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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식이 글을 읽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고, 기분이 좋아져서 이렇게 답글을 단다. 그 글에 잘 나타나있지만, 천식이는 이번 여행이 아주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글을 쓰면서도 천식이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방문하여 즐거웠다니 나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이 글은, 다른 게 아니라, 천식이 글에 대한 주석이다. 원래, 위대한 저술이 한 편 나오면, 제자들이 달려들어 꼼꼼하게 주석을 붙이지 않는가?
주 (1) “‘해변으로 가요’와 ‘진주조개 잡이’ 노래를 듣는 순간, 해변으로의 유혹을 더 이상은 참질 못하고 마침내 여름 바다여행을 다녀 오기로 마음 먹었다.”와 관련하여
천식아, 우리 자신이 ‘진주조개 잡이’를 불렀다는 것은 어째서 쓰지 않았니? 우리는 흥얼거리듯 그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를 부르고 나니 “시원한 밀집 모자, 포풀라 그늘에,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장의 아가씨” 하는 박재란의 또 다른 노래가 생각나서 그 노래도 불렀다. 나는 (세련되게) 운전대를 톡톡 쳐가면서,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천식이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가만히 앉은 채로...... 우리가 그런 노래를 불렀던 것은, 그 노래의 제목이 화제에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변산 반도로 가는 길이었잖아? 그리고, 삼례에서 변산으로 가려면, 익산, 김제, 부안을 거쳐야 하는데, 자동차 앞 유리로 들어오는 경치가 또 예사스럽지 않았거든. 도화지의 8할 정도는 하늘에 할애해야 하네. 이 지역은 한결같이 들이 넓고 산이 멀잖아? 부당하게 넓은 파란 하늘에는 새하얀 뭉게구름이 넉넉하게 떠있었고, 저 아랫 쪽에는 벼가 자라는 녹색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따가운 햇볕 탓에 강한 콘트라스트를 띤 채 말이야. 그러니 절로 나오는 거지. “새파란 수평선 흰구름 흐르는......”
분위기 어떤가? 약간 슬퍼 보일까? 중년의 아저씨 두 명이 4, 50년 전 노래를 부르면서, 비치파라솔과 휴대용 자리까지 챙겨 트렁크에 싣고는 바닷가로 피서 여행을 간다 ㅡ 이건데...... 얼마 전 KBS의 <가요무대>에 박재란이 출연한 적이 있다. 이상하게 얼굴은 더 젊어졌는데, 목소리는 그렇지 않더라. 중년의 아저씨 두 명의 심정은 어땠을까? 경쾌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슨 물기 같은 것이나, 희미하지만 분명한, 뻐근한 통증 같은 것을 느꼈을까?
주 (2): “물개처럼 수영에 일가견이 있는 조교수와 헤엄이라곤 평영과 배영 밖에 할 줄 모르는 원모 선수가 함께 바다를 오랫동안 누비다가”와 관련하여
평영이라고 하면, 보통은 개구리헤엄을 가리키지만, 천식이가 말하는 평영은 약간 다른 것 같다. 천식이가, 과연 어떠한 동작을 취하고 난 후에 “나는 평영을 하였다”고 주장하는지에 대해서, 사실 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배영 쪽도 마찬가지이다. 보통은 송장헤엄을 가리키지만, 천식이의 경우 그것은 다소간 배(복부)를 이용하여 떠있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영법(泳法)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친구, 한번 영법을 구사했다 싶으면, 얼마나 격렬하게 하는지, 10초만 해도 먹은 게 다 소화가 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10초 이상을 연속적으로 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우리가 이렇게 수영 혹은 물놀이를 하였던 곳은 물론 변산해수욕장이다. 그런데 천식이가 어느 순간 갑자기, 이곳이 변산해수욕장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 않는가? 변산해수욕장은 변산반도에서는 제일 큰 해수욕장일 텐데, 이곳은 너무 좁고 피서객도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약간 어이없는 일이지만, 안전 요원에게 다가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 변산해수욕장 맞습니까?” 젊은 안전 요원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 청년은 동해안의 안전 요원과 달리 호루라기를 삑삑 불어대면서 겁을 주지도 않았다. 변산해수욕장은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동해안 해수욕장에 비해 물이 탁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얕은 물이 매우 길게 펼쳐져 있었고, 수온도 상당히 따뜻한 편이었다.
주 (3): “이 가게 주인 아주머니와 종업원 언니들과는 나도 구면이라 가벼운 인사를 한 뒤 저녁 식사를 먹었는데” 및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 모퉁이 찐빵집에 들려, 영태와 나는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찐빵을 하나씩 먹으며 돌아왔다.”와 관련하여
천식이는 요즈음 내 글을 읽지 않는지 찐빵집 아가씨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더라. 그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아가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리며(22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혼자이다. 그리고 사료가게 아저씨와의 동업은, 유감스럽게도, 이미 깨어져버렸더라. 이 아가씨가 전체를 인수하여 단독으로 운영하고 있다. 악기점 아줌마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알려주는데, 그 아줌마도 잘 지내고 있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라고 혼잣말을 하던 그 아줌마 말이야. 지난 번에 갔을 때에는 또 이러지 않겠어? 역시, 황홀한 눈으로 기타를 죽 훑어가고 있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말이야. “지난 번부터 이거 꼭 물어 보고 싶었는데, 물어 봐도 돼요? 뭐 하는 분이세요?”
그러나 나에게는 새 여자가 생겼다. 그것도 둘씩이나. 천식이가 말한 라이브까페의 ‘종업원 언니들’ 중에는 윤양이 있다. 윤양은, 인물은 좀 빠지는 편이지만, 내가 시시껄렁한 말을 던지고, 실없는 농담을 건네도 잘 받아준다. 이것이 부러웠던지, 천식이가 그 다음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내 흉내를 내 보았다. 이 집은 ‘왱이집’이라고 불리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전주에서는 제일 맛 좋은 콩나물국밥을 만들어낸다. (4000원인데, 정말 맛있고 배 터져.) 잘 먹고 나오면서 천식이가 주인 여자에게 한 마디 하였던 것이다. 뭐라고 말을 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천식이는, 아이들 말로, ‘개무시’를 당했다. 아니, ‘씹혔다’고 해야 하나? ‘왱이집’ 주인여자는 내 관심을 끄는 또 한 여자가 아니다. 이 부인은 상당한 미인이라고 인정해 주어야 하겠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것이 너무 사납게 생겼다. (그러니 천식아, 사람 봐 가면서 건드려야지.)
내 관심을 끄는 또 한 여자는 대둔산 밑에 산다. 이것은 지난 달에 있었던 일이지만, 천식이와 나는 비를 맞으며 산행을 마친 후 첫 번째로 나타난 음식점에 들어갔었다. 그 집에는 테라스가 있어서 거기에서 빗줄기를 보면서 동동주를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빗줄기가 강해지는 바람에 우리는 실내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 집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주인 아줌마가, 키가 좀 작아 초가집처럼 보인다는 점만 빼면, 아주 참하게 생겼고, 게다가 아주 친절하고 아주 착하였기 때문이다. 이 아줌마가 착하게까지 보인 것은 주인 아저씨 덕분이다. 주인 아저씨는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인터넷 카드게임에 열중하더니, 우리가 나갈 때쯤,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더니, 자기 처에게는 인사도 없이 산으로 올라가더라. 이 부부는 원래 그렇게 사는 것 같았다. 식당 한 켠에 암벽등반 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니, 이 아저씨는 거의 산악인인 듯하였다. 완주군에서는 내가 제일 팔자 좋은 남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주 (4): “내 마음이 기고만장(^^)해져서인지 내 말이 많아졌고, 이에 대한 영태의 날카로운 반론과 코멘트가 이어져 선방하느라 땀을 질질 흘리며 갑론을박 떠들다 보니”와 관련하여
내가 ‘날카로운 반론과 코멘트’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해변의 평상에 앉아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천식이가 ‘기고만장해져서 내 말이 많아졌고’라고 쓴 것은 사실대로 쓴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냐고? 천식이는 항상 그랬거든. 천식이는 내 앞에만 오면 엄청나게 말이 많아진다. 이 점은 본인도 흔쾌히 인정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아는 체를 하면서ㅡ “야, 영태야 너 이거 알아?” ㅡ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내 귀에, 혹은 그 근처에 쏟아놓는다. 30분도 좋고, 1시간도 좋고, 듣는 쪽의 표정 같은 것은 살피지도 않은 채 마이크를 독점하는 것이다. 내가 용기를 내어 내 인생의 전환점을 기획하고 집행한 것은 지난 달의 일이다. 나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내가 참아 온 기간이 수십년이 넘는다. 그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한 것이다. 여생을 편하게 보내려면 어떤 수를 써서든지 천식이의 만행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음 대화는 둘쨋 날 전주 시내로 들어가는 자동차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천식: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1등을 차지하는 분야들이 제법 많아. 전자 산업이라든가. 넌 이런 것은 잘 모를꺼다.”
영태: “잘 모르겠는데. (음, 또 시작하는구나. 10분 이상 들어주나 봐라.)”
천식: “스포츠에서는 보통 양궁이나 태권도, 여자 골프 정도로 알고 있는데, 펜싱만 해도 말이야......”
영태: “(10분 지났지?) 그런데, 우리가 1등을 차지하는 분야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1등을 차지하지 못하는 분야들 사이에는 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천식: (주저 없이) “하드와 소프트야. 소프트 분야에서는 우리나라가 아직 멀었어. ‘소프트’는 ‘콘텐츠’라고 불러도 좋은데, 영화나 소설의 스토리 같은 것 말이야. 또 다른 예를 들면......”
영태: “(또 10분이 지났네. 잘 안 먹히는구나.) 예는 잘 알겠는데, 내가 더 알고 싶은 것은 특징이거든. 우리가 1등 하는 분야들에는 그만한 공통된 특징이 들어있어서 우리가 1등을 하는 것일테고,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분야들 역시 그만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텐데, 그 공통된 특징이 무엇일까? 그것이 과연 하드와 소프트일까? 만약 그렇다면, 하드와 소프트라는 것은 과연 뭐지? 그 예는 지금까지 자세하게 들었지만 말이야.
천식: “......”
다음 대화는 둘쨋 날 내 연구실에서 있었던 것이다.
천식: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ㅡ 야, 멋진 말이지?”
영태: “그래 멋진 말이다. (제까짓 것이 맥아더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으려고.)”
천식: “맥아더는 거의 평생을 장군으로 산 사람이야. 그 집안부터가......”
영태: “(역시 알긴 많이 아는군. 10분 됐지?) 그런데 그 멋진 말이 과연 무슨 뜻일까?
천식: “무슨 뜻은 무슨 뜻. 글자 그대로지. 그 말은, 맥아더가 웨스트 포인트에 다니던 시절에 유행하던 군가에 나오는 가사라는데, 맥아더가 은퇴할 때 상하원 합동 의회에서......”
영태: “그 뜻이 그렇게 분명해? ‘노병은 죽지 않는다’ 쪽이 중요할까, ‘다만 사라질 뿐이다’ 쪽이 중요할까?”
천식: “뭐?”
영태: “어느 쪽이 중요하건, 그것이 무슨 뜻일까? 혹시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불멸의 이순신’과 관련이 있을까?”
천식: “......”
영태: “이상하잖아? 노병도 다 죽었고, 이순신도 죽었잖아? 어째서 ‘죽지 않는다’, ‘불멸이다’는 거야?
천식: “......”
닮은 점이라고는 같은 명문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것밖에는 없는 두 사람이 이상하고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시나? 그렇다면,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하지 않겠다. 이렇게 함부로 썼다가 천식이가 삐져서 이 다음부터는 절대로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걱정해 준다면, 나는,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라고 되충고해 주겠다. 내 걱정은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이 정도의 대비책은 너무나 허약해서 약발이 서지 않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천식이 이야기는 재미있을 것 같고, 게다가 배울 것도 많을 것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엄살을 부리느냐고 나에게 핀잔을 준다면, 나는 그 핀잔을 흔쾌히 받아들이겠다. 천식이 글을 읽고 기분이 좋아져서 얼굴에 웃음을 띠고 쓰다 보니 글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글을 더 재미있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지나치게 엄살을 부리게 된 것 같다. 사실 나는 천식이가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정보와 상대방의 기분에 얽매이지 않는 대범함을 부러워하기만 할 뿐 아니라 즐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천식아, 이정표를 보면서 길을 잡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에는 제발 좀 말시키지 말아줘. 음식을 고르느라고 메뉴판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말이야.
첫댓글 천식이 영태 신났다 신나... ㅎㅎㅎㅎ
확실히 댓글이 본글보다 재미있는 것은 왠일일까? 별로 중요치 않는 일상사를 영태는 재미있게 잘풀어가는 것을 보면 역시 글쟁이?. 콩나물집주인에게 내가 물은 말은 '이 가게 주인 맞으시죠?'였는데 그 쌀살함이란^^
천식아 본글도 재밋었어~
둘이 재미있게 한판 걸게 몰았구만... 다음에는 같이 놀아보세...
본글이고 댓글이고...다 흐뭇하다
이것도 이상하다. 원교수 글에 조교수 글이 댓글인데 또 빠져들었네요. --- 우리 동창 교수님들 모두 조교수로 통일하시면---?
조교수로 통일하다니? 조(어시스턴트) 교수로? 그래 재한아, 언제 한번 같이 가 보자고.
천식이와 영태사이에 있었던 그날 일들을 다 눈앞에 펼쳐놓는 듯... 멋있3