 성경인데, 여기에 믿음에 따라 행동한 사람의 예로 라합을 소개합니다. 그만큼 라합에게 있어서 행함이 무엇보다도 돋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의 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하나님을 잘 압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제 행동의 믿음으로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약점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시대는 다르고, 문화와 사는 모습은 다르겠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엘리야를 소개하면서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쩌면 성경의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보다 더 많은 문제와 한계와 핸디캡과 역점이 많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 모든 약점을 잘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많은 약점을 극복하며 믿음으로 우뚝 선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라합입니다. 사실 라합은 성경에, 특히 믿음의 전당에 오를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모세에 이어 여호수아를 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라합을 언급합니다. 여호수아에 대해서는 여리고 사건을 강조하면서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의 믿음으로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인 믿음의 장에서는 모세에 이어지는 이름이 여호수아가 아니라 라합입니다. 이렇게 소개되는 것은 라합이야말로 부족함과 실수가 많지만 그것을 극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당시 라합이 가지고 있던 약점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여자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은 물론 다릅니다. 여자가 약점이라고 말하다간 큰 코 다칠 세상입니다. 하지만 라합의 시대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여자이기에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남자로 태어난 것을 큰 축복으로 믿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여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약점이겠습니까? 그런데 라합은 그 약점 아닌 약점을 누구보다도 극복하여 사라와 함께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이었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진국의 여권으로 선진국으로 가려면 많은 무시를 당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됩니다. 아무리 후진국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선진국의 상식 없는 사람보다도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당시에 이방인이라는 딱지가 라합에게는 큰 문제요, 고민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도 자기와 같은 이방인에게 구원이 임하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이방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살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약점과 핸디캡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라합에게 가장 큰 약점은 기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라합의 이름 앞에 늘 꼬리뼈처럼 기생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것이 라합의 시대는 물론이고 라합이 죽은 이후, 시대가 몇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당시 라합에게는 이것이 큰 약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라합의 직업을 ‘기생’이라고 번역합니다만 이것은 아주 점잖은 번역입니다. 실제로 라합은 기생보다는 매춘부, 창녀가 더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거룩한 성경과 강단에서 쓰기가 거북하고 말하기도 꺼려지는 사람입니다. 라합이 왜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그녀의 과거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그녀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기생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추하고 더러운 과거가 있더라도 다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그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살다가 기생이 되었고, 사회에서 버림받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나같은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이 놀라운 믿음입니다. 어쩌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꼬리표요, 그녀의 생애 무엇보다도 부담되고 힘들고 극복하기 힘든 약점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믿음의 반열에 이름이 올랐고,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만이 가진 장점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약점도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허점과 약점과 핸디캡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약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에게 공개되고 보여지는 약점으로 노출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약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나만이 아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몸부림치고, 눈물 흘리며 사는 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약점이 있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에게서 배우는 믿음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고,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는 힘이 없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점 투성이의 나를 부르셔서 강점이 돋보이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자신감으로, 자존감으로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약점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꼭 가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 오늘 저녁부터 부흥사경회를 갖습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집회지만, 분명 내 생애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특히 라합과 같은 믿음을 갖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믿음의 기회, 아는 대로 행동하는 믿음의 기회, 그리고 약점과 문제와 장벽을 극복되는 믿음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참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한 주간도, 남은 생애도 라합의 믿음으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믿음의 여인 기생 라합
수 2:8~14; 히 11:31 / 주성호
라합은 우상을 숭배하는 아모리 족속으로 여리고에 살고 있었고.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하기 전 은밀히 정탐하기 위하여 두 사람을 보냈는데 그들이 여리고에 가만히 들어가 기생이었던 라합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 소식이 여리고 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사람을 보내 그들을 끌어오도록 했는데. 분명히 신분은 좋지 않은 기생이지만 신앙이 깊은 고로 그들을 숨겨줄 뿐 아니라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탈출하도록 도와 무사히 싯딤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 후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를 점령하여 전멸할 때 이미 약속한대로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구출되었다. 어떤 이는 라합을 주막을 지키는 이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여호수아서에는 라합을 기생이라고 3번씩이나 언급했고 harlot라는 말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모두 동일하게 기생이라는 말을 뜻한다.
후에 그는 유다 지파에 속한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는데, 어떤 이는 살몬이 라합의 집에 머물렀던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신빙성이나 근거는 없다. 보아스는 효부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이 다윗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보잘 것 없는 기생의 신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첫째: 믿음의 여인
1) 기생 라합의 믿음(수 2:8 11)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할 때에 제일 먼저 공격 대상이 된 곳이 여리고였다. 여리고는 가나안 입성의 첫 관문이요, 가나안 지역 중 가장 큰 샘 즉 엘리사 샘이 있는 풍요로운 지역으로서 농업은 물론 상업도 번성했으며 주민들은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했으며 도덕적으로도 문란하였다.
여호수아는 침략하기 전에 두 사람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 안에 보내게 되었는데 그들은 기생 라합의 집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 당시 여리고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기사를 들고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2:11). 라합은 신분은 기생이고 도덕적으로 순결 하지 못했으나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다.
9, 11절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아노라.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는 그녀의 말은 두 정탐꾼은 물론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주는 중요한 정보가 되었고 또한 라합의 신앙이 구원받기에 넉넉한 믿음임을 증거 한 셈이다. 그래서 라합은 동족과 왕을 속이면서 생명을 내건 모험을 할 수 있었고, 이 같은 믿음 때문에 여리고 성을 진멸할 때 가족과 함께 유일의 생존자가 되었다. 라합은 신중하면서 기지를 발휘하는 면모까지 갖춘 여인이었다.
2) 라합의 행동(수 2:12~20)
라합이 구원받을 만한 신상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었다(3~7). 이는 육신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에서 나오는 행위였다. 이는 왕이 보낸 사람을 속이고 동족을 배반한 행위였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으나 신앙적으로 가능하다. 신앙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의 기로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지만 성도는 신앙 제일주의로 살아야 한다.
② 여리고 멸망 시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살려 줄 것에 대한 약속의 보증을 받아냈다(12~14절). "내가 너희를 선대 하였은 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 형제자매 등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③ 구원받기 위해서는 여리고 성이 정복될 때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아야만 했다(18~20절). 라합은 비밀들을 누설치 말아야 하고 그 날에는 그들을 피신시킬 때 썼던 붉은 줄을 창에 매어 놓아야 하고, 이 모든 일을 인내로 기다려야 했다. 믿음으로 인한 구원은 마음으로 시인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모험을 함께 하는 행동을 필요로 한다.
약 2:14, 26 "내 형제들아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둘째: 멸망 속에서의 구출
1) 신앙적 이유(히 11:3)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다. 세상 편으로 생각하면 라합은 신분이 천한 기생이고 동족이나 왕까지 속인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이지만, 신앙적인 면으로 볼 때 불순종의 여리고 백성과 함께 멸망치 않고 구원받게 됨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가나안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있으므로 전멸의 대상이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라합은 유일의 신앙인이었다. 그는
①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었으며
②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③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구원과 무관한 사람들이 제법 많다. 어쨌든 라합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때문에 어떤 어려움, 어떤 모험도 감수하였으므로 멸망 가운데서 구출될 수 있었다.
2) 구출된 후의 축복(수 6:22~25)
라합은 목숨만 구출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는데 그러므로 야고보는 라합을 의인이라고 표현했다. 약 2:25 "기생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죄인이었던 사람이 믿고 의인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롬 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합은 천한 이방인이요 더구나 기생의 신분이지만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행동하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보아스는 효부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에게서 다윗이 태어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족보에도 이름이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여인이 되었다.
기생라합의 산믿음
수 2:8-15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생활을 이끌다가 가나안땅 입성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땅 초입인 요단강 기슭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성만 점령하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곧 시작될 여리고와의 한판 전쟁을 위해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성에 들여보냅니다. 여리고는 고대 지중해 도시 중에서 유일하게 성벽이 360°로 둘러싸인 강한 요새 지역이요, 여리고성은 금성철벽이요, 난공불락의 철옹성입니다. 이 성벽이 얼마나 크고 견고한지 그 위에 집을 짓고 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생 라합의 집이 바로 그 성벽위에 있었습니다.
(수 2: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오늘 이 시간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도왔던 라합은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그 믿음이 어떤 놀라운 축복을 가져왔는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정탐꾼을 숨겨준 라합의 믿음은 목숨을 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이 여리고성에 몰래 침투했는데, 이들이 마침 라합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라합의 집이 여리고성 성벽 위에 위치한 집이었기 때문에, 성을 정탐하기 용이했을 것입니다. 또한 라합의 집은 나그네들이 드나드는 주막 내지는 여관이었기 때문에 정탐꾼의 신분을 감추고 여리고의 동향을 파악하기에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두 정탐꾼이 몰래 여리고에 잠입했음에도, 벌써 신고가 들어갔습니다. 즉시 출동한 여리고 군인들이 라합의 집에 들이닥쳐 수상한 자를 끌어내라고 명했습니다.
(수 2: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수 2: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이때 라합은 어떻게 했는가?
(수 2: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수 2: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수 2:6)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라합은 이미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놓고 둘러댔습니다. “이미 그들이 밖으로 나갔어요. 급히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거에요.” 여러분은 이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알지요? 무슨 죄인가? 범인 은익죄? 보통 범인이 아니라 간첩을 숨겨준 죄입니다.
라합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했겠는가? 즉시 112로 신고를 했겠지요. “여기, 수상한 사람이 왔어요. 빨리 오세요.” 설사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군인들이 와서 “여기 수상한 들어왔지?”라고 하면 “어머! 제가 정말 몰랐어요. 지금 그들이 저기 지붕에 숨어 있어요.” 즉시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어떻게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줄 수 있었는가?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목숨을 건, 믿음입니다. 정말 일사각오의 신앙입니다. 그녀의 결단력 있고 용감한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경외심의 발로였습니다.
아니 이방 여인, 라합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지요? 여리고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정탐꾼들에게 한 라합의 말입니다.
(수 2: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수 2: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수 2: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의 백성을 지켜주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지 승리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이스라엘이 곧 이 곳으로 온다. 그렇다면 아무리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여리고성도 하나님이 오시니 멸망하게 되어있다.”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라합의 결정적인 믿음의 고백은 11절입니다.
(수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숨겨준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방 여인 라합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불렀습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심과 구원자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능력의 팔이 이스라엘을 도와 여리고를 점령하게 될 것도 믿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얼마나 귀한 믿음인가? 여러분, 믿음장이 어디지요? 히 11장입니다. 히 11장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16명의 믿음의 거성들, 신앙의 거목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믿음장에 이 라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믿음을 얼마나 귀한지 그녀가 죽고 1,500년 뒤,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모든 세대가 본받아야할 믿음의 거장으로 그녀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 하였도다
또한 야고보서에도 이 라합의 행함이 있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을 소개하였습니다.
(약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에 의하면 라합의 믿음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보호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라합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라합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산 믿음에는 역사가 따릅니다. 하나님에 대해 소문만 듣고도 이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많은 말씀을 듣고 배우고도 왜 믿음이 약한지요.
성도여러분, 우리도 라합의 믿음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적의 정탐꾼이라도 숨겨줄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 목숨을 건,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 내 믿음 되기를 원합니다.
2. 라합의 믿음은 자신은 물론 전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정탐꾼을 숨겨주게 된, 믿음을 고백한 후에,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한 가지 청을 합니다. 무슨 청을 했는가?
(수 2: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수 2: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무슨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점령할 때에 내가 당신들을 구해준 것처럼, 당신들 역시 나와 나의 가족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그런 요청입니다. 가족 구원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우리도 가족 구원에 대한 이런 열망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가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라합의 이 요청에 정탐꾼들이 뭐라고 대답했는가?
(수 2:14)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반드시 구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비방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슨 비방이지요?
(수 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다시 말해 “우리가 나가는 이 창문에 붉은 밧줄을 걸어 놓으면 우리가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에 그 붉은 밧줄을 보고 너희 집은 건드리지 않겠다. 그러니 너는 즉시 부모님과 형제들을 네 집으로 모셔 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창문에 붉은 줄을 걸어놓으라’ 여러분, ‘붉은 줄’ 하면 뭐 생각나는 것 없는가? 그렇습니다.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을 때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심판에서 면죄를 해준 것을 연상케 합니다. 이 ‘붉은 줄’이 라합의 가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붉은 줄’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상징합니다. 붉은 줄이 라합의 가족을 죽음에서 구해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이 ‘붉은 줄’을 걸어놓기를 바랍니다.
라합은 정탐꾼의 말대로 창문에 붉은 줄을 걸어놓았습니다.
(수 2: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즉시 순종했습니다. 순종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서 라합은 무엇을 했을까요? 즉시 부모형제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제여, 이제 곧 이스라엘 군대가 이곳으로 쳐들어와서 이 성은 모두 멸망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으로 가면 살 수 있어요. 그러니 어서 우리 집으로 갑시다.”
그때 가족들이 뭐라고 말했을까요? “라합아, 이 여리고 성이 어떤 성인지 네가 몰라서 그러냐? 어떻게 이스라엘이 난공불락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린단 말이냐. 그리고 너희 집엘 가면 산다고? 그게 말이 되냐?” 안 믿지요. 여러분이 가족들에게 전도하면 이렇게 말하지요?
그리고 전쟁이 나면 가장 위험한 곳이 성벽위에 지어진 집인데, 라합은 성벽 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야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요. 하지만 얼마나 간곡히 설득했는지 부모 형제들이 다 그녀의 집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여리고성이 언제 무너지는가? 오늘이 될지, 일주일 뒤에 함락될지, 한 달이 걸릴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며칠 기다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라합이 팔을 벌리고 가로막습니다. “못갑니다. 여기서 나가면 죽습니다. 반드시 이 성은 무너집니다. 못나갑니다.” 그리고 가족을 못 나가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는 되어야 가족 전도를 합니다.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려면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성을 돌기 시작합니다. 매일 한 바퀴씩 대열을 지어 돕니다. 그리고 마지막 7일 째 되는 날은 7곱 바퀴를 도는 것입니다. 7곱 바퀴를 돌더니 멈춰 서서, 여리고 성벽을 향해서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나팔을 불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굉음소리를 내며 그 견고한 여리고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수 6: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그런데 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벽이 기초까지 무너지고 있는데 한 성벽만이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 성벽 위를 보니, 그 집 창문에 붉은 밧줄이 묶여 있었습니다. 심판주 하나님께서 그 붉은 밧줄은 보신 거지요.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기다린 라합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분 뒤 라합의 집 문을 긴급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라합! 문을 여세요. 우리가 왔습니다. 가족들도 다 같이 모여 있는 거죠?” 기다렸던 구원의 목소리였습니다. 결국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 동생들 모두가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한 사람도 안 죽고 모두 살았습니다.
(수 6: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라합의 믿음이 그의 식구들을 다 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기적을 여러분도 체험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라합의 믿음이 자신과 전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3. 천한 기생인 라합이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라합이 뭐하는 여자라고요? 여리고성의 기생이었습니다.
(수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원문 성경에는 ‘기생’이라는 말이 ‘조나’라고 돼있는데 이 말은 ‘매춘하다’의 뜻입니다. 사실 라합의 직업을 정확히 말하면 성매매를 하는 매춘부였습니다. 그래서 직업상 여리고 성벽 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여자가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다니요. 놀라운 축복입니다. 확인으로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1장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족보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그리고 ‘낳고 낳고’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쭉 내려가서 5절을 보십시오.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가나안 지방의 이방 여인이었던 라합이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로 귀화하여, 유다 지파의 살몬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보아스가 누구인가요? 룻기에 나오지요. 효부 룻의 새로운 남편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라합이 다윗 왕의 고조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룻의 시어머니가 됐고요.
천한 기생 신분의 라합이 메시아의 조상이 되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멸망당한 여리고성의 일개 기생에 불과한 여자가 이토록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렇게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라합이 이 큰 복을 받은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라합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그녀의 일사각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믿음으로 행동한 라합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믿은 대로 실천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분이나 지위나 민족을 초월해서 오직 믿음을 보시고 라합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그릇만큼 채워주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합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라합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런 믿음이 자신은 물론, 전 가족을 구원하게 될 줄 믿습니다. 천한 기생이었던 라합이 메시아의 조상이 된 것처럼 여러분의 자자손손이 이런 신령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직업을 통해 자기가족을 구원한 기생 라합
여호수아 2:8~14
1. 들어가며
어떤 가정이든지 가족 중에서 먼저 구원받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신이 들어서 알고 있는 정보가 정말 참된 생명 길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나만 믿고 구원받으면 되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구성원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주어 그들도 살려내야 되지 않겠는가? 만약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 자기의 생명만을 보존하길 원했다면 그녀는 혼자 여리고성을 빠져나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투항하면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참된 영적인 정보를 알게 된 것을 두고 그녀는 막중한 부담을 느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을 실천에 옮김으로서 자기와 자기가족 구성원 모두를 구원얻게 한다. 그래서 오늘은 한 사람의 행함있는 믿음의 실천으로 인하여, 한 가족 전부를 구원한 실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은 어떤 여인이었는가?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 매춘행위를 하고 있던 부도덕한 여인이었을까?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그녀를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정탐꾼을 살려 보내 자기가족을 구원한 믿음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생명과 가족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조상인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게 됨으로, 다윗왕의 증조할머니이자 메시야의 직계조상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마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약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왜 그녀에게 기생 곧 창녀라는 수식어가 달린 것일까?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그녀를 소개하는 문구에 “기생의 집”이라는 문구가 붙어있어서 후손들에게 그렇게 불려진 말인 듯 싶다(수2:1,6:22) 그런데 당시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녀가 창녀일 수가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첫째로, 여호수아가 보낸 2명의 정탐꾼들이 그 중요한 시점에 매춘행위를 하기 위해 기생의 집에 들어갔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두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땅과 여리고성을 정탐하라 보낸 특수한 사명자들이다. 그런데 그들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창녀의 집에 매춘하러 들어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둘째, 여리고 왕이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사람들을 보냈는데, 만약 그녀가 창녀와 같은 천한 직업의 종사자였다면 아마 그녀는 포박당하여 끌려갔을 것이다. 셋째, 그녀가 진정 창녀였다면, 여리고성이 멸망하던 날, 그녀의 집 안에 자기의 부모와 자기 아버지의 가족인 자기의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그들에게 속한 자들과 친척들까지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집 안에 모여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넷째, 만약 그녀가 창녀였다면 그녀는 돈버는 일만에 혈안이 되어있을 것인데 그녀는 그렇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정보까지 다 꿰뚫어보고 있었다. 다섯째, 그녀가 정말 창녀였다면 출애굽2세대였던 유다지파의 청년이었던 “살몬”이라는 사람이 그녀를 아내로 쉽지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창녀라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들에 의하면, 그녀는 여관집 주인 내지는 카운터 담당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여자는 보통 베일을 쓰고 있는데, 여관집을 운영하다보니 베일을 쓰지 않아서, 얼굴을 보이며 사는 여자라는 뜻에서 창녀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에 대한 기사를 종합해보면, 이 여자는 여관집을 운영하던 주인이었을 것이다. 다만 다른 여관집들 중에는 매춘행위를 한 집도 있었기에, 그녀의 집도 기생의 집이라고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3. 여관집을 운영하던 이 여인이 귀 기울인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 이 여인은 여관집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이었기에 외부의 손님들로부터 여러가지 소식들을 많이 들어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일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자기가 정탐꾼들을 숨겨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수2:9-13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첫째, 그녀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마르게 함으로 이스라엘은 무사히 건너갔지만 당시 세계최고의 군대인 애굽군대가 전멸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요단강동편과 동북편에 위치한 당시 최고의 무적의 왕들이라 일컬어지던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도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해 전멸당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둘째,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은 히브리인들만이 믿는 부족신 정도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절대 창조주라느 사실과,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조차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직업을 통하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참된 신이 누구며, 그분이 지금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탐꾼이 자기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재빠르게 그들을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가 삼대 줄기들로 덮어 그들을 숨겨주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살려줌으로 자기와 자기가족을 구원할 방도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4. 정탐꾼을 살려주기 위해 그녀가 행한 거짓말은 과연 죄라고 할 수 있는가?
라합의 집에 두 명의 정탐꾼이 들어왔을 때에, 이미 여리고 왕도 그 소식을 듣고는 정탐꾼들을 붙잡도록 사람들을 보냈다. 하지만 라합은 이미 사태를 주시하고 그들을 몰래 숨겨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과연 그 사람들이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 잡으리라(수2:4~5)” 어찌 보면, 그녀의 거짓말은 매국적인 행위이자 자기민족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반역의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죄인인가? 아니다. 만약 이 여인의 말을 거짓말로 본다면, 히브리산파들이 했던 말들도 거짓 증거한 죄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산파들도 바로왕의 명령을 어겨, 자기가 해산하는 히브리여인들에게 가기전에 해산하더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 여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서 하는 행동이므로 하나님이 그 여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출1:21). 그렇다. 라합의 행동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상숭배하는 일로 인하여 이미 하나님은 가나안을 심판하기로 작정한 상태였으며, 가나안민족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자기와 자기의 가족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정탐꾼을 살려보내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 즉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은 모든 세상 법 위에 존재하는 가장 위의 상위법이기 때문이다.
5. 그녀가 정탐꾼을 살려준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할 점은 무엇인가?
만약 그녀 혼자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알고 그녀 혼자만 살기를 바랬다면 그녀는 정탐꾼들을 숨기는 위험한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절대주권자인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얻은 정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정보를 통해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도 살리고, 자기의 형제자매들도 살리며, 자기의 아버지의 가족까지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이야말로 인류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전능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만 그 사실을 알고 끝내버리면 되겠는가?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었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친척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면 그들에게 꼼꼼하게 들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야 되지 않겠는가? 천국가는 길이 오직 예수님뿐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면, 언젠가는 그 사실을 날잡아서 가족에게는 꼭 들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러한 기회를 만들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