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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修德旅館)
수덕사(修德寺)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1966년에 발표된 가수 '송춘희'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다.
워낙 방송전파를 많이 탄 대히트곡이라 초등학생시절인 당시의 추억을 되살리며 지금도 가끔 흥얼거리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수덕사와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이 '수덕여관'이다.
수덕여관에 얽힌 이야기는 여러 매체를 통해 대강 알고는 있지만 솔직히, 예술가니 신여성(新女性)이니 하며 등장하는 비정상
적 도덕개념을 가진 인물들에게 좋은 호감을 가지기란 힘든 일이었다.
물론, 지아비의 배신에도 일생을 인고의 세월로 기다리며 살다간 조강지처 한 여인을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들어서는 길
충남 예산군 덕성면 사천리 덕숭산 수덕사 매표소 왼쪽 개울 건너편에 자리한 수덕여관은 '서예적 문자추상화'로 유명한 고암
(顧庵) 이응로(李應魯, 1904~1989)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19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거처했던 곳으로, 6.25동란 때는
피난처로도 사용하였고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는 작품 활동을 하던 고택이다.
▲ 이응로가 이 집을 구입하기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이 3년간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나혜석은 이응로보다 8년 연상으로 남편 김우진과 이혼하고 그 아픔을 달래려 이곳을 찾은 당시에, 그녀의 친구 김일엽은 이
혼의 아픔과 세속의 사랑을 모두 떨쳐버리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있을 때였다.
일엽 스님은 한국 최초 비구니 선원인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공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27년간을 두문불출하며 수행했다.
견성암은 수덕여관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지척지간에 있다. 두 번 결혼 두 번 이혼에 춘원 이광수와 염문을 뿌리기도 한 것
으로 알려진 일엽 스님은 문학지를 창간한 신여성으로 문필을 날렸다.
가수 송춘희와 일엽 스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음에도 불교로 개종
을 한 것이다. 일엽 스님은 그렇다치고 송춘희는 자신이 부른 노래 '수덕사의 여승' 때문이었다. 그녀는 법사로서 지금도 음성
공양을 통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이응로가 한국을 떠난 1959년부터 시작한 프량스 파리에서의 생활을 함께한 사람은 본부인(박귀희 여사)이 아닌 제자 박인경
이었다. 이응로는 헌신짝 버리듯 조강지처를 버리고 21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박인경과 부부의 연을 다시 맺었다.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이 공전의 대히트를 치며 여세를 몰아갈 즈음인 1967년에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 터졌다.
작곡가 윤이상, 이응로 화백 등 예술인과 대학교수, 공무원등 190여명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여 처벌당
한 사건을 말한다.
노무현 정권의 참여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가 동백림 사건을 재조사하였다. 그 결과,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는 1967년 6월 8일 제7대 총선의 부정 의혹에 대한 비판 분위기가 확대되자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혐의가 미미한
사람까지 혐의를 확대하는 등 동백림 사건을 확대 과장한 측면은 있으나 중앙정보부가 사전에 기획하거나 조작한 사건은 아
니라고 2006년 1월 밝혔다.
▲ 수덕여관은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응로가 1969년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 두 달 정도 머물며 건물주위에 있는 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다. 약 3년의 수감생활동안 정작 그의 옥바라지를 한 사람은 그에게 버림받은 본부인 박귀희씨였다.
문자추상 암각화
둘레 17m, 높이 85cm와 둘레7.6m, 높이75cm의 두 개의 화강암 바위에 문자체로
추상화를 조각하였다. 삼라만상의 성(盛)함과 쇠퇴함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문자 추상화
2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급 문화재 특별전시회 때 이응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저으기 놀랐었다. 이 작품이 국보급 불화(佛畵)와 같은 공간에 전시될 만큼
높은 가치를 지니며 평가를 받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난생 처음으로 대한 그의 작품 앞에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운과 감동으로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저런 구상을 해낸다는 게 놀라웠다. 관람객에 떠밀
려 제대로 구도를 잡지도 못하고 누른 셔트에 담긴 그의 작품사진 한 장이다.
화가 이응로와 인간 이응로를 구분하여 이분법적으로 그를 평가하기란 무척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옥바라지한 본부인을 두고 이응로가 미련없이 프랑스로 다시 떠난 후, 본부인인 박귀희씨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랫동안 식
당과 여관을 운영하며 일대의 명소로 자리했다.
그러나 2001년 박여사의 사망과 수덕사 집단시설지구 개발사업 진행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문을 닫은 후, 6년여 동안 주인없
는 빈집으로 방치되다가 수덕사에서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2007년 가을, 옛 수덕여관의 원형을 복원하고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러 각종 문화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응로가 쓰던 방
이응로와 그의 후처 박인경은 1977년에도 파리에서 이응로가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建宇)와 영화배우
윤정희(尹靜姬) 부부의 북한납치미수사건의 배후로 지목됐으나 조사를 거부한 뒤, 남한과의 관계를 단절하다가 1983년 프랑
스에 귀화하였다.
그리고 1981년부터는 남한의 민주화투쟁을 주제로 삼은 ‘시위 군중’ 소재의 대대적인 수묵화 연작에 주로 열중하였다.
1996년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수덕여관은 애증의 세월을 초가지붕에 묻은 채 못다한
이야기를 오늘도 들려주고 있다.
수덕여관
- 정 호 승 -
일생에 한번쯤
수덕사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
평생 오지 않았던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붉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비록 이튿날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생에 하룻밤쯤
수덕여관 산당화에 기대어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맺은 열매에
다시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평생 오지 않는 잠이 있다면
수덕여관 샘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보아라
물 위에 코끼리를 타고
모든 쓸쓸한 사랑이 지나가
♬ 신계행/ 사랑 그리고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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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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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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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와 수덕여관 그리고 그곳에서 구도와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간 역사의 인물~
그들 모두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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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스님, 나혜석, 송춘희, 이응로 화백 모두가 수억겁의 인연으로 함께 했나 봅니다,
좋은 글과 사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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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에문자 암각화 너무 좋으네요...예술과 문화는 정치의 진흙탕에 빠지지 않게 잘 가꿀 필요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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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수덕여관이 수덕사에 들어가게 되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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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의 '수덕여관' 처음 감상합니다,'넘 좋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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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행복한 마음담아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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