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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75 (105)
《범증(范增)의 위기(危機)》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한신(韓信)의 질문에, 괴철(蒯徹)은 얼른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한신이 다시 말을 계속한다."만약 연왕이 성문을 활짝 열고 우리에게 순순히 항복해 온다면
난들 전쟁을 좋아해서 무고한 생명을 살상하리오.
지금 육국(六國) 중에서 우리에게 항복해 오지 않은 나라는 오직 연나라가 있을 뿐이오.
모든 나라들이 한왕의 위덕에 순응하여 스스로 귀순을 해 오고 있거늘, 유독 연나라는 항우의 힘에
의지하여 우리에게 맞서 온다면 우리는 부득이 연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오..
그리고 내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연나라는 일시에 초토화 되게 될 것이오."
한신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이번에는 좌우를 돌아보며 새로운 지시를 내린다.
"여러 장군들은 잘 들으시오. 나는 이제부터 연나라와 제나라를 모두 정벌하겠소.
그리고 나서 내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대부에게 알려주기 위해 사신으로 온 괴철대부를
그때까지 객사(客舍)에 정중하게 모셔 두도록 하시오."괴철(蒯徹)은 꼼짝없이 객사에 연금(軟禁)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그리하여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해보고 고달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천만 뜻밖에도 조나라 시절의 대부 이좌거가 괴철을 찾아왔다.
조나라와 연나라는 동맹국이었던 관계로, 두 사람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괴철(蒯徹)은 이좌거(李左車)를 만나자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조왕께서는 생포가 되고 진여 장군은
전사를 하고 뒤이어 우리 연나라는 한신 장군으로 인해, 누란(累卵)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좌거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한다."대부께서는 무엇을 주저하시오.
자고로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말이 있지 아니하오?
한왕은 항우에게 시해된 의제를 정중하게 장사지내 드림으로써 천하의 의주(義主)가 되셨소.
게다가 한신 장군의 용병술은 신출 귀몰하여 그를 당할 사람이 당대에 없는 형편이오.
나는 그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조왕에게 순순히 항복할 것을 여러차례 권고했건만,
조왕은 끝까지 나의 충고를 무시하고 막강한 한군에 맞서다가 결국에는 나라도 망치고 자기 자신도
포로가 된 것입니다.대부께서도 그런 점을 충분히 감안하셔서, 한왕 편이 되든가
혹은 초패왕의 편이 되든가 스스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도록 하시오."
이좌거의 이같은 말을 들은 괴철은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초패왕은 의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힘으로 찬탈했는데, 한왕은 의제를 끝까지 받들어 모신 것을 보게 되면, 한왕은 인의(仁義)가
무척 두터운 사람인 것은 틀림 없기는 하오만 ....."하고 망설임을 보인다.
그러자 이좌거가 다시 말한다."항왕과 한왕은 의로운 면에서도 비교가 안 되오. 그러나 인격적인 면을
불문에 붙이고 순전히 군사적인 면에서만 보더라도, 한왕이 훨씬 우세하다는 것을 아셔야 하오.
한왕 휘하에는 장량, 한신, 소하, 진평 같은 신출 귀몰한 현사들이 있지 아니하오 ?
항왕 휘하에도 범증, 용저, 계포, 종이매 같은 용장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그들이
어찌 장량이나 한신 같은 사람들의 지략을 당해 낼 수 있겠소 ?"괴철(蒯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닌게 아니라, 범증 군사는 장량의 지략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고, 용저와 계포등은 한신 장군을
당해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그처럼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 무엇을 주저하시오. 한왕은 흥하고,
항왕은 망해 가고 있는 판인데 무엇때문에 흥하는 사람을 놔두고 망해가는 사람을
따르려고 하느냐 말씀이오 ! " "..... "괴철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결심이 섰는지 이렇게 말한다."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장군의 말씀이 옳소이다.
그러면 우리도 이제부터는 한왕을 섬기기로 하겠으니, 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만나보게 해주시오."
"참으로 좋은 판단을 하셨소이다."이좌거는 크게 기뻐하며 한신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괴철은 연왕에게 항복을 권유하겠노라고 한신에게 분명하게 말하니 한신은 매우 흡족하게
여기며 말했다."대부는 단순한 사신일 뿐이니, 이제는 본국으로 돌아가 연왕으로 하여금 정식으로
항복한다는 뜻을 명확하게 표명하게 하시오. 그리고 대부가 돌아가실 때에는 조참과 번쾌 두 장수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부와 동행을 하게 하겠소."
한편, 연왕은 대부 괴철을 한신에게 보내 놓고, 그 결과가 몹시도 궁금하였다.
그러던 차에 괴철이 돌아와 지금까지의 경과 과정을 소상하게 보고하고 난 뒤,
"우리나라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항왕을 버리고 한왕을 섬기는 것이 생책이 되겠사옵니다." 하고
아뢰었다.연왕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그러잖아도 나 역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그러면 조참과 번쾌 두 장수를 기꺼이 맞아 들여서, 진정으로 친선을 도모하도록 합시다."
하고 성밖으로 달려 나와 두 장수를 융숭하게 맞아들였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나 한신이 몸소 연왕을 찾아 오니, 연왕은 정식으로 항표(降表)를 작성하여
한신에게 올리니, 한신은 크게 기뻐하며 연왕을 깍듯이 왕으로 받들어 모셨다.
이렇게 한신은 화살 한촉 쏘지 않고 이좌거(李左車)의 지혜를 빌려 연나라를 고스란히
접수하였던 것이다.한신은 연왕(燕王)의 항표(降表)를 수하에게 시켜, 영양성에 있는 한왕에게
급히 보내고,그때부터는 제(齊)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또다시 원정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대한(大漢) 3년 11월.
한신이 위(魏), 대주(代州), 조(趙), 연(燕)등의 네 나라를 차례로 정복함에 따라, 한왕 유방의 세력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다.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초패왕 항우의 마음은 지극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범증이 입궐하여 항우에게 품한다."한신이란 자가 육국을 휩쓸고 돌아가는 바람에
한왕 유방은 영양성에 가만히 앉아서도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들의 세력확장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에게 어떤 불상사가 닥쳐올 지 모르니,
저들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지금 당장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할 것 같사옵니다."
항우가 즉석에서 대답한다."그러잖아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오.
그러기에 내가 불원간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영양성으로 직접 쳐들어 가기로 하겠소.
이렇게 내가 나선다면 유방 따위는 문제가 안 될 것이오."항우는 자신 만만한 어조로 말하였다.
이런 항우의 호언 장담은 한나라 첩자에 의해 한왕에게 즉시 알려졌다.
한왕은 항우가 조만간 10만 군사를 이끌고 직접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자 크게 불안해 하며,
장량과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항우가 불원간, 십만 군사를 직접 이끌고 영양성으로
쳐들어오겠다고 하는구려,한신 장군은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아직 북방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영포 장군은 구강(九江)으로 돌아가 버렸고, 왕릉장군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으니,항우의 내습(來襲)을 어떻게 막아 낼 수 있을지 크게 걱정이오."
그러자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신에게 좋은 계략이 있사오니, 대왕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무슨 계략이 있기에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구려."
진평이 다시 대답한다."초패왕이 믿고 있는 사람은 범증과 종이매, 용저와 주은 등, 몇몇 군사와
장수에 불과하옵니다.그러하니 우리가 반간지계(反間之計)를 써서 항우와 범증을 반목(反目)하게
만들면 저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내분(內紛)이 일어나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성품이 워낙 우직하기 때문에, 떠도는 소문만 듣고서도 범증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범증이 제아무리 좋은 계략을 상신해도 듣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또 하나의 계략을 써서 항우를 저절로 망하게 만들어 놓겠사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첩자를 매수할 공작금으로 황금 4만 근을 내 주었다.
진평은 그 돈으로 적의 첩자들을 매수하여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범증과 종이매는 지금까지 많은 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왕이 아무런 논공 행상도
베풀어 주지 아니하므로, 그들 두 사람은 항왕에게 원한을 품고, 지금은 한왕과 내통하여
초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책동하고 있다.>진평이 매수한 첩자들을 통해 퍼뜨려 놓은 이같은 유언비어는
확대 재생되어, 초나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서 마침내는 항우의 귀에까지 들어 갔다.
항우는 그 소문을 듣고 대로하였다."나는 범증을 <아부(亞父)>로 대접해 오고 있는데, 그자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유방과 내통하여,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고 있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
그 자가 이렇게 나온다면 당장 불러다가 목을 베어 버리리라 !"
항우는 워낙 성품이 불같이 급하고 우직한 사람인지라 앞뒤를 가릴새도 없이 길길이 분노하였다.
그러자 대장 용저가 간곡히 간한다."떠돌아 다니는 소문은 누군가의 모략으로 퍼뜨린 말이 분명하오니,
믿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범증 군사께서 폐하에게 원한을 품고 계실리가 만무하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그대는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가 ?
범증이 진심으로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면,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 리가 없지 않은가 ?"
"전시에는 적이 이간책(離間策)으로 그 같은 유언 비어를 퍼뜨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범증 군사를 끝까지 믿어 주시옵소서."
항우는 그 말을 듣고서야 반신반의 하며 분이 풀렸다.,
그러나 한번 의심을 품고 나니, 그때부터는 범증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영양성을 공략하는 일만은
단독으로 결행하기로 하였다.그리하여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단독으로 출정하여, 영양성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밤낮 사흘 동안이나 무지무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성안에 칩거해 있는 한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일체의 반응이 없으니, 적들은 이미 도망쳐 버리고 성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냐 ?
그렇다면 모두들 성벽을 기어올라가 성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 것이다 ! "
초군들이 기다란 사다리와 밧줄을 성벽에 걸고 성벽을 기어 오르기 시작하자, 어느 틈에 한나라 군사들이
나타나 성벽을 기어 오르던 초군을 모조리 떨어뜨리고 펄펄 끓는 물을 퍼붓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다 보니, 초군은 크게 당황하여 그때부터는 누구도 성벽에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항우는 크게 노하여,"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성벽을 타고 넘으라 ! "
하고 불호령을 내렸다.거머리 같은 초군의 끈질긴 공격이 계속되자 장량이 한왕에게 품한다.
"초군의 공격이 자심하여 끝까지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으니, 임시 방편으로 사신을 보내
항우에게 화친(和親)을 제의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항우는 화의(和議)를 수락할 것 같으니,
그때에 가서 진평의 <반간지계(反間之計)>를 다시 한번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 한왕은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에 잠겨 있었다. 그러자 장량이 다시 간한다.
"병서에 이르기를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란은 말이 있사옵니다. 이것은 전시에는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전법이옵니다.이번만은 항우에게 우리가 먼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여 위기를 넘기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우리가 화친을 제의해도 항우가 들어주지 아니하면 어떡하오 ?"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항우가 성품은 포악하여도 결단성은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세력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화친을 제의하면
고민하는 듯 하다가 결국에는 들어 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선생의 말씀대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해 봅시다."
그리하여 변설에 능한 수하가 왕명을 받들고 초진으로 향하였다.
이윽고 수하는 항우를 만나 간곡하게 말했다."그 옛날 한왕은 폐하와 함께 회왕(懷王)의 명을 받고,
형제지의(兄弟之義)를 맺고 동서로 나뉘어 진(秦)나라를 정벌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에 한왕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증왕(褒中王)으로 임명되는 바람에, 고향이 하도 그리워서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그러나 그것은 고향이 그리웠기 때문이지, 천하를 도모하려는
야망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한왕이 이미 관중(關中)을 얻었으므로
소원이 성취된 셈입니다.그러하니 이제부터는 영양성을 경계로 동쪽은 초나라가, 서쪽은 한나라가
각각 통치하여 피차간에 부귀를 오래도록 다 같이 누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
두 분께서는 과거에 형제의 의까지 맺으신 사이인 관계로, 이 문제도 역시 형제의 의리로써
해결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항우는 고개를 몇 번이고 기울이다 대답한다."그렇다면,
한신이 지금 나의 예하국(隸下國)인 연(燕)나라를 점령하고 있는데, 그 문제는 어떡하겠다는 것이오 ?"
하고 묻자, 수하가 다시 대답한다.
"폐하께서 화친을 수락만 하시면, 한신 장군을 즉시 연나라에서 철수시키겠습니다."
항우는 대답을 아니하고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범증을 불러 물어본다.
"한왕이 수하를 보내 화친을 제의해 왔는데,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이번에는 일단 화친에
응해 주었다가 후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연후에 유방을 다시쳤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부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그러자 범증(范增)이 대번에 머리를 흔든다."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저들은 영양성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임시 방편으로 화친을 제의해 온 데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기회에 영양성을 철저히 때려부숴야 합니다.
이번에 영양성만 때려부수면, 그 후에는 한신이 100만 대군을 몰고 와도 맥을 못 추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수하의 감언(甘言)에 속아 대사를 그르치려고 하십니까 ?"
범증은 워낙 지략이 출중한 모사인지라 그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정확하였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 크게 흔들렸다. 그리하여 수하를 다시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직 화친에 응할 결심이 서지 않았으니, 대부는 일단 돌아가서 하회를 기다려 주시오."
항우는 수하를 돌려보내고 나서 영양성을 본격적으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수하가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항우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것은 군사상의 비밀입니다만, 한왕께서 화친이 성립 될 줄로 알고
연나라에 주둔중인 한신 장군에게 긴급히 철수하라는 군령까지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신 장군은 100만 대군을 이끌고 불원간에 영양성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내심 적잖이 놀랐다. 그리하여 끝까지 싸우려던 결심이 크게 흔들려서,
"가부간에 내가 사신(使臣)을 보내기로 하겠으니, 그리 알고 일단 돌아가 주시오."
하고 말했다.사람을 보내 가지고 한왕이 주둔하고 있는 영양성내의 허실을 정확히 알아보고 나서,
최후의 판단을 내릴 생각이었던 것이다.수하가 영양성으로 돌아와 지금까지의 교섭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니 진평은 크게 기뻐하며 한왕에게 아뢴다.
"항우가 사신(使臣)을 보낸다고 했다니 우리로서는 이처럼 좋은기회가 없사옵니다.
만약 사신이 오면 우리는 그자를 이용하여 항우와 범증사이를 완전히 갈라 놓아야 합니다.
초나라에서 범증(范增) 한 사람만 제거해 버리면 항우를 거꾸러뜨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항우와 범증 사이를 어떻게 갈라 놓겠다는 말씀이오 ?""장량 선생과 저에게
절묘한 복안(腹案)이 있사오니, 그 점은 염려치 마시옵고 저희들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옆에 앉아 있던 장량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한편 항우는 영양성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수하가 다녀간 뒤 사흘 째 되는 날, <사신>을 보냈는데, 보낸 사람은 우자기(虞子期) 이였다.
변설가나 모사를 보내기 보다는 장수인 우자기를 보내어 적의 군세(軍勢)를 살펴보게 하려는
항우의 숨은 뜻이 있는 사신이었다.우자기(虞子期)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영양성으로 찾아와
한왕을 만나려고 하니, 장량과 진평등이 몸소 마중을 나와 융숭하게 접대하면서,
"대왕께서는 어제 과음(過飮)하신 관계로 아직 잠자리에 계시오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하며 우자기를 매우 호화스러운 객사(客舍)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점심상이 나오는데, 음식은 산해 진미(山海珍味)가 그득한 성찬이었고, 음식을 담은
그릇 조차도 금배옥완(金杯玉碗) 뿐이었다.
장량과 진평은 우자기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융숭하게 공대(恭待)하면서,"범증 아부께서는
무양(無恙)하시옵니까 ? 범증 아부께서 오늘은 무슨 일로 귀공을 이처럼 일부러 보내시더이까 ?"
하고 계획적으로 엉뚱한 말을 물어 보았다.
우자기(虞子期)는 장량과 진평으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받고 내심 크게 놀랐다.
자기는 초패왕이 보낸 사신인데, 장량과 진평은 자기를 범증이 보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우자기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면 범증(范增)은 소문처럼 아무도 모르게 이들과 내통이라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 ? )
그러한 의심을 품으며, 자기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범증 아부가 보낸 사람이 아니고, 항왕 폐하께서 보내신 특명 사신(特命使臣)입니다."
장량과 진평은 그 소리를 듣자 크게 놀라는 빛을 보인다.
"그러면 당신은 범증 아부께서 보내신 밀사가 아니고, 항왕이 보낸 사람이란 말이오 ?"
그리고 이내 심부름꾼을 부르더니,"이 사람은 범증(范增) 군사께서 보낸 밀사가 아니고
항왕이 보낸 사람이라고 하니, 이 방에 모실게 아니라 바깥 사랑으로 데려가도록 하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자기(虞子期)는 마지못해 바깥 사랑방으로 쫒겨 나왔다.
바깥사랑은 조금 전에 있던 방(房)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초라하고 가재 도구도 형편없이
허술하였다. 게다가 바깥 사랑방으로 우자기를 쫒아내고 난 장량과 진평은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않았다.(음 .... 이제 알고 보니 범증과 한왕간에는 내통 관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구나 ! )
우자기는 이를 갈며 분노하였다.마침 그때 수하가 찾아오더니 말한다.
"대왕께서 이제야 기침하셨소이다. 나와 함께 입궐하여 대왕을 알현하기로 합시다."
우자기는 수하를 따라 입궐하여 접견실(接見室)로 들어왔다.
접견실에는 책이 여러 천권이 쌓여 있었고, 책상위에는 서류도 많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왕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수하는 우자기를 의자에 앉혀 놓고 나서,
"대왕께서는 지금 세수를 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내가 대왕을 모시고
나오겠습니다."하고 방에서 나가 버린다.
우자기(虞子期)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책상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훔쳐보았다.
그중에는 누가 보냈는지 모를 서한이 한 통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항우는 지금 팽성을 비워 놓은 채 영양성을 취하려고 원정길에 올랐는데,
병력은 10만 명 정도입니다.그러나 항우는 천명을 거역한 사람이니 머지않아 한군(漢軍)에 의해
패망할 것이 분명합니다.그러므로 한왕께서는 항복하지 마시고, 한신 장군을 급히 불러다가
영양성을 끝까지 수호하도록 하시옵소서.노신(老臣)과 종이매 장군은 이곳에서 끝까지
대왕을 도와 드릴 것이옵니다. 참, 지난번에 보내주신 황금(黃金)은 잘 받았습니다.
대왕께서 통일 성업을 완수하시거든 이 늙은 신하를 고향의 후백으로나 봉해 주시옵기를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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