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흑백논리에 익숙하다. 대립된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고 나머지 하나를 외면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선과 악이 있을 때, 우리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선을 택한다. 바울은 영과 육 가운데서 영을 취하라고 권고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부모를 섬기는 일 사이에서 부모를 외면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몰두했다(막 7:9-14). 그런데 예수님은 마가복음 7장과 마태복음 25장에서 하나만을 택하지 말고 두 가지를 모두 택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특히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23)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두 가지 중에서 하나에만 치중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문제만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에서는 천국과 세상 가운데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강조면서 세상을 멀리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이 주목을 받으면서 천국 못지않게 지상의 나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치중하면서 인간의 노력은 외면해 왔다. 바로 이점이 한국교회가 오늘날 이토록 타락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다. 우리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성령이 인도해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당면하는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회사의 사장이 하나님이 인도해주실 것을 믿고 회사운영을 게을리 한다면 그의 사업이 어떻게 될까? 어느 학생이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줄 믿고 기도하면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의 성적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요즘 교회가 물질욕, 명예욕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좇는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그런 욕망을 버린다는 것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주신다고 믿고 행위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 세속적인 욕구는 걷잡을 수 없이 자라게 마련이다. 성령의 은혜와 인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령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면 되지 않을 일이 없다고, 인간의 노력을 말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를 믿지 않는 사람의 말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막 9:23)는 말씀을 못 읽었느냐고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토록 한국교회가 타락한 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그런데 성령의 역사와 믿음을 항상 강조해온 한국교회가 지금 이렇게 세속화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범법 행태는 하나님의 인도에 의한 것인가? 이 괴변(怪變)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실상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 아닌가?
성경에서는 인간의 노력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십계명에서는 우리의 노력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지만, 계명을 어기는 자는 벌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길을 버리고 딴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끊임없이 경고했다. 창세기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20세기 복음주의를 이끈 존 스토트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에서 시편 32편 8-9절을 강해하면서 8절만을 읽지 말고 9절을 함께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 하리로다(9)”
여기서 8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9절에서는 짐승처럼 끌려 다니지 말고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하라고 말한다. 스토트는 이 두 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인간의 편에서도 노력해야한다는 점이 잘 나타난다고 말했다. 구약의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시지만, 우리의 노력을 요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신약에 오면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의 행위가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심판 날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각자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선한 행실은 노력의 결과다. 예수님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셨지만, 우리의 노력도 중시하셨다. 우리는 흔히 바울이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와 믿음만을 중시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토트가 시편에서 지적한 것을 우리는 에베소서 2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8)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9)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 8절과 9절에는 하나님의 은혜, 믿음, 그리고 구원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말로 끝내지 않았다. 10절에서는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았으니 선을 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지만, 그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7장에서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이 구절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믿음이 구원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중요하지만,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처방해주는 회개라는 약을 복용했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주신다는 주장에 밀려서 그 약은 반짝 효과에 불과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면 욕망을 통제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혹은 회개의 효과를 지속시킬 수 있는 특효약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성경에는 예정론뿐 아니라 자유의지에 관한 구절이 많은 것처럼 성령의 인도뿐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구절들이 아주 많다. 그렇다면, 자유의지가 성경적인 것처럼 행위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성경적이다.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주장에 얽매어서 성경에 기록된 행위에 대한 구절들을 외면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고,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도 필요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은혜, 믿음, 구원이 중요하다는 것은 신앙인이면 누구나 인정한다.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치중하다가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행위, 즉 인간의 노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의 행위도 모두 중시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오늘처럼 타락하게 된 근본 이유가 바로 성령의 인도만을 앞세우고 인간의 노력을 외면한 데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예배드릴 때는 1등교인인데 세상에 나가서 사는 모습을 보면 꼴등 교인 아니 교인의 삶이 아닌 경우가 너무 많다.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 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4)라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더 크신 성령의 역사하심과 함께 말씀대로 살려는 더 많은 애씀이 있어야 하겠다.(언)  |
첫댓글 좋은 信仰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